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운명
2018.09.03.
“미안해, 미안해.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속이고 싶지 않았어. 누구보다도, 내가 당신에게……!”
그녀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진실을 말한다면 가장 먼저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그에게 에스텔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다.
제드의 그립고도 따스한 품에서 루시펠라는 무너져 내렸다. 사랑할 자격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는가. 이미 자신이 마음에 담은 사람인데, 그런 자격은 차고도 넘쳤다.
이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하며 그녀의 사랑을 애타게 갈구한다. 자신의 마음 따윈 이미 그에게 가 있는데, 손에 넣을 수 없는 진귀한 보석처럼.
억눌러 왔던 최후의 비밀이 폭로되고, 그녀는 처음으로 진실하게 그의 앞에 설 수 있었다.
서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하나였다. 언제나 그를 그리고, 그도 언제나 그녀를 그려왔다.
같은 마음. 마음을 억누르는 무거운 비밀은 밝혀졌고, 그는 그것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사랑스럽다는 듯 이마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
루시펠라는 지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이 드리운 하늘에는 하늘에 별이 떠 있었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
고개를 돌리자 제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방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시펠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제드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많이 지쳐 보이는군.”
“응.”
제드를 만나고 나서도 그녀는 마냥 감상에 젖어 있을 수 없었다.
그녀가 처리해야 할 일은 많았다.
우선 전쟁의 뒤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녀를 습격한 자들이 어떤 소속인지 알아내야 했고, 누구와 연관되어 있는지, 아니, 정확히는 테미르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 와중에 병사들이 전사자들의 시신을 성문 안으로 모두 옮겨왔기에 그녀는 전사자들의 시신을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기사들이 옮겨온 시신 중에는 칼리드의 시신도 있었다.
“칼리드 루이르크 때문에 우울한 건가?”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 녀석 때문에?”
“그래, 그 녀석 때문에.”
“부정하진 않을게.”
그것이 제드가 기분 좋아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루시펠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제드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 녀석의 시신을 봤어. 얼굴이 처참하더군.”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옆모습을 관찰하던 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펠라에게 다가갔다.
“루시?”
“응.”
제드가 루시펠라의 뺨을 살짝 쓸어올려 고개를 들게 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돼.”
“…….”
“루시펠라가 되면서 단 한 번도 에스텔로서의 감정을 남들과 나눠보지 않았잖아.”
“…….”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스텔일 때도 다른 녀석들한테 힘들다고 말하고 다닌 건 아니라서 말이야. 그래서 내가 죽…… 아니, 아니야.”
제드는 어째서인지 그녀의 표정이 씁쓸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엄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사실, 솔직하고 쾌활하다고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힘들어하는 것에 입을 다문 그녀는 정말로 그녀는 솔직했던 것일까.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내게 말하도록 해. 앞으론 내가 다 들어줄게.”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제드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당신도 힘든 감정을 내게 말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당신에게 내 감정을 모두 받아줘야 할 의무가 없어.”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건 힘든 일이 없어서일 뿐이야.”
“…….”
“에스텔, 나는 네가 이끌 기사단도, 구해낼 사람도 아니야. 그저 네 옆에 서 있는 사람일 뿐이지.”
루시펠라가 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기억나? 예전에도 너는 내 품에서 울었었지. 나는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
“내가 나중에 힘들 때, 그때 참신한 위로를 기대하지. 그러니까 지금은 네가 기댈 차례야.”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드는 루시펠라의 뺨에 얹은 손을 그녀의 뒤통수에 얹더니 그대로 그녀의 고개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따스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도, 끌어안는 품도 따스했다.
말라붙었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칼리드와 에스텔이 서로 가졌던 애증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미 매듭지어졌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생각도, 공유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제드의 괜찮다는 말 한마디는 그녀를 허물어져 내리게 했다.
왜 이 사람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거지?
이 사람의 존재는 이렇게나 기적 같았다.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관계.
단단히 버팀목처럼 서서 흔들리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루시펠라는 울면서 사실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아주 짧았다.
제드는 루시펠라가 하는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잘했어.”
“맞아, 나는 잘했어.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고 후회가 남지 않는 선택이야.”
그럼에도 루시펠라는 훌쩍이며 제드의 품에 기댔다. 루시펠라는 그의 품에서 생각했다.
언젠가 이 남자가 무너져 내리는 날이 있다면, 그때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런데 이렇게 내가 행복해도 되는 걸까.”
눈물을 쓱쓱 닦고는 루시펠라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응?”
“나는 당신과 이렇게 있어서 행복해. 이제 정말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야.”
루시펠라의 얼굴을 내려다본 제드가 피식 웃었다.
“정말 기쁜 소리만 하는군. 오랜만에 대화를 하니 그런가?”
“내가?”
“그대를 따라다니면서 그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그래서 지금 무슨 말을 해도 기쁜 걸까?”
제드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자 루시펠라가 잔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을 본 제드는 빙그레 웃으며 루시펠라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는 부드러운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루시펠라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이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새, 생각해 보니 리엄이랑 번갈아 가면서 날 호위했다는 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다 봤다는 거잖아.”
“그래, 그랬지.”
“그거 좀 기분 나빠.”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를 호위하면서 이래도 되나 생각했던 건 사실이다. 동의 없이 그녀를 따라다닌 건 맞으니까.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굴리더니 말했다.
“예전 내가 준 브로치 잃어버렸지?”
“어, 어?”
“그때 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하지 않았나?”
“…….”
“용서해 줘.”
제드가 미소 지으며 다시 루시펠라의 입에 입을 맞췄다.
그에 루시펠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눈치를 보는 게 귀여웠던 탓이다.
분명 화를 낼 일이 맞았지만, 사실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루시펠라 역시 자신의 정체를 속인 채 제드를 만나왔던 게 사실이니까.
“그럼 특별히 용서해 줄게.”
루시펠라가 일부러 새침하게 말하자 제드가 루시펠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루시펠라는 그의 뺨을 감싼 채 입을 맞췄다. 두 눈이 마주했다.
“키스해도 돼?”
제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몸을 숙여 입을 맞춰왔다.
까슬한 입술이 열리고, 뜨거운 혀가 밀려들어 왔다.
질척거리는 야릇한 마찰음이 들리며 그들은 서로에게 몰두했다.
입천장을 간질이는 혀에 그녀가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하는 입맞춤은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입이 델 듯 뜨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뜨겁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의 두 눈이었다. 적갈색의 두 눈에 서린 것은 그녀에 대한 열렬한 갈망이었다.
루시펠라는 마치 끓어오르는 시선에 흠칫해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그가 루시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편, 제드는 속으로 ‘참자’를 외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여자와 오랜만에 키스를 하니 좀 더 욕심이 나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솔직히 몇 번을 생각해도 자신이 미친놈이었다. 그래서 그는 참으려고 했다.
제드는 갑자기 목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감촉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다 또다시 느껴지는 감촉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루시펠라의 입술이 그의 목에 진하게 입을 맞췄던 탓이다.
“윽!”
그가 아래를 보니 고개를 파묻었던 루시펠라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가 얼굴을 찌푸리자 루시펠라가 이번에는 부드럽게 그의 목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질척한 혀가 깨문 자국을 간지럽게 쓸었다. 루시펠라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드는 그 눈을 보며 루시펠라도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도발은 지나치게 효과적이었다.
“루시.”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래. 어차피 평생 나를 괴롭힐 기억이니까.”
“…….”
“내 머릿속을 당신으로 채우고 싶어.”
“…….”
“그렇게 해줄 거지?”
어떻게 그 부탁을 거절하겠는가. 서로의 마음이 통하자 모든 일은 마치 정해졌던 것처럼 흘러갔다.
방 안은 금세 뜨거운 열기로 가득해졌으며, 그들은 서로를 갈망했던 만큼 꽤나 오랫동안 서로를 탐했다. 열락의 시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에스텔.”
제드는 루시펠라를 에스텔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에 루시펠라의 눈이 커지더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사랑해, 에스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에스텔이 사랑받지 못했다고 절망한 것일까.
에스텔의 눈을 했기 때문에 마음에 담은 거라며, 이 사람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백했다.
그가 사랑한 사람은 처음부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에스텔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진짜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에 절망해 왔던 그녀를 향한 위로이자 애타는 고백이었다.
이걸로 충분했다. 이제 루시펠라는 다시는 진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제드, 그거 알아?”
뭐냐고 물어보는 듯한 제드의 눈을 바라보며 루시펠라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려 꽤나 많이 노력했는데 말이야.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게 불가능하더라고.”
“…….”
“생각해 봤는데, 내게 다시 삶이 주어진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을 거야.”
루시펠라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던 그의 손이 멎었다. 제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것을 본 루시펠라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한 건가 했다. 그러나 그 두 눈이 촉촉해지는 것을 보자 루시펠라는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드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침대에 누우며 뒤에서 루시펠라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침대 위를 뒹굴었다.
“제드, 나보다 더 잘 울면 어떻게 해!”
“그게 뭐가 어떻다고 그러지? 이런 것도 감동을 받으면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야.”
제드가 애써 태연하게 말하자 루시펠라가 고개를 돌려 미소 지었다.
그는 여전히 촉촉한 눈가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내 고백이 그렇게 멋있었어?”
“그래, 나보다 멋있게 고백할 줄은 몰랐어. 패배감이 드는군.”
“검술로는 못 이겼는데, 고백으로 당신한테 이길 줄은 몰랐네.”
“사실 그것도 내가 제대로 이긴 건 아니지. 감옥에 갇혀 있다가 기사들과 싸웠던 너와 몸 상태가 좋았던 나와는 차이가 존재했으니까.”
“그래서, 진짜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잘 모르겠군. 하지만 그때 난 내가 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루시펠라가 웃었다. 이젠 에스텔이 아니니 그런 승부도 낼 수 없다. 그러나 이젠 그게 아쉽지 않았다.
루시펠라가 몸을 돌려 제드를 바라보자, 제드가 루시펠라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누군가의 삶에서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을 줄 몰랐어.”
“정말?”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되살아난 삶의 이유가 나 때문이라니, 행복해서 미칠 것 같군. 자꾸 이러니 바보 같은 생각도 들고 말이야.”
“바보 같은 생각?”
“꼭 이오지프가 읽는 소설에 나오는 운명, 뭐, 그런 걸 믿어버릴 것 같단 말이지.”
“난 당신과 내가 운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가?”
“죽기 전에도 만났고, 죽은 후에도 만났잖아.”
“그렇긴 하지.”
“그리고 되살아난 내가 무너지려 했을 때 당신은 나를 잡아주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고 말이야.”
그것을 본 제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어야겠군.”
“응?”
“죽기 전 너를 보고 내가 살아갈 의미를 찾았고, 다시 만난 너를 이렇게 마음에 담았으니까.”
“…….”
“그래, 이건 우리가 운명이라고 해도 될 것 같군.”
루시펠라가 활짝 웃었다.
운명.
진부한 단어이긴 했지만, 그렇게 두 사람을 칭하니 서로가 더욱 견고하게 묶여 있는 것 같아서 든든했다.
그때 제드가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린 운명이 되었으니 두 번 다시 나를 그렇게 놓지 않았으면 좋겠군.”
“…….”
“너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나는 너를 평생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서로가 편하려면 너도 나를 그렇게 대해야 할걸.”
제드의 눈에는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 말에 루시펠라가 일부러 눈을 굴리며 말했다.
“글쎄, 생각 좀 해보고.”
그녀가 일부러 눈을 굴리며 말하자 제드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대답하지 않고서 못 배기게 해주지.”
“아, 알았어! 그만!”
루시펠라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를 운명이라고 말했어도, 삶은 언제나 가변적인지라 언제나 변할 수도 있음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마주한 지금 이 순간은 그들의 마음은 같았으며 진심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서로를 탐하며 그들은 행복을 느꼈다.
서로가 서로를 운명이라 여긴다면 운명인 것이다.
루시펠라와 제드는 다시 서로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
황궁으로 날아온 서한을 읽은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몸져누워 있던 황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력이 돌고 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서 있는 이오지프에게 말했다.
“이오지프, 정말 걸작이 아니더냐!”
그는 정말로 기뻐 보였다. 만면에 서린 미소는 그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했다.
“한낱 여자가 대승을 거두다니 말이야!”
이오지프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네 도박이 승리했구나!”
이오지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도박이 승리한 게 아닙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지?”
“어느 정도 제 운명을 내맡겼음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확신도 없는 일에 저를 내맡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아이딘 백작이 승리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대체 어떻게?”
“아이딘 백작도, 이드리스 공작도 전쟁 경험이 없다는 것이 똑같지 않습니까?”
“뭐?”
“하지만 아이딘 백작은 동기도 충분했고, 이기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허무맹랑하지만 효과적인 작전 역시 존재했고요. 그래서 믿었고, 저를 내걸었습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그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황제는 이오지프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네가 만들어 나갈 세상인 모양이로구나.”
“…….”
“내가 만들어 나갔던 것을 모두 부정하고 없었던 일로 되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렇게 새로운 방향으로 네 나름대로 투쟁을 하려는 모양이군.”
“저는 딱히 투쟁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싸우지 않아도 모든 것은 순리대로 이루어질 테니까요.”
이오지프가 빙그레 웃었다.
“이오지프, 나는 이제 늙었고, 내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
“너의 승리다.”
황제의 선언에 이오지프의 두 눈이 커졌다. 그 말로 인해 차기 황제가 확정된 것이다.
이오지프는 결국 승리했다.
다름 아닌 루시펠라 아이딘, 얀스가르의 레이디 덕분에.
그는 벅찬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렇게, 이오지프의 비원이 이루어졌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