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53화 (153/173)

#153화 얀스가르의 이슈타르

2018.08.16.

그해 겨울, 루시펠라가 세운 어마어마한 계획을 듣고 그웨인은 입을 떡 벌렸다.

이것은 루시펠라가 영지전을 생각할 때부터 구상해 오던 작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세운 전략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친 짓이었다.

“자, 잠깐만 아가씨, 아니, 주군! 이건 정말로, 어떻게 그 많은 보석을……!”

생각만 해도 엄청난 이야기였기에 그는 입만 어버버할 뿐이었다.

그 많은 보석을 허공에 뿌리자고? 제정신인가?

“그웨인 경, 우린 이런 방도 이외에 이길 방법은 없어. 저쪽은 보석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렇지 않지.”

“그, 그렇지만!”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은 부가 아니라 영지에 대한 지배권과 이드리스 공작에 대한 복수야. 설령 실패하더라도 이드리스 공작가에 들어가는 것보다 가치를 훼손하여 파괴하는 게 더 낫지.”

“…….”

그웨인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이상한 것인가. 대체 이 말을 듣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그때, 칼리드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보석은 어떻게 마련할 거지?”

“아버지가 명령하셔서 이미 가공된 보석들이 있어. 나머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산하라고 해야지.”

“그리고 보석은 어떻게 저들에게 뿌릴 생각인데?”

“화약을 사용할 생각이야. 불꽃놀이처럼 보석을 산산이 흩어지게 하는 거지.”

“그러면 보석이 망가지지 않을까?”

“가치가 하락하겠지만 망가지지는 않아. 화약의 위력이 세지는 않을 테니까. 설령 망가져도 내 목이 잘리는 것보다 그게 더 낫지.”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그걸 어떻게 던질 건데?”

“작은 투석기를 만들도록 하자. 불을 붙인 채 터뜨리면 되는 거지. 이 부분은 이번 겨우내 연구해 보도록 하고, 화약에 대한 건 도움을 받으면 될 거야.”

“도움?”

“생각해 둔 게 있거든.”

루시펠라의 말에 칼리드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미묘한 표정을 했다.

“그래,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말이야.”

“뭔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이드리스 공작의 군사들이 한가로이 보석이나 주우러 다닐까?”

칼리드의 의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웨인도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 상황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미쳤다고 한가로이 보석이나 줍겠는가.

“그래서 우린 성 밖에 나가 있을 거야. 병력이 적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줄 거고, 그중에는 내가 나가 있을 거야. 나는 멍청한 사람이니 위협이 안 되는 것처럼 보여줘야지.”

“…….”

“마음만 먹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적은 병력을 앞에 두고, 그들은 눈앞의 보석을 줍느라 혈안이 되겠지. 당연한 거 아니야? 이 보석 때문에 더 이상 굶지 않아도 될 테니까.”

“……”

“이드리스 공작은 현재 재정이 좋지 않아서 사람들을 말 그대로 쥐어짜 내는 모양이야. 이번 혹한에 많은 이가 굶어 죽었지. 그런 영지민을 병사로 징집했으니, 그들의 충성심은 그리 높지 않을 거야.”

“그래, 확실히 횡포를 부리는 영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보다는 그 보석을 하나 주워가는 게 이득일 테니까.”

칼리드가 턱에 손을 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뭐, 어때. 이드리스 공작에게 한 방 먹인 것으로 만족하자.”

루시펠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루시펠라가 거는 최후의 도박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그녀의 작전대로 준비가 이루어졌다.

***

이드리스 공작의 병사들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꿈결같이 아름다운 붉은 빛의 비가 자신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좀 전에 저 여자가 뭐라고 했었지? 분명히 이걸 가지면 남작령의 절반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가족들이 배를 곯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 붉은 보석은 희망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보석을 바라보았다. 마치 유혹하듯 보석은 맑게 반짝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퍼져 가는 광기였다. 그 찬란한 빛에 홀린 병사들은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래, 어차피 저기 있는 군사들은 자신들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이들은 전시 상황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혹 위험하다면 다른 이들이 알아서 싸워주겠거니 생각했다.

사람들은 무기를 떨어뜨린 채 그 보석 조각들을 줍기 시작했다.

“어서! 보석을 주워라!”

이드리스 공작이 악을 질렀다.

보라, 공작 각하도 저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걸 줍지 않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이, 이것만 있으면!”

그들은 보석을 줍기 위해 땅을 기었다. 심지어 무장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몇몇 이가 땅을 기어 다니며 그 반짝이는 보석들을 쓸어 담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그것을 줍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보는 보석이라는 것은 보는 사람을 잠시 넋을 잃게 할 정도로 황홀했다. 이런 돌들이 더 있으면, 더 부유하게 살 수 있다.

“이리 내!”

“이건 내 거다! 어서 놓지 못해!”

“아아악!”

심지어 그들은 서로 주먹다짐을 하며 싸우기까지 했다. 그렇게 보석을 주우며 그들은 자신이 어느 열에 서 있는지도, 자신의 무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렸다.

마침내 모든 이가 탐욕의 광기에 휩싸이며, 이드리스 공작의 군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담담히 바라보며 언덕에서 전속력으로 진군해 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드리스 공작이 궁금해했던 그웨인이 이끄는 ‘나머지’ 군사들이었다.

칼리드에게 오백, 이곳에 오백, 그리고 상대적으로 무력이 약한 여성 궁병들에게는 성의 수비를 맡겼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돌격해 오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이 겨울, 루시펠라는 이 사람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데 노력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건 군사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얼마나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리는가였다.

칼을 든 채 돌격하는 이들은 눈앞에 흩어진 보석보다 적군의 섬멸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들은 아는 것이다, 이곳에서 보석을 탐하다간 목이 날아갈 거라는 것을,

붉은 보석이 가져온 붉은 광기 속 전투의 첫 피가 흘러내렸다.

그웨인이 후미에서부터 적들의 목을 친 것이다.

그때 루시펠라가 들었던 손을 내리며 자신의 뒤에 있는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돌격!”

모든 기병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드리스 공작의 군대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흐트러진 전열을 가진 오합지졸과 추운 겨울 내내 이를 갈았던 그녀가 만든 군대가 상대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론?”

그때, 루시펠라는 자신의 바로 옆으로 말을 타고 달려온 아론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녀는 아론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곁에 온 줄 알았기에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 게다가 화를 내기엔 상황이 급박했다.

“지키려면 확실히 지켜. 난 여기서 또 죽고 싶지 않아.”

루시펠라의 말에 아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들었다.

땅 위로 피처럼 붉은 보석이 아닌 붉은 피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계획대로 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튀고 생명이 죽어간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풍겨오는 짙은 죽음의 냄새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때, 어깨에서 느껴지는 손의 감촉에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아론이었다.

“나 익숙한 거 알잖아. 관련이 없는 사람을 전쟁으로 몰아넣는 거.”

“…….”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군사를 일으키고, 전쟁을 일으키고, 그러면서 또 싸우자고 하고. 나도 아렌트와 똑같은 사람인 거지. 이제 보니 나도 그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어.”

루시펠라가 덤덤히 말했다. 그녀는 말고삐를 쥔 손을 꾹 쥐었다.

“나는 이슈타르라고 불릴 자격이 없었어. 이슈타르는 적어도 인간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내려온 거니까. 그냥 나는 모든 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아레스야.”

아론이 고개를 숙인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루시펠라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아론에게 살풋 미소를 지으며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군사를 이끄는 장수는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 전사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외면하지 말고 똑똑히 지켜봐야 했다.

모든 것은 그녀의 계획대로였다. 탈주하는 이들, 도륙하는 이들, 죽어가는 이들, 마침내 이드리스 공작의 마지막 호위기사마저 허망하리만치 쉽게 죽고, 이드리스 공작이 붙잡혔다.

그녀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 미친놈들! 어서 이거 놔라!”

이드리스 공작이 그녀 쪽으로 끌려오며 소리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그녀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입을 당장 막아버려.”

그녀의 지시에 기사 한 명이 이드리스 공작에게 달려들어 재갈을 물렸다. 그의 고함 소리는 허망하게 묻혔다.

생애 최초로 굴욕을 당한 이드리스 공작은 분노로 얼굴만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정리된 후, 루시펠라는 폐허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시체가 가득한 전쟁터를 보며 맷시와 그웨인이 그녀를 걱정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오히려 덤덤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쌍둥이 산에 당장 오백의 지원군을 파견하도록. 아론 경, 그대도 어서 가도록 해.”

그에 루시펠라 옆에 있던 아론이 가기 싫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그녀의 단호한 눈초리에 말 머리를 돌렸다.

그것을 본 그웨인이 맷시에게 말했다.

“자작님, 대체 저 남자 정체가 뭡니까?”

“조카입니다.”

항상 들었던 대답이 돌아왔다. 그웨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상하잖습니까. 이제 전쟁도 끝났으니 말해주십시오. 창술이 저렇게 능숙한 사람이 조카라고 때마침 좋은 시점에 나타나다니 말이나 됩니까?”

맷시는 그에 흠흠, 헛기침을 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웨인의 표정을 보고 맷시가 조용히 속삭였다.

“백작님의 명령일세.”

“명령이라니요?”

“자세한 건 알려 하지 말게. 백작님께서도 정체를 알고 계시니까.”

맷시의 말에 그웨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령이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아가씨와 아는 사이라는 걸 들으니 후련하기는 했다.

그러고 보면 아론과 루시펠라는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다. 때로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본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루시펠라가 비밀리에 데려온 용병인 모양이었다.

그웨인은 그것에 호기심을 더 가지지 않기로 하고, 자신의 앞에 펼쳐진 전장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죽여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전투를 치른 적은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싱겁게 끝나 버렸다. 인명피해도 거의 없었고. 심지어 수성전까지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멍청한 지휘관과 똑똑한 지휘관이 만나면 군사 수에 상관없이 멍청한 지휘관 쪽이 필패한다더니…….”

“그러게 말일세.”

그웨인의 중얼거림에 맷시가 동의했다.

그들은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무도 루시펠라가 영지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 누구도 그녀의 능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

성문을 연 루시펠라가 말을 타고 들어가자, 쏟아질 듯한 환호성이 그녀의 귀에 들렸다.

도시의 모든 이는 너무나 쉽게 끝난 전투에 얼떨떨했으나, 이드리스 공작의 군대를 단시간 만에 대패시켰다는 것에 모두 열광하고 있었다.

그들은 밧줄로 묶인 채 질질 끌려가는 이드리스 공작을 보고 환호했다. 해가 채 지기도 전에 끝난 일이었다.

걱정으로 물들었던 이들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모든 이의 선두에 선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녀의 얼굴만 눈에 들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루시펠라는 너무도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의 눈에는 루시펠라의 외모는 그저 그녀를 장식하는 한 요소일 뿐이다.

그들은 이제 이 특이한 여자 영주가 자랑스러웠다.

지난겨울, 루시펠라와 함께하며 이들은 루시펠라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봤다.

그녀는 아주 자비로운 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만의 기준이 있었으며, 그들에게 약속한 것을 지켰다.

그녀는 평민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생각했다. 그녀는 도시의 번영을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안락한 삶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싸우자고 그들을 독려했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던 머리카락을 자르고 전쟁에 임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승리했다. 자신들이 지켜낸 땅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땅의 마땅한 주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칭송했다. 루시펠라 아이딘, 그녀는 바야흐로 이곳의 백작이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는 샛별이 떠 있었다. 붉은 노을을 등에 진 그녀의 뒤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모든 이를 이끄는 루시펠라를 홀린 듯 바라보던 어떤 이의 입이 열렸다.

“이슈타르.”

“응?”

“우리 백작님, 꼭 이슈타르 같지 않은가? 전쟁의 여신 말이야.”

남신 아레스가 일으킨 전쟁에서 인간들이 고통에 처하자 이 땅에 강림하여 전쟁을 승리를 이끌어낸 여신.

이드리스 공작으로부터 영지전을 치러 승리를 이끌어낸 루시펠라.

루시펠라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 이슈타르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맞아. 이름도 루시펠라, 샛별이라는 뜻이잖아.”

그에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우리 백작님은 이슈타르께서 보내신 신의 사자일지도 몰라.”

“맞아, 그런 걸 거야!”

사람들은 일제히 그녀를 루시펠라, 라는 이름이 아닌 얀스가르의 이슈타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또다시 그녀에게 ‘이슈타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

한편, 루시펠라는 무거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개선 행진은 참으로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에스텔일 때는 마냥 기분이 좋던 개선 행진이 이렇게나 무거운 이유는 그녀가 이제 승리만이 아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전이 신묘하고 전세가 압도적이었어도 죽은 이들은 존재했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이들도 존재했다.

전시 체제였기에 봄 농사가 늦어졌고, 이는 가을에 타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

승리에 안주하지 말고 영지의 정상화를 위해 그녀는 마땅히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것은 루시펠라가 단순한 기사로 남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감옥 속, 별안간 횃불이 타올랐다. 그와 동시에 끼익, 하고 철문을 여는 소리가 지하 감옥에 울려 퍼졌다.

“일으켜 세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뚜벅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들렸다. 횃불 아래에 서 있는 것은 루시펠라였다.

이드리스 공작은 병사들에 의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져야만 했다. 루시펠라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무릎을 꿇은 채 올려다보는 것은 굴욕적이었으나, 이드리스 공작에게 지금 그런 것 따윈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지가 더 중요했다. 그는 눈을 빛내며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가 있어.”

“하지만 주군.”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어.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 말에 루시펠라의 옆에 서 있는 호위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루시펠라는 천천히 이드리스 공작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침으로 범벅이 된 재갈을 벗겨냈다.

“푸하! 루시, 루시, 내가 잘못했다!”

그는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소리쳤다. 루시펠라는 그의 비굴한 음성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늘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시, 내가 설마 널 죽이려 했겠느냐. 난 너를 살리려 했단다! 루이르크 공에게 물어보려무나.”

“칼리드 루이르크와의 거래요?”

“그래! 너를 살리는 조건으로 거래를 했단다! 네가 내 마음을 안다면…….”

“루이르크 공작에게 저를 살리면 얼샤의 영지에서 살아가게 해준다고 했지요?”

“그게 맞……. 그런데 그걸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루시펠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칼리드 루이르크는 처음부터 제 편이었어요. 그 녀석이 두 번 다시 저를 배신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이드리스 공작은 너무나 놀라서 칼리드 루이르크의 계획을 루시펠라가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 찢어 죽일 개새끼! 그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 배신자 놈이 또 배신한 모양이었다.

“항상 누군가를 배신하고, 누군가를 벌레보다 하등하게 여기며, 그렇게 사람들을 농락하셨지요. 가장 잔혹하게 농락하신 아이딘 백작의 딸인 제게 이런 꼴을 당한 기분이 어떠십니까.”

“…….”

“처음부터 이 싸움은 제가 이기는 싸움이었어요. 왜냐면 저는 잃을 게 없고 당신은 얻어야 할 것도, 잃어야 할 것도 많거든요.”

루시펠라의 서늘한 은청색 눈이 그를 향했다.

이드리스 공작은 그 눈빛이 어쩐지 낯설다고 느꼈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루시, 아니야. 오해란다. 아이딘 백작은 내가 죽이지 않았어!”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당신은 이미 패해서 이렇게 비참하게 갇혀 있는 것을.”

그녀가 조롱하자 비굴한 이드리스 공작의 눈에 살의가 돌았다.

“네, 네가! 네가 감히!”

그 분노에 찬 눈빛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루시펠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감히? 제가 ‘감히’ 당백부님을 죽이려 한다는 겁니까? 제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저를 죽이려 했던 이를 죽이는 건 ‘감히’가 아니라 보통 ‘당연히’라고 말하지 않나요?”

“그, 그건!”

이드리스 공작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더니, 별안간 그의 입을 힘껏 걷어찼다.

“으으으으읍!”

발길질의 강도는 약했으나, 군화를 신었기에 이드리스 공작의 입에서 피가 터졌다.

손발이 묶여서 이드리스 공작은 아픈 입을 감쌀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런 취급을 당한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피차 다 아는 거, 오해는 무슨. 아직도 할 소리가 남아 있긴 해?!”

“으아악!”

“이 미친 새끼야!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데! 어?!”

“으으흐흑! 그, 그만!”

그녀는 몇 번이고 이드리스 공작의 입을, 배를 걷어찼다.

“네놈 때문에! 네놈만 아니었어도! 대체 몇 명이나 네놈 때문에 죽었는데!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이 망할 새끼!”

그녀가 악을 내지르며 더욱 세게 그를 걷어찼다.

이드리스 공작은 몸을 웅크려 루시펠라의 발길질을 막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는 고통의 비명을 질렀으나, 루시펠라는 한참 동안이나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고통 속에 이드리스 공작이 두려움을 품은 얼굴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는 울음과 신음이 섞여서 기괴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지친 듯 숨을 헐떡이며 벽을 짚고 섰다. 그러더니 바닥에 발을 비비며 군화 바닥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분명 레이디가 보일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너, 너는 누구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루시펠라의 발길질에 그의 이빨은 부러져 발음이 부정확했으나 그것을 알아들은 루시펠라는 쭈그려 앉아 겁에 질린 이드리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드리스 공작은 그 눈빛을 보며 움찔했다.

“누구긴 누구야, 루시펠라 아이딘이지.”

조용한 음성. 분명 목소리는 다르지 않았으나 그의 감히 말하고 있었다.

“아, 아니야. 너는…….”

“아니면 어쩔 건데?”

낯선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는 이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이였다.

벌레만도 못한 계집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니! 그러나 그에게는 수치심보다 공포가 먼저 일었다.

그녀는 루시펠라 아이딘이 아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발악처럼 소리쳤다.

“이건 내가 진 게 아니야! 네가 루시펠라 아이딘이 아니라면 이건 무효야!”

그의 발악에 루시펠라가 미소 지었다.

“한심한 놈. 그걸로 네가 진 게 무효가 될 것 같냐? 더 지껄여 봐, 이 머저리 같은 새끼야. 그 누구도 너를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

“그 누구도 너를 구해주지 않을 거고, 그 누구도 너를 살리려 하지 않을 거야. 너는 이제 죽게 될 거야. 루아나 아이딘처럼, 루이보스 아이딘처럼.”

이드리스 공작의 절망하는 표정을 본 루시펠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루시펠라, 너는 기뻐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녀는 희열로 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바깥으로 나왔다.

“루시, 기다려라, 루시!”

애타게 그녀를 부르는 이드리스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그것을 무시했다.

그녀가 지상으로 올라가 복도를 거닐 때였다.

맷시가 루시펠라를 향해 뛰어왔다. 맷시는 다급한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차분했다.

“쌍둥이 산 쪽에서 소식이 도착한 모양이군. 어떻게 됐나?”

“스, 승리했습니다! 다만.”

“다만?”

“루이르크 공작께서, 전사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걸렸다. 마치 그것을 바라왔던 것처럼.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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