#159화 사고
2018.09.06.
루시펠라 아이딘이 승전했다는 소식이 얀스가르 전체에 퍼졌다.
이드리스 공작은 아이딘 백작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후계자인 란달프 이드리스 역시 전사했다.
승전의 결과로 공작위와 이드리스 공작령은 국가에 환수되었다.
그 말은 공식적으로 이드리스 공작가가 멸문했다는 것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백작가의 레이디였던 루시펠라 아이딘의 손에 의해.
이는 수도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감히 여자가 작위를 탐냈노라고 사람들은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군사수가 두 배나 되는 이드리스 공작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것은 순전히 루시펠라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화제에 대해 계속 떠들어댔고, 그 열기는 식지 않았다.
사람들은 작위 세습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으며, 여성에게도 작위 세습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도가 떠들썩한 와중 루시펠라는 황제의 명을 받고 조용히 수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황궁으로 가자 루시펠라는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병환으로 루시펠라를 볼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올라오자마자 바로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클로렌스에게 연락할걸.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백작가로 돌아가서 다른 이들과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루시펠라가 건물을 나올 때였다.
“어.”
“어?”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떴다. 클로렌스와 황후가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황후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클로렌스는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루시! 뭐예요! 연락도 안 했잖아요!”
심지어 그녀는 체통도 잊고 루시펠라에게 뛰어와 그녀를 안았다. 루시펠라 역시 환하게 웃어 보였다. 황후는 그런 그녀들을 보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시끄러워서 몰래 올라온 거야. 저택에 돌아가서 연락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나네.”
“그러니까요. 정말 너무해!”
루시펠라가 웃으며 클로렌스의 머리를 쓰다듬자 클로렌스가 루시펠라를 더 힘주어 껴안았다.
“이렇게 아이딘 백작을 보니 오늘은 운이 좋으려나 보네요.”
황후가 반가운 듯한 표정으로 루시펠라에게 말을 건넸다. 루시펠라는 오늘 정말로 운이 좋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후 자신들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것을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
“으, 으으으!”
테미르가 이를 갈았다. 도저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두 눈이 불안하게 굴러갔다. 절대 이럴 리가 없는데. 그는 되뇌고 또 되뇌었다.
외숙이 전쟁에서 패하고 루시펠라 아이딘에게 처형당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은 테미르는 그것을 믿지 못해 소식을 전해준 시종을 두들겨 팼다.
외숙부가 루시펠라 아이딘에게 죽임을 당하다니!
이드리스 공작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파벌이 말 그대로 몰락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은 끝난 것이다.
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테미르는 손을 덜덜 떨었다.
“그, 그래, 바반드 백작! 포에르 백작과 뒤를 도모하자!”
그가 좋은 생각이 난 듯 소리쳤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걸음을 옮겼다.
포에르 백작은 현재 영지에 내려가 있는 상황이니 우선 바반드 백작을 불러와야 할 것이다.
“바반드 백작! 바반드 백작을 불러와!”
테미르가 명령을 내리자 시종이 허리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테미르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할 리가 있겠는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바반드 백작이 테미르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에 테미르는 안도했으나, 오라고 한 지 한참이 지나서 온 백작이 못마땅했기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참으로 늦었군. 언제나처럼 말이야.”
바반드 백작은 무력을 소유한 가문이지만 지나치게 굼떴고, 겁이 많았으며, 때로는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지나치게 성급한 면이 있었다. 그 때문에 실수도 잦아 이드리스 공작은 대놓고 그를 무안 주기도 했다.
테미르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쯤 죄송하다고 말해야 할 바반드 백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멀뚱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앉지 않고 뭐 하는 건가?”
테미르의 말에 그제야 바반드 백작이 그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전하를 뵙습니다. 한데 무슨 일 때문이신지?”
그 말에 테미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나?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지!”
테미르의 말에 바반드 백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하, 지금 전하가 누굴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뭐?”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2황자 전하께서 와달라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모조리 다 2황자 전하께서 듣게 된다 이 말입니다.”
“이오지프 이 미친놈이!”
테미르가 분노해서 테이블을 걷어찼다. 바반드 백작은 그런 폭력적인 행동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이전과 분명 달라져 있었다. 테미르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애써 숨기려 큰소리쳤다.
“이오지프에게 붙었단 말이냐, 이 박쥐 같은!”
“저는 이미 전하를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입니다. 2황자 전하의 명을 거절하고 싶지 않아 이곳에 왔을 뿐인데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내 말이 틀렸나? 그 모자란 놈을 따른다고? 네가 제정신이냐?”
“그만하십시오! 2황자 전하께서 그 말을 들으면 노여워하실 겁니다.”
“그놈이 노여워한들 지금 무얼 어쩔 수 있단 말이냐!”
“지금 2황자 전하께서 섭정(攝政)이 되셨다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섭정!
태미르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오냐, 그놈이 섭정이라고 하자! 그래서, 그놈이 노여워하면 이 형을 죽이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아직 차기 황제는 정해지지 않았어! 아바마마는 돌아가시지 않았단 말이다! 우리에게 기회…….”
그 발악과도 같은 말에 바반드 백작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전하께 온전히 황위를 물려주실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테미르가 눈을 크게 떴다. 그 표정에 바반드 백작이 자신이 한 말에 놀란 듯 아래턱을 덜덜 떨다가 말을 이었다.
“폐, 폐하께서는 2황자 전하를 차기 황제로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전하가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전하께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셨다면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테미르는 눈을 크게 떴다.
“마, 말도 안 돼.”
“폐하께서 2황자 전하가 선대 하인트 공작 각하께 검술을 배운다는 걸 모르셨을 것 같습니까? 왜 2황자 전하가 학자들을 포섭하는 것을 방관하셨겠습니까? 왜 2황자 전하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걸 방관하셨겠습니까?”
테미르가 믿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본 바반드 백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왜, 아이딘 백작의 상속을 위해서 폐하께서 귀족들을 모두 소집하는 번거로운 회의를 여셨겠습니까. 모두 다 영지전을 위한…….”
“그, 그만해! 나는 분명 황태자였다! 아버님은 분명 내게 마음이 있었던 거야!”
“로에르 후작가를 제외한, 지금까지 전하와 약혼을 맺으려는 가문이 왜 없었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의도적으로 전하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막으셨던 겁니다!”
“…….”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전하를 지지하신 게 아닙니다. 폐하께서 지지하신 이는 2황자 전하, 이오지프 황자셨습니다.”
“이 개새끼가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전하와 척을 진 모든 가문이 이오지프 전하의 강력한 세력이 되었음을 왜 모르십니까! 로에르 후작가도, 하인트 공작가도! 그 아이딘 백작가마저도!”
그는 클로렌스를 겁간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클로렌스와 그의 사이가 틀어졌다.
그는 루시펠라 아이딘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리하여 하인트 공작은 이오지프를 지지했다.
그가 무시하고, 이드리스 공작이 무시했던 중소귀족들이 이오지프에게 붙었다.
그가 무시하고 멸시하던 그 모든 것이 이오지프의 힘이 되었다!
“나, 나는!”
테미르는 바반드 백작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황제는 의도적으로 이오지프를 외면하며, 한심하게 여기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하여 테미르는 그 멍청한 동생 놈에게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오지프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인가?
“프, 프리실다 년! 다 그년 때문이야!”
테미르가 버럭 소리쳤다. 갑작스럽게 황후를 욕하자, 바반드 백작이 놀라 입을 벌렸다. 그러나 테미르는 계속해서 프리실다에 대한 욕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면 테미르는 정작 이오지프는 그대로 두면서 황후만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바반드 백작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테미르를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곤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려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백작! 기다려! 가지 마, 백작!”
테미르가 불렀으나 백작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아아아악!”
테미르는 분노에 휩싸여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내지르더니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깨고 부수기 시작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저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자신은 이오지프 놈을 황위에 올려놓기 위한 디딤돌이었단 말인가!
이오지프에게 세력을 만들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역할을 준비했던 것이다!
저 망할 아버지! 망할 황제가!
그는 숨을 헐떡이더니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시야가 붉게 물든 것 같았으나 정신만은 또렷했다.
그가 걸어서 도착한 곳은 황제의 침실 앞이었다.
“아바마마를 뵈어야겠다.”
“폐하께선 지금 오수에 드셨습니다. 부디 다음번에 방문하십시오.”
“지금 뵈어야 한다고 하지 않더냐!”
“여기서 소란을 피시면 안 됩니다.”
“하찮은 기사 나부랭이 주제에! 어서 비켜!”
테미르가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행여나 황제가 잠에서 깨어날까 기사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았다.
그때, 침실의 문이 열리며 시종이 걸어 나왔다.
“폐하께서 안으로 들라고 하십니다.”
테미르는 이를 으득 갈고 안으로 들어갔다. 테미르가 들어가자 시종이 기사들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전하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시니 멀리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황제가 자식과 독대하며 이야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므로 기사들은 순순히 물러났다.
***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좋군요.”
프리실다가 웃으며 말하자, 루시펠라 역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루시펠라가 황후를 가까운 사람이라 여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황후는 언제나 루시펠라에게 호의를 드러냈다. 그래서 루시펠라는 저 사람이 싫지 않았다.
따스한 봄바람과 누그러든 햇빛은 적당했고, 꽃은 향기로웠다.
완연한 봄을 느끼며 그들은 초록 잔디가 깔린 정원을 거닐었다.
“저는 루시가 정말로 자랑스러워요.”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랑스러울 것까지야.”
“내 친구가 이렇게 대단한 게 자랑스러운 건 당연하죠! 황후 폐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럼요, 저 역시도 참으로 자랑스럽답니다. 영애의 소식을 듣고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어요.”
두 사람 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으나 루시펠라가 기분이 좋았던 것은 그들이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루시펠라의 볼이 빨갛게 물들자 그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러고 보니 루시는 백작위를 받았으니 이제 레이디가 아닌 걸까요?”
한참을 웃던 클로렌스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묻자 황후가 대답했다.
“이제 아이딘 백작을 백작 영애로 부르지 않을 뿐이지 여전히 레이디는 맞답니다. 결혼을 안 한 사람들을 레이디라고 지칭하니까요.”
“그렇군요. 뭔가 복잡하네요. 레이디면서 백작이라니.”
“레이디도 백작이 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레이디가 작위를 물려받다니, 참 재미있네요. 만약 예전에도 그게 가능했었다면, 우리 가문을 제가 물려받았을 텐데요.”
그들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게 잘 풀린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즐거웠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던 도중 또다시 루시펠라에게 질문이 집중되었다.
“그래서 루시, 하인트 공작 각하와는 어떻게 할 거예요?”
“맞아, 나도 그게 궁금했답니다. 하인트 공작과는 헤어진 건가요?”
클로렌스와 프리실다의 물음에 루시펠라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딘 백작령에서 이미 만났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일단 그 사람이 수도로 돌아오면 생각해 보려구요.”
지금쯤 수도로 부리나케 오고 있을 테니까.
제드는 얼샤에 간 것처럼 위장했기에, 수도로 올라오려면 얼샤로 간 부하들과 함께 올라와야 했다.
전속력으로 수도로 오고 있을 제드를 떠올리며 루시펠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클로렌스와 황후는 시선을 교환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혼은 어떻게 하죠?”
“응?”
“결혼을 하면 루시는 하인트 공작부인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하인트 공작부인이 백작이 되는 건가요? 작위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 부분은 생각하지 못한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떴다.
“황후 폐하, 이때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러네요. 이 경우는 어떻게 되려는지 나도 잘 모르겠군요.”
황후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뭐,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복잡하게 생각하진 말도록 해요.”
황후가 그렇게 말하자 어쩐지 안심이 된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갈림길이네요. 어디로 갈까요?”
클로렌스의 말에 황후가 바로 대답했다.
“아, 이쪽에 장미원이 있어요. 아직 꽃봉오리만 보이겠지만 구경할까요?”
황후의 제안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은 한적했고 이따금 새 우는 소리만 들렸다.
“여긴 이맘때쯤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이오지프와 단둘이 산책하기에 참 좋은 장소였지요.”
황후가 추억에 잠긴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전하와 산책을요?”
“네. 이오지프는 어렸을 때부터 참 사랑스러웠답니다.”
황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사랑스럽다’는 말에 루시펠라는 애써 얼굴에 떠오른 떨떠름한 표정을 감췄다.
어린애야 다 사랑스럽겠지. 한데 지금까지도 사랑스럽다고?
루시펠라는 지금의 ‘사랑스러운’ 이오지프를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반면 클로렌스는 흥미로웠는지 어린 이오지프에 대해서 물어보고 있었고, 루시펠라는 잠시 대화에 관심을 거둔 채 정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푸드덕 새가 날아가는 소리에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을 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풀숲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테미르였다.
왜 이 사람이 여기 있지? 순간적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예전 황후의 티 파티를 망쳐 놨던 때보다 안 좋아 보였다.
더 위험한 것은, 어딘지 모르게 ‘피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루시펠라는 보이지도 않는 듯 황후만 보고 있었다.
“폐하, 위험……!”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프리실다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테미르는 전속력으로 그녀에게 돌진해 왔다.
“루시!”
“백작!”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배에 따끔한 고통을 느낀 순간,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빌어먹게도 익숙한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슬며시 손을 들어 배를 만지자 뜨뜻한 피가 묻어 나왔다.
루시펠라는 억지로 중심을 잡으며 자신을 찌른 이를 바라보았다.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테미르가 눈이 풀린 얼굴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테미르가 루시펠라를 찔렀던 단도를 뽑아 들려 하자, 그녀가 그의 손목을 잡고 그것을 막았다.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테미르의 종아리를 걷어차 그를 쓰러뜨렸다.
호위기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포박하십시오!”
황후의 명령에 기사들이 뛰어와 테미르를 잡아들였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루시, 루시! 정신 차려보세요!”
루시펠라는 배를 움켜잡은 채 비틀거렸다. 배에 느껴지는 고통은 점점 커졌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지금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 겨우 얻은 두 번째 인생인데!
루시펠라의 머릿속에 제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로가 서로를 운명이라고 여겼는데, 내 운명이 이렇게 끝이라고?
그녀는 죽기 싫다며 애써 발악했다. 그러나 의식의 끈은 무정하게 끊겨 버리고야 말았다.
“기껏 살려놨더니, 번거롭게 하는구나.”
그 순간, 어떤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루시펠라는 눈을 감았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