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작별
2018.07.12.
루시펠라는 마치 제드가 하려던 일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은청색 눈동자가 거울처럼 맑게 반짝였다.
제드는 루시펠라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시.”
탄식하듯 그녀를 부르는 말에 루시펠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루이르크 공작이 알고 있어. 그 사람은 제드를 죽일 생각이야.”
“그런 건 알고 있어, 나도.”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싫어. 특히나 당신이 날 위해 목숨을 거는 건 더 싫고.”
“…….”
“사실, 그것 때문에 적당히 마음이 식었다고 헤어지자고 하려 했어. 하지만 그게 안 돼. 나는 누군가를 속이는 게 아직도 익숙하지 않나 봐.”
루시펠라의 목소리는 흐느끼는 듯했다. 붉어진 눈시울을 보며 제드는 무어라고 말하려 했다. 그는 답답해졌다.
“그대는 나를 믿지 못하나? 그런 것 따윈…….”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제드, 확률이 그렇게 높은 건 아니잖아. 적당히 괜찮다는 말로 넘어가려면 날 기만하는 거니까 솔직해져.”
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제드는 차마 자신이 괜찮을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은 제드도 확답을 못 할 만큼 위험했다.
“지금 황제는 살아 있고 황위 싸움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 수도까지 군사를 진군시키려는 모양인데, 당신이 하려는 건 반역이야. 거기다 신전까지 적으로 돌리려고 하는 거잖아.”
신전은 잘 움직이지 않는 집단이지만 저들이 한 번 움직이면 얼마나 잔혹하게 움직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신관들이 보증한 유언장에 제드가 불복하여 군사를 일으키면 신전은 하인트 공작가를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신전은 신전기사단이라는 강력한 무력 집단이 있다.
만약 신전이 제드의 움직임에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신전기사단을 얀스가르에 불러 모아 그를 공격하면, 그만큼 절망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제드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력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는 테미르 쪽 군대, 황제의 군대, 신전의 군대와 전투를 해야 했다.
겨우 루시펠라 하나 때문에.
자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걸 원치 않는다는 자애로운 마음씨를 지녀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기사였고, 사람들의 희생이 불가피한 일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개개인의 희생에 일일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면, 자신의 기사단원과 병사들에게 최후까지 항전하자는 말을 안 했겠지.
사실 제드에게 위험이 없다면 기꺼이 그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제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죽지 않을 거야, 루시. 그렇게 할 거야. 그대가 전투를 원하지 않는다면 도망가는 것도 방법이야. 지금이라도 당장 제국을…….”
“그건 미친 짓이야. 도망가도 평생을 쫓기게 될 거잖아.”
“…….”
“당신을 무시하지 않아. 단지 나 때문에 죽음의 위험에 처하면서까지 그러는 게 싫어.”
“…….”
“당신을 좋아해.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있어.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을 정도로 당신은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루시.”
“제드, 당신이 하려는 건 너무도 단순하고, 누구라도 예상 가능한 일이야.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것에 마땅히 대비를 해뒀을 거야.”
맞는 말이었다. 이것은 제드 역시도 생각한 부분이었다.
벗어날 돌파구가 하나밖에 없고, 그것이 읽기 쉬운 수라면 당연히 마땅한 대비를 해뒀을 것이다. 저들도 필사적일 테니까.
“그러니 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 말아줘.”
그 말에 제드는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 자신이 그렇듯 이 사람 역시 같은 마음이라는 게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조급함을 느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어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함께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눈앞의 행동에 기꺼이 사랑에 눈이 먼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해 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희생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같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그 어리석은 법에 순응하다가는 그와 그녀는 다시 헤어지게 된다. 칼리드 루이르크 손아귀에 떨어져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들은 둘이서 계속 행복할 거라고 했다.
언제까지나 손을 맞잡은 채 삶의 남은 시간을 함께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행복했던 둘은 다시 혼자가 되고, 그는 다시금 고독을 느껴야 했다.
루시펠라를 만나고 서로를 마음에 담아 함께하며, 제드는 자신이 외로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알았다. 그는 왜 사람들이 사랑을 찬양하고 찬미하는지 알았다.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게 되는 유일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 너무도 사랑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이타적이 될 수 있었다.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던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제드, 나는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이 개소리라고 생각했어.”
루시펠라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녀의 붉은 입술 역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항상 배우는 게 늦나 봐. 지금 당신을 보니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
루시펠라가 손을 뻗어 제드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우리 잠깐만 이별하자.”
“…….”
“모든 게 끝나면 내가 당신에게 찾아갈게.”
거짓말이다. 지금 그냥 적당히 그를 달래려고 한 말이다.
제드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다시 이대로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평생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득했다.
그는 투정을 부리듯 루시펠라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절대 보내지 않을 것이다.
“날 믿어줘.”
루시펠라가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이렇게나 사랑한다는데, 어떻게 놓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 작별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제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도 잔인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이건 그녀가 자신을 덜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 따윈 헤아리지 못한다. 제드는 화를 내고 싶었다.
그때, 루시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당신이랑 지금 헤어지자고 말하는 건 나를 믿기 때문이야. 그리고 당신이 날 기다려 줄 걸 알기 때문이고.”
제드는 그 말에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았다. 평생 함께할 수 없을지 모르는데도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제드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정말 어떤 방법을 찾아낸 것일까? 정말로 그녀는 자신에게 돌아와 줄까?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별이 내려앉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
그는 그 눈동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니, 날 믿고 아무것도 하지 마.”
제드는 그것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해줄 거지?”
잦아드는 비에 그도 이제 알 수 있었다. 루시펠라의 두 눈에서는 빗물이 아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이다. 나약한 모습 따윈 보이지 않으려고.
“내 목숨은, 아깝지 않아.”
“내가 아까워서 그래. 당신은 죽는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잖아.”
“…….”
“당신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어?”
그 말에 제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전 그녀의 마차가 산 아래로 떨어졌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나도 똑같아. 언제나 당신이 그 독약을 먹고 죽는 걸 생각해. 그때 느꼈던 감정을 절대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
“그때 깨어나 나를 봤다는 말이야?”
“그래.”
그에 제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는 한참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만약 제드가 이대로 날 데려가서 다른 이들과 전쟁을 하면 난 제드를 다신 보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고 자기의 마음만을 강요한 거니까. 마치 칼리드 루이르크처럼.”
제드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며 서늘했다. ‘칼리드 루이르크’처럼 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와 똑같은 놈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루시펠라가 필사적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눈을 보았다. 여기서 제드가 멋대로 움직인다면, 루시펠라는 제드를 끊어낼 것이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할 것이다.
결국 그는 루시펠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영원한 작별의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
칼리드가 방으로 찾아왔을 때 루시펠라는 비 맞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였다.
방 안은 얼음처럼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옷시중을 들던 하녀에게 말했다.
“앰버, 나가 봐.”
“아가씨.”
그녀는 자신이 나가면 칼리드에게 루시펠라가 해코지를 당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루시펠라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나가 봐.”
“아가씨, 저는 나갈 수 없어요.”
“나가 봐. 명령이야. 내가 매질을 하길 바라는 거야?”
루시펠라가 단호하게 말하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애걸하듯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루시펠라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하녀는 허리를 숙이더니 칼리드를 스쳐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 둘만이 남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창밖의 비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는 그때,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약속대로 돌아왔어.”
칼리드는 대답하지 않고 루시펠라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것이 자못 위협적이었으나 루시펠라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손목을 잡았다.
“어떻게 해줄까, 에스텔?”
“…….”
“어떻게 해야 네가 그 깜찍한 짓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지 네가 날 화나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역시 제더카이어 하인트, 그놈을 죽여야 할까? 당장이라도 그러길 바라?”
그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루시펠라는 무표정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칼리드가 루시펠라의 얼굴에서 힘이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였다.
“쓸데없는 짓은 안 해도 될 거야. 그 사람을 만나서 헤어지자고 했으니.”
“…….”
“제대로 정리하고 왔어. 그저 그뿐이야.”
칼리드가 루시펠라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예전, 에스텔이었을 적 그녀는 지나치게 솔직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지만, 루시펠라인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었다. 레이디가 되더니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습득해 버렸다.
갑자기 루시펠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별안간 그녀가 울컥한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화나게 하질 않길 바라, 칼리드?”
그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퍽, 쳤던 것이다.
칼리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자,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곤 갑자기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개자식아! 이 나쁜 자식아!”
그녀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칼리드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언제나 에스텔은 울지 않으려 했다. 여자니까, 약해 보이기 싫다는 게 그 이유였다.
눈물을 보일 상황이 와도 그저 입술을 깨문 채 눈물 몇 방울만 흘리는 게 다였다.
그러나 이 순간 그의 에스텔은 이렇게 무너져 내린 채 울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 때문에. 그것이 낯설고 무서웠다.
“나쁜 자식아!”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울었다. 새하얀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그녀의 작은 손은 계속해서 칼리드의 가슴을 때렸다. 칼리드는 그것을 맞아주고 있었다.
“널 믿었어! 널 살려준 건, 널 믿어서였다고! 적어도 네가, 나를 조금은 생각해 줄 거라 생각해서였어!”
“…….”
“이러지 않았잖아. 너는 이런 놈이 아니잖아!”
자신의 주먹이 칼리드에게 아무런 타격이 없을 것을 알면서 루시펠라는 계속해서 칼리드의 가슴을 때렸다.
원망하지 않으려 했다.
아니, 정확히는 원망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려 했다.
칼리드를 배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
“이제 만족해? 이제 만족하냐고!”
그녀는 계속 가슴을 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결국 눈물을 보이던 그 애처로운 사람을 기억한다. 제드는 끝까지 간절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이별을 하지 말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애써 웃고자 했다.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별을 어떻게 웃으며 고하겠는가.
이별을 아름답다고 연극을 만들던 놈들은 다 죽어야 한다! 이별은 아름답지도 않았고, 그저 아프고 또 아프기만 했다.
“대체 나는 왜! 대체 왜!”
왜 나는 행복해질 수 없는 거지?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저놈에게 살해당했다.
“대체 너는 왜!”
왜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에스텔이 진심을 다해 애정을 주었던 이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것일까.
그녀는 통곡했다. 모든 감정을 쏟아내 버리듯.
제드,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사실은 같이 떠나자고 말하고 싶었어. 날 데려가 달라고 하고 싶었어. 내가 에스텔이었다면 난 기꺼이 당신과 함께 떠났을 거야. 당신이 날 좋아하듯 나도 당신을 정말 좋아해.
설령 그가 남아서 전쟁을 택한다고 해도 그의 목숨이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다.
전쟁은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다. 죽지 않을 것 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허망하게 죽었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엔, 그들이 걸어갈 길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제드가 죽는 게 무서웠다. 그와 영원히 이별할 것이 더 무섭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을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 때문에 죽길 바라지 않았다.
“에스텔, 미안해.”
“…….”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
“에스텔, 그러니까 제발……!”
칼리드가 루시펠라의 어깨를 만지려 했지만, 그녀는 그 손을 매섭게 쳐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카펫에 스며들었다.
칼리드는 절망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에게 원망의 소리를 내뱉었다. 그녀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에 칼리드는 안절부절못한 채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칼리드가 말을 다시 걸어오는 듯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더는 무너져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서로 다시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녀는 긴 이별을 감내해야 했다.
***
버나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주군이자 상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드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 그의 말수가 상당히 줄어 있었다.
선대 공작의 죽음에도 제드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물러났다 이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대장장이 길드에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대금을 지불했다.
철이 생산되면, 제드의 계획을 실현시키려면 다량의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전 별안간 2기사단이 그곳을 급습했다. 감찰대가 제구실을 못하니 감찰하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제드는 이미 자신의 군사를 움직일 계획을 철회한 지 오래였다. 그에 무기 역시 생산 중단되었다.
생산된 무기의 수는 행여나 꼬투리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적었기에 2기사단원들은 입맛만 다시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도발이라도 하듯, 감찰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것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하인트 공작가는 감찰대원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감찰대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움직인 2기사단에 의해 꼬투리를 잡혀 하마터면 모든 게 들통 나 반역으로 몰릴 뻔했다.
“몇몇 놈이 배신을 하려고 한 모양이군. 정확히 하인트 가에서 의뢰한 길드의 무기 공장을 찾아갔으니 말이야.”
“어디서 새어 나갔는지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입니다. 미리 파악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나.”
“네?”
버나드가 놀라서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어떻게 된 것인가. 차라리 짜증이라도 내면 좋을 법하건만, 제드는 그것조차 없었다.
“폐하께서 사흘 뒤 중앙 귀족 회의를 여신다고?”
“그렇습니다. 수도의 모든 귀족을 소집하라 명하셨습니다.”
“무슨 일로 회의를 여는 것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나?”
“그렇습니다.”
“그래, 폐하께서 작정하고 숨기셨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겠지.”
보통 같으면 화를 낼 일이지만, 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딘 백작의 장례식날, 아이딘 영애를 만난 이후로 제드는 줄곧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차라리 제드가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면 저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마치 고통을 견디는 것처럼 가끔 천천히 눈을 감았다고 떴다. 우울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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