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처형
2018.08.23.
이드리스 공작의 처형은 바로 다음 날 집행되었다.
영지의 모든 일이 정리되고, 루시펠라는 광장의 단상에 나가 그를 꿇어 앉혔다.
끌려 나온 이드리스 공작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신경질적인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사, 살려줘, 살려줘!”
“…….”
“루, 루시, 내게 이러지 말아다오! 난 네 핏줄이란다. 유일한 핏줄이야!”
“…….”
“살려다오, 제발! 죽은 듯이 영지에서 살겠다. 그냥 목숨만 살려준다면 뭐든지 하겠다!”
이드리스 공작이 손을 비비며 빌기 시작했다.
제국을 주름잡던 공작치고는 참으로 추하고 비굴한 발버둥이었다.
“뭐든지요?”
루시펠라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펠라가 고민하는 듯 눈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자백해 주시겠습니까?”
“무, 무엇을 말이냐!”
“당백부께서 홍열병 환자를 데려와 어머니를 병에 걸리게 하고, 제 아버지를 죽인 것이 사실입니까?”
“그, 그건!”
“자백하십시오. 뭐든지 하겠다고 하셨잖습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입으로 루시펠라의 부모를 죽였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지 전혀 다른 소리를 해댔다.
“카, 칼리드 루이르크가 한 짓이다! 그놈이 나를 꼬드겼던 거야! 모든 건 다 그놈 잘못이야. 어서 그놈을 불러와라!”
“……안타깝게도 루이르크 공은 전사해서 말입니다.”
루시펠라의 말에 이드리스 공작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더니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내가 죽게 했거든.”
그에 이드리스 공작이 움찔했다.
“으, 으아아아아아악!”
그는 있는 힘껏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도망치려 했으나 그의 팔과 다리는 묶여 있었고, 주위에는 검을 든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가 없었다. 살고 싶지만 죽어야 한다.
여태껏 그는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삶과 죽음은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흑,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흑! 제발, 제발……!”
끝내 그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아이딘 가의 가주로서 그대에게 묻겠다. 이드리스 공, 전염병이 걸린 환자를 데려와 아이딘 백작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사람을 시켜 아이딘 백작을 사고로 위장하여 살해한 것이 사실인가?”
“사, 사실이 아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혐의를 부정했다. 그것을 본 쉐인이 소리쳤다.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네 부하놈이 선대 백작을 납치하는 것을. 이 짐승보다 못한 놈아!”
“시끄럽다! 어디서 기사 나부랭이 따위가 내게 말을 거는가!”
이드리스 공작이 버럭 고함치더니 무릎으로 기어가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루, 루시! 제발 살려다오. 제발! 나는 혐의가 없다! 나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
루시펠라는 그것을 보며 벌레를 보는 듯,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드리스 공, 사실 그대의 자백은 그리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우린 이미 영지전에서 승리했고, 공을 죽일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겠지.”
“이 더러운 년! 이 뻔뻔한 년! 망할 계집!”
“공은 마지막까지 뻔뻔하군.”
이드리스 공작은 그제야 깨달았다.
혐의의 인정이든 아니든 루시펠라는 그를 살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루시펠라는 이드리스 공작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앞에 모여 있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나는 이 땅의 주인이라는 증명을 위함과 더불어 내 어머니 루아나 아이딘과 내 아버지 루이보스 아이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드리스 공작령에 영지전을 신청하였다.”
그녀는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들과 싸웠고, 승리했지.”
그에 사람들이 자랑스러움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것을 본 그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지금 이 땅에 서 있는 전사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이 땅의 주인을 농락하고, 기만하며, 욕보인 자에게 마땅한 죽음의 철퇴를 내릴 것이다!”
“루, 루시!”
“…….”
“다 하겠다! 모든 걸 다 줄게. 모든 걸 다 줄 테니 제발!”
“…….”
루시펠라가 대답하지 않자 이드리스 공작이 또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살려다오! 제발 살려다오! 으아아아아!”
“입을 틀어막아.”
루시펠라의 명령에 기사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얼굴을 흔들며 발버둥을 쳤으나, 이내 입에 천이 물렸다.
“으으으읍! 으으으으으읍!”
그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두려운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바라보았다.
“안심하시오, 항복을 선언한 영지민들을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포에르 백작부인도 내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따로 처분을 내리진 않을 거야. 내 약속하지.”
루시펠라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으으으으읍!”
“그럼, 안녕히 가시오, 이드리스 공. 쉐인 경!”
루시펠라가 살짝 물러나며 쉐인을 부르자, 그가 루시펠라 앞으로 나섰다.
외팔의 검사는 눈을 번쩍이며 이드리스 공작을 바라보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제가 한쪽 팔을 잃은 나머지 다른 팔로는 힘 조절이 안 돼 단숨에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공작을 더욱 두렵게 했다. 이드리스 공작은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비굴한 모습이 퍽 애처로웠으나 루시펠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쉐인의 검이 이드리스 공작의 목을 내려쳤다.
죽어가면서 이드리스 공작은 생각했다.
이럴 리가 없다! 절대 이럴 리가 없다!
분명 부와 명예가 바로 코앞까지 펼쳐져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제국의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대체 어디서부터! 칼리드 루이르크, 그놈을 믿었던 게 잘못인가? 아니면 바반드 백작과 싸운 게 잘못인가? 아니면 그래, 그 루이보스 아이딘을 믿었던 게 잘못일지도 몰랐다!
“지옥에서 자네를 저주할 거네.”
그의 머릿속에 죽기 전 아이딘 백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손과 발이 꽁꽁 묶인 그는 이드리스 공작의 폭력에도 몸을 숙이지 않고 증오의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언제나 유순하며 비굴했던 놈에게서 느낄 수 없던 서늘한 시선이었다.
그에 이드리스 공작의 가슴이 선뜩해졌으나, 그는 애써 웃으며 루이보스 아이딘의 머리를 발로 짓이겼다. 그래 봤자 죽을 놈이었으니까.
어렸을 적에 만난 루이보스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사람에게도 계급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낮은 계급에 위치한 놈들의 특성이기에 그는 친히 그것을 이해시켜 주었다.
급이 맞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명령에, 저놈이 자신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는 꼴이 재미있기에 그를 곁에 두었다.
루아나 아이딘을 아내로 맞이하던 날, 루이보스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사실, 하인트 공작의 비참한 표정을 보기 위해 저질렀던 짓이라 별로 감흥이 없었다. 저런 머저리에게 여자를 빼앗긴 하인트 공작을 비웃는 것만으로도 그는 아주 즐거웠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하인트 공작은 더욱더 황제의 곁에 붙어 정치에 매진했다.
그는 하인트 공작이 너무도 거슬렸다. 그는 그가 얻으려는 모든 것을 너무도 쉽게 얻어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드리스 공작은 하인트 공작의 기를 꺾기 위해 루아나를 죽였다. 그 와중에 루이보스의 괴로움이나 루아나 아이딘의 비참함 따윈 알 바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이 가장 중요한 건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게 하인트 공작이 죽고, 그 아들은 정치에 뜻이 없었기에 제국은 순탄히 자신의 것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오지프가 등장했고, 공작령에서 산출되는 은이 바닥났다. 그리고 제더카이어 하인트가 이오지프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나 아이딘 백작의 실체를 칼리드에게 들었을 때, 그는 환희했다. 신은 그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아이딘 백작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몇 년을 함께해 왔으며 사촌 관계라는 것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자신을 배신하려 한 그놈에게 배신의 대가가 어떤지 보여주는 것이, 그리고 그의 재산을 가져오는 것이 중요했다.
“자네는 절대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을 걸세. 내가 그렇게 바랄 테니까.”
그는 이드리스 공작에게 잘못도 빌지 않은 채 그를 저주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 덤덤한 분노가 어째서인지 발악보다 더 소름이 끼쳤다. 이드리스 공작의 마음에는 그 찝찝함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저주는 실행되었다. 그의 딸에게 이렇게 복수당한 것이다.
저 거슬리는 계집을 진즉 죽였어야 했다. 감히 테미르에게 얼쩡거렸을 때부터. 그래! 그랬을 터다! 저년이 문제였다!
그런데 왜 저 계집은 자신을 죽일 수 있었던 거지? 아이딘 백작마저 못 죽인 자신이었다. 제국의 공작이자 황자의 외척인 그가, 대체 왜 한낱 계집에게 죽느냔 말이다!
이드리스 공작은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잔혹한 처형 장면이라고 눈을 가리는 여느 레이디들과 다르게 그녀는 그의 죽음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서늘한 은청색의 두 눈은 분명히 루이보스의 것이었다.
그러나 저 계집에게서 드는 위화감은 무엇인가! 저 표정이 정말 그가 아는 계집의 표정이 맞느냔 말이다.
저건 나약해 빠진 레이디의 눈이 아니라, 마치 기사의 눈 같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 그랬다. 어떻게 한낱 여자가 자신을 이길 수 있느냔 말이다! 가짜가 분명했다. 아니, 가짜여야만 했다!
이 가짜 계집!
이건 무효다! 저년은 가짜니, 모든 게 무효란 말이다!
그는 입을 열어 소리치려고 했으나 소리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목은 이미 몸통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앞으로 숙였던 그가 뒤에 서 있던 루시펠라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몸과 목이 분리된 이드리스 공작은 이내 숨을 거두었다. 참으로 허망하고 덧없는 최후였다.
***
“혼자 계셔도 되겠습니까?”
“응, 괜찮아.”
루시펠라가 그웨인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있어야 뒤처리가 빨리 끝나지. 맷시 경과 고생해 줘.”
“알겠습니다.”
그웨인은 고민했다. 하지만 루시펠라가 괜찮다니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웨인이 고개를 숙여 보이곤 몸을 돌려 복도 너머로 걸어가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모든 것이 끝난 하늘은 참으로 맑았으며, 구름은 유유자적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나른한 표정으로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들였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어떤 것도 그녀를 방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오롯이 루시펠라 아이딘이 될 수 있었다.
과거를 끊어낸 기분은 후련했지만, 또다시 공허를 불러일으켰다.
이전, 얼샤에서 시토라 기사단과 작별한 느낌과는 다른 더 쓸쓸한 느낌이었다.
분명 봄인데도 그녀는 아직 겨울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창밖에서 시선을 뗀 그녀는 복도를 조용히 걸어갔다. 뚜벅거리는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렸다.
이제 만족하니, 루시?
그녀는 루시펠라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이제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뿌듯한 감정이라도 들면 마음이 좋을 텐데.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사실 그녀가 이렇게 노력했던 건 루시펠라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드와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제드는 루시펠라에게 화를 냈고, 끝을 말하며 멀어져 버렸다.
그러곤 여태껏 다가오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일부러 제드의 화를 풀어주지 않았다.
화를 푸는 방법도 모르거니와,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관계가 회복이 된다면 그는 루시펠라를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을 알아서였다.
영지전만 끝나면 어떻게든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달려왔지만 이젠 영지전이 끝나 버렸다.
그에게 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끝낸 지금,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복도를 걷다가 연회장을 보았다.
추운 겨울, 몸이 약한 영지민들이 지내던 장소로 변모했던 연회장은 다시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그녀는 샹들리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연회가 벌어질 일이 없었기에 샹들리에는 제대로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아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낡은 샹들리에가 아닌 화려한 샹들리에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천장을 보고 그것을 떠올리니, 문득 잊고 있었던 연회장의 화려한 왈츠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황금색 샹들리에, 화려한 음악, 웃고 떠드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서 있던 제드.
그는 연미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채 루시펠라의 허리에 손을 얹고 자신의 손을 단단히 맞잡은 채, 그렇게 뱅글뱅글 춤을 추었다.
루시펠라도, 제드도 그때는 서로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맞닿은 온기와 오가는 마음, 춤을 추며 서로가 서로와 공유한 시간.
그 시간을 떠올린 루시펠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지.
분명 얼마 되지 않은 일임에도 아득히 먼 일로 느껴졌다.
제드. 제더카이어 하인트.
참으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진심을 다해 속삭이더니, 끊을 때는 차갑고 냉정하고 깔끔하게 쳐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서늘함을 떠올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루시펠라가 목숨을 내걸고 싸운 이유는 제드였다. 그러나 제드와 멀어진 이상 그녀는 이 싸움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만약, 그를 찾아간다면 그가 자신을 받아줄까?
아직도 루시펠라를 차갑게 쳐다보던 그의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루시펠라를, 에스텔을 용기 있다고 말했지만, 제드 앞에서의 그녀는 달랐다.
무서웠다.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한참 연회장에 서 있을 때였다. 끼이익, 소리가 들리며 연회장 문이 열렸다.
그녀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사가 루시펠라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몇몇의 남자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뭐지?”
“이 사람들이 주군께 전할 말이 있다고 해서 안내해 왔습니다.”
기사가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영지민들에게 그들이 바라면 언제든 알현을 허락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루시펠라는 감상적으로 변한 자신의 얼굴을 굳혔다.
기사 뒤에 있는 남자는 다섯 명이었고, 그들은 분명 겨울에 식량을 받아갔던 이들이기에 낯이 익었다.
그러나 왜 이렇게 낌새가 좋지 않은 거지? 그때와는 다르게 루시펠라를 쳐다보는 눈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를 테면 살기 같은…….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뒷걸음질을 칠 때였다.
“주군?”
그 순간, 의아한 표정이던 기사의 목에 칼이 꽂혔다. 급소에 단도가 꽂힌 기사는 피를 뿜은 채 절명했다.
기사가 쓰러지는 것을 본 루시펠라가 얼굴을 굳히며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그중 한 명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죽어주십시오, 백작님.”
그들이 루시펠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일제히 단도를 빼 들었다.
이드리스 공작이 죽으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암살자를 보내다니!
그녀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언제나 칼리드나 아론이 자신의 곁에 있었기에 그녀는 방심하고 있었다. 에스텔처럼 행동하다 보니 또다시 안전에 지나치게 둔감해져 있었던 것이다.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혼자 있는 것은 정말 멍청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방심이 그녀를 승리하게 했지만, 방심 때문에 또 죽을 판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퇴로를 훑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멍청하게 죽고 싶지는 않은데.”
루시펠라는 뒷걸음질 쳤다. 남자들이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냈어? 테미르? 아니면 죽은 이드리스 공작?”
“…….”
“날 죽이는 건 너무 늦지 않았어? 이드리스 공작과 전쟁을 치르기 전에 죽였어야지.”
“애석하게도 백작님이 승리하면 죽이라는 명이 있어서요.”
루시펠라의 뒷걸음이 멈추었다. 그녀의 등이 연회장의 창문에 닿았기 때문이다.
루시펠라가 완벽하게 궁지에 몰리자 그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이다!
루시펠라가 창문의 커튼을 확 젖혔다. 그러자 밝은 빛이 남자들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일순 그들의 시야가 멀었다.
그녀는 연회장의 출구 쪽으로 전속력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암살자다! 누가 이리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금 뒤처리 때문에 대부분의 기사가 성을 비워 와줄 사람이 없었다. 기껏해야 쉐인 정도?
그러나 저들은 팔 잘린 기사가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며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어?”
살았다는 안도와 동시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론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리엄! 너 미쳤어? 왜 여기에!”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아론의 본명을 부르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단검이 날아들었다.
리엄은 루시펠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뒤에 세우더니 창을 뽑아 들어 날아오는 단검을 쳐냈다. 그러더니 재빨리 창을 던져 암살자의 심장에 명중시켰다.
“야, 거기서 하나밖에 없는 창을 날리면 어떡해, 이 멍청아!”
그녀가 빽 소리치자 그는 보란 듯이 검을 꺼내며 암살자들에게 달려들었다.
리엄은 검도 잘 쓰는 편이지만 창술이 더 뛰어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암살자들은 너무도 쉽게 그의 손에 죽어 나갔다.
리엄이 싸우는 것을 보는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하게 질려갔다.
분명 그 검술은 익히 아는 이의 것이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는가.
그와 검을 맞댄 지금까지 그가 검으로 그린 궤적은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루시펠라는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그녀가 ‘리엄’이라고 한 말을 들었을까? 아니, 이전에 그가 왜 ‘아론’으로 여기 있는 거지? 아니, 언제부터 함께한 거지?
루시펠라는 지금껏 그를 ‘리엄’으로 대했다. 그의 앞에서 ‘에스텔’로서 스스럼없이 행동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그것을 다 봐왔다는 말인가?
그때, 그의 검이 마지막 암살자를 찔렀다.
쓰러진 암살자를 발로 툭 차서 생사를 확인한 뒤 그는 자신의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시펠라의 얼굴을 본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얼굴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강인한 턱, 쉴 새 없이 사랑을 속삭이던 입술, 오뚝한 코, 언제나 그녀를 담았던 적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제…… 드.”
루시펠라가 입술을 덜덜 떨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도 그리웠던 자신의 연인, 자신의 삶의 이유가 눈앞에 서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아니, 오랜만에 내 얼굴을 ‘보이는’ 건가?”
“…….”
루시펠라의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본 그가 말했다.
“방심을 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루시.”
“…….”
“아니, ‘에스텔 슈페르트’ 경.”
그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정확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연인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었던 그녀의 진짜 이름을 입에 담은 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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