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기사는 목숨을 바친다
2018.06.28.
“그래서, 네가 죽였다고?”
루시펠라의 물음에 칼리드가 미소 지었다.
모든 이가 돌아가고 그녀는 자신의 방 안에서 칼리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죽인 건 내가 아니라 이드리스 공작이지. 나는 그냥, 조금 거들었을 뿐이야.”
“거들었다고?”
“그냥, 그의 비밀 광산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이야. 나머지는 그가 다 알아서 다 하더군.”
그녀는 칼리드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이딘 백작의 어리석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불신, 그리고 범해 버린 최악의 실수.
칼리드는 자신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채자마자 일부러 아이딘 백작에게 접근했다. 아이딘 백작이 그를 관찰하듯, 칼리드 역시도 그를 관찰했겠지.
루시펠라가 에스텔임을 확신하기 위해 그는 함정을 팠으며, 루시펠라가 알아채지 못한 곳에서 그녀를 손아귀에 틀어쥐기 위한 함정을 깔아두고 있었다.
에스텔이 칼리드를 믿었듯, 아이딘 백작도 칼리드를 믿었다. 그리고 똑같이 배신당했다.
그 결과 제드와의 약혼은 파기되었고, 그녀는 이제 대리인이 된 칼리드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너, 나 때문에…… 그 사람을!”
“진짜 아버지도 아니잖아, 에스텔. 무슨 문제야?”
그는 나긋하게 말하며 티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그 우아한 모습에 살의가 샘솟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억눌렀다.
“그는 딸인 루시펠라 아이딘이 행복하길 바랐지만, 선대 공작의 아들인 제더카이어 하인트와 행복해지길 결코 바라진 않았어. 그래서 약혼에 승낙하면서도, 약혼을 깨고 싶어 했지. 참 간사한 사람이야.”
“…….”
“그 사람이 하인트 공작에게 지독한 열등감을 가졌다는 것은 조금만 조사하면 쉽게 알 수 있거든.”
루시펠라는 이를 갈았다. 완벽하게 당한 것이다.
“행복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모든 걸 잃어버린 기분은 어때?”
칼리드가 그녀를 조롱하듯 비웃었다.
“그러니까, 날 그때 죽였어야지. 얄팍한 동정과 온정에 날 살린 게 네 잘못이야. 너는 언제나 그렇게 마음이 여렸지.”
번뜩이는 희열이 가득한 자안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 욕구를 억눌렀다.
그때 죽였어야 했다고? 그것이 동정과 온정이라고?
그런 얄팍한 마음으로 그를 놓은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에 대해 미안함을 품었기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당했는데도 저놈을 믿었다. 이렇게까지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녀가 생각하지 못한 최악의 짓을 저질렀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칼리드가 당연한 듯 대답했다.
“네가, 나를 버리려고 했잖아.”
그가 서 있는 루시펠라를 올려다보았다. 저녁, 달빛이 서린 그의 보라색이 서늘하게 반짝였다. 그의 두 눈에는 그녀에 대한 강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칼리드가 자리에 일어서더니 루시펠라를 향해 다가왔다.
“네가, 나를 끊어내려 했잖아.”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 그는 루시펠라의 어깨를 꽉 잡아 눌렀다. 그 악력에 그녀가 그것을 뿌리치려 했으나, 칼리드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제더카이어 하인트. 그 사람과 함께하려고 했잖아!”
칼리드가 버럭 소리쳤다. 그것이 마치 커다란 죄라도 된다는 듯, 칼리드는 원망을 토해냈다.
루시펠라는 이를 악물며 그의 발을 걷어찼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친놈, 내가 널 떠난 이유는 네가 날 죽여서잖아!”
왜 인연이 끊겼는가, 왜 그녀가 제드를 선택했느냐에 대한 자기반성 따윈 없다. 그저 칼리드는 에스텔이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과거로 남기려고 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놈이 이렇게 어린애 같은 사람이었나?
아니면 미쳐서 이렇게 변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는 칼리드의 얼굴에 대고 소리쳤다.
“내가 원망스러워? 그래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너, 나를 좋아한다면서 그냥 내가 괴롭길 바라는 거지? 내가 생전에 네게 그렇게 잘못한 거야? 빌어먹을 나라를 위해서 같이 뒈지자고 한 게 그렇게 싫었어? 그럼 말을 하고 도망가지!”
“에스텔, 그건!”
“다시 살아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게 못마땅해? 너 없이 행복하려는 게 싫어?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야! 그걸 받아들여야지, 애새끼처럼 징징대는 걸 보니 구역질이 나오려고 해.”
그녀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칼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난 널 더 싫어하고 경멸하게 될 거야. 날 아직도 모르겠냐?”
“널 모른다고?”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에스텔, 나는 너를 정말 잘 알아.”
칼리드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넌 날 용서하게 될 거야.”
“미친 소리.”
루시펠라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녀는 칼리드의 얼굴에 대고 차갑게 미소 지었다.
“네가 아는 내가, 널 절대 용서할 리가 없잖아. 이 미친놈아.”
그녀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칼리드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 어깨에 손을 떼고 손을 내렸다. 그는 애써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확신해 봐.”
그가 루시펠라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싸늘한 시선과 칼리드의 시선이 마주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루시펠라는 칼리드를 보며 물었다. 칼리드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뻔하잖아, 에스텔? 바로 너야.”
“…….”
“정말로 사랑하고 있어, 에스텔.”
그는 또다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드의 고백과 달리 가슴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 감정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루시펠라는 경멸을 숨기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칼리드는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서늘하게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날 사랑하도록 노력해, 에스텔.”
“…….”
“그렇지 않으면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불사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것은 협박이었다. 루시펠라는 이 녀석이 정말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와 평생을 같이해 온 그의 가족이자 동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그에게 품은 두려움을 애써 숨기며 미소 지었다.
“그거 이상하네.”
“뭐?”
“내가 널 용서할 거라 그렇게 확신하면서 지금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가지고 사랑하라고 협박하잖아.”
“…….”
“자신 있는 거 맞아? 자신이 있다면 협박을 하진 않겠지.”
턱을 틀어쥐는 힘이 더 강해졌다. 루시펠라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기도 확신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에 칼리드의 눈이 커지더니, 턱을 잡은 손을 놓았다.
“여전히 허세는 잘 부리는군.”
그는 으르렁거리듯 말하더니 그녀를 두고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방에 혼자 남은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쉰 채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여전히 신전기사단과 또 황태자가 보낸 것으로 보이는 2기사단이 있었다.
그녀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마지막에 봤던 제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살벌한 대치는 분명 유혈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의 수보다 신전기사단의 수가 더 많았다. 제드가 여기서 더 버티다간 다칠 수도 있었다.
“제드, 우선 물러가 있어.”
“…….”
“괜찮아. 내가 이야기해 볼게.”
그녀가 안심시켰지만 제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지금 이 순간, 그가 신전의 주적이 된다는 것이 두려웠다. 제드가 대리인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으면, 신전의 권한에 불복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스트라를 믿고 있었으며, 아스트라의 신전과 틀어진다면 그들이 어떤 식의 보복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부탁이야, 제드.”
루시펠라가 그에게 속삭였다. 제드의 두 눈이 커졌다. 처음으로 하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그는 루시펠라가 살짝 웃자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공작 각하께서 물러나신다고 합니다. 무기를 치워주시고 물러나 주십시오.”
루시펠라의 말에 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들이 뽑아 들었던 검을 다시 검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별의 시간도 허용되지 않는 짤막한 순간이었다.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루시펠라와 제드가 동시에 그 말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에 루시펠라는 상황도 잊고 피식 웃었다. 그에 제드 역시 마주 보며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것처럼.
그녀는 이것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고, 제드 역시도 이것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한 게 아닌가. 짧은 이별이냐, 아니면 오랜 이별이냐의 차이였다. 루시펠라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그래서, 황실에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이거로군.”
제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오지프 역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지프의 얼굴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내려앉아 있었다.
“아이딘 백작의 죽음이 이렇게 대사건이 될 줄은 나도 몰랐어.”
이오지프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신전에 돈을 대체 얼마나 먹여둔 건지.”
제드는 이를 갈았다. 신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이딘 백작의 유언 집행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다. 마치 짠 것처럼.
“신전이 꼭 돈을 먹어서 그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것이 아닐 거야. 그들도 황위 싸움에 뛰어든 거지. 아이딘 백작의 죽음은 구실이고.”
이오지프가 힘없이 말했다.
신전은 신전기사단을 파견하면서까지 유언의 집행을 요구했다.
따라서 1황자파인 칼리드 루이르크가 아이딘 백작가를 거머쥐게 되었다. 심지어 신전은 신전기사단을 파견하여 아이딘 백작가를 호위하도록 했다.
유언의 집행이 ‘안정적’으로 되기까지 도움을 주겠다는 게 그 구실이었다.
칼리드와 아이딘 백작의 거래를 몰랐던 것인지 1황자파는 갑작스러운 행운에 환희했고, 2황자파는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제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분노에 몸이 떨렸다. 아이딘 백작의 어리석음에 분노하고, 칼리드 루이르크의 그 야비함에 분노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어리석음이 원망스러웠다.
그간 제드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경위로 그와 그녀를 맺어주려 했는지 따윈 생각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알아낸 몇 가지 정보로 아이딘 백작이 루시펠라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지레짐작해 그를 경멸했다.
만약 제드가 백작의 생전 그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라도 했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몰랐다.
아이딘 백작은 끝까지 루시펠라와 제드의 사이를 의심했다. 딸을 사랑했던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줬다면, 이런 어리석은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겠지.
과거에 지나치게 매몰된 것은 아이딘 백작만이 아니었다. 거짓된 사랑이라는 것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여, 아이딘 백작의 사랑을 지레짐작한 채 멀리했다. 자신 역시 이 참담한 결과를 불러일으킨 공범이었다.
“아이딘 백작도 결국 순진한 사람이었어. 내게 자금을 지원하며 칼리드 루이르크를 살려달라고까지 이야기했는데 그 인간이 배신을 할 줄 몰랐던 거지.”
“칼리드 루이르크가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 않았나?”
“글쎄, 몇 번이고 우회적으로 기색을 내비쳤지만, 백작의 고집은 단단하더군. 그렇게 강하게 설득하다간 여차하다 나한테서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었어.”
“……그렇군.”
제드는 팔에 턱을 괸 채 씁쓸하게 웃었다.
약혼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들 사이에 약혼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통했고, 서로를 강렬하게 원하며 사랑했다.
루시펠라가 칼리드 루이르크를 사랑할 리가 없다. 그렇게 강제적인 수단을 취해 손아귀에 넣고 가둔 이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는가.
칼리드 루이르크의 선택은 너무나도 비이성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제드는 칼리드 루이르크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았다. 그도 그런 그릇된 욕망을 품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얼샤에서 루시펠라가 사라졌을 때, 자신이 품었던 음험하고 더러운 욕구를 떠올렸다. 칼리드가 그런 감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빌어먹을 새끼.”
“욕해봤자 소용없어. 아이딘 영애를 앞으로 보긴 힘들 거야. 대리인 칼리드 루이르크가 방침을 그렇게 정한 것 같으니까.”
“빌어먹을 법 같으니.”
제드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대리인으로 지정되는 이는 가문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가문의 준가주가 되는 것이다. 대리인의 권한을 유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가문의 여성이 장성하여 후계를 낳을 때까지다.
그 말은 루시펠라가 결혼하지 않으면 계속 그 대리인의 ‘보호’ 아래 있게 된다는 소리였다.
루시펠라가 제드의 아이를 가졌다면 이 일은 쉽게 해결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피임은 철저히 했기에 전혀 가능성이 없었다.
아이딘 백작은 이것을 알았을까. 아니, 그만큼 칼리드 루이르크를 믿었으니 자신이 이렇게도 빨리 죽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나는 내 약혼녀를 되찾을 방법이 전혀 없다는 소리군.”
“가문의 대리인인 칼리드 루이르크가 약혼을 취소했으니 그렇지. 만약, 네가 아이딘 영애를 억지로 데려오면 그건 납치야. 황실 재판에 회부되게 돼. 신전 역시도 반발할 거야. 제국민의 지위를 잃을지도 모르지.”
이오지프의 진지한 표정에 제드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말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내 약혼녀를 되찾을 방법이 전혀 없다는 소리였어.”
이오지프가 턱을 괸 손을 떨어뜨린 채 놀란 표정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군사라도 일으키겠다는 건가?”
“나쁘진 않겠지. 너를 황제로 추대하고, 나는 내 사랑하는 약혼녀를 되찾고, 그 후 적당히 명분을 붙여서 신전 놈들을 설득하고, 이 일에 가담한 신관 놈들을 축출하는 것.”
“하지만 제드, 만약 시작하게 된다면 이건 우리 측에서 먼저 내란을 일으키는 거야. 반란이라고.”
언제나 유해 보였던 이오지프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제드는 그것을 서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언제나 전쟁을 무서워하던 그 꼬마 시절에서 벗어난 게 아니었나, 이오지프?”
“약혼녀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자는 발상이 이상한 거야! 그러는 너는 영토 확장만 외치던 부황의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너야말로, 이게 내 약혼녀를 구할 뿐만이 아니라 너와 황후 폐하를 구하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나? 테미르가 황위에 오르면 너도 황후 폐하도 죽어.”
제드의 말은 살벌했지만 진실이었다. 이오지프 역시도 알고 있었다. 황제에게 남겨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테미르가 황위에 오르면 이오지프도 죽일 것이다.
이 와중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법이라는 것을 그들이 이용하고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 버린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력을 쓰는 것뿐이었다.
여기, 그 무력에 특화된 이가 있다. 제드라면 군사를 일으켜 철저하게 전복시키겠지. 테미르가 본격적으로 아이딘 백작의 재산을 굴려 세력을 만들기 전에 수도를 치면 된다.
이오지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란을 일으킨다는 건 얀스가르가 불바다가 된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얀스가르가 어지러우면 제국에게 점령당한 다른 나라들이 독립을 외치며 들고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 말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초조해 보였다. 이오지프는 애써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생각했다.
승산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아직 시간은 있어. 그때까지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지.”
이오지프는 가장 안전한 보류를 선택했다. 이 일은 결정하기까지 검토가 꼭 필요했다.
그 우유부단한 태도를 본 제드가 입을 열었다.
“이오지프.”
“왜?”
“내가 예전에 말했지. 네 미래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
“지금 기꺼이 내던져 주지. 내 목숨 말이야.”
이오지프가 본 제드는 삐뚜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오지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 따위에 목숨을 바친 게 아니다.
루시펠라 아이딘, 아니, 에스텔 슈페르트라는 이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