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2018.08.30.
그들은 약속한 듯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그것을 본 맷시의 얼굴이 더욱 새하얘졌다.
“자, 잠깐만. 그만하십시오! 여기서 소란이 일면 곤란합니다. 제발!”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분이 아니라 백작님이 곤란해지신단 말입니다! 얼샤 잔당과 공작 각하! 두 분 다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들이잖습니까!”
그 소리를 듣자마자 또다시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을 내렸다. 그러곤 서로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저놈은 죽여야 할 것 같은데. 나를 목격했잖아?”
“얼샤에 가 있어야 할 이놈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아이딘 백작을 처형시키고 싶은 건가?”
“형씨, 이거 어떻게 설명할 거야. 설명 못 하면 죽여야 하는데.”
“맷시 경, 대체 어떻게 설명할 거지?”
두 사람이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맷시는 자신에게 벌어진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졸도할 것 같았다.
루시펠라의 명령으로 리엄을 이곳에 데려와 자신의 조카로 위장해서 데리고 있었다.
그는 왜 얼샤의 잔당이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무언가 큰 이유가 있는 것 같아 함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제드에게 제대로 들켰다!
“그건…….”
“혹, 아이딘 백작이 명한 건가?”
제드의 물음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 제드는 알겠다는 듯 리엄을 바라보았다.
리엄 역시도 탐색의 시선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리엄 히르카, 저놈이 루시펠라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은 알고 있기에 얼굴을 찌푸리며 리엄에게 말했다.
“잠깐 이야기하지.”
그가 턱짓을 하고 문밖으로 나가자, 리엄이 따라 나갔다.
“그 낡은 모자 잘 어울리는군.”
“그쪽에게 칭찬 들으려고 쓴 모자는 아닌데 말이야. 그쪽이야말로 여기서 한가로이 빨래라니, 참 가관이군.”
둘은 얼굴을 찌푸리며 서로 날 선 말을 주고받았다.
“대체 왜 이곳에 찾아온 거지?”
“그러는 너야말로.”
“대답 여하에 따라 이번에는 진짜로 죽일 거야.”
“죽일 수는 있나? 날 죽이면 아이딘 백작이 꽤나 슬퍼할 텐데. 아이딘 백작의 미움을 받고 싶진 않을 거 아닌가?”
제드의 입가에 서린 자신만만한 웃음을 보고 리엄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군.”
“무엇을 말하는 거지? 경들의 단장인 에스텔에 대한 거? 아니면 아이딘 백작에 대한 거? 그것도 아니면 둘 다에 대한 거?”
그 말에 리엄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자신을 노려보는 그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으며 제드가 말했다.
“피차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지. 그대를 보니 이젠 확신이 서는군. 내 약혼녀가 어떤 사람인지 말이야.”
“그래서 배신감에 그녀를 죽이기라도 할 생각인가? 아니면 따지려고 온 건가?”
“죽일 생각이라면 이딴 모자를 쓰고 오지 않았겠지.”
제드가 모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리엄이 그 와중에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했다.
“아이딘 백작은 대체 왜 여기에 너를 부른 거지? 무슨 계획이 있나? 다른 사람들도 온 건가?”
제드가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며 묻자, 리엄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설령 계획이 있다 한들 내가 왜 그쪽에게 말해야 하지?”
제드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자 리엄이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그녀가 널 믿지 않는다는 걸 알았군. 쯧, 그러니까 미덥지 못한 놈은 조신하게 수도에서 얌전히 기다리면 될 것을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제드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너, 우리가 싸운 이유를 들었나 보군.”
그에 리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이 싸웠다고? 혹시 그녀에게 조신하게 얌전히 기다리라고 해서 그녀가 화라도 낸 건가?”
리엄은 정곡을 찔렸다는 제드의 표정을 보며 픽 웃었다. 그는 이제야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제드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그것을 본 리엄이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드는 자신 앞에 있는 이놈이 얼샤에서 자신을 죽이려던 그놈이 맞나 생각했다.
“그 백작이 어떤 사람인데 조신하고 얌전하게 있으라고 한 거냐! 진짜 화났겠다. 옛날 같으면 넌 죽었어.”
“‘조신하게’라는 말은 안 했어.”
“그러면 얌전하게 기다리라고 한 모양이군. 조신하게라는 말도 쓰지 그랬어? 그럼 진짜 끝이었을 텐데. 우리 백작님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그런 거야. 조신하고 얌전하고, 그런 거!”
리엄이 낄낄거렸다. 그 웃음에 제드의 심기는 많이 불편했으나, 자신이 잘못한 부분이므로 그냥 참았다.
“어쩐지 왜 그쪽과 연락을 안 하냐고 물어보니까 한마디도 안 하고 발로 걷어차더라니! 그녀가 얼른 너와 헤어져야 내가 너를 주저 없이 죽일 텐데!”
그렇게 살벌한 말을 지껄이며 리엄은 킥킥거렸다. 제드는 그 웃음이 멎어들기를 기다려야 했다.
리엄 히르카는 참으로 짜증 나는 놈이었다.
한참을 웃던 그가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뭐?”
“그래서 너는 어떻게 알았는데? 우리가 지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확인은 해야 하지 않나?”
리엄의 물음은 타당했기에 제드는 자신이 어떻게 에스텔에 대해 알았는지 설명했다.
제드의 설명을 들은 리엄이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2황자라는 놈의 입이 상당히 싸다 이 말이군.”
그 긴 이야기의 결론치고는 지나치게 이상한 방향의 결론이었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때 약을 마시고도 깨어 있었다니, 우리 백작님이 알면 엄청 쪽팔려 하겠는데. 죽은 놈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 그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니 말이야.”
리엄이 웃었다. 제드는 저 인간이 상당히 잘 웃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웃던 리엄이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자, 이제 그래서 이제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 왜 하인트 공작께서 이곳을 찾아온 거지?”
무슨 자격으로 그걸 물어보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드는 그 충동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고 싶다.”
“…….”
“모든 싸움이 끝날 때까지 함께하고 싶어. 그래서 온 거다.”
“뭔 개소리야?”
리엄의 물음에 제드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걸 모른다.”
“아아, 그러셔? 그렇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알려야…….”
“아니,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모르는 척할 거야. 내가 있다면 싸움에 집중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그녀를 지키고 싶고, 그녀는 내가 신경 쓰이고. 그렇다면 내가 정체를 밝히지 않고 곁을 지키는 수밖에 없지.”
리엄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작정 이곳에 왔다고? 제정신인가?”
“나머지는 맷시 경에게 알아서 하라고 하겠다. 너는 그 입만 다물어줘.”
제드의 말에 리엄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으, 단장 같은 무모한 인간이 여기 또 있네.”
“…….
“미안한데 말이야. 우리 단, 아니, 백작님 호위하는 사람 인원수가 꽉 찼거든?”
“무슨 소리지?”
“우리 단…… 아니, 백작, 에라, 모르겠다. 안 그래도 내가 단장을 지키고 있거든. 알다시피 우리 단장이 좀 약해졌잖아?”
“…….”
“게다가 칼리드 루이르크도 옆에 있어. 누구도 우리 단장을 건드릴 수는 없을걸.”
“칼리드 루이르크?”
삽시간에 제드의 얼굴에 살의가 깃들었다.
왜 그놈이 옆에 있는가? 루시펠라는 대체 왜 그놈을 곁에 둔 건가! 당연히 배신을 할 놈이 아닌가?
“대체 그 위험한 놈이 왜 옆에 있는 거지?!”
“단장의 생각이야.”
“대체 여기에 아무 의문도 표하지 않는 건가? 누구 때문에 그녀가 이 짓을 하는데. 에스텔 슈페르트가 그놈에게 살해당했다는 건 잊어버린 건가?!”
“네놈보다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진정해.”
리엄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드는 이야기해 보라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혹, 그놈이 배신하려는 낌새를 보인다면 내가 직접 그놈을 죽일 거야. 그놈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고.”
리엄의 말에 제드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리엄은 제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놈이 다시 단장을 죽이진 않을 거야. 아니, 단장을 죽게 두지 못할 거야.”
“어째서지?”
“단장을 죽였으니 더더욱.”
그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제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칼리드 루이르크를 이해할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알았으면 공작 나으리께서는 이제 돌아가는 게 어떨까? 여기 인원수는 꽉 차버렸으니 말이야.”
“…….”
“피차 우리가 이렇게 사이좋게 이야기 나누는 사이도 아니잖아? 난 지금이라도 그쪽이 단장과 아무 관련이 없으면 그 목을 딸 생각이라고.”
“오, 비슷한 생각이군. 나도 지금 그러고 싶어졌는데 말이야.”
제드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리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단장의 취향이 이상한가? 왜 저런 놈을 좋아하는 거지? 나까지 질투하는 꼴이 아무래도 단장 미래가 보이는데 말이야.”
“림!”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에 제드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금발 머리의 여자가 그와 리엄에게 뛰어왔다. 그녀는 제드를 금세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왜 하인트 공작이 여기 있는 거야? 저 안 쓰느니만 못한 모자는 또 뭐고?”
“아니카, 사람 앞에서 대놓고…….”
제드는 이 여자도 에스텔의 동료라는 것을 깨달았다.
***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이유가 뭐야? 아직 전쟁도 안 일어났는데 적당히 하는 게 어때? 너, 다른 쪽에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잖아.”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얼굴을 붕대로 감싼 제드를 보며 말했다.
제드는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은 제드가 처음으로 루시펠라를 호위하는 날이었다.
“게다가 군사훈련 때의 그 허접한 창술은 뭐야? 창을 떨어뜨리다니, 연기라기엔 지나치게 실감 나던데 어디 다친 건 아니지?”
“…….”
그는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찌푸렸다. 창술을 연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주 무기가 검인 이상 창술은 어색했다. 오랜만에 잡아서 그런 건데 그걸 ‘허접한 창술’이라니. 제드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제드는 별안간 자신의 팔에 느껴지는 감촉에 깜짝 놀랐다.
“팔 봐봐. 다쳤나 볼게.”
제드는 루시펠라의 스스럼없는 행동을 보며 조용히 분노했다.
이 녀석들, 여태 이런 접촉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론? 팔 보여달라니까.”
제드는 고개를 저으며 팔을 뺐다. 붕대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것이 서운하면서도 그 곁에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되어 못내 기뻤다. 그는 괜찮다는 듯 루시펠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루시펠라가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서는 말을 해도 되잖아.”
목소리는 위장할 수 없기에 제드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자신이 지금 몰래 숨어들어 와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루시펠라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불쾌해하겠지.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공작으로 어떤 도움이 될 수 없다면, 그저 제더카이어 하인트라는 한 인간으로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다.
기사가 레이디를 지키듯이가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것뿐이다. 그녀가 이기적이게도 홀로 목숨을 내걸었다면, 제드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이런 감정은 이기적이었으니까.
제드는 루시펠라의 뒷모습을 보며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아니카가 나타나 결론을 내려준 것은 천운이었다.
그는 그날을 떠올렸다.
“그럼 그냥, 그쪽과 림이 바꿔치기하는 건 어때? 교대로 말이야.”
제드의 사정을 들은 아니카가 단 한 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그 말을 들은 리엄은 반발했으나, 제드는 생각 외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얼굴을 가리니까 누군지 상관없을 거 아니야.”
“아니카!”
“림, 지금 네가 단장 곁에서 어물쩍 있을 때가 아니라고. 화약 준비, 투석기 준비를 언제까지 우리들끼리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그리고 만약에 정체가 들통나면 입장이 곤란해지는 건 단장이잖아? 얼샤와 내통했다는 누명을 쓸 수도 있다고. 반면에 저쪽은 정체가 들통나도 적당히 ‘사랑에 미쳐서 앞뒤 가리지 않는 팔불출’로 넘어갈 여지는 있지.”
“사랑에 미친 팔불출이라니. 아니카, 아무리 그래도…….”
리엄이 중얼거리며 제드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제드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기꺼이 찬성하지.”
그는 기분이 좋았다. 사랑에 미친 팔불출이라. 자신을 지칭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그것도 에스텔의 동료들이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다니, 그만큼 자신의 마음이 인정받는다는 증거였다.
“허 참.”
리엄이 제드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준비해야 할 게 많긴 하지.”
루시펠라의 전쟁까지 준비해야 할 건 많았다.
한 손이라도 더 필요한 게 사실이었고, 마침 공교롭게도 리엄과 제드의 덩치는 비슷했다. 붕대를 감고 보니,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지도 못할 듯했다.
눈동자 색이 달랐으나, 리엄이 따로 신성력이 담긴 반지를 주자 그마저도 해결되었다.
그걸 본 제드는 리엄 히르카가 왜 그간 붙잡히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여하튼 그 둘은 교대로 루시펠라를 지키기로 했다.
그녀를 호위하면서 제드는 그녀의 옆에 있는 칼리드를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다행히 칼리드가 그에게 먼저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칼리드는 제드에게 있어서 죽일 놈이었고, 루시펠라에게 있어 더더욱 죽일 놈이었으나, 대체 이들은 어떤 관계인 것인지 애매했다.
루시펠라는 때때로 그를 스스럼없는 친구처럼 대하기도 했고, 신뢰하는 부관처럼 대우했으며, 때로는 말없이 서늘한 표정으로 노려보기도 했다.
저들은 저들끼리의 감정이 존재했다.
제드는 그 과정에서 루시펠라와 칼리드의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너무나 분했지만, 에스텔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칼리드와 함께해 왔다.
제드는 감히 그녀의 감정을 재단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칼리드가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이 서늘하게 제드를 훑었다.
칼리드는 이따금 그런 시선으로 제드를 보았다. 마치 무언가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제드는 태연을 가장했다.
어차피 그는 루시펠라를 호위하며 곁에 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호위를 하며 제대로 관찰한 루시펠라는 언제나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제드는 표면적인 루시펠라의 모습을 보기만 했기에 그녀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시펠라 아이딘이라는 연약한 육체가 어느덧 전쟁을 벌일 정도의 체력이 되기까지 그녀는 제드가 모르는 곳에서 부단히 노력해 왔던 것이다.
그녀는 아침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무리한 일정을 힘든 티를 내지 않고 소화했다. 또한 지시를 내리기까지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으며,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루시펠라의 노력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여자 주인이라고 업신여겨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개의치 않아 했고, 그 노력은 점차 빛을 보기 시작했다.
교대할 때마다 만나는 리엄과의 대화에 따르면 그녀는 시토라 기사단 역시 같은 식으로 감화시켰다고 했다.
항상 이상을 말하는 그 눈에 모두가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루시펠라의 눈은 항상 별처럼 맑았으며, 사람들은 그것에 홀린 듯 따르고는 했다.
제드는 루시펠라 아이딘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게 되자 그녀가 왜 자신에게 화를 냈는지 깨달았다.
그녀의 능력 자체를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화가 난 것이다. 그녀 스스로 이렇게나 잘할 수 있는데 말이다.
제드는 그녀가 영지를 이끌어 나가며 때로는 실수하는 모습을 보며, 때로는 잘 해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 필사의 노력을 보자 제드는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대들에게 맹세한다,”
그리고 그 겨울, 루시펠라는 제드가 좋아하던 탐스러운 긴 머리를 잘라 버렸다.
“그대들과 함께 내 목을 걸고 싸우겠다고.”
루시펠라는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단호한 눈에는 힘이 서려 있었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그 두 눈을 잘 알고 있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그들의 눈빛도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군중 속에 있던 제드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사람을 감싸던 산만한 공기가 사라지고 이내, 모두가 다 루시펠라를 보고 있었다.
“나는 기꺼이 그대들을 승리로 이끌 이슈타르가 되겠다!”
이슈타르.
그녀는 또다시 자신을 ‘이슈타르’가 되겠다고 말하며 모든 이를 둘러보았다.
그때, 루시펠라와 제드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 두 눈을 본 제드는 그제야 제대로 실감했다.
너였구나.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여기, 에스텔 슈페르트라는 존재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정말로 너는 이곳에서 다시 살아나, 내 곁에 남아 있기를 선택했던 거로구나.
증오 대신 사랑으로, 누구보다 나를 선택하지 말아야 했던 에스텔, 네가.
그의 눈시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알고 있었지만, 루시펠라 안의 에스텔을 느끼니 이상하게도 그것이 서글펐다.
비록 그를 기만해 왔지만, 그 기만하는 순간마저 더없이 애달프며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사랑스러운 사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는 그녀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뜨겁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이의 단 하나가 되고 싶은 욕구와 그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는 애타는 소유욕이 그의 가슴속 불길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
“그래서 그대의 곁에서, 그대와 함께하고 있었어.”
설명을 끝낸 제드는 미소를 지었다.
루시펠라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드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이제야 알았어. 내가 그대에게 그렇게 빠르게 빠져들었던 이유 말이야.”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울음,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차마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대, 루시펠라 아이딘의 눈동자에서 바로 너, 에스텔 슈페르트라는 인간을 발견하고 빠져들었던 거야.”
“…….”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이쯤 되면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에스텔?”
제드의 얼굴에 서린 미소를 보며 루시펠라 아이딘은 미소를 지었다.
예전부터 갈망해 왔다. 그가 ‘에스텔’인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그것이 루시펠라의 진짜 모습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사랑에 빠진 이유가 ‘에스텔’ 때문이라고 말했다.
루시펠라의 눈에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것이다.
그가 두 팔을 벌리자 루시펠라는 주저 없이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제드가 그녀의 허리와 등을 끌어안았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