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52화 (152/173)

#152화 붉은 비

2018.08.13.

이드리스 공작가의 후계자인 란달프 이드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어찌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겠는가! 그는 언제고 이런 것을 꿈꾸었다. 전쟁!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파괴하는 것!

그러나 목숨이 아까웠기에 그는 차마 전쟁에 자원하지는 못했다.

그는 언제나 기사들이 부러웠다. 특히나 하인트 공작 같은 고개만 뻣뻣이 들고 다니는 그런 놈들처럼 되고 싶었다. 이제 자신도 전쟁에 참여한다, 그놈들처럼 되는 것이다!

우선, 수도에 가서 친구 놈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이들은 모두 이드리스 공작령의 봉신 자제들이었으며, 뜨거운 피를 갈망하는 젊은이 특유의 혈기를 지니고 있었다.

정복, 전쟁, 싸움!

이들은 그 단어에 흥분하고 있었다.

그나마 기사 수행 때 전장에 나간 경험이 있던 이드리스 공작령의 부단장이 침착하게 말했다.

“루이르크 공의 말에 따라 우린 저 쌍둥이 산만 점령하면 됩니다. 따로 위험한 일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도련님.”

“알고 있어. 듣자 하니 산 아래에 마을도 있다면서?”

“그렇습니다만.”

“그곳부터 쓸어버리자.”

란달프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벌써부터 그곳을 ‘정복’할 생각을 하니 흥분되었다. 그에게 이것은 놀이였다.

“하지만 비무장 마을은 침입하지 않는 게 영지전의 법칙입니다. 게다가 저 마을은 보석을 생산하는 마을로서 제 기능을 해야 하므로…….”

“아! 알아, 알아. 그럼 그쪽 사람들이 우리에게 반항하면 죽여도 된다는 말이잖아?”

부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란달프 이드리스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공작은 우선 산을 점령하여 하루빨리 보석을 채굴하기를 원했다.

공작가는 화려했지만, 틈 하나라도 있으면 무너져 내릴 만큼 재정이 위태했다.

그 쌍둥이 산만 가진다면 영지전이 길어져도 상관없었다.

우선 그곳만 가지면 된다. 도움을 줄 이를 저기에 심어놓았다. 그것이 공작이 란달프와 부단장에게 하는 말이었다.

“흠흠, 내가 지휘관이니 내 지시에 따라야 해. 알고 있지?”

란달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선봉에 선 그는 자신을 뒤따라오는 군사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자신 하나만을 따르며 절대복종하는 무리. 이 모습을 여자들이 보면 얼마나 멋있어할까?

그 드센 바반드 백작 영애도 분명 이걸 보면 자신에게 대든 걸 후회하겠지. 그는 자신의 약혼녀였던 그 여자를 생각하며 입맛을 쩝 다셨다. 질투 빼고는 완벽한 여자였는데 말이다.

그 때문에 바반드 가와 이드리스 가문 간의 불화가 시작되었으나, 란달프의 머릿속에 그 사실은 들어 있지 않았다.

“마을이다!”

기사 중 한 명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에 란달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에 서 있는 기사들 역시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부단장의 말을 무시하며 마을에 들어갔다. 피가 보고 싶어 근질거렸다.

“어, 마을이 비어 있네?”

만약 이들이 전투에 능숙하고 경험이 많았다면 마을이 텅 빈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위험을 감지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경험이 전무했으며, 사람이 없는 것을 그저 신기한 일 중 하나로 취급할 뿐이었다.

“마을이 버려진 건가?”

“그런 모양입니다.”

란달프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들은 마을을 가로질렀다. 약탈할 만한 것도 없었다. 왠지 김이 팍 샜다.

그의 군대가 마을을 지나쳐 쌍둥이 산에 가까워질 때 란달프가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다른 쪽 산은 마물이 출몰한다니 각별히 주의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러자 모든 이가 진지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란달프는 희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기사뿐만 아니라 병사들마저 자신의 말을 듣는 게, 자신이 꼭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산 하단부를 오르려고 할 때였다.

“어?”

산 위, 돌출되어 있는 절벽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란달프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자세히 보니 익히 알던 이였다. 갑옷을 입고 있는 물빛 머리카락을 가진 장신의 청년.

란달프는 미소를 지었다.

“루이르크 공이다!”

란달프가 부단장을 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칼리드 루이르크 공이 도움을 줄 거라고 하셨다. 바로 여기서 도와줄 모양이었군.”

그 말에 부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란달프가 손을 흔들려고 할 때였다.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모습을 드러내며, 잠시 동안 위를 바라보는 이드리스 공자의 시야가 가려질 때였다.

푸슈슈슉!

란달프가 자신도 모르게 놀라 방패를 든 것은 천운이었다. 그가 방패로 막자마자 무언가가 튕겨 나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매복입니다! 도, 도련님, 피하십시오!”

사람들이 놀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란달프는 자신에게 날아온 화살비에 놀라 날뛰기 시작한 말의 고삐를 필사적으로 잡고 소리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서 뒤로 물러나십시오!”

부단장이 소리치자 란달프가 재빨리 말에서 내려 달려 나갔다.

부단장이 검을 들어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어서 피하라!”

부단장의 소리에 모든 이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란달프는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단장, 루, 루이르크공은?”

“도련님, 루이르크 공은 배신자입니다!”

또다시 화살비가 날아왔다. 란달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드리스 공작의 군사 수는 오천이다. 그리고 이곳 산을 점령하기 위해 떨어져 나온 군사 수는 천 명.

아이딘 백작령의 병력은 기껏해야 이천오백 명 남짓인데 산에 따로 떨어뜨려 놓을 만한 여유가 있다는 소리인가? 나머지 가지고 어떻게 싸울 생각이지?

전술 따윈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이다. 이 멍청한 계집!

란달프는 이를 악물며 산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산 아래에 매복한 군사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히죽이며 미소를 지었다.

루이르크 공작의 배신은 뼈아프지만, 우린 이렇게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다!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감히 자신에게 화살을 날리다니, 응당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란달프는 약이 올라 무작정 돌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는 에스텔 슈페르트가 평지 전투보다 산지 전투를 주로 해왔으며, 그녀의 전문 분야가 소수의 군사로 대승을 거두는 것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산은 그녀가 준비해 놓은 덫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

“괜찮으십니까?”

그웨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론이 물을 가져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루시펠라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녀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는 투구를 쓰고 있기에 그녀는 아론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속삭이자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를 두드린 루시펠라는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저 너머 평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루이르크 공작 각하는 괜찮을까요? 천 정도의 병력이 그곳으로 분산되었다는데 삼백으로는 아무래도…….”

“못 이기면 죽기밖에 더하겠어?”

“주인님, 그건…….”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죽으라고 보낸 거야, 거기.”

섬뜩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겨우내 영지전을 준비하면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던 이라고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날카로운 어투였다.

“이제 정말로 모든 걸 끝내야 할 때가 온 거지.”

루시펠라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웨인이 그것에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생긋 미소 지었다.

“자, 우리도 전투를 시작해야지.”

그웨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루시펠라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론 경, 경도 가봐야 하지 않을까?”

“…….”

“너 진짜 계속 여기 있을 생각이야? 고집 좀 그만 부려.”

루시펠라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속삭이자, 아론이 고개를 저으며 내려갔다.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울리지 않게 왜 나를 지킨다고 해서 이 고생인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루시펠라는 짧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성벽 너머, 적군이 올 평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아! 아!”

루시펠라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증폭석을 입에 대고 작게 말하자 자신의 목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이걸 다시 쓰게 될 줄이야.”

황제나 고위 귀족이 국민에게 연설할 때 쓰는 증폭석은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대면 멀리 있는 이도 귀에 대고 말하듯 목소리를 크게 만들어주었다.

구하기 힘든 고가의 물품이었으나 과연 황자인 이오지프였다 그것을 확실하게 구해주었다.

“시작해 볼까?”

루시펠라는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예전 전투에 나가기 전 에스텔이 지었던 표정처럼.

바야흐로 전투의 시작이었다.

***

이드리스 공작은 저 멀리서 보이는 성벽을 보며 혀를 찼다.

성은 도시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에워싼 성이라니, 참 번거로웠다.

아이딘 백작령이 과거, 얀스가르의 국경에 위치해 수비 도시의 기능을 했다더니, 이것 때문에 아이딘 백작은 ‘수비’를 택한 듯했다.

공성 무기가 있으면 했으나, 전쟁이 사라지는 추세에다 대장장이 길드의 가장 큰 지원자인 하인트 공작이 지원을 끊었기에 공성 무기는 개발되지 않았고, 여기에 든 자원들은 대부분 대 마물전 무기로 변형되었다.

공성 무기를 다시 만들면 막대한 자금이 들었고 이드리스 공작의 재정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기에 돈을 최대한 아껴야 했다.

어차피 이길 전쟁이었다. 성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다면 그 계집은 무서워서 바로 항복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이드리스 공작은 공성 무기 없이 무장한 병사들과 진군했다.

쌍둥이 산 점령은 아들에게 맡겼고 칼리드 루이르크도 거기 있을 예정이니 자금 문제도 금세 해결될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을 벌여도 그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성문 앞까지 도달하자 그는 도열해 있는 아이딘 백작령의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이드리스 공작가의 군사 수에 비해 참으로 초라하고 형편없는 규모였다.

기껏해야 오백이 될까 말까.

게다가 그 앞에 서 있는 루시펠라를 보며 이드리스 공작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저 멍청한 계집은 ‘영주’는 최대한 몸을 피해 있어야 하는 게 제일이라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선두에 서 있던 루시펠라가 단신으로 말을 몰아 이드리스 공작을 향해 왔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그녀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자 이드리스 공작은 루시펠라의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짧은 머리카락에 바지, 심지어 그녀는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다. 어딜 봐도 레이디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이드리스 공작은 그녀가 이미 삶을 반쯤 포기했다고 생각하며 비웃음을 지은 채 홀로 말을 몰아 그녀 바로 앞에 섰다. 전쟁 전 흔히 있는 장수들의 기 싸움이었다.

루시펠라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당백부님.”

이드리스 공작은 지나치게 크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손에 돌이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증폭석을 쓰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전쟁이랍시고, 증폭석을 쓴다는 게 참 우스웠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루시. 그 꼴은 네가 사랑하는 하인트 공작이 좋아하진 않을 듯싶은데 말이야.”

이드리스 공작은 조롱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쯧쯧, 그러게 공동 대리인을 수용했으면 내 하인트 공작과 결혼을 시켜준다지 않았느냐. 그때 말을 들었어야지.”

루시펠라는 그 말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드리스 공작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장 성문을 열어 항복한다면 내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부족함 없이 잘 살게 해줄 것이다!”

“…….”

“하인트 공작과의 결혼도 노력해 보마.”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는 어서 이 멍청한 계집이 떼를 부리는 것을 멈추고 복종하길 바랐다. 대가는 참혹하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때, 루시펠라가 군사들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인 당신이 제 목숨을 살려주겠다고요? 지나가던 개가 웃겠습니다!”

증폭석을 타고 웃음소리와 더불어 그녀의 말이 퍼져 나갔다.

이드리스 공작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 안 그래도 징병에 불만이 많던 병사들이었다.

루시펠라의 말에 그들은 더욱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로만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동요하는 것을 힐끗 본 이드리스 공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난은 그만하지.”

“숙부님도 그런 애들 장난 같은 회유는 집어치우시죠.”

루시펠라가 그녀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드리스 공작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눈을 크게 떴다.

햇빛에 반짝이는 것. 그것은 그가 애타게 바라던 루비, 그것도 피죤 블러드였다.

햇빛에 핏빛으로 반짝이는 붉은 보석에 그는 잠시 동안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 보석이 피죤 블러드라지요? 이만한 크기라면 남작령의 절반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그에 깜짝 놀라 루시펠라가 들고 있는 보석을 보았다.

보석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저거 하나에 남작령의 절반이라면 대체 얼마나 귀중한 가치를 가진 것인가.

사람들의 두 눈에 서린 탐욕을 읽은 루시펠라는 일부러 크게 말했다.

“이 보석, 이 보석 광산을 가지자고 이런 힘없는 계집을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닙니까!”

루시펠라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이드리스 공작에게 던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말에서 내려 그것을 주워 들었다.

“네가 정녕 미친 것이냐?”

“안심하십시오, 당백부님. 폐하의 명대로 아이딘 가의 재산은 함부로 처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보석만 채굴하고 세공했을 뿐이니까요. 당백부님이 절 죽이고 가져가시기 좋게 말입니다.”

증폭석으로 그녀의 말은 가감 없이 병사들의 귀에 들어갔다. 병사들이 눈치를 보는 것을 보며 루시펠라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드리스 공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서 어린 여자와 영지전을 벌이고, 여자의 부모를 죽였다는 것이 대대적으로 알려져 자신은 인륜을 저버린 놈이 된 것이다.

그는 루시펠라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이 사실을 퍼뜨린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네 목을 치기 전에 그만 입 닥치는 게 좋을 거다. 그런다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자 루시펠라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백부님, 우린 한 번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우리 둘 중 하나는 죽을 텐데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게 무엇이 그리 나쁩니까?”

“……입 닥쳐라.”

“그렇다면 입을 닥치도록 하지요. 아, 그전에 하나만 더, 우리 쪽 군사가 왜 이렇게 적은 걸까요? 당백부님께서 맞혀보시겠습니까?”

루시펠라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드리스 공작은 얼굴을 찌푸리며 루시펠라의 뒤에 도열해 있는 군사들을 보았다. 분명 오백 남짓한 적은 수였다.

“나머지는 성을 지키려는 모양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드리스 공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굳이 오백 명을 데리고 성 밖에 나와 자신을 위험에 노출하는 건가? 루시펠라의 군사를 최대 삼천이라 가정하자면, 나머지 이천의 존재의 행방은 확실히 이상했다.

“이드리스 공자께서 산에 가신 모양이라던데요.”

설마! 이드리스 공작의 등골에 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나머지 이천을 그곳으로 끌고 간 것인가? 그는 칼리드 루이르크의 제안에 따라 성을 먼저 점령하는 게 낫다고 결정을 내렸었다. 설마 그놈이 배신한 것인가?! 이 배신자 새끼! 그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네가 죽으려고 작정한 모양이구나! 내 아들을 인질로 삼으려고!”

이드리스 이를 갈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루시펠라의 목을 틀어쥐고 싶었다.

“그래서 성을 지키는 군대 없이 이렇게 죽을 생각이냐! 어리석고 어리석다!”

“성을 지키는 군사 역시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루시펠라가 손을 들자 성가퀴 뒤에 숨어 있는 모든 이가 일어났다.

고개를 들어 올려 성벽의 병사들을 본 이드리스 공작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성벽 위, 그리고 총안(銃眼) 사이로 보이는 궁병까지, 분명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다.

“아이딘 백작령의 군사가 삼천이라고 하셨습니까? 잘못 아셨습니다.”

루시펠라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군사는 남자만 칭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제가 가진 군사 수는 육천이고, 당백부님보다 많습니다.”

이드리스 공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정말로 미쳤다.

여자들에게까지 성을 지키라고 하고 자신은 싸우기 위해 성 밖으로 나와?

그는 어이가 없었다. 병사들 역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공작 군영에서 웃음이 터져 나와 루시펠라를 비롯한 백작령의 군대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성 위나 총안에 서 있는 이들도, 루시펠라의 뒤에 도열해 있는 이들의 표정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당백부님.”

루시펠라가 미소 지으며 말 머리를 돌려 자신의 군대로 돌아갔다.

이드리스 공작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멍청한 년. 저렇게 멍청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야! 정말로 궁지에 몰린 모양이로구나!

그는 자신에게 온 행운에 미소를 지었다. 전쟁은 빨리 끝날 것이다.

란달프를 인질로 잡아도 그전에 루시펠라를 죽이면 그만이었다. 한데 루시펠라는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어째서인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 점이 마음에 걸린다고 생각했을 때, 루시펠라가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어 위로 치켜 올렸다.

검을 든 모습은 의외로, 아니, 꽤 그럴듯했기에 그는 어딘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준비!”

그녀가 증폭석으로 신호를 보내자, 성 위에 있는 이들이 무언가를 장치시켰다.

그건 자그마한 투석기였다. 설마 돌이라도 던지려는 건가? 저렇게 작은 투석기로 무엇을?

“쏴라!”

루시펠라가 하늘로 치켜든 검을 이드리스 공작군을 가리켰다. 그러자 투석기 안에 있는 돌들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공작의 군대가 살짝 물러날 때였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일제히 펑펑거리며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사된 것들이 하늘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드리스 공작은 그 물체에서 떨어지는 붉은 비를 보았다.

붉은 비.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새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그것은 분명 붉은 비였다.

“쏴라!”

또다시 루시펠라가 소리치자, 그와 동시에 그 붉은 무언가가 또다시 발사되었다.

이드리스 공작은 그것이 폭탄이 달린 주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폭발하며 주머니 안에 있던 그 붉은 것이 터져 나왔다.

새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붉은 보석이 햇빛에 반짝였다.

이드리스 공작군은 그 황홀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붉은 비를 맞고 있었다.

붉디붉은 보석으로 이루어진 비. 하늘에서 반짝이며 쏟아지는 그것은 선혈로 만든 듯 붉디붉었으며, 아름다운 광채를 지니고 있었다.

순간이나마 모두를 미치게 할 만큼.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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