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레이디의 비밀
2018.08.27.
“이걸 드십시오.”
제드는 버나드가 내민 것을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신전의 신성력이 담긴 성수입니다.”
루시펠라가 얼샤의 잔당에게 납치당했다. 제드는 납치범들의 요구대로 신전에 단신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차에 내리자마자 버나드는 황급히 준비된 성수를 내밀었다.
성수는 마시면 상처 회복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별 쓸모 없는 이유는, 이걸 마신다고 해서 회복 속도가 극적으로 빨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있으면 나쁘지 않고, 없어도 그리 아쉬울 게 없는 것이 성수였다.
“이런 걸로 방비가 될 리가 있나.”
그래도 버나드가 어렵사리 구한 물건이기에 제드는 그것을 들이켰다.
그때까지 그는 그 성수가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신전에 들어간 제드는 리엄 히르카에게 독을 받아 마셨다.
그는 자신이 곧 죽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의 의식은 깨어 있었다.
왜? 그러다 그는 성수에 생각이 미쳤다. 성수 때문에 지금 죽지 않고 정신만 살아 있는 것이다.
눈을 뜨려고 했지만 떠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소리와 촉감뿐.
그때, 그는 자신을 어루만지는 감촉을 느꼈다.
누구인지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로 루시펠라였다.
설마, 루시펠라가 깨어난 것인가? 지금, 자신의 죽음을 보고 있는 건가?
“아…… 아아.”
괴로움에 찬 루시펠라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제드! 안 돼, 제드!”
참으로 지독한 죽음이었다. 죽기 전 의식을 되찾아 연인이 자신을 보고 절규하는 걸 들어야 한다니.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냥,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아니, 절대, 절대로 그렇지 않아. 그는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에스텔.”
그때, 리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뜬금없이 나오는 에스텔이라는 이름에 제드는 주저 없이 이것을 죽기 전에 꾸는 개꿈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깨어난 이후로도 제드는 그때의 꿈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꿈’에서 루시펠라와 그들이 나누는 대화처럼, 그놈들이 먹인 약이 독약이 아니라는 게 놀라웠으나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루시펠라에게 에스텔을 처음으로 대입시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에스텔을 닮은 점이 꽤나 많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딱딱한 군인 말투라던가, 테미르의 급소를 시원하게 차버리는 태도라던가, 항상 올곧은 태도라던가.
그러고 보면 그녀에게 에스텔 슈페르트는 꽤나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보였다.
설마, 에스텔이 루시펠라로 환생한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상상력에 자조했다.
환생은 무슨. 에스텔이 살아 있었을 적에 루시펠라도 살아 있었다. 게다가 그런 기적이 있다면 그야말로 아스트라가 인간들을 차별한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루시펠라와 에스텔을 동일시해 버렸다.
예를 들어, 그가 루시펠라에게 이자힐의 참상에 대해 말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대했다.
연인에게 다른 이를 투영하다니. 그는 자신이 큰 잘못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의도적으로 그 생각을 배제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루시?”
“응?”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루시펠라를 보고 제드가 미소 지었다.
그녀는 에스텔을 꽤나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
닮은 게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몰라. 그러나 왜 에스텔을 닮고 싶어 했던 라흐시 공작에게는 이런 느낌이 느껴지지 않았단 말인가. 제드는 혼란스러웠다.
***
“그렇다면 이 관계가 끝나야 한다는 건 명확한 게 아닌가?”
상처 입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도 상처를 입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상처 입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펠라를 보자 그는 또 다른 상처를 입어버렸다.
자리를 피하며 그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욕설을 연신 중얼거렸다.
대체 자신이 어떻게 했기에 루시펠라는 ‘영지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인가.
그는 루시펠라가 목숨을 거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이 무능하며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는 게 싫었다.
자신의 아버지도, 그녀의 아버지도, 이드리스 공작도, 칼리드 루이르크도, 그 빌어먹을 황위 싸움도, 빌어먹게도 모든 게 엿 같았다.
그러나 가장 엿 같은 것은 자신이었다.
헤어지자고 말하며 상처를 준 자신. 한순간의 감정을 못 이기며 폭언을 쏟아낸 자신.
사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모든 것을 알려주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제드는 조바심이 난 나머지 그녀에게 화부터 냈다.
조금 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물었다면 그녀도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었을지도 몰랐다.
그때, 누군가가 제드의 앞으로 다가섰다.
“제드.”
고개를 드니 이오지프가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장난기 하나 없었다.
그 얼굴을 보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끓어올랐다.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자책한 것이 방금 전임에도 제드는 이오지프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주먹질에 이오지프가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이오지프는 자신의 볼을 손으로 감싼 뒤 헛웃음을 터뜨렸다.
“황자의 얼굴에 주먹질이라니.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해봐. 황족 시해도 가능할 것 같으니까.”
제드가 이를 악물고 말하자 이오지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넌 아이딘 백작과 관련된 일이면 꼭 이성을 잃어버리더라. 그렇게 되길 원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영락없이 미친놈 같군. 참 실망스러워.”
이오지프가 웃으며 날리는 독설에 제드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서 미친 개새끼는 필요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 황족모독죄로 붙잡아 가지?”
제드의 서늘한 말에 이오지프가 한숨을 내쉬곤 따라오라고 턱짓했다.
그는 따라갈지 고민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점처럼 작아진 루시펠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쫓아갈까?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사실은 자신의 마음은 그게 아니라고, 너를 지키고 싶었노라고 말하면 끝을 말했던 자신이 없어질까?
생각해 보면 루시펠라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이대로 그녀에게 갔다간 또 서로 할퀴며 상처를 입힐 게 뻔했다.
우선, 이오지프가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지 알아봐야 했다. 그는 이오지프를 따랐다.
이오지프의 방 소파에 앉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나왔다. 미리 준비를 시킨 모양이었다.
“마셔.”
이오지프의 권유에도 제드는 찻잔에 손 하나 대지 않고 이오지프만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이오지프가 웃었다.
“일단, 그동안 숨겼던 거 사과할게. 네가 이성을 잃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 약혼녀, 아니, 아이딘 백작도 너도 참 나를 제대로 보는 것 같군. 그런데 웃긴 건 알면서도 이런 짓을 저지른단 말이지.”
그 말에 이오지프가 턱을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제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딘 백작에게 당장 이 일을 그만두라고 하는 게 좋을 거야.”
“부황께서 이미 인가를 내리신 일을 번복하라는 소리인가? 게다가 그 회의에서 너도 찬성했잖아. 번복은 불가능해, 제드.”
이오지프의 말은 마치 그를 놀리는 것 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 속, 이오지프의 태연한 표정은 살의를 불러일으켰다.
제드에게서 풍겨 나오는 흉악한 기운에 이오지프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제드, 우리는 이길 거야.”
“무슨 근거로? 네 그 빌어먹을 직감 말인가?”
“그래, 내 빌어먹을 직감. 그런데 내가 그 직감이 마냥 분석 없이 충동적으로 드는 게 아니거든.”
“…….”
“아이딘 백작은 이길 수 있는 사람이야.”
“설명이 필요한데 말이야.”
이오지프는 제드가 한계까지 다다랐음을 알았다.
이오지프는 제드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 이내 결심한 듯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아이딘 백작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군. 아이딘 백작은 평생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넌 이대로 가다간 정말 미쳐 날뛸 것 같으니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네가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 아이딘 백작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거야.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면 그것부터 알아야 하니까.”
“뭐? 잠깐, 그건…….”
그건 루시펠라가 숨기려 했던 비밀이다.
막상 저놈의 입에서 그 말이 들리려고 하니 제드는 그게 더 화났다.
누구 맘대로 루시펠라의 비밀을 까발리는가! 그가 들으려던 건 이 상황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지, 그녀가 숨겨오던 비밀이 아니었다.
“아이딘 백작은 널 잃을 걸 가장 두려워해. 언제나 너를 생각하고, 너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지. 너는 그녀가 무엇을 포기했는지 모를 거야.”
남의 입에서, 그것도 이오지프의 입에서 듣는 건 참 기분 더러운 경험이었다.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고, 그녀의 가까이에 있는 것도 자신이었다.
“어째서 네가 그녀에 대해서 훈계를 하는 거지?”
그 말에 이오지프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으으, 질투에 미친 남자라니. 내가 이놈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지? 왜 이 역할이 나한테 와서는…….”
그 말을 들은 제드의 얼굴에 다시 살의가 깃들 때였다.
그것을 눈치챈 이오지프가 말을 이었다.
“그녀는, 그러니까 너를 생각해서 평생 묻으려 한 거야. 그렇지만 나는 말해야겠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주군의 자격으로.”
“너, 설마.”
“주군은 부하의 비밀 역시 이용할 수 있는 법이지. 하물며 이렇게 미친 인간을 길들이는 것에 거리낄 이유가 있나?”
이오지프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우아한 자세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제드는 그녀의 비밀을 알고 싶다는 갈망과 듣지 말아야 한다는 충동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가 막 거절하려고 입을 열 때, 이오지프의 입이 열렸다.
“루시펠라 아이딘이라는 존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이상하다니. 그녀가? 전혀.”
제드의 단호한 말에 이오지프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루시펠라 아이딘 말이야. 그녀는 에스텔 슈페르트야.”
“……!”
그에 다시 날아오는 제드의 주먹을 이오지프가 한 손으로 막았다. 주먹과 손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오지프의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더 맞아줄 생각 없으니 똑바로 들어. 루시펠라 아이딘은 에스텔 슈페르트야.”
이오지프가 서늘한 눈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이오지프의 폭로를 듣게 된 제드는 사실 이오지프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마음 한구석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제드는 팔짱을 낀 채 서서 생각에 잠겼다.
책략가인 이오지프가 그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을 설득하려 했으면 좀 더 그럴듯한 변명을 했을 테니까.
심지어 그는 아주 진지했으며, 그가 루시펠라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된 경위는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그 일을 벌였던 이유는 그녀가 에스텔 슈페르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을 믿으라고? 자신이 그것을?
그는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납득하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껏 그 개꿈을 꾼 뒤로 에스텔과 그녀를 동일시하던 제드였다. 아니, 이전에도 그녀가 에스텔의 눈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오지프의 말에 따르면 에스텔이 눈을 떴을 땐 3년이 지났고, 그녀는 루시펠라 아이딘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사실 루시펠라가 에스텔이라는 것을 끼워 넣는다면 모든 것이 다 설명되었다.
리엄 하르카라는 살인범이 돌아다니는 거리로 몰래 가출한 것도, 자신을 죽인 칼리드 루이르크를 황궁에서 본 순간 그런 행동을 한 이유도.
루시펠라가 가끔 드러내던 엉뚱한 분노도, 서글픔도, 우울함도 모두 다 설명이 되었다.
그녀는 제멋대로인 게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사로 살아가던 삶의 방식을 레이디가 살던 삶의 방식으로 바꿔야 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게 쉬웠을까? 게다가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는 얼마나 절망했던 것일까.
그는 에스텔이 루시펠라라는 사실을 결국 인정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루시펠라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얼샤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한 사람이다.
그녀가 지키려던 나라, 그녀의 세상을 철저히 파괴시켰다.
거기다 그녀가 아끼던 기사단원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한데 그런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에스텔 슈페르트가 자신을?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제드와 에스텔은 절대 서로를 사랑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왜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느냔 말이다.
그는, 자신을 에스텔이 절대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 납득되지 않은 감정에 제드는 괴로워했다.
“내가 정말 당신을 많이 좋아해.”
그날, 얼샤의 에른 숲에서 루시펠라는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속에서 그는 행복함을 느꼈다.
“사랑해.”
서로 몸을 겹쳤던 날, 루시펠라는 제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루시펠라 아이딘은 제더카이어 하인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드가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던진 것이다. 제드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루시펠라가 납치당했던 신전에서 독약을 먹고 잠들어 있었을 때가 떠올랐다.
개꿈이라 치부하고 넘겼던 기억.
그는 그 대화를 애써 떠올렸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냥,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던 그녀는 분명히 진심이었다.
자신을 안은 채 울부짖으며 그녀는 에스텔의 동료였던 얼샤의 잔당을 비난했다.
그 꿈을 떠올리자 그는 이 모순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드를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갑자기 감정이 벅차올랐다.
자신은 그동안 너무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목숨을 내거는 것보다 더욱 깊고 짙은 사랑. 그 사실에 제드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재촉하며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 했건만 그는 그녀를 알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 버렸고, 그것은 그녀에게 부담이 되었을 터였다.
만약 반대의 입장에서 제드는 에스텔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인가.
네가 나에게 오기까지 너는 얼마나 번민했을까.
그는 자신의 이기심이 증오스러웠다.
그는 당장에라도 루시펠라의 앞에 다가가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녀를 찬양하고, 숭배하며,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루시펠라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다가오기로 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목숨을 걸고 권리를 되찾는 것이라면, 자신은 끝까지 자신을 숨긴 채 뒤에서 그녀를 도울 것이다.
그를 사랑했기에 과거의 모든 것을 끊어낸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
그녀가 지키는 것보다 지켜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처럼, 그도 지키는 것보다 지켜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만의 계획을 짰다.
***
“……가, 각하, 대체.”
맷시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제드를 바라보았다.
“백작에겐 비밀로 하게.”
제드는 그렇게 말하며 낡은 모자를 벗어 내렸다.
참으로 미친 짓 같지만, 그는 이오지프와 싸운 척하고 영지에 내려온 상황이었다.
사사로운 도움을 주면 안 되는 영지전의 규칙상 그는 ‘하인트 공작’으로 그녀를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의 기사로서는 그녀를 도울 수 있었다.
생각 외로 결론은 간단했고, 그는 요란스럽게 하인트 공작령으로 내려가는 척하다 아이딘 백작령으로 들어왔다.
그는 혼자였고, 초라한 여행자 행색을 했기에 제드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그는 맷시를 만나기로 했다. 맷시는 이전 루시펠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전적이 있으니, 제드의 기준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제드가 조사한 바로는 맷시는 요사이 무슨 일인지 아이딘 백작의 성에서 나와 따로 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
통보하지 않고 방문하면 그가 놀랄 거라 생각은 했으나, 맷시는 제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놀랐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왜?”
아무리 놀라도 그렇지, 대체 왜 저렇게 놀란단 말인가. 꼭 무언가 들킨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사적인 상황에 온 건가? 그렇다면 왜 문을 연 거지?
제드가 그렇게 생각할 때 방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형씨, 여기 빨래가…….”
방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빨래를 산처럼 들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기에 제드는 빨래를 들고 있는 사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들고 있던 빨래를 떨어뜨렸다.
천 무더기가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맷시는 이미 모든 게 다 망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놈이 왜 거기서 나와?”
“너야말로 왜 여기 있지?”
남자들이 동시에 말했다.
그렇게 리엄과 제드가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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