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이길 수 있는 방법
2018.07.09.
“아, 아가씨께서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어요.”
“…….”
“전 아가씨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라고 하셨어요. 혹 제게 벌을 내린다면,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요.”
로이자는 벌벌 떨었지만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예전에는 어쩌다가 바꿔치기를 당했지만 이번엔 자발적으로 한 것이다.
로이자는 아가씨가 얼샤에서 하인트 공작 각하와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완벽한 한 쌍이었다. 행복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세상의 행복은 모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행복을 루이르크 공작이 깨버렸다.
아가씨와 이 남자가 어떤 사이인지 모른다. 그러나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질투에 미친 남자는 추한 법이다.
그녀는 기꺼이 아가씨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만에 하나 그녀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로이자, 절대 네가 다치지 않게 할게.”
루시펠라는 굳게 약속했다. 로이자는 그것을 믿었다.
처음에는 무서운 아가씨라고 생각했지만, 아가씨는 참으로 상냥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배려해 주었다. 그런 아가씨가 자신을 방치할 리 없었다.
한편, 칼리드는 살기를 억누르며 이 맹랑한 하녀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준비를 했는지, 로이자는 장례복을 입고 있었다. 불과 짧은 시간에 그녀는 바꿔치기 된 것이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책에 대해 떠올렸다. 장례 절차에 대해 세세하게 공부하는 듯하더니 아이딘 백작가의 대리인인 자신이 직접 운구마차까지 운구를 하러 그녀와 잠시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또 그녀가 탈출의 귀재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그를 속였던 거지? 칼리드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 마음을 열어준 것이 아니었나?
설마,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나?
처음부터 탈출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이용한 건가?
비로소 속은 것을 깨달은 칼리드의 자안이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젠 그녀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묶어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저 하녀도 그녀의 눈앞에서 목을 잘라 버릴 것이다.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다. 루시펠라는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마땅했다.
그가 살의를 억누르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이지, 루이르크 공작?”
제드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칼리드의 돌변한 표정을 보고 겁에 질렸던 로이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제드는 로이자를 훑어보았다. 그러곤 과장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겠군. 아이딘 영애가 또 사고를 친 모양이야. 내가 그녀를 잘 아는데, 그녀는 이런 도망 쪽으로 재능이 있거든.”
“…….”
칼리드가 그를 노려보았다.
“공이 이해해야지. 아버지를 잃고 제정신이 아닌 가여운 사람이 벌인 짓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다간 그녀가 무서워서 돌아오지 않을 거 아니야?”
“혹 하인트 공, 공이 그녀를 데려간 게 아닙니까?”
“내가? 아니, 전혀.”
제드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약혼도 파기된 마당에 나와 관계없는 레이디를 납치했다간 큰일이 아닌가. 나는 납치범도, 신전의 적이 되고 싶지도 않아.”
그러더니 그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로이자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사태를 파악한 바로는 이건 도무지 간과할 수 없군.”
“……네, 네?”
“감히 귀족을 사칭하다니.”
제드의 눈이 서늘함을 머금었다. 그 싸늘한 기운에 로이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 각하, 그건 아가씨가…….”
“변명은 필요 없다. 그대가 한 짓이 제국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중죄라는 것을 모르는가!”
“가, 각하!”
갑작스러운 제드의 고함에 로이자가 겁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내가 알기로 그대가 이런 행동을 한 것도 이번이 두 번째다. 심지어 아이딘 백작의 장례식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그대는 고인을 욕보이는 것임을 모르는가!”
“가, 각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로이자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그것을 본 칼리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인트 공작.”
“이자의 여죄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1기사단이 조사하도록 하지. 공은 장례 때문에 바쁠 테니 말이야.”
제드가 미소를 지으며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칼리드가 미소를 지었다.
“빼돌리려는 겁니까?”
제드가 그 말에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빼돌리다니, 누구를? 이 하녀는 지금 귀족 모독죄를 짓지 않았나?”
“그건 2기사단에서 하면 될…….”
“공이 장례 때문에 바빠서 내가 대신 조사해 주겠다는 건데 마다하는 이유가 뭐지? 내가 조사를 하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제드가 빙그레 웃자 칼리드가 이를 으득 갈았다. 선수를 빼앗겼다.
제드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로이자를 데리고 있겠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제드의 의도적인 시선 끌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저택 안에 있는 사용인들만으로도 루시펠라에게 압박은 충분히 가할 수 있었다. 칼리드는 로이자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에 제드가 미소를 지었다. 제드가 로이자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따라오도록.”
그는 로이자를 뒤로한 채 아이딘 백작가를 벗어났다. 그러곤 로이자를 마차에 태우고 자신도 마차에 올랐다.
졸지에 하인트 공작가의 마차를 타게 된 로이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가, 각하,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또!”
“어디지?”
“네?”
“루시 말이야, 어디 있지?”
“각하, 저 벌 받는 거 아니었나요?”
“루시가 어디 갔는지 물어보려고 데려왔어.”
“정말요? 전 또!”
로이자가 안심하며 환하게 웃었다.
루시에게 말해서, 이런 일을 벌이려면 하녀를 좀 더 눈치 있는 사람으로 바꾸라고 해야겠다고 제드는 생각했다.
“아가씨는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하지 않았어요. 저는 공작 각하께서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이자를 굳이 데려온 이유는 루시펠라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다.
루이르크 공작은 루시펠라를 찾기 위해 2기사단과 신전기사단을 동원했다. 반드시 그녀를 먼저 찾아야 한다.
제드가 군사를 일으키기 전, 최우선으로 삼았던 계획은 루시펠라를 몰래 탈출시켜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녀가 혹 인질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한데 루시펠라가 알아서 빠져나오다니, 일이 너무나 수월하게 풀렸다.
“조금 더 생각해 봐. 분명 그녀가 실마리를 남겨두었을 거야.”
“정말 모르겠어요.”
그러나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 나가기 전 루시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낱낱이 말해봐.”
***
이오지프는 한숨을 내쉬며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아직도 멍했다.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어서 와. 장례식은 어땠어?”
“제대로 끝날 리가 있겠어요?”
“하긴.”
“도망을 도와준 루시의 시녀를 두고 하인트 공작 각하와 루이르크 공작의 싸움이 재미있었어요. 저는 하인트 공작 각하가 그렇게 연기를 잘할 줄 몰랐어요. 각하께선 아무래도 루시를 전력으로 생각 중이신가 봐요.”
“그래? 오랜만에 둘이 재회하겠군.”
이오지프가 피식 웃었다.
클로렌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뒷감당이 걱정이네요. 일단 루시펠라의 말을 듣고 자리를 마련하긴 했는데…….”
“뒷감당할 자신이 있으니까 그대를 불러 도와달라고 했겠지. 아이딘 영애는 멍청하지 않아.”
클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맞아요, 루시는 정말로 똑똑해요. 저는 그녀가 그런 방식으로 도움을 요청할 줄은 몰랐다니까요.”
루시펠라를 만난 클로렌스는 응접실이 필요 이상으로 더운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굳이 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왜 벽난로에 불을 땐 것일까?
그 때문인지 루시펠라의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부채를 일부러 드는 상황을 유도했다는 게 된다.
그녀는 루시펠라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루시펠라가 부채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것은 레이디들이 부채로 쓰는 은어로써, 비밀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들어달라는 말이었다.
클로렌스는 그것을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계속 차를 마셨다.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기사는 레이디들의 은밀한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다.
루시펠라는 줄곧 로맨스 소설이 재미있다며 그 이야기만 했다.
클로렌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의 대화에 집중했다.
루시펠라는 특정한 소설을 언급할 때 부채를 접어 입에 가져다 댔으며, 클로렌스는 그 제목을 기억하며 그녀가 이야기하는 부분을 염두에 두었다.
그야말로 그녀가 태어나서 무언가에 가장 집중한 시간일 것이다.
집에 들어온 클로렌스는 그녀의 대화를 종이에 적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왜 하필 로맨스 소설인가?
루시펠라가 로맨스 소설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로맨스 소설이 의미하는 이는 단 한 명, 이오지프밖에 없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닐 터였다. 고민 끝에 그녀는 이오지프에게 이 내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오지프는 루시펠라가 언급한 소설의 장면에서 핵심 단어가 반복되는 것을 발견했다.
‘서점’, ‘재회’, ‘장례식’.
장례식날 서점에서 만나자는 전언이었다. 이오지프와 루시펠라가 만난 서점은 단 한 군데였다.
어떻게 탈출할 것인지 탈출이 성공할 것인지 의심스러웠으나 이오지프는 일단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서점에서 그녀를 기다렸고, 그녀와 만났다.
“왜 웃고 계세요?”
“그냥 너무도 엄청난 소리를 들어버려서.”
이오지프는 어쩐지 멍해 보였다. 그에 클로렌스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엄청난 소리라니요?”
“로라.”
“네.”
갑작스러운 자신의 애칭에 클로렌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오지프는 피식 웃었다.
“미안해.”
“네?”
“그냥, 모든 게 다 미안할 따름이야.”
“…….”
클로렌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말 안 해주실 건가요?”
“나중에, 좀 더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지금은 잠시만, 나도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아. 하지만 약속할게. 곧 알게 될 거야.”
이오지프가 빙그레 미소 짓자 클로렌스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렇게 부드럽게 애칭을 불린 이상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뭐예요, 기껏 자리를 마련해 주었더니.”
그녀가 툴툴거리자 이오지프의 미소가 짙어지더니 그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녀는 그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루시는 어떤 이야기를 했나요? 희망적인 이야기인가요?”
클로렌스는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오지프에게 가담했던 자신의 아버지도 지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 역시 몇십 년간 권력을 잡아왔던 이다. 그 머리 좋은 이도 딱히 좋은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클로렌스 역시 거의 포기하여 물어본 것이었지만, 이오지프의 대답은 의외였다.
“모든 것을 역전시켜 끝낼 수 있는 이야기.”
“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이오지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간 어둡게 가라앉았던 그의 두 눈이 다시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이야기를 말했어.”
“이길 수 있다고요, 우리가?”
클로렌스의 물음에 이오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렌스, 그녀는 이름 그대로 샛별이야.”
“샛별?”
“이슈타르라는 말이었어.”
이오지프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제드는 로이자로부터 아무런 실마리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이전 루시펠라의 행적을 더듬었다. 루시펠라는 어디로 향했을까.
그러다 제드는 의문이 들었다. 왜 루시펠라는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지?
만약 도망간다면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야 마땅한 게 아닌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선뜩한 예감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루시펠라가 자신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가?
설마,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닐 테고. 그는 말을 탄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비는 상당히 차가운데, 루시펠라는 옷은 제대로 차려입었을까. 몸이 많이 약한 이인데…….
제드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직까지도 수하들의 보고는 없었다. 당연했다. 드넓은 그린힐에서 대체 어떻게 루시펠라를 바로 찾겠는가.
그러던 그는 다시 한 번 로이자에게 들은 루시펠라의 행동을 생각했다.
‘칼리드와의 대화’, ‘침대에 멍하게 누워 있기’, ‘로맨스 소설책 읽기’, ‘방 안을 거닐며 생각에 잠겨 있기’, ‘차 마시기.’
잠깐, 책 읽기? 게다가 로맨스 책?
그녀는 책을 즐기는 위인은 아니었다. 심지어 로맨스 책은 싫어했다.
이것은 얼샤에 갔을 때 알아낸 사실이었다.
휴식을 취할 겸 책을 같이 읽노라면 그녀는 지루함을 느끼는지 제드의 품에 파고들어 뺨에 입을 맞추고는 했다. 눈물나리만치 행복한 순간이 떠올랐다. 그는 루시펠라의 온기와 부드러운 입술을 추억했다.
이 로맨스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신호가 아닐까.
예전, 기사 에스텔이 붙잡혔을 때 ‘행동’으로 자신의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낸 것처럼 그녀도 마찬가지 일수 있었다.
로맨스 소설 하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 바로 이오지프다. 어쩌면 이오지프와 만난 서점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신호가 아닐까?
그는 그 서점의 위치를 떠올리고 재빨리 말을 몰았다. 비가 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 서점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까지 신전기사단과 다른 이들은 이곳까지 도달하지 못한 듯했다. 아니면 비가 와서 피했거나.
제드는 자신의 추측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텅 빈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채 그 사람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제드가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가 인기척을 눈치챈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뛰어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장막처럼 그들을 감싸주었다. 그들은 힘을 주어 끌어안으며 서로의 온기를 절박하게 느꼈다.
루시펠라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제드가 루시펠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고요한 길거리 위, 둘은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들어 있었다.
제드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칼리드 루이르크에게 느꼈던 분노와 이 상황에 대한 갑갑함, 눈 뜨고 당한 자신에 대한 자책과 루시펠라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
그간 그를 괴롭혔던 모든 감정이 마치 비에 씻겨 내려가듯, 루시펠라를 끌어안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 너만 있다면.
그는 이 순간 이대로 루시펠라의 손을 잡고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굳이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있나? 신전의 적이 되어, 파면당해도 상관없다. 평생 쫓겨도 된다. 이미 목숨까지 버리려 했다. 그 무엇이 무섭겠는가.
다신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다신 널 잃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너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제드는 마치 다짐하는 것처럼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제드.”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드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빗물 탓일까, 그녀는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손을 들어 루시펠라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감기 걸리겠다. 어서 집에 가자.”
“집?”
그 물음에 제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까지 그는 루시펠라가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 말이야.”
“…….”
“루시, 나와 함께 가자. 나와 같이 있으면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
“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항상 그대만 생각했어.”
“…….”
“그대가 있어야 해. 그대가 없으면 안 돼.”
“…….”
그의 고백은 마치 피를 토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것은 그가 그간 품었던 마음의 절반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 말하고 싶었다. 그녀가 없어서 그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가 얼마나 그리움에 미쳐 갔는지. 그리고 그녀도 그러했노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루시펠라는 슬픈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애써 잊으려 했던 의문이 떠올랐다.
왜 장례식장에서 도주한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것일까.
그녀는 무엇을 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생각도, 그녀의 행적도 알 수 없었다.
루시펠라가 한참 동안 물끄러미 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불안함을 토로하려고 할 때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드.”
“…….”
“다 그만두자.”
루시펠라의 말은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녀를 데려가 달라는 절박한 요구 또한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드는 굳이 그녀에게 물었다.
“무엇을?”
“당신이 하려던 거 모두 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