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죽음의 맹세
2018.08.09.
“필시 숨기는 게 있을 터! 어서 뒤져 봐라!”
집정관의 명령에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은 가족들은 불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으리, 정말로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의 말에 집정관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수확량이 이것밖에 안 된다니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추수 때 가져가시고 두 번이나 더 가져가시지 않으셨습니까.”
“공작 각하께서 마땅히 필요하셔서 가져간 것이다. 그 은덕으로 이 땅에 발붙이고 살고 있음을 모르는 것인가!”
집정관의 말에 남자가 울컥한 마음을 억눌렀다. 세금을 걷어간 것만으로 모자라서 몇 번이고 이런저런 사족을 붙여 돈을 뜯어갔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겨울을 날 식량밖에 없었다. 그것만 들키지 않으면 되는데……!
“찾았습니다!”
병사가 소리치자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역시나 들켜 버렸다. 그는 필사적인 표정으로 외쳤다.
“그, 그건 겨울을 날 식량입니다, 나으리!”
“감히 각하를 속였겠다!”
집정관이 그를 걷어차자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남자의 아내와 아이들은 벌벌 떨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제발 부탁입니다. 이건 저희 가족이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입니다. 부디 자비를!”
“공작 각하께서 심려가 매우 크시거늘! 식량은 남아 있는 걸로 아껴 먹도록 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지금 저기에 있는 게 그들이 가진 여유 식량인데! 나머지 식량이라고 해봤자, 당장 며칠 먹을 것밖에 없었다.
“이걸 가져가시면 저희는 굶어 죽고 말 겁니다.”
“공작 각하의 명을 듣지 않는 이들은 즉결 처분이다!”
집정관의 눈짓에 병사가 칼을 뽑아 들었다. 무기를 본 남자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아내가 재빨리 만류했다. 집정관은 그것을 보며 병사들과 함께 집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될 겨울을 생각하자 너무나도 막막했다.
이 땅의 영주, 이드리스 공작은 어째서 이런 횡포를 일삼는 건가. 황제 역시도 이제 그를 막을 수 없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희망이 없었다.
먹을 게 필요했다.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모두 빼앗겨 버렸다.
아내와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 겨울,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것이다.
설상가상 봄이 오면 그는 영지전으로 징집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탄식하며 생각했다. 이드리스 공작, 그 악마를 위해서 싸우고 싶지는 않노라고.
***
그해 겨울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더욱 혹독했다.
눈이 자주, 많이 내렸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주들의 능력이었다.
어느 곳은 노인과 어린아이가 대부분 사망했으며, 어느 곳은 대다수의 사람이 합심하여 살아남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이 지나갔다.
세상을 모두 뒤덮을 정도로 내리던 눈이 비가 되는 듯하더니 초록 새싹이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따스한 봄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병중인 황제의 상태가 가끔 위독하다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들의 온 신경은 이번 봄에 벌어지는 이드리스 공작가와 아이딘 백작가의 영지전에 쏠려 있었다.
레이디가 작위를 주장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영지전’을 주장하다니, 그것은 겨울 내내 그들의 화젯거리였다.
아이딘 백작, 루시펠라는 영지에 내려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이드리스 공작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듯 수도의 화려함을 즐기고 있었다.
곧 손에 쥐게 될 아이딘 백작의 어마어마한 재산, 그로 인해 황위 다툼에 실질적으로 승리한 그의 외조카 테미르.
황제가 병중으로 나서지 못하며, 하인트 공작 역시 영지로 내려간 지금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드리스 공작과 테미르는 이전보다 더 황궁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귀족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괴롭혔으며, 황후궁의 시녀들을 괴롭혔다.
다만 이들이 황후와 이오지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황제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황제는 몸져누워 있다가도 가끔 걸어 나와 자신이 건재함을 보이고는 했다.
꽃이 필 무렵이었다.
“다녀오십시오, 외숙.”
테미르의 배웅에 이드리스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몸을 사리고 계십시오, 전하. 이번 전쟁만 끝나면 전하의 앞길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를 말입니까. 외숙의 충고 가슴에 새겨듣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테미르의 말에 이드리스 공작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붉어진 눈시울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벌써 어엿한 어른이 다 되신 모양입니다. 돌아가신 황후 폐하도 기뻐할 겁니다.”
“어머니 말입니까?”
“전하를 낳으시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하셨습니다. 이 아이를 꼭 황제로 만들어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꼭 지킬 생각입니다.”
테미르의 두 눈에 물기가 서렸다. 그들 사이에서도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전하.”
테미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드리스 공작이 말에 올라 황궁을 떠났다. 바야흐로 영지전의 시작이었다.
***
이오지프와 클로렌스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둔 이오지프가 물었다.
“나야 원래 미친놈이라지만, 걱정되지 않아?”
“뭐가요?”
“지금 이 상황 말이야. 이드리스 공작이 영지로 내려갔어. 곧 출병할 거야.”
클로렌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되지만 우리 아버지처럼 저택에서 떨고 있는 건 좀 꼴사납지 않나요?”
클로렌스의 신랄한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래, 맞아.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패배를 걱정하는 건 꼴사납지. 우린 그저 우리의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돼.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말이야.”
“할 수 있는 거라뇨?”
클로렌스의 물음에 이오지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자 클로렌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또 비밀이라고 하려는 거죠?”
“아, 아니! 이번엔 아닌데! 아이딘 백작을 돕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다 했다는 소리야. 학자들을 통해 내가 소문을 퍼뜨렸거든. 이드리스 공작의 전횡과 악행에 대해서 말이야.”
“아이딘 백작령의 영지민을 설득하려고 한 모양이군요.”
“맞아. 이드리스 공작의 횡포는 백작령의 영지민이 이드리스 공작으로부터 땅을 지킬 충분한 이유가 되었지.”
“그래서 영지민들은 루시를 잘 따르고 있나요?”
“글쎄?”
이오지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클로렌스가 얼굴을 찌푸리려고 할 때 이오지프가 대답했다.
“참고로 이번 겨울, 아이딘 백작령에 있는 그 누구도 추위에 죽지 않았어. 그게 대답이 아닐까?”
클로렌스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도 안 죽었다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우리 영지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어요.”
“아이딘 백작이 능력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소리겠지.”
클로렌스가 그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영지민이 목숨을 걸고 여자 영주에게 충성할까, 아니면 남자이지만 잔혹한 이드리스 공작을 받아들일까. 대답은 이걸로 명확해졌지.”
뿌듯해하는 이오지프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본 클로렌스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이오지프, 더 숨기는 거 있죠?”
“어, 있긴 하지만…… 어떻게 알았어?”
“제가 전하를 모르나요? 전하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는 뭔가 숨기는 게 있을 때죠. 중요한 건 알려주시지 않은 것 같아요.”
“그대에겐 그게 보이나 보군. 이거, 이제 앞으로 거짓말은 못 할 것 같은데.”
“말 안 해주실 건가요?”
클로렌스의 말에 이오지프가 난감한 듯 웃었다.
“아이딘 백작이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말이야.”
“루시와 제가 만든 비밀보다 전하와 루시가 만든 비밀이 더 많네요.”
클로렌스가 툴툴거리자 이오지프가 피식 웃다가 문득 깨달은 듯 물었다.
“아이딘 백작을 질투하는 게 아니라 나를 질투하는 거야?”
“당연하죠. 매일 비밀이네 뭐네 웃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루시가 더 낫거든요.”
클로렌스가 뾰로통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이오지프는 그걸 보며 웃었다. 클로렌스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오지프를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하인트 공작도 참 하인트 공작이네요. 이 시기에 얼샤 시찰이라니.”
“키칼 공작 쪽 움직임이 이상하다잖아. 어쩔 수 없지.”
“진짜 루시와 헤어진 거래요, 그 사람? 이제 루시가 죽어도 상관없대요?”
그녀의 말은 과격했으나 그 말에 담긴 분노는 이해가 갔다. 이오지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클로랜스가 재차 따져 물었다.
“저는 영지에 내려간 게 나름의 전략인 줄 알았는데 얼샤까지 가다니, 정말 끝이라도 난 건가요?”
“내 실수야. 하인트 공작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우리의 일을 생각하자.”
이오지프가 빙그레 웃자 클로렌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클로렌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무에는 초록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새싹은 돋아나고 꽃들은 아름답게 피어 있는데, 아직 진정한 봄은 요원해 보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우리에게도 봄이 찾아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클로렌스의 말에 이오지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렇게 될 거야, 반드시.”
***
“이드리스 공작가의 군사들이 진군한다는 소식입니다.”
“그래.”
루시펠라가 성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웠다. 그웨인은 루시펠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겨울을 잊지 않은 선뜩한 찬바람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그웨인은 휘날리는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카락이었다. 그녀가 걸어갈 때마다 검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윤기가 흘렀던 긴 머리카락은 이제 없다. 왜냐하면 그녀가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그웨인은 그날을 생각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대들에게 맹세한다.”
레이디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닌 낮고 힘 있게 끊는 목소리가 성에 울려 퍼졌다.
기사들과 병사들을 바라보던 루시펠라는 검을 들어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버렸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루시펠라의 윤기 나는 흑발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 검은 머리카락을 손에 들며 그녀는 병사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대들과 함께 내 목을 걸고 싸우겠다고.”
루시펠라 아이딘은 사람을 이끄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두 눈을 홀린 듯 응시했다. 짧은 머리를 한 채 검을 든 그녀는 왠지 모르게 늠름해 보였다.
“나는 기꺼이 그대들을 승리로 이끌 이슈타르가 되겠다!”
병사들 사이에 어떠한 감정이 퍼져 나갔다.
이들은 그녀가 영주가 되어 영지전을 벌일 계획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탄식했다.
이제 막 백작위를 승계받은 이 여자 영주는 분명 자신들을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올해 겨울 그녀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매일 도시를 정찰했으며 한파에 대비했다.
그녀는 식량을 풀었으며 기사들을 시켜 마른 장작을 배급했다. 심지어 그녀는 먹을 수 있는 나무뿌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여분의 식량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추위에 약한 노인과 어린아이는 그녀의 성에서 머물렀고, 더불어 의원이 항시 상주하고 있었으므로 혹 병에 걸리는 이들이 있으면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이 한겨울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무렵, 루시펠라는 그들 앞에서 레이디를 상징하던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미덥지 못한 여자를 주인으로 따르느냐, 아니면 이드리스 공작을 따르느냐, 이제 답은 명확해졌다.
그들은 이 땅까지 흘러들어 온 소문 덕분에 이드리스 공작이 얼마나 악마 같은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이드리스 공작령에서는 굶어 죽는 이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이 여자 주인, 새로운 아이딘 백작은 어떠한가.
그녀는 적어도 자신들의 삶을 황폐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더구나 영지민들은 루아나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돌보다 죽어버린 백작부인의 존재는 분명 그들에게 충격이었다.
한데 그때 그녀가 병에 걸려 죽은 게 이드리스 공작 때문이라니. 더더군다나 전 아이딘 백작마저 그에게 살해당했다니!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땅의 주인과 안주인을 잃고, 그 딸이 오롯이 일어서 ‘주인’이라고 말하며 원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처참하게 잘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그녀가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그녀의 다짐을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리고 짧은 머리카락이 된 그녀의 모습까지도.
그러나 머리카락이 없는 그녀의 모습은 초라하지 않고 빛이 나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이 결의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거센 겨울,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아, 아닙니다.”
그웨인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루시펠라가 손을 들어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드레스만 입었던 레이디는 언제부터인지 기사단의 제복과도 같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폭약은 제대로 제조되었나?”
“네. 순조롭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은 어디서 알게 되신 겁니까?”
“비밀이야.”
루시펠라가 빙그레 웃었다. 그웨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분이 언제 뭘 제대로 말해준 적이나 있던가. 어쨌든 그녀만 믿을 뿐이었다.
그때, 성벽 아래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무슨 일이 있나? 그웨인이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투구를 쓴 채 창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대련이라도 벌인 듯, 그 앞에 기사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그웨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런 장난질은 이제 그만 벌이라고 했건만.”
“냅둬. 좋잖아.”
루시펠라가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웨인의 표정은 변할 줄 몰랐다.
“그리고 저 남자도 그렇습니다. 아론이라고 했나요? 맷시 경의 조카라고 하던데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거죠? 그리고 얼굴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게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화상을 입었다잖아. 내가 얼굴 봤어. 별로 안 수상해.”
루시펠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아론이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루시펠라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는 그에 화답하듯 창을 돌리며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들은 마치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대체 뭐가 뭔지…….”
그웨인의 우려 섞인 말에 루시펠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웨인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론을 보았다.
겨울을 함께 보내며 깨달은 사실은 루시펠라는 상당히 비밀이 많다는 것이었다.
예상외로 전쟁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존재라던가, 한파를 날 수 있는 식량에 대해 생각하는 그녀라던가, 아니면 그녀밖에 생각해 낼 수 없는 기상천외한 작전이라던가, 아니면…….
“루시.”
“어, 왔어?”
마치 그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그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웨인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대체 왜 여기 있냔 말이다.
“안 그래도 칼리드, 널 부르려고 했어. 전략을 재검토해야 하거든.”
“그래.”
칼리드 루이르크.
그녀가 영지전을 요구한 이유는 칼리드 루이르크 때문이 아니었나?
칼리드 루이르크는 대리인의 자격을 주장하며 루시펠라를 감금했다. 그 때문에 루시펠라가 영지전을 하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한데 대체 왜 칼리드 루이르크는 이곳에서, 그녀를 보필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이게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들 사이에는 친밀함이 존재했다.
그의 아버지와 맷시도 이것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루시펠라와의 대화 후에 납득했고, 맷시는 그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전 기사단장인 아버지가 납득하자 그웨인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기사단들도 이드리스 공작과 칼리드 루이르크에게 원한이 깊은 쉐인이 받아들이자 그를 받아들였다.
칼리드 루이르크는 공작으로 깍듯이 대접받길 원하지 않고 오로지 부관으로 대접받길 원했다.
“아, 그웨인 경. 저기 첼시 경이 부르네.”
루시펠라가 성벽 아래를 가리키자 손을 흔드는 첼시 경의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 문제라도 발생한 모양이었다.
그웨인은 손으로 신호를 보내며 루시펠라와 칼리드에게 인사를 한 뒤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칼리드를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웨인이 내려가자 성벽 위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그 순간 그들 사이에 감돌았던 친근한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고, 루시펠라의 서늘한 눈빛이 그를 향했다.
“이제 시작이네.”
“그래.”
칼리드가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창을 든 아론을 보았다. 그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왜?”
그녀가 떠보듯 묻자 칼리드가 고개를 주었다.
“아니, 아무것도.”
“현재 진행 상황까지 보고해 줄래?”
“네가 예전, 드레스를 팔아서 기사와 무기를 늘리라고 했던 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어. 무기 역시도 거래처가 있어서 준비가 빠르게 끝났지.”
“식량과 훈련은?”
“식량 역시도 비축이 끝났어. 훈련 역시도 끝났지. 문제는 이들이 전투 경험이 없어 당황하면 바로 무너질 거라는 거야.”
“그런 거면 됐어.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전하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훈련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않대. 쪽수로 밀어붙일 생각인가 봐.”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한참 대련을 벌이고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칼리드의 시선은 또다시 아론에게 향했다. 그것을 본 루시펠라가 물었다.
“준비됐어, 칼리드?”
무슨 준비냐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서늘하게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날 위해 죽어줄 준비 말이야.”
칼리드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더니 이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언제든지.”
칼리드는 자신의 손을 뻗어 조심스레 루시펠라의 손을 감쌌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널 위해 기꺼이 죽어줄게, 사랑하는 나의 에스텔.”
“…….”
“두 번 다시 우리가 볼 일은 없을 거야.”
그는 기꺼이 죽음을 맹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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