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49화 (149/173)

#149화 엇갈림의 이유

2018.08.02.

그 일은 아주 우연히 일어났다. 막바지로 달려가는 에스텔 슈페르트의 인생에, 그녀가 절망하기를 원하듯 운명이 마련한 잔혹한 안배였다.

에스텔은 혼자서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했고, 검이라도 연마할 생각으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에스텔이 도착한 곳에는 이미 손님이 있었다. 기사단원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에스텔은 그 와중에도 근심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들, 여기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겠다?’

그녀는 그들을 놀래켜 줄 요량으로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다가갈 때였다.

“그렇다고 어떻게 그래!”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잖아. 우리가 모두 다 살 수 있는 방법이야!”

“그래서 배신하자고? 체이시,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전하의 명령이잖아. 우린 전하에게 충성을 바쳤지 단장에게 충성을 바친 건 아니라고.”

“하지만…….”

“여자에게 기사단장 직을 준 것 자체가 잘못된 거야. 멍청한 짓이었어! 나는 죽기 싫다고!”

“나도 죽기 싫어! 하지만 단장을…….”

“너, 단장 좋아하냐?”

“아니, 그건 아닌데.”

“너도 생각해 봐! 우린 지금껏 홀렸던 거야. 부단장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니 더 그렇게 보였던 거지! 뭐, 아스트라의 품에 안겨? 별이 돼? 같이 죽자니, 그런 미친 짓에 어떻게 동참하냐고.”

“맞아. 그리고 그 여자가 단장이 된 건 단순히 검을 잘 써서가 아니라……. 그래, 단장에게 너무 불쌍한 이야기니 하지 말자. 리델, 너도 알고 있잖아?”

“…….”

“단장은 우릴 잘못 이끌었어. 결국 이렇게 된 건 단장 때문이야. 처음부터 항복하자고 전하를 설득했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전하도 억울하다고 하잖아! 자기도 피해자라고. 무식한 여자를 따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였어. 이슈타르는 무슨 이슈타르!”

“진정해. 단장도 전하에게 이용당한 것뿐이야. 전하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용당해도 적당히 이용당해야지, 여자라서 머리가 멍청한 건가? 다른 놈들은 죽 쑤는데 자기 머리만 꽃밭이야.”

“맞아. 부단장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사실 단장이 돼야 할 건 부단장이 아니었나? 평민 여자가 기사단장이라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부단장님을 모욕주려고 그런 거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잖아. 우리 단장만 모를 뿐이지.”

“리델, 너도 이제 정신 차려. 너 정말 죽고 싶은 거야?”

“……당연히 죽고 싶지 않아.”

“그러면 전하의 말을 따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네가 단장에게 약을 먹여서 기절시켜. 단장은 널 신뢰하니까 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받아 마실 거야.”

“그래. 단장도 자신의 희생으로 우리를 살렸다는 걸 알면 우릴 크게 원망하진 않을 거다. 단순한 사람이니까.”

“오이겐 녀석에겐 비밀로 해. 그 녀석 별로 내켜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단장은 어떻게 되는데? 얀스가르 놈들에게 넘겨지는 거야?”

“그건 전하가 알아서 하겠지. 단장도 살고 싶으면 얀스가르 국왕에게 무릎을 꿇으면 될 거 아니야.”

“그래. 만약 단장이 죽더라도 그건 단장의 선택이야. 항상 죽고 싶어 하던 인간이니 어떻게 죽는 게 뭐가 그리 대수겠어.”

그녀는 자신의 귀에 들려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대화를 마친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에스텔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기척을 죽였다. 만약 대면한다면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으로 돌아온 에스텔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동료들이 자신을 배신하려 하고 있다. 게다가 그렇게나 검을 들고 함께 싸워왔는데 자신을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걸 기꺼이 함께할 사람은 없겠지. 모두가 자신 같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 같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해온 것일까. 그녀는 몸을 덜덜 떨었다.

삶이 모두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 녀석들이 한 말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검을 잘 써서 기사단장이 된 게 아니라고?

전하가 칼리드를 조롱하기 위해 내가 단장이 된 거라고?

내가 전하에게 이용당했어?

오랫동안 그녀를 속여오던 진실은 너무도 쉽게 그녀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그녀는 알려고 하지 않았고 보려고 하지 않았다. 한데 지금 이 순간 진실을 직면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에 너무나 간단하고 엄청난 결론이 내려졌다.

자신의 인생은 잘못된 것이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노력했다고 자부해 왔다. 자신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항상 앞을 보고 필사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제대로 된 것인가?

그녀는 자신이 죽인 이들을 떠올렸다. 국왕의 반대파, 역도의 무리, 배고픔에 산적이 된 국민, 그리고 별이 되자는 말에 자신을 따랐던 전우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잘못되었다. 그간 노력해 왔던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다!

차라리 듣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부정하려 애썼다. 잊어버리고 싶어!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속으로 외쳤다.

그녀는 차마 배신을 모의하는 동료들을 탓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는데, 끝을 향해 폭주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자신이 그들을 탓한단 말인가.

끝을 향하는 상황 속 그녀는 지쳐 있었고, 그녀의 머릿속에 내려진 극단적인 결론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칼리드를 피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 가족, 동료.

저 녀석은 자신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채겠지.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지도 몰랐다. 이제껏 칼리드의 다정함에 의존해 왔으니 또 나약함을 드러내 버릴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소중한 친구는 기꺼이 그들을 죽여 버리겠지. 당연했다. 같은 상황에서 에스텔이라면 기꺼이 그리했을 테니까.

칼리드, 내가 아닌가 봐. 내가 잘못 살아왔나 봐. 하지만 돌이키기에 이미 늦어버렸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칼리드를 보면 튀어나오려는 물음을, 울음을 애써 삼켰다.

그렇게 며칠째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을 위장하며 지냈다.

연기를 해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특히나 간간이 마주하는 칼리드 앞에서는 더욱.

그녀는 때때로 방에 혼자 틀어박혀 눈물을 흘렸다.

“이젠 지쳤어…….”

그러나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았다.

“지쳤단 말이야…….”

누군가가 이 상황에서 구원해 줄 사람이 있다면.

신이시여, 신이 있다면 제발,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세요! 이슈타르여, 당신이 전쟁의 신이라면 나를 이끌어주십시오!

잘못된 삶을 살았기에 나를 버리시는 겁니까?

나한테 아무도 잘못되었다고 알려주지 않았잖아!

그녀는 행여나 울음이 새어 나올까 입을 틀어막은 채 오열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 에스텔은 조용히 절망했다.

“차라리 그놈에게 죽어야 했어. 제더카이어 하인트, 그놈에게 죽어야 했다고……!”

그녀의 슬픔과 분노, 절망은 고독했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한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단장, 아침 먹자!”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언제나 늦잠을 자던 리엄은 그녀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울다 지쳐 잠든 에스텔을 깨우러 왔다. 그녀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햇빛은 아름답게 내리쬐고 있었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식당은 벌써 밥을 먹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녀는 홀린 듯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떠들썩하게 음식을 먹는 자신의 친구들. 이 식당 안의 풍경은 배신과 앞으로 맞이할 죽음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환했다.

칼리드가 리엄과 잡담하다 웃음을 터뜨렸다. 발데르는 아니카에게 얼굴을 붉히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리델은 오이겐에게 잔을 내밀었으며, 어떤 이는 음식을 던지며 낄낄거렸다.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 기묘한 풍경을 보며 에스텔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고민을 오래 하는 건 에스텔답지 않았다. 이 쉬운 걸 왜 이제껏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괴로워했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기사단 녀석들의 말대로, 에스텔은 단순한 사람이었다.

얘들아, 너희가 너무 좋아. 너희를 정말로 사랑해.

만약 너희가 선택한 길이 그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게.

얀스가르 놈들에게 어떤 일을 겪더라도 괜찮아.

너희를 살리는 길이라면 그렇게 할게.

그렇게 그녀는 혼자만의 서글픈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의연하게 최후를 맞이하려 했다. 결심을 하니 자신에게 찾아온 번민을 물리칠 수 있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두렵고 때로는 제어할 수 없는 원망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녀는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모든 것은 그녀가 책임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먹었으므로 그녀는 최후의 전투 전날 자신의 방에 찾아온 칼리드를 담담한 얼굴로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칼리드에게 이야기하자고 결심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그러곤 아무도 원망하지 말고 살아달라고, 뒤를 부탁한다고, 자신을 따른 이들을 지켜달라고 얘기하려 했다.

그때의 칼리드는 분명 이상한 표정이었으나, 에스텔은 자신이 고백할 거리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다.

“한번 안아봐도 돼?”

“응?”

갑작스러운 칼리드의 말에 에스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칼리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이상하게도 미소는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냥 안아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고 보니 포옹을 한 지는 꽤나 오랜만이었다. 그녀도 칼리드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녀가 두 팔을 벌려 칼리드를 껴안았다. 그녀는 이 포옹이 풀리면 그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자고 생각했다.

그의 온기에 마음이 포근해질 무렵 그녀의 등에 독이 발린 칼리드의 단도가 꽂혔다. 그녀의 최후까지 배신으로 얼룩져 있었다.

죽어가며 에스텔은 생각했다.

왜?

대체 왜?

칼리드, 너도 나를 배신한 거야?

너무나 뜻밖의 배신이었다.

어째서 그가 자신을 죽이는 것인가. 분명히 친구이자 가족 같은 이가 아니던가.

다른 동료들은 몰라도 너는, 너만은 나를 따라 죽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죽어가면서 그녀는 비통함에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죽었다가 깨어나면 난 어디에 있을까?

난 아스트라의 품에 안겨 있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아스트라여, 내가 잘못 살았다는 기억 따윈 잊어버리게 해주십시오.

기사 에스텔은 마지막까지 노력해 온 기사였다고, 배신을 당하지도 않고, 기만을 알지도 못했던 에스텔로 남아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단, 나를 배신한 저놈의 얼굴은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것이, 루시펠라가 된 그녀가 기억하지 못했던 진실이었다.

그녀는 간절하게 이 일을 잊기를 소망했고, 루시펠라 아이딘으로 깨어나서 그것을 깨끗이 잊어버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기억들은 진실이되 그녀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실만 삭제된 진실이었다.

루시펠라 아이딘이라는 인물이 되어 그렇게 안주하고자 했다.

어쩌면 제드를 좋아한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얼샤는 이미 자신을 버렸으니까.

시토라 기사단 녀석들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은 건, 그놈들 몇이 배신을 했다는 기억을 맞닥뜨리기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

얼샤에 돌아가 깨달은 진실은, 죽기 전 그녀가 기억하던 진실보다 더욱 잔혹했다.

그러나 제드로 인해 그녀는 일어설 수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지탱할 힘을 가지자 기다렸던 것처럼 죽기 직전 기억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루시펠라는 에스텔이 죽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결심을 했는지 기억해 냈다. 비참하고도 허망한 진실이었지만 그녀는 그 인생을 애써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모른 죄를 내 죽음으로 책임지려고 했어.”

“…….”

“내가 죽어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했지. 그런데 네놈은, 네놈은 그걸 망쳤어! 나는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을 네게 박탈당했어! 어차피 죽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한 거야? 너는 날 존중하지 않았어!”

“…….”

“나를 위해서 나를 죽였다는 것만큼 개소리가 어디 있어!”

그녀의 비명 섞인 말에 칼리드가 탄식하듯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후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은 마치 종잇장처럼 새하얬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울부짖음이 새어 나왔다.

모든 것을 숨기고자 그녀를 죽였다. 배신과 기만 따윈 아무것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에스텔의 소원대로 그녀를 별이 되도록 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소용없었던 거라니.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서…….”

칼리드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망연히 선 채 자신 바로 앞에 서 있는 에스텔, 아니,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도 역시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루시펠라는 칼리드에게 향한 원망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에스텔.”

별. 별이 되고 싶었다. 그래, 그건 맞았다. 그러나 저놈이 자신을 멋대로 그렇게 만들 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에스텔은 모든 것을 알고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설령 그 어리석은 에스텔이 아무것도 몰랐더라도 적어도 선택할 기회는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칼리드는 그것을 막아버렸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기만한 것이다.

“너는 너를 위해서 그랬던 거겠지. 모든 걸 안 내가 너를 원망하지 않길 바랐을 테니까. 이제야 네가 보여. 너는 언제나 어른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어린애였지.”

칼리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던 루시펠라가 순간 이를 악물고 그의 뺨을 주먹으로 휘갈겼다.

그녀의 힘은 미약했고, 칼리드는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칼리드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감싸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죽어버려.”

“…….”

“죽어버려, 칼리드!”

그녀가 씹어뱉듯 말했다.

진심으로, 자신이 억지로 사그라뜨리려 했던 모든 원망을 담아.

결국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한 것은, 칼리드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기만했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쌓아 올려진 관계에서 두 사람은 솔직해질 수 없었다.

어쩌면 에스텔이 조금 더 솔직했더라면, 이런 비극 따윈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칼리드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솔직했다면, 비극 따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칼리드는 에스텔을 죽였다.

그녀를 죽이고 그녀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왔든 간에, 삶을 박탈당한 에스텔의 분노가 사라질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오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드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루시펠라는 그것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칼리드가 그간 노력해 왔던 것이 모두 무용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칼리드는 절망했다.

에스텔이 루시펠라가 되어 되살아났을 때 그는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뻐하는 한편, 루시펠라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그녀와 그는 과거로 엮인 사이였는데 그녀는 자꾸 변하려고 노력했다. 변하여 미래로 향하려고 노력했다. 칼리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증오로라도 연결되고 싶었다. 그녀가 복수심을 품으며 자신을 바라봐 주길 바랐다.

그리고 보란 듯 얼샤를 되찾으면 언젠가 에스텔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미소를 지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했던 행동이 면죄부가 되어주길 바랐다.

그랬다.

그러나 에스텔이 달라지면서 그런 확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를 지탱하는 하나의 희망이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보란 듯 과거를 끊어내 버렸다. 그러자 그가 품었던 최후의 이성까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새장 속에 가두려 했다. 좁디좁은 자신만의 새장 속에.

그러나 그의 에스텔은 그것을 벗어나 버렸다. 목숨을 걸고.

칼리드는 에스텔이 영원히 자신의 손에 들어올 수 없음을 직감했다.

허망하고 덧없는 진실 속, 칼리드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에스텔, 아니,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에스텔은 에스텔로 돌아갈 수 없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결국 그가 그렇게 자신했던 진실 따윈 허망한 것이었다. 견고해 보이지만 거짓으로 쌓인 관계는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

황제는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이드리스 공작가와 아이딘 백작가의 영지전에 대한 서류였다.

이드리스 공작이 공격을 선택했고, 아이딘 백작은 수비를 선택했다.

두 배나 차이 나는 이드리스 공작의 군대에 루시펠라 아이딘은 과연 자신의 땅을 지킬 수 있을까?

“참으로 재미있지 않더냐.”

옆에 서 있던 이오지프가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제의 눈치를 보며 공손히 말했다.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를 믿어서 그런 게 아니다. 네게 기회를 준 적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것이지. 그러나 재미있다. 너무도 재미있구나.”

황제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아직도 작위를 제게 달라며, 영지전을 하겠다던 루시펠라 아이딘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녀의 두 눈은 거울처럼 맑게 반짝였다. 이전, 소심하며 어리석던 그 루시펠라 아이딘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뀐 것인가. 역시 루아나의 딸이기에 그런 것인가?

그는 이오지프를 바라보았다.

저놈도 틀림없는 자신의 핏줄이었다. 저놈도 전쟁을 하겠다는 루시펠라의 두 눈을 보며, 그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황제가 그 무례한 루아나 바네스를 말벗으로 삼았듯, 저놈에게도 그런 비틀린 충동이 있는 것이다.

황제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오지프, 참으로 재미있지 않느냐! 큭큭큭!”

“…….”

“지겹도록 살고 또 살아도 삶은 이리 지루하지 않으니, 내 어찌 쉽게 죽음을 맞이하겠느냐! 크크크큭!”

“…….”

“내년 봄까지 내 기필코 살아 이 진귀한 구경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꺼져 가던 황제의 두 눈에 빛이 돌아왔다.

스스로 삶을 놓아 사그라지던 황제의 생명의 불꽃에 마지막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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