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비극을 피하는 법
2018.07.30.
“난 말이야 칼리드, 별이 되고 싶어.”
“…….”
검을 잡은 소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두 눈에는 별을 빼다 박은 듯,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소년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에스텔, 그건 결국 죽겠다는 말 아니야?
너는 죽고 싶은 게 꿈이야?
소년은 그 물음을 숨기며 미소 지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진짜?”
“진짜.”
에스텔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칼리드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그러면 우리 평생, 함께하자.”
에스텔이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칼리드는 에스텔의 손을 잡았다.
별이 되기 위해서, 죽기 위해서, 그녀를 따라 찬란하게 살다가 죽기 위해서.
이 어두운 밤과 같은 세상 속에서 너 하나만 있다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아.
죽음 따윈 무섭지 않아.
국왕 전하가 언젠가 나를 죽일 거거든.
칼리드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전하!”
칼리드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아렌트가 불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내게 충성을 맹세한 놈들이 그리 입을 싸게 놀리다니, 역시 그놈들은 진짜 기사가 아닌 모양이군.”
“전하!”
칼리드의 고함에 아렌트가 움찔했다. 그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뭐냐, 날 위협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나라가 망하려니 기사놈들까지 나대는구나. 불쾌하기 그지없어!”
“지금 단장을 얀스가르에 팔아넘긴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평민 계집을 기사단장씩이나 시켜준 보답을 해야지.”
“그게 무슨!”
“모든 이가 이슈타르라고 칭송한다고 해서 진짜 이슈타르라도 되는 줄 알았더냐? 그 계집은 어차피 그럴 의도로 아버님이 만든 기사단이었어. 의외로 잘해주고 있어 그대로 둔 거지.”
아렌트는 거만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손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든 건 그 계집 탓으로 돌려야 해. 그래야 우리 모두 목숨을 구할 수 있어. 이소타가 죽은 건 같은 여자 기사인 그 계집 탓이라고 할 거다.”
참으로 구역질나는 말이었다.
이소타는 스스로의 의지로 몸을 던진 것인지 국왕의 폭력에 몸을 던진 것인지 불분명했다.
전쟁의 발발 역시도 에스텔에게 떠넘기겠다는 소리인가?
“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 이소타, 그 계집년이 뛰어내리지만 않았어도……. 이건 그년의 복수인 거야!”
아렌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칼리드는 그 한심한 모습을 보자 살의가 들끓었다.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곁눈질로 국왕의 옆에 서 있는 기사들을 보았다.
애당초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놈들이다. 여기서 차라리 국왕을 죽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에스텔은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에스텔에겐 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결국 그를 가로막은 것은 에스텔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이었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도록.”
아렌트가 미소 지었다.
알현실을 나온 칼리드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병사들을 이끌고 국왕의 목을 쳐야 할까? 그러나 명령을 받은 이들이 정확히 ‘그 녀석들’뿐인지 파악이 불가능하다. 잘못하다간 오히려 이쪽이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국왕은 시토라 기사단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겠지.
우선 에스텔이 있는 외성으로 가는 게 먼저였다.
“부단장님.”
오이겐이 고개를 푹 숙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복도를 보며 그를 왕궁의 빈방으로 데려갔다.
“전하와 이야기해 보셨습니까?”
“그래.”
“부단장님. 저는, 아니, 우린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오이겐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오이겐을 본 칼리드가 조용히 물었다.
“리엄은 이 일을 알고 있나?”
“아니요, 단장님에게 불만이 많은 일부 녀석에게만 명하신 모양입니다.”
“…….”
“이대로 가다간 최후의 전투도 치르기 전에 단장님은 단원들에게 붙잡혀서 바이두에게 바쳐질 겁니다.”
“…….”
“그 녀석들, 정말로 일을 낼 것 같았습니다.”
아아, 아스트라여. 결국 최후까지 나를 버리십니까.
칼리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부단장님, 차라리 단장님께 이야기하고…….”
“우선 이 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도록. 리엄, 그 녀석들한테도 말하지 말고. 성급한 녀석들이니 함부로 움직이다간 우리가 당한다.”
“알겠습니다.”
오이겐의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칼리드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망설이지 않고 내게 말해줘서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반드시 방법을 찾아볼 테니, 그대로 참고 있어.”
그 말에 오이겐의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다. 칼리드도 애써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절망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말에 오른 칼리드는 외성으로 가기 위해 수도를 가로질렀다. 항상 활기찼던 수도의 분위기는 적막했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칼리드는 에스텔이 지키려는 도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최후의 전투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보름? 열흘?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바야흐로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칼리드는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외성에 도착했다.
에스텔이 있는 곳은 언제나 그의 예상 범위 내였다. 성벽 위에 팔을 올린 채 그녀는 바람을 쐬고 있었다.
붉은 하늘에 물든 그녀의 잿빛 머리가 흩어지며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검을 잡고 남자처럼 행동해도 그녀는 여자였고, 여체의 곡선을 숨길 수 없었다.
칼리드는 노을을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단장님, 뭐 하시고 계십니까?”
그녀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 웬일이야, 칼리드?”
“웬일? 내가 말을 거는 게 웬일인가?”
칼리드의 말에 에스텔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미칠 듯 사랑스러웠다.
“생각할 게 많아서 말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어 왔으니까.
여자임에도 검을 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녀를 이슈타르라고 불렀다.
그 두 어깨에 나라의 안위가 달려 있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려는 그녀에게 나라가 죽음을 강요한다.
칼리드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한한 애정을 담은 그녀의 두 눈에 담긴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순수였다.
칼리드는 그 순수가 사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증오스러웠다. 칼리드는 비틀린 마음을 꾹 억눌렀다.
“오늘은 하늘이 흐린 것이 별이 뜨지 않으려나 보군.”
“그러게. 하늘만 빨갛게 물들었어.”
에스텔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보았다. 노을은 순식간에 저물었고 하늘은 어둑하게 물들었다.
“에스텔.”
“응?”
“살고 싶어?”
“그게 무슨 소리야, 새삼스럽게.”
칼리드의 어깨를 두드리며 에스텔이 미소 지었다.
“아스트라의 품에 안기는 게 내 소원이잖아.”
“그랬지.”
“별이 되는 게 내 소원이야.”
그래, 그 빌어먹을 별이 되는 것이 네가 가진 소원이었지.
칼리드는 에스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삐뚤빼뚤한 은발, 도저히 희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친 피부. 메마른 입술. 겨우 작은 체구만이 여자라는 것을 대변해 줄 뿐이다.
나약한 여자가 검을 잡았다고, 사람은 그것을 멋대로 업신여기고 멋대로 우상화해 그녀더러 여신이라고 한다.
정작 그녀는 에스텔일 뿐인데.
그녀는 지금 자신의 처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알긴 하는 걸까?
에스텔, 너는 별이 될 수 없어.
모든 이가 너를 꺾어버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배신감에 치를 떤 에스텔이 맞이할 방식은 아마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일 것이다.
칼리드는 자신의 실수를 곱씹었다.
이 여자를 기사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때, 그 손을 잡아서는 안 되었다.
하다못해 도망치자고 했어야 했다. 비겁하게 살아도 된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냥, 정신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쫓아와 버렸기에 이렇게 된 것이다. 이런 결말이 된 것이다.
그녀가 쌓아왔던 인생이 모두 헛된 것임을 알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에 배신당했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괴로워하겠지. 괴로워하다가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녀의 인생은 한낱 꼭두각시 놀음에 불과했다.
파비아누스의 비틀림에 이용될 대로 이용되다가 결국 아렌트가 지은 죄로 인해 마지막에 비참하게 버려지는 신세.
칼리드는 그녀의 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은 그가 손에 힘을 주고 조이면 톡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어차피 에스텔이 살길은 없다.
절망하며 끝난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모른 채 죽는 게 더 낫지 않나?
얀스가르 놈들에게 던져져 더럽혀지고 또 절망과 비탄에 빠져 비참하게 죽는 게 그녀의 끝이라면, 차라리 이 손으로 끝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칼?”
에스텔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칼리드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살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왜 하필 너일까.
왜 하필 너여야만 했을까.
널 기사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는데.
그는 후회했다.
그러나 에스텔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데, 그녀는 그가 만들어낸 순수 안에서 가증스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에스텔의 신뢰와 애정에 가슴 벅찬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 벅찬 증오를 느낀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무지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까.
그가 시토라 기사단과 공모하여 철저히 만든 거짓이지만, 그녀는 알려 하지 않았다. 보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의 잘못이다.
그의 기만 속에서 그녀는 끝까지 순수하게 미소 지을 것이다. 차라리 그것이 파괴될 것이라면 적어도 영원한 별로 남게 하면 되지 않나?
왜냐하면 그게 네 소원이잖아, 에스텔?
배신을 결심한 칼리드를 눈앞에 둔 에스텔의 두 눈은 서글프리만치 맑았다.
***
“다, 단장님!”
오이겐은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참상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리드의 품에 에스텔은 안겨 있었고, 그녀의 배와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스텔을 안고 있던 칼리드가 말했다.
“소란 피우지 마.”
“……어, 어, 어, 어떻게! 설마 부단장님도!”
배신감에 치를 떨던 오이겐은 칼리드의 얼굴을 보며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울음기가 가신 지 얼마 안 된 칼리드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는 짙은 어떠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었다.
기이한 모습이었다. 마치 에스텔은 잠든 것처럼 칼리드의 품에 편안하게 누워 있었고, 칼리드는 소중한 듯 에스텔을 끌어안고 있었다.
피만 아니었다면 부단장이 단장을 재우기라도 했나 보다, 라고 생각할 정도의 평온한 장면이었다.
“대체 부단장님, 왜…….”
“에스텔이 살아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어.”
“…….”
“그래서 이 손으로 숨통을 끊었다. 얀스가르 놈들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부단장님.”
“배신을 했다고 생각하면 죽여도 좋다. 아니, 차라리 죽여다오.”
오이겐은 그 짙은 광기와 슬픔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배신자를 처단하는 검을 쥐는 대신 털썩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았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오이겐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최후의 전투 따윈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두에게 배신당하지 않은 채, 아무 진실도 알지 않은 채 단장이 죽었다면 그 죽음은 차라리 축복이 아닐까? 오이겐은 칼리드의 마음을 이해했다.
단장은 너무나도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시토라 기사단 모두가 그녀의 순수를 지키려 했다.
이것도 그것의 일환이다. 차라리 이런 최후가 더 낫다. 그 증거로 칼리드의 품에 안긴 에스텔은 너무도 편하게 잠들어 있지 않은가?
“오이겐, 시간이 없다. 나머지 놈들을 살려야 해.”
“…….”
“네가, 그 역할을 맡아줘야겠다.”
“…….”
“에스텔의 소원은 내 평생을 걸고 반드시 이루겠다.”
“…….”
“에스텔은 이름 그대로 영원한 우리의 별이 될 거야.”
오이겐은 칼리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자신을 동생처럼 아껴준 부단장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것을 차마 ‘배신’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저들이 얼마나 완벽한 사이였는지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세월이 거짓은 아니었을 터다.
서로를 목숨보다 아꼈던 둘이었기에, 부단장은 혼자 살아남기 위해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하는 칼리드의 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절망이 자리해 있었다.
“맡겨주십시오, 단장님.”
오이겐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칼리드의 예상대로 아렌트는 목이 잘렸다.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 노력한 것에 비해 참으로 허망한 최후였다.
칼리드가 에스텔을 배신한 것과 아렌트의 죽음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칼리드는 바이두에게 충성의 증표를 보여야 했으며, 그는 시토라 기사단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을 부르는 것은 간단했다. 최후까지 항전하자는 부름에 그들은 무장한 채로 그를 따랐던 것이다.
칼리드는 남아 있는 기사단원들의 수가 상당한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오이겐에게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알려주었건만, 몇몇 녀석만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리엄, 아니카, 발데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빠져나간 이들은 모두 에스텔의 최측근들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을 도륙하는 동안 나머지 놈들이 무사히 빠져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은 칼리드가 주장하는 ‘항전’에 결의를 다지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반면, 그 안에 있는 배신자 무리는 칼리드가 시켰던 대로, 오이겐이 일러둔 모양인지 그가 항복할 거라고 생각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제더카이어 하인트를 비롯한 얀스가르의 가사들이었다. 칼리드는 몇 년 동안 함께해 왔던 전우들을 배신한 것이다.
처음 그들은 칼리드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기에 하인트 공작을 보자마자 그들은 검을 치켜들었다.
“에스텔을 위하여!”
“우리의 이슈타르를 위하여!”
처음 봤을 때는 오합지졸이었지만 어느샌가 고귀한 기사도를 읊으며 명예로운 죽음을 외치고 있었다. 마치 에스텔처럼.
“모두 즉살하라.”
제더카이어 하인트가 일종의 사형선고를 내리자, 하인트 가의 기사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에스텔을 배신하려 했던 기사단원들 역시 검을 들었다. 그것은 충성심이라기보다, 길이 없다는 걸 깨닫자 선택한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다.
칼리드는 배신자들의 최후를 낱낱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전우들의 죽음 역시도.
이후 자신들을 죽음의 장으로 이끈 게 부단장임을 알게 된 시토라 기사단원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살육이 끝난 후 제더카이어 하인트가 그를 경멸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더 이상 있기도 싫다는 듯 기사들을 이끌고 기사들을 모두 도륙했던 방을 나가 버렸다. 그렇게 시토라 기사단의 전투가 허망하게 끝나 버렸다.
혼자 남은 칼리드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동료들의 시체 속, 짙은 피비린내를 보며 그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지극한 슬픔과 고통은 이미 어제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참 동안 쓰러진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아스트라의 가호가 함께하길.”
너흰 결국 에스텔을 따라 별이라도 되었으니까.
칼리드는 눈을 감은 채 복도를 걸었다. 살아남은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에스텔이 사라지자 서글프게도 너무나 많은 길이 보였다.
에스텔이 왕가에 충성했기에 그 역시 충성했다. 에스텔의 세상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세상의 추악함 속에 내던져진 칼리드는 앞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자신에게 죽음이란 축복은 허용되지 않았다.
앞으로 배신자의 괴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문득 바닥을 바라보았다. 군화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뒤를 바라보았다. 그가 걸어온 피로 만들어진 발자국이 보였다.
피로 내딛는 발걸음. 자신이 찍은 발자국을 보며 칼리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해는 저물어 있었고, 그날은 별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칼리드는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그는 에스텔을 위해 기꺼이 평생을 다 바치기로 했다. 얼샤를 다시 독립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면밀한 움직임이 필요했다.
칼리드는 테미르가 아렌트와 비슷한, 아니, 아렌트보다 더 최악의 인간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이놈을 황제로 앉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 나라가 흔들리고, 얼샤가 독립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시토라 기사단원들의 오해를 풀지 않았다. 그들은 얼샤를 독립시키겠다고 하며 곧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당연히 칼리드에게 증오를 드러냈다. 그들은 칼리드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오이겐이 미리 보고해서 피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동료에게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감정을 품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증오는 곧 강한 원동력이 되었으니까.
모든 일이 끝나고 오해가 풀리면 그것은 미안함을 담아 더 강력한 애정이 되어 돌아온다.
그것이 그가 습득한 사랑받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칼리드 가브라인이 칼리드 루이르크가 되었다.
얼샤가 독립하게 된다면 에스텔의 존재는 어리석은 여기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별이 될 것이다. 배신자라는 오명은 자신이 지고 가니, 그녀는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주면 되었다.
그가 만든 계획은 에스텔에게 바치는 그만의 애도였고, 그녀를 앗아가 버린 모든 것에 대한 그의 복수였다.
***
루시펠라는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었다.
칼리드가 시토라 기사단 녀석들을 배신한 이유가 결국 리엄 일행을 살리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그렇게 살린 후, 얼샤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고?
동료를 살해하고 나라를 배신했다는 오욕을 뒤집어쓰면서?
루시펠라는 칼리드를 보며 멍하게 생각했다. 그래, 그랬지. 칼리드는 언제나 자신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가장 나중에서야 오해가 풀리게 하고는 했었다.
그래야 그녀가 더욱 커다란 미안함을 느끼고 더욱 애정을 쏟았으니까. 그것이 그의 못된 버릇이었다.
“자, 어때? 너를 위해서 난 이 지옥 속을 걸어왔어, 에스텔.”
그러나 그의 비밀도 루시펠라가 또다시 선택한 죽음에 사라져 버리고야 말았다. 얀스가르와 얼샤의 상황이 또 벌어지자 칼리드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칼리드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달라져 버린 에스텔, 달라져 버린 그들의 관계.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일어났고, 칼리드는 그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어린애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그 짓거리 당장 그만둬. 나를 위해서라도 제발 그만둬.”
칼리드의 비참한 삶에 대해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에스텔에게 평생을 바쳤던 것이다. 그만의 일그러지고 미숙한 사랑 방식으로.
“에스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한 시선으로 칼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후 그녀가 처음으로 보인 것은 눈물이나 절규가 아니라 웃음이었다.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우습다.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고백한 비밀에 눈물이 절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칼리드! 너랑 난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서로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었구나!”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칼리드는 루시펠라의 그 이상한 모습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마침내 루시펠라는 숨을 헐떡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점차 치밀어 오르는 울음기를 가라앉혔다.
“칼, 우린 대체 어떤 세월을 함께하고 있었을까. 그 세월 동안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너는 날 속이고, 나는 속아 넘어가고. 나는 널 친구라 생각하고, 너는 날 사랑하고. 그렇게…….”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울음을 멈추려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네가 그때, 그 비극을 피하는 법을 딱 하나 알고 있는데, 알려줄까?”
비극을 피하는 방법이 있었다고? 만약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작 찾았을 것이다.
칼리드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도 알고 싶었다. 칼리드의 시선을 눈치챈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네가 스스로 죽어버렸어야지, 새끼야.”
이를 갈며 씹어뱉는 낮은 목소리가 그를 향했다.
어느샌가 루시펠라의 두 눈에 서린 것은 시퍼런 증오였다. 칼리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에스텔, 나는…….”
“네가 죽으면 그런 걸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애꿎은 나를 죽여! 그게 네 배려였다고, 이 새끼야?!”
“…….”
“죽어버려!”
루시펠라는 몸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방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던지기 시작했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화병이 깨졌다. 그것도 모자라 찻잔을, 도자기를, 액자를 칼리드에게 던졌다.
“개자식, 미친 자식, 바보 자식!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리라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비명이 섞여 있었다.
칼리드는 그녀가 토해내는 격렬한 분노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던질 게 없어진 루시펠라는 한참 동안 숨을 헐떡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멍청한 새끼야, 알고 있었어!”
“…….”
“그 망할 국왕이 날 팔아넘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그녀가 크게 소리치곤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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