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47화 (147/173)

#147화 다툼

2018.07.26.

루시펠라는 제드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알고 있기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그대는 참으로 나를 우습게 만드는군.”

심지어 그녀에게 이렇게 화를 내리라는 것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명백한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항상 애정을 담았던 적갈색 눈동자가 더없이 싸늘했다.

그녀는 제드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회의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제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얼굴에 더욱더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루시펠라는 자신이 그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데 그다지 재주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그대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진 알고 있나? 지금, 그대는 죽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안 죽어. 그럴 리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

루시펠라가 웃었다. 제드가 그것을 보며 입가를 비틀며 미소 지었다.

“그대도 나와 똑같은 소리를 해대는 거 알고 있나?”

“그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목숨을 걸지 말아달라면서 나보고 그대가 목숨을 거는 꼴을 지켜보라는 건가?!”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루시펠라는 그 시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태연한 루시펠라의 표정을 보더니 제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내가 이렇게 나올 것도 예상했나 보군.”

“그래.”

루시펠라의 솔직한 말에 제드는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대는 나를 어떻게 보는 거지?”

“…….”

“그냥 내게 모든 걸 맡길 수도 있었어! 차라리 그때 날 따라왔으면 되었는데, 대체 왜 일을 이렇게!”

“말했잖아. 난 제드가 목숨을 거는 게 싫어!”

“그렇다면 난 좋을 거라고 생각했나? 레이디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목숨을 거는 걸 나더러 지켜보라고? 그대는 내가 지켜주겠다는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나 보군! 고작 내가 그런 존재였던 거야.”

“난 당신이 날 지켜주는 게 싫단 말이야! 내 스스로 일어서서 당신에게 가고 싶었어!”

“정말 끝내주는 자립심이군. 그런 게 이런 일까지도 발휘되다니, 정말 칭송할 만해.”

제드의 냉소에 루시펠라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제드의 냉소였다.

루시펠라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드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짓이 그대가 내린 해답이란 말인가? 작위를 물려받는 거?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 영애가 영애 스스로 상속권을 주장할 줄이야. 인정하지. 영애는 1황자파의 허를 찔렀어.”

“…….”

“그러나 이런 짓을 하고도 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했나?”

그의 이글거리는 눈이 루시펠라의 두 눈을 노려보았다. 그의 분노는 그녀가 생각하던 것보다 엄청났다.

루시펠라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제드, 나는 정말…….”

“거기다가 이런 계획이라는 걸 이오지프는 알았고, 나는 몰랐지.”

“그거야 그 사람이 이 일을 도와줘야 하니까…….”

“그래서 내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로는 안 되는 건가? 공작 위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거라면 때려치웠어야 했군.”

제드의 빈정거림에 루시펠라가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그거야 제드가 반대할 걸 알았으니까 말하지 않았던 거야. 만약, 얘기했다면 억지로라도 날 데려갔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제드의 눈이 변했다.

“그대에게 대체 나는 뭐지?”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 듯, 또다시 입을 열어 고함쳤다. 그의 두 눈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샤에서 제드로부터 도망쳤을 때도 그는 이런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보였던 것이 슬픔이었다면 지금은 순수한 분노였다. 심지어 그는 루시펠라에게 증오까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오지프! 그래, 언제나 이오지프. 2황자 전하와 그대는 무언가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더군. 그대에겐 나보단 2황자 전하가 더 의지가 되는 존재인 모양이야.”

“…….”

“이오지프 녀석과 그대는 계획을 짰고, 나는 그걸 몰랐지. 난 여느 얼간이들처럼, 나중에서야 영애의 계획을 이렇게 알고 놀라워했어. 나는 영애에게 있어서 다른 이들과 똑같았고, 이오지프는 아니었던 건가?!”

이성을 잃은 제드는 자신 안에 숨겨져 있던 감정까지 다 드러내고 있었다.

제드도 알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묘한 비밀을 공유한 것 같은 루시펠라와 이오지프.

로맨스 소설을 힌트로 들었을 때, 그는 어쩌면 루시펠라가 이오지프를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회의로 확실히 깨달았다.

가장 먼저 칼리드로부터 탈출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자신이 아닌 이오지프였다. 그리고 이오지프와 이딴 터무니없는 것을 계획하고 자신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녀와 이오지프의 사이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만약 그랬으면 그는 이오지프를 죽여 버렸을 테니까. 그러나 이것은 이오지프와 자신의 중요도가 달랐기에 느꼈던 서운함이었다. 아니, 어쩌면 서운함보다 더 커다란 감정일지도 몰랐다.

루시펠라는 여느 때처럼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사랑해서라고만 말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 말라고 하면서 스스로의 목숨을 걸어버린다.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2황자 전하는, 그게…….”

루시펠라는 제드의 분노에 당황했다. 이렇게 격렬히 분노하는데 어떻게 말을 해야 그가 납득하고 넘어가 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게?”

제드가 되묻자 루시펠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이오지프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에스텔이었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특히 제드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에스텔로서의 자신을 끊어내려고 결정한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제드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루시펠라는 제드를 속여왔다. 어떻게 보면 그는 약혼부터 지금에 오기까지 기만당한 것이다.

에스텔에게 모든 것을 숨겨왔던 칼리드와 제드에게 모든 것을 숨기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루시펠라가 무엇이 다른가. 그녀는 제드 앞에서는 언제나 겁쟁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제드의 마음은 허탈했다. 어째서인지 오늘만은, 오늘만은 이 답답함에 그녀가 너무도 미웠다.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제드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그래, 말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 언제나처럼.”

제드가 싸늘한 비웃음을 지었다.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고, 언제나처럼 그렇게 혼자서 생각하고 행동할 거고, 언제나처럼 또 내가 참아야 하겠지.”

“…….”

“그대가 나에 대해 판단한 건 옳았어. 나한테 오는 방법이라는 게 작위를 물려받고, 터무니없는 영지전을 벌일 계획이라는 것을 들었다면 나는 영애를 그때 바로 데려갔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날 제대로 보진 못한 모양이군.”

“제드.”

“영애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 관계는 오래갈 수 없을 거야.”

“…….”

“당장 폐하께 고해서 그 어리석은 계획인 영지전을 취소해. 그대로 얌전하게 내 계획을 따라. 나는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제발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하지 말고 얌전히…….”

이성을 잃은 제드의 입에서 다소 거친 말이 나왔다.

칼리드와 루시펠라의 묘한 관계, 그를 소외시킨 채 벌어진 터무니없는 계획.

그의 눈에는 루시펠라가 불길에 스스로 뛰어든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얌전히’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제발 가만히 있어달라고, 스스로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나 그 ‘얌전히’라는 말에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뜨며 얼굴을 서늘히 굳혔다.

“그쪽이야말로 날 못 믿는 모양이네.”

이번에는 루시펠라의 얼굴이 서늘하게 물들었다. 그녀는 제드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미안함을 느낀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루시펠라는 누군가의 화를 잠자코 받아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리석은 계획’, ‘터무니없는 짓’, ‘얌전히’라는 말에 루시펠라의 감정이 분노로 타올랐다.

어리석은 계획이 아니다. 터무니없는 짓이 아니다. 그녀가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것이다. 엄연히 그 이오지프마저도 동참한 계획이란 말이다.

그런데 제드는 그러한 상황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무작정 루시펠라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루시펠라가 에스텔이라는 것을 알아야 납득이 될 상황이라는 것은 안다. 그럼에도, 그는 에스텔이 아닌 루시펠라 아이딘에게 최소한의 믿음조차 없단 말인가?

루시펠라가 화난 부분은 그것이었다. 제드는 그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어야 믿어준다. 그녀가 할 수 없을 것을 가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능이 그의 머리에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그쪽?”

제드는 루시펠라의 ‘그쪽’이라는 말에 기분인 상한 건지 되물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제드의 기분을 일부러 무시했다. 그녀 역시도 제드에게 실망과 서운함을 느꼈다.

솔직히 인정하자. 제드라면 화를 내면서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어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드는 끝끝내 그 이유를 묻지 않았고, 루시펠라의 비밀에만 집중했다.

그녀가 왜 그렇게까지 한 것이냐, 이오지프와 그녀 사이의 비밀이 무엇이냐, 질문의 답은 ‘그녀가 에스텔이다’라는 답으로 통했지만, 어디에 의문을 가지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보자 보자 하니까, 그쪽이 날 얼마나 바보 취급하는지는 잘 알겠네.”

“그건 바보 취급이 아니라…….”

“그래, 나는 아무것도 말 안 할 거고, 그냥 제드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참아달라고 말할 거야. 생각해 보니 웃기네. 참아준다고? 내가 말하기 싫은 건데 그걸 왜 ‘참아줘?’ 내게 적선해?”

“뭐?”

“내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안 하는 게 뭐 어때서? 누구나 다 말하기 싫은 비밀은 있잖아. 그걸 다 털어놔야 해?”

“그래, 그렇게 해놓고 이해를 요구하지. 그래서 우리 관계가 문제인 거야.”

“이해해 달라고 말했던 적 없어! 알면서도 내게 좋아한다고, 곁에 있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루시펠라를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한참 동안 시선이 오갔다. 먼저 말한 이는 제드였다.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럼 답은 명확하군.”

“뭐?”

“날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거라면 당장 그만두면 되겠군. 난 지금 ‘아이딘 영애’, 아니지, ‘아이딘 백작’과 더 이상 말도 섞기 싫으니까.”

그 비꼬는 말에 루시펠라 역시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말을 섞기 싫으면 내 선택에 간섭하지 않으면 되겠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바보 취급 해줘서 고맙네. 있는 정도 다 떨어졌어. 당신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았어. 그간 내가 그냥 제드의 의견에 따르는 인형같이 얌전한 사람이 되길 원했던 거지?”

그에 제드가 울컥했다.

“나는 바보 취급 하려던 게 아니야! 그리고 얌전하라는 건…… 그래, 그만두지.”

제드는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허탈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백작은 내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없고, 나 역시 백작의 선택을 그다지 존중하고 싶지 않은 게 결론이로군.”

“날 존중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니, 참 고맙네.”

제드는 루시펠라의 말을 무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내게 목숨을 걸지 말라고 이별하자고 해놓고, 본인은 목숨을 내던지는 무모한 계획을 짰지. 내게 상의하지도 않고.”

“그건!”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잘 알고 있어. 누구와 상의하든 백작의 마음이지. 거기에 실망했던 건 오롯이 내 마음이고.”

제드가 빈정거렸다.

루시펠라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백작이 운 좋게 이기더라도 이런 일이 반복될 거고, 그걸 부정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이 관계가 끝나야 한다는 건 명확한 게 아닌가?”

“뭐?”

루시펠라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 거지? 제드, 왜 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루시펠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작 마음대로 해. 나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건투를 빌지.”

제드는 싸늘하게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루시펠라는 그 뒷모습을 보며 멍하게 서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제드가 지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라고도 말했다.

분명 원하는 결과였으나, 제드는 지금의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루시펠라는 제드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붙잡아야 하는데, 지금 그가 가만히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행여나 붙잡아도 자신을 뿌리칠까 두려워하는 자신이.

제드를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드는 필요 없다고 한다.

루시펠라는 울컥해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왜 저놈을 흑사자가 아니라 고양이라고 칭했는지 깨달았다.

저 쪼잔한 인간!

언제는 목숨을 바친다면서! 그런 거 하나 참아주기 힘들었나?

내 목숨 바치는 건 쉬운 줄 아나! 내가 얼마나 대단한 결심을 했는데 이 인간이!

그렇게 내가 못 미더워 나를 무시해?

왜 날 바보 취급 해?

좋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거다. 이겨서 저 쪼잔한 놈의 멱살을 잡고 어떠냐고 소리칠 거다! 그리고 이런 내가 싫냐고 물어본 후 싫다고 하면 잘 먹고 잘 살라고 할 거야!

루시펠라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에 맺힌 눈물을 쓱쓱 닦았다.

아니, 사실 알고 있다. 저 인간이 자신을 바보 취급한 게 아니라 걱정해서라는 것 정도는. 그는 상처받았고, 이해하고 싶어 했지만 그것을 거절한 건 자신이었다.

자신이 제드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오해를 풀고 싶지 않았다. 칼리드와 에스텔의 관계는 오로지 둘만의 것이었다. 그에 제드를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죽거나 다치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어쩌면 좋은 기회인지도 몰랐다. 이것으로 제드는 그녀가 벌일 일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

루시펠라는 그와 반대 방향으로 등을 돌려 걸었다.

어쩌면 모든 게 다 끝나고 제드가 정말 자신을 안 보면 어떻게 하지? 불안이 들었지만 그녀는 애써 자신을 안심시켰다.

그는 단지 화가 난 것뿐이야. 화가 풀리고, 만약 자신을 입증하게 된다면 분명 웃어줄 거다. 분명 그럴 거다. 우린 분명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루시펠라의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거부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

이오지프가 미리 손을 써둔 것인지, 백작가에 있는 기사들은 모두 철수한 뒤였다.

루시펠라는 오랜만에 텅 빈 집을 보며 멍하게 서 있었다. 이제 정원을 마음껏 다닐 수 있었다. 그 자유가 마냥 후련하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돌아다니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우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점검했다. 이번 주 내에 영지전의 작전 계획을 짜야 한다.

인명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는 영지전의 특성상, 영지전은 내년 봄에 열릴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아이딘 백작령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더 차출하는 게 급선무였다. 무기…… 아, 무기는 어떻게 해야 하지?

루시펠라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자신의 방에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것을 몰랐다.

그녀가 낯선 이의 침입을 깨달았을 때는 그가 손목을 잡아 루시펠라를 거칠게 자신 쪽으로 잡아끌었을 때였다.

“왜! 대체 왜?!”

칼리드였다.

루시펠라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진정했다. 이놈이 이렇게 나올 것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녀는 덤덤하게 칼리드가 분노를 터뜨리는 것을 보았다. 황궁에서 제드와 다툰 일로 이미 그녀는 지쳐 있었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되었잖아.”

“…….”

“네가 싫어서.”

루시펠라가 덤덤하게 말하자 칼리드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 힘에 루시펠라의 몸이 흔들려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드는 아무래도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정말로 알고 싶지 않았지만, 루시펠라는 그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루시펠라에 대한 걱정임을 알았다. 제드와 똑같은 감정에서 기인한 분노였던 것이다.

“에스텔, 너는 왜, 왜 똑같은 걸 선택하는 거야!”

“…….”

“그때와 똑같아! 얀스가르와 얼샤가 전쟁했을 때. 병력 차이가 엄청나고 질 게 뻔했음에도 너는 아렌트를 따라 검을 들었지! 대체 또 왜!”

그는 몸을 일으킨 루시펠라의 어깨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루시펠라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네. 얼샤와 얀스가르의 전쟁처럼 희망이 없어 보이긴 하네.”

그녀의 말에 칼리드가 루시펠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내 간절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냥 레이디로 태어났으면, 레이디로 그렇게 살았어도 됐잖아!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입고, 행복하게 살아도 되었는데 대체 또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거야! 목숨 따윈 걸지 않아도 되잖아!”

그 말에 루시펠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게 내가 레이디로 사는 법이라서 말이야.”

그에 칼리드가 입술을 악물고 바르르 떨더니 이내 루시펠라의 손목을 잡았다.

“가자, 에스텔. 얼샤로 돌아가자!”

“이거 놔.”

“여기 있다간 네가 죽는다고!”

그가 버럭 소리쳤다. 칼리드는 초조해 보였다. 그의 하얀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고,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이거 놓지 못해? 사람을 부를 거야.”

“부르려면 불러! 모조리 다 죽여 버릴 테니까!”

칼리드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순식간에 흘러나온 살기에 루시펠라가 몸을 움찔했다. 저 녀석, 진심이다. 그녀를 진심으로 얼샤에 데려갈 생각이다.

하필 기사단이 집을 비웠을 때라 자신을 지킬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야, 이거 안 놔?!”

“가자고! 가잔 말이야! 다시 돌아가자! 옛날처럼, 그래, 옛날처럼 돌아가자!”

“이 미친놈이, 진짜!”

루시펠라가 그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행동은 멈추었다. 루시펠라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만약 네가 여기서 날 더 끌고 가려다간 내 몸도, 네 몸도 성치 않을 거니 각오해. 수도에 빠져나가기도 전에 뒈지고 싶지 않으면 여기서 멈춰.”

적어도 가만히 끌려가진 않을 거라는 소리였다. 루시펠라의 경고에 칼리드는 애걸하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에스텔, 제발.”

“이거 빨리 놓지 못해?”

“그래, 시토라, 시토라 녀석들에게 돌아가자. 모두가 널 반겨줄 거야!”

그에 루시펠라는 진지하게 칼리드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그 녀석들이랑은 인연을 끊었잖아! 너도 같이 있었으면서 기억 안 나?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녀석들이야!”

“아니야, 알고 있어. 그러니까, 어서 날 따라와. 다시 옛날처럼 살자. 그래, 레이디로 살기도 힘들었지? 그런 거였다면, 에스텔로 다시 진실 되게 살아가자.”

잠깐. 시토라 기사단 녀석들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칼리드가 어떻게 그들의 위치를 알고 있단 말인가?

“잠깐만! 칼리드 너, 어떻게 그 녀석들의 위치를 아는 거야?”

얀스가르가 추적해도 잡을 수 없던 놈들이다. 그 비밀스러운 위치를 칼리드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러나 칼리드는 그녀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에스텔, 나는 네가 죽게 둘 수는 없어!”

“네가 죽여놓고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미친 새끼야!”

루시펠라가 소리쳤다. 그에 칼리드가 루시펠라에게서 손을 떼 그녀를 쳐다보았다.

“말해봐. 너 대체 왜 이러는데? 이런 놈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자꾸 왜 이렇게 질척거려? 정말로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거야?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

“날 죽였잖아! 너의 에스텔은 친구이자 가족이자 가장 사랑하는 반쪽이었던 칼리드에게 살해당한 거라고! 먼저 관계를 끊은 건 넌데,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건데! 왜 날 죽이고! 나를 이렇게 만든 건데!”

루시펠라가 악을 쓰자 칼리드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 숨을 몰아쉬다가 루시펠라의 단단한 표정을 보며 소리쳤다.

“네가, 죽어서 별이 되고 싶다고 했잖아!”

그의 안색은 이제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루시펠라의 얼굴을 노려보며 칼리드가 고함쳤다.

“에스텔, 너는 항상 내게 잔혹했다! 언제나 너는 나에게 잔혹했어!”

“…….”

“너는, 언제나 싸우다 죽고 싶다고 했지! 여자로서, 사람으로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원 따윈 네게 없었어! 네가 바라는 미래는 죽는 것 이외에는 없었지!”

“…….”

“내가 왜 널 죽였냐고? 네가 전사가 되어 아스트라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했으니까!”

“…….”

“네가 비참하게 죽질 않길 바랐으니까! 네가 짓밟히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냥 그대로, 죽길 바랐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미친놈아!”

칼리드가 루시펠라의 뺨에 손을 얹었다. 칼리드는 자신의 입에서 새어 나온 진실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칼리드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렌트가…… 네가 충성을 맹세한, 그 대단하신 주군이 널 팔아넘기려 했어.”

“……”

“넌, 얀스가르인에게 짓밟히기로 예정되어 있었지.”

칼리드는 비웃음을 지었다. 루시펠라는 멍한 상태로 칼리드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에스텔, 넌 영웅으로서 죽는 발판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전사로서 죽을 수 없었지. 네 끝은 별이 된 기사가 아니라 짓밟히며 감히 남자들의 영역을 탐낸 어리석은 여자가 되는 것이었어.”

칼리드는 너무도 서글픈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루시펠라 안의 에스텔을.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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