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레이디들의 대화법
2018.07.05.
“칼리드, 그거 알아?”
루시펠라는 읽던 책을 책상에 내려두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뭔데?”
루시펠라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칼리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루시펠라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루시펠라 말이야, 내 외사촌 동생이야.”
칼리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우리 엄마에 대해 이야기했나?”
그는 턱을 손으로 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는군. 어머니가 어린 널 버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얼샤에서 백작부인, 그러니까 루시 어머니의 본가를 찾아가 우연히 알게 됐어. 바네사 남작의 눈이랑 내 눈 색, 그러니까 에스텔의 눈 색이 똑같더라.”
“…….”
“바네사 남작이 결혼하기 전 하녀와 낳은 딸이 우리 엄마야. 그러니까 루시펠라 엄마인 루아나와 내 어머니는 이복 자매 사이지.”
마치 옛날처럼 그들의 대화는 물 흐르듯 잔잔하게 흘러갔다.
칼리드는 그것을 들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네가 그 몸에 들어온 것도 완전히 우연은 아니라는 소리군.”
“어라, 바로 믿네?”
“네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잖아.”
칼리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굳건한 신뢰가 어린 미소. 루시펠라는 그 모습을 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정말로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루시펠라가 아닌 에스텔과 칼리드. 서로를 가족처럼, 영혼의 반쪽처럼 여기던 그때처럼.
“그렇단 말은 에스텔, 너도 레이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네.”
“……”
예전 루시펠라가 생각했던 것을 칼리드는 그대로 말했다.
“차라리 네가 레이디였으면 좋았을 텐데.”
“뭐?”
“아니, 아무것도.”
루시펠라는 앞으로 할 대화를 생각해 내느라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애 말이야, 진짜 루시펠라, 어떤 삶을 살았어? 넌 3년 동안 봤을 거 아니야.”
“딱히 기억나진 않는군.”
칼리드가 눈썹을 찌푸리자 루시펠라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렇게나 예쁜데?”
“껍데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
“그나마 기억나는 건 멍청하고 어리숙했다는 것뿐이군. 꼭 병아리처럼 1황자를 졸졸 따라다녔지. 단 한 번이라도 뒤돌아봐 줄까, 그렇게 말이야.”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칼리드가 기억하는 루시펠라는 언제나 테미르의 사랑을 갈구하던 모습이었다.
그녀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 이 애의 삶을 기억하고 있어.”
칼리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억하고 있다니?”
“그냥, 기억이 떠올라. 루시펠라의 육신에 남아 있는 기억이 나한테 흘러들어 오나 봐.”
“그래서 내가 확신을 못 했던 거로군.”
칼리드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이야, 그 루시펠라는 어디 있지?”
“어디 있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나타나서 네 본체를 빼앗아 버릴 수도 있잖아.”
칼리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어. 얘는 되살아나지 않아. 스스로 삶을 포기했으니까.”
“스스로 포기했다고?”
“뭐라 말을 하긴 어렵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 루시펠라가 되살아날 일은 없을 거야. 다신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거든.”
루시펠라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나는 이 애가 너무 불쌍해.”
“불쌍하다고?”
“결국 이 애는 사랑받길 원하기만 하다가 제대로 된 사랑도 못 받은 채 죽어버렸으니까.”
“…….”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어.”
루시펠라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루시펠라가 칼리드에게 털어놓는 속내였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테미르 말이야, 생각해 보면 꼭 아렌트를 닮았어.”
루시펠라의 말에 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드는 왜인지 모르게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의 호의적인 표정을 보자 루시펠라는 겨우 안심했다.
그녀는 갇혀 있는 동안 책을 읽었고, 점점 칼리드에게 마음을 여는 것처럼 행동했다.
또한 칼리드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 따뜻한 차, 겨울맞이 새로운 외투, 그가 제공했던 책을 더 많이.
그녀는 점점 칼리드의 말에 대답하는 빈도를 늘려왔다. 그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계산된 대화법. 적당히 자신을 드러냈다 숨겨야 한다.
그렇게 계산된 행동을 해오던 루시펠라는 이 순간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책을 들었다.
“무슨 책을 그렇게 봐?”
칼리드가 물었다.
“장례 절차에 대한 책. 아이딘 백작의 장례식을 잘 치르고 싶어서 말이야.”
“잘 치르고 싶다니?”
“내 불쌍한 외사촌 동생에 대한 예의잖아. 내가 몸을 쓰고 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루시펠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대체 이런 건 왜 이렇게 복잡해? 난 이런 비효율적인 게 싫어. 인사를 몇 번 하고, 치마를 어떻게 잡는지 이런 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루시펠라가 에스텔이 하던 것처럼 욕설을 내뱉었다. 칼리드가 그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굳이 안 해도 돼.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니까. 이런 종류는 글을 백 번 읽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한 번 동작을 보여주는 게 더 좋은데 말이야.”
“하긴, 너는 이론보다 실전이었으니까.”
그는 향수에 잠긴 듯했다. 그 표정을 본 루시펠라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어.”
“누군가라니?”
“이런 거 잘 아는 사람 말이야. 혹시, 클로렌스한테 배울 수는 없을까?”
“뭐?”
칼리드의 얼굴이 굳자 그녀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루시펠라는 일부러 태연한 척 말했다.
“허튼수작 부리지 않을게. 무슨 대화를 하는지 네가 와서 봐도 좋아. 예법도 예법이지만, 클로렌스의 얼굴을 보고 싶어.”
“…….”
“나 억지로 납치해서 가둬뒀다는 소문이 도는 것보단 낫잖아.”
칼리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루시펠라 역시 얼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것도 아닌 장례식을 위해서야. 지금 날 가둬둔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내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을 둘 생각이야?”
“…….”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냥 레이디야. 한낱 여자애 하나 초대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미안, 클로렌스.
그녀는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칼리드는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루시펠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칼리드는 레이디에 대해 에스텔과 똑같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채 보석이나 드레스, 허황된 사랑을 이야기하며 생각 없이 해맑은 족속들.
클로렌스를 굳이 불러 달라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가 예비 2황자비라는 위치더라도 칼리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이에게 그녀는 그저 생각 없는 레이디에 불과했다.
“그러도록 하지.”
됐다. 예상과 한 치 다름없는 칼리드의 대답에 루시펠라가 살짝 주먹을 쥐었다.
클로렌스는 바로 그다음 날 오후에 왔다.
운이 좋은 것일까. 공교롭게도 칼리드는 출타할 일이 생겼고, 이들의 대화는 2기사단 중 한 명이 감시하게 되었다.
그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루시펠라는 몸수색이라는 모욕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크게 기분이 상했다. 칼리드, 이 철저한 놈은 루시펠라가 혹시라도 허튼짓을 하지 않을까 단단히 감시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린 채 응접실에 앉아 부채를 펄럭이며 불쾌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클로렌스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루시펠라를 끌어안으려다, 이내 방 안에 서 있는 기사의 모습을 보며 멈칫하더니 부드럽게 예의를 차렸다.
“잘 있었어요?”
“물론이지.”
“그럼 다행이에요.”
클로렌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클로렌스의 눈 밑이 거뭇한 게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았다. 루시펠라는 그 와중에 그녀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여기 좀 덥네요?”
클로렌스가 문득 깨달은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침에 춥다고 하니까 로이자가 장작을 지나치게 많이 넣은 모양이야. 나도 더워서 지금 이걸 들고 있어.”
루시펠라가 보란 듯 부채를 들었다. 그에 클로렌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펴졌다. 곧이어 클로렌스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루시펠라는 찻물이 담긴 찻잔을 내밀었다.
“차 맛이 좋네요.”
“그래? 로이자가 실수는 많이 하지만 차는 잘 타는 것 같아. 나는 거기서 거긴 것 같지만 말이야.”
루시펠라의 표정에 클로렌스가 미소 지었다. 루시펠라가 스리슬쩍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이들의 대화를 주도면밀하게 듣고 있었다.
여기서 빈틈이 생기면 안 되지. 루시펠라가 식은땀을 흘렸다.
“루시, 아버지의 일은 참 안됐어요.”
“괜찮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모두가 충격을 받았답니다. 더구나 루시까지 얼굴을 안 보여서 무척 걱정했어요.”
“그래.”
“혹시 억지로 감금되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니, 그렇진 않아. 루이르크 공작 각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그래도…….”
“그냥,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바깥세상에 대해 관심이 사라졌어. 그래서 밖에 안 나간 거야. 많이 걱정했지? 미안해.”
“그랬군요.”
루시펠라는 부채를 접고 그것을 입술에 댔다. 그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클로렌스가 차를 마셨다.
루시펠라가 그 모습에 생글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동안 집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었지 뭐야.”
“책이라니, 어떤 책이요?”
“처음에는 역사서나 전술서 같은 책을 읽었는데 그건 지루하더라. 가볍게 읽기엔 로맨스 소설이 딱인 것 같아.”
“로맨스 소설요?”
클로렌스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루시펠라가 슬쩍 바라본 기사의 표정은 벌써 지루하다는 표정이었다.
“응, 그냥 그곳의 주인공들은 다 행복한 것 같아서. 그걸 자주 읽게 돼.”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그래? 그럼 이야기해 줄게.”
루시펠라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간만에 레이디들의 대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혹시 ‘돌아와요, 약혼자’는 읽어봤어? ‘선택의 미학’도 재미있는데 말이야. ‘두 얼굴 사이’도 재미있었어.”
“그래요? 저는 그런 걸 안 읽어봐서 잘 몰라요.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그게 어떤 내용이냐면…….”
한편,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기사는 여자들의 시답잖은 수다에 금세 지루함을 느꼈다.
하여튼 여자들이란 비슷한 족속이었다. 장례식의 예절이라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지나치게 영양가 없는 대화가 많았다. 여자들의 수다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는 벌써부터 이 많은 내용을 루이르크 공작에게 보고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다 아팠다.
“서점에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처음 만난다니까.”
저들의 대화는 지나치게 길었다. 그녀가 말하는 책의 제목들만 해도 상당했다. 저걸 어떻게 다 기억을 하겠는가.
심지어 내용도 다 비슷해서 헷갈린다. 저런 쓸데없는 보고를 올리면 오히려 안 좋은 소리를 듣기만 하겠지.
“어머, 멋져라! 그럼 거기서 재회하는 건가요?”
“그래, 거기서 진하게 입을 맞추지!”
기사는 아직도 로맨스 소설에 열을 올리는 레이디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고, 잠시 후 본론인 장례식 예법으로 화제가 넘어가자 그제야 정신을 바짝 차리며 혹시라도 클로렌스에게 무언가 건네주지 않았는지 면밀히 감시했다.
이윽고 클로렌스가 돌아가자, 그는 칼리드에게 상세하게 보고를 올렸다.
당연히 그녀들이 나누었던 하찮은 수다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남자들은 레이디의 대화법을 알지 못했으니까.
남자들이 그들만의 소위 말하는 고상한 대화법이 있듯, 그들이 말하는 머리가 텅 빈 레이디의 대화는 조금 더 은밀하며 암시적이었다.
루시펠라 역시도 그러한 대화법을 배웠다. 다른 이도 아닌 클로렌스로부터.
클로렌스가 보기에 루시펠라는 상당히 훌륭한 제자였다.
***
제드는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 앞에 선 루시펠라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베일을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드리스 공작은 가식적인 표정으로 눈물을 지었고, 참여한 테미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드는 이오지프가 왔나 찾아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클로렌스만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 칼리드가 보란 듯 루시펠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루시펠라의 옆에 서 있는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장례식이기에 칼리드는 웃지 않았지만, 그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젠 완벽하게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고.
제드는 칼리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칼리드는 그 눈을 피하고 루시펠라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가 제드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러자 루시펠라의 가느다란 허리와 등이 보였다. 제드는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루시펠라는 관 앞에 새하얀 꽃을 올리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꽃을 들고 관으로 걸어가기까지 그녀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우아했으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부디 아스트라의 품에 편히 안기소서.”
루시펠라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다가와 관 위에 꽃을 두기 시작했다. 그녀는 베일을 쓴 채 관 위에 꽃을 올리는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제드는 꽃을 든 채 관 앞으로 다가갔다.
장례식장을 지키던 신전기사단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경계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하얀 꽃을 관 위에 올려둘 뿐이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베일에 가려진 루시펠라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반투명한 베일 안에 보이는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했다는 것, 단지 그것만으로도 왈칵 그리움이 밀려왔다.
잘 지냈냐고, 어디 아픈 곳은 없냐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허용치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그녀의 숨소리 하나, 베일 안으로 보이는 눈의 깜빡임, 손의 미약한 움직임까지 집중했다. 마치 그녀가 도움을 청하면 당장이라도 데리고 도망 나갈 것처럼.
“애도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루시펠라는 그를 ‘제드’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그것이 아쉬웠다.
제드는 무엇이라고 더 말을 하고 싶었다. 이 짧은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심지어 그는 루시펠라의 손을 잡고 이곳을 달아나고 싶었다.
다시 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공작.”
칼리드가 루시펠라의 어깨를 당기자, 그들만의 일시적인 세계는 깨져 버렸다.
루시펠라는 칼리드 쪽으로 등을 돌렸다. 아까 주고받은 시선은 착각일까 생각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태도였다.
칼리드가 무슨 행동을 한 건가? 제드는 칼리드를 바라보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공께서 고생이 많군.”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아이딘 영애를 위해서라도.”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치가 떨렸다. 그러나 제드는 이 순간 모든 감정을 억눌렀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저놈의 목을 쳐버릴 것이다. 그는 살기를 억누른 채 덤덤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아이딘 백작의 장례식은 평탄하게 흘러갔다.
그 누구도 요란스럽게 울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딸인 루시펠라조차도.
그 울음 없는 고요한 장례식 속, 루시펠라는 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반투명한 베일 뒤에선 그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운구를 할 때, 사건은 일어났다.
루시펠라 아이딘이 사라진 것이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