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편히 잠들라
2018.08.20.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밤중에 칼리드는 아이딘 백작저를 방문했다.
저택에 상주했던 사용인들이 난리가 났으나, 루시펠라는 그들을 조용히 시키고 그를 자신의 방으로 들였다.
일렁이는 촛불을 사이에 두고 루시펠라는 그를 외면한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칼리드는 루시펠라를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동녘에 걸려 있던 달이 하늘 위로 높이 떠오를 때 칼리드의 입이 열렸다.
“네 말대로 할게.”
루시펠라가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 시선에 칼리드가 말을 이었다.
“내가 죽을게, 에스텔.”
루시펠라의 두 눈이 커졌다.
이제 보니 그의 볼은 푹 들어가 있었고, 그의 두 눈은 빛이 꺼져 있었다.
그것은 ‘절망’이라는 감정과는 다른 공허한 느낌이었다.
그는 스스로 삶을 포기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너를 믿지?”
루시펠라의 날카로운 물음에 칼리드가 고개를 살짝 숙여 미소를 지었다. 음울한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믿음이라……. 이제 우리 사이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참 재미있구나.”
“그렇게 만든 건 네놈이잖아. 네가 테미르와 이드리스 공작과 거래를 하고 여기 와서 개수작을 부릴지 어떻게 아는데.”
“내가 바보는 아니잖아. 그들은 어찌 되었든 너를 죽일 게 뻔해.”
루시펠라는 그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 두 눈에 서린 것은 진실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칼리드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의 입에 걸린 씁쓸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서글픈 시선으로 루시펠라를 보며 말했다.
“잠시만, 예전처럼 함께하자.”
“…….”
“얼샤와 얀스가르가 마지막으로 전쟁을 치렀을 때처럼, 그렇게 말이야.”
“…….”
얼샤와 얀스가르, 패배와 죽음이 확정되었던 그 전쟁처럼 함께하자고? 그 전쟁의 끝은 칼리드의 배신이었다.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칼리드가 입을 열었다.
“싫으면 에스텔, 날 지금이라도 죽여줘.”
그는 테이블 위에 조용히 단도를 내밀었다.
“너를 찌른 단도야.”
루시펠라는 그것을 보며 픽 웃었다.
그는 일부러 루시펠라를 자극하기 위해 그것을 내민 것이다. 루시펠라가 그를 죽이도록.
그 단도를 보자 꾸물거리며 증오가 샘솟았다.
루시펠라는 단검을 손에 쥐더니 주저 없이 칼리드의 목을 향해 단도를 찔렀다.
칼리드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단도의 끝은 칼리드의 목을 살짝 찔렀고, 이윽고 그의 목에 피가 비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루시펠라가 단도를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시체를 치우는 것은 귀찮으니 이곳에선 사양하지.”
“…….”
“그래, 너란 인간도 쓸모는 있으니 최대한 이용해 주겠어.”
“…….”
“내 죽음을 네 마음대로 결정했으니, 네 죽음도 내 마음대로 결정할 거야.”
그녀는 여전히 냉정했고, 목소리는 서늘했다.
칼리드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칼리드는 루시펠라에게 죽음을 맹세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신전에 맹세해도 좋아.”
칼리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네가 또 배신하면 나는 또 죽을 텐데, 네가 그런 걸 바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그 말에 칼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
함정을 판 것만으론 세 배가 차이 나는 군대를 상대하긴 힘들었다.
쌍둥이 산으로 파견된 아이딘 백작의 군대는 이드리스 공작군의 군세에 밀려 계속해서 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쫓아라! 저들을 모두 죽여!”
란달프 이드리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부단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소리를 내지르며 그들을 쫓았다.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들은 단단히 약이 올라 어느새 말에 내린 채 좁다란 산길을 아득바득 올라가고 있었다.
이드리스 공작군의 대형은 열이 넓고 행이 적었기에 산을 오르기에 적절하지 못했다.
따라서 산의 특성상 바위나 나무 때문에 이들의 대형은 결집되지 못하고 흩어지기 일쑤라 계속하여 각개격파를 당하고 있었다.
또한 공작령은 높은 산이 없어 이드리스 공작군은 산을 타는 데에 서툴렀고, 무거운 갑옷마저 입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들의 진군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는 부상자까지 속출했다.
반면 아이딘 백작령의 군사들은 산을 타는 데 능숙했으며, 여러 번 모의 훈련을 거쳤기에 돌발 상황에도 침착하게 대처했다.
이들은 전면전을 벌이기보다는 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이드리스 공작의 군사들을 조금씩 제거해 갔다.
그것에 이를 갈며 산을 오르던 란달프 이드리스는 문득 주위가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같이 산을 오르던 자신의 군사들은 어디 갔지?
그리고 아까부터 옆에 있던 부단장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그는 그제야 병사들의 수가 크게 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때였다.
“돌격!”
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칼리드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에 란달프 이드리스와 기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시작했다.
승리는 허망하리만치 간단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공작군을 제압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들은 제일 먼저 도망간 란달프 외 몇몇을 제외한 이드리스 공작군을 전멸시켰다.
잠시 후 모든 이가 승리에 취해 있을 때, 칼리드가 검을 다시 뽑아 들며 말했다.
“나는 란달프 이드리스를 쫓겠다.”
“지원군이 오면 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칼리드의 보좌관인 첼시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잡아야 한다. 아이딘 백작이 승리해도 그놈이 도망간다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어.”
“그렇다면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아니, 추적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경은 군사들을 이끌고 혹 있을지도 모르는 나머지 잔당들을 잡도록 해.”
“…….”
혼자서 그게 가능한가? 첼시는 그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칼리드의 단호함에 그가 무슨 생각이 있으려니 짐작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리려던 칼리드가 문득 생각난 듯 다시 멈췄다.
“아, 그리고 혹 아이딘 백작을 만나면…….”
“…….”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칼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동자가 산 너머 아이딘 백작이 있는 도시를 향했다.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 도시를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숲 속을 향했다.
그것이 사람들이 본 칼리드 루이르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생각해 보면 루이르크 공께서는 마치 죽으러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루시펠라는 첼시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조용히 물었다.
“시신은 발견했나?”
“네. 산 아래 란달프 이드리스의 시신과 함께였습니다.”
“그렇군.”
그녀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첼시가 고개를 숙이며 후회하는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무슨 생각이 따로 있으신 줄 알고 제가 루이르크 공작 각하를 혼자 보냈습니다.”
그의 정중한 사과에 루시펠라의 옆에 서 있던 쉐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죄송할 게 무언가. 주인님의 원수를 갚은 것뿐이네.”
“네, 네?”
첼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쉐인은 분노로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말했다.
“주인님께서 선대 백작님의 복수를 하신 거야. 주군께서는 처음부터 칼리드 루이르크를 살릴 생각이 없으셨네. 부모의 원수를 어찌 받아들이겠는가?”
“그, 그러면!”
“루이르크 공작은 스스로 죽기로 모든 것을 걸고, 백작님께 ‘죽음’을 맹세했다네. 그나마 마지막 맹세는 지켰군.”
그 말을 들은 첼시는 그웨인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웨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은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그녀의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었다.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며 그들은 이것이 진실임을 깨달았다.
이해할 수 없는 관계였다. 전쟁을 앞두고 루시펠라와 칼리드는 서로를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쪽의 일방적인 증오로 이루어진 관계라니.
죽음을 맹세한 루이르크 공작이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죽음으로 내몬 자신의 주군이나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웨인은 이해를 포기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것으로 선대 주인님께서도 눈을 편히 감으실 겁니다.”
“그래.”
쉐인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어째서인지 후련함보다 씁쓸함이 감도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
칼리드는 배를 부여잡았다. 상처 사이로 피가 마구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란달프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배신자 새끼, 죽여 버려!”
그는 자신을 배신한 칼리드에게 마땅한 응징을 해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칼리드가 주변을 훑었다.
앞으로 남은 수는 열 명. 저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 특히 저 란달프를 죽이지 않으면 훗날 후환이 될 게 뻔했다.
란달프를 쫓아가면서 하필 안 좋은 곳을 맞아버렸다. 그대로 두면 자신은 과다 출혈로 죽을 게 뻔했지만, 어차피 살 생각은 없다. 저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면 그만이었다.
끝까지 자신의 목숨이 에스텔에게 유용하게 쓰이길 바랄 뿐이었다.
그는 검을 고쳐 잡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빛을 머금고 결연하게 빛났다. 그는 헐떡이는 숨을 멈추곤 발을 내디뎠다.
마지막을 생각하는 그의 검이 또다시 생명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의 검술을 제대로 목격한 그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
검술에 뛰어난 건 하인트 공작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앞으로 세 명!
칼리드가 검을 치켜든 채 그들에게로 돌진했다. 그가 검을 횡으로 휘두르자 기사의 팔이 잘려 나갔다.
그 귀신같은 속도에 란달프가 뒷걸음질 쳤다.
앞으로 두 명. 칼리드가 검을 휘두르려 발을 내디딜 때, 갑자기 그의 가슴에 화살이 박혔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란달프가 영문 모를 표정을 한 채 기사들을 보았다. 그러나 곧 그 의미를 깨달은 란달프가 미소를 지었다.
“지, 지원군이다! 아버지로부터 지원군이 왔어! 크하하하!”
그가 웃자 기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놈을 어서 죽여라!”
기사들 역시 힘을 얻은 듯 칼리드에게 다가왔다.
칼리드는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무리한 모양인지 겨우 가슴에 화살이 박혔을 뿐인데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제 곧 죽음이 다가올 것이다.
검을 든 사람들을 앞에 두고 칼리드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산들바람이 그의 머리를 간질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꽃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흐릿한 시선을 애써 맑게 하며 다시 앞을 보니 에스텔이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에스텔은 어렸으며, 풋풋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헐렁한 셔츠에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항상 그래 왔듯 그녀의 호박색 눈에는 따스한 애정이 넘쳐흘렀다.
그것을 본 칼리드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버석하게 마른 그의 입이 열렸다.
“……돌아가자.”
얼샤로 돌아가자, 에스텔.
그곳의 하늘은 지금도 이곳처럼 파랗고, 산들바람은 너의 잿빛 머리를 간질여 줄 거야. 우리가 검을 휘둘렀던 민들레 꽃밭은 여전히 우릴 기다리고 있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자.
너도, 나도 아무 걱정 없이 죽음으로 향하는 미래를 떠들어댔던 그때로.
서로가 서로의 반쪽이라고 여기던 그때로.
매일매일이 눈물나게 행복했던 그때로.
그는 눈앞에 있는 에스텔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에스텔은 그에게 다가오지 않은 채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칼리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로 그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따윈 사실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것을 망쳐 버렸기 때문이다.
그날, 자신이 에스텔을 죽였던 그때. 칼리드는 에스텔이 죽어가는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육신은 너무도 많이 봐왔다. 어머니의 죽음도 받아들였고, 아버지의 죽음도 덤덤히 받아들였다. 동료들의 죽음 역시도 받아들였기에 에스텔의 죽음 역시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경악의 시선으로 그를 보며 힘을 잃어갔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동자에 꺼진 생명의 빛에, 그는 자신이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음을 알았다.
“에스텔.”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에스텔의 두 눈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이지? 에스텔을, 이 사람을, 자신이 죽였다. 돌이킬 수 없다.
“에…… 스텔.”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시체가 되어버렸으니까.
“에스텔!”
그녀를 죽이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진심으로?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눈앞에 죽어 있는 사람이 다시는 눈을 뜨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그는 비로소 죽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이것은 영원한 이별이다.
그가 살아 있는 이상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되풀이한 나머지, 그게 어떤 건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때 에스텔과 만나서는 안 되었다! 가브라인 공작가에 데려와서는 안 되었다! 기사가 되자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 별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을 바꾸라고 말해야 했다.
그녀의 목표와 그의 목표가 다르다면 갈라질 것이 두려워 별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에, 그도 함께 별이 되고 싶다고 거짓을 말했다. 하지만 너와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해야 했다.
그녀가 떠날 게 무서워, 그녀가 행복에 취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싸우지 말자는 말도, 도망가자는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게 거짓임을 깨달았을 때, 그녀가 그를 얼마나 미워할지 무서웠으니까! 모든 게 다 비겁한 겁쟁이인 자신 때문에 그런 것이다!
기만의 세상은 이제 끝이 나버렸다. 그가 직접 끝을 내버린 것이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에스텔의 눈을 감겼다. 그러자 편안하게 잠든 듯한 모습이 눈에 보였다. 언제나처럼 칼리드 앞에서 풀어져 잠드는 그녀의 모습이.
“으으으윽!”
그는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억누르며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아직도 이 얼굴에 온기는 가득한데, 너는 죽고 사라졌다. 다신 만날 수 없다.
칼리드는 그 온기를 느끼기 위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흘린 피가 자신의 몸을 적시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미안, 미안해, 에스텔!”
이런 방법밖에 없었어!
그는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실수를 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되씹고 되씹으며 그녀를 껴안으며 그는 자신의 울부짖음을 억누르며 또 억눌렀다.
에스텔, 만약 네가 검을 들지 않았다면 우리 인생은 달라졌을까?
만약 네가 검을 잡지 않았다면, 바지 대신 드레스를 입었다면, 기사가 아닌 레이디가 되었다면, 그랬다면 우린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언제나 그는 검을 잡지 않은 에스텔을 상상하고는 했다. 빌어먹을 이상이 사라진 채 평범한 여자가 되어 레이디로서 그의 곁에서 미소 짓는 에스텔을.
나라를 지키고 사람을 지키는 게 최고의 행복이 아닌,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게 최고의 행복이 되는 에스텔을.
그러나 그것은 허망하고 덧없는 꿈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그녀의 만남조차 검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던 그는 조용히 누워 있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잘 자, 에스텔.”
자신을 감싸던 세상이 거짓인 줄 모른 채 죽은 가련한 나의 사랑이여, 편히 잠들라.
이걸로 그녀의 세상은 영원히 완전무결해졌다.
그가 만든 영원 속에서 부디 그녀가 편하게 잠들 수 있기를.
그는 비탄에 잠긴 채 흐느끼며 생각했다.
부디 소원하건대, 우리에게 다음이 있기를.
내가 살아가는 동안, 너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때 만난 너는, 나라를 지키는 빌어먹을 기사가 아니라 레이디기를.
아무것도 지키지 않아도 되며, 검 따윈 잡지 않아도 되는 레이디가 되기를!
칼리드는 에스텔을 한참 동안 껴안고 있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던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에스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망설이듯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여서 에스텔에게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키스였다.
“어서 죽이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란달프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칼리드의 초점 잃은 두 눈은 에스텔의 환영에 닿아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미안해, 에스텔. 사실 내 잘못을 잘 알고 있었어. 단지 투정을 부렸을 뿐이야.’
그의 사과를 듣기라도 한 것일까. 갑자기 에스텔이 다가오더니 그에게 손을 뻗었다. 얼굴을 찌푸리는 것으로 보아 왜 안 오냐고 투덜거리는 것 같았다.
칼리드는 에스텔에게 마주 손을 뻗었다.
‘그래, 얼샤로 돌아가자, 에스텔.’
그렇게 손을 잡자, 어째서인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마치 그의 참회에 용서라도 받은 듯.
그렇게 그는 눈을 감았다. 에스텔에게는 미안하게도, 참으로 만족스러운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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