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잘못된 신뢰
2018.06.25.
복수를 결심한 아이딘 백작은 자신을 도와줄 이를 찾았다.
가장 큰 적인 이드리스 공작, 바반드 백작, 포에르 백작, 모두 다 황태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질적인 한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칼리드 루이르크였다.
자신의 권력에 도취된 인간은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이딘 백작은 언제나 눈치를 봐왔던 이였기에 알 수 있었다.
루이르크 공작은 어딘지 모르게 다른 이들과 달랐다.
루아나의 나라에서 온 남자. 자신의 상관을 배신하고 그 목을 잘라 바치고 이곳에 뛰어든 남자.
황제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칼리드 루이르크를 받아들였다.
물론 완전히 그를 신뢰하지는 않았기에 경고의 의미로 반역으로 처형된 이의 집을 하사했으며, 영지는 없었지만 그를 제국의 공작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망국의 왕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그런데 왜 그는 굳이 황태자파에 가담한 것일까? 단순히 명예만을 위해서 그런 것일까?
아이딘 백작은 칼리드 루이르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끔 드러나는 황태자에 대한 서늘한 경멸을 볼 때마다 그는 저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딘 백작은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칼리드 루이르크는 그야말로 황궁의 개였다. 황태자가 어떠한 지저분한 짓을 저질렀어도 처리하며 보필했다. 그런 그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고? 그건 자신의 착각이겠지.
그러나 먼저 다가온 이는 자신 쪽이 아니라 칼리드 루이르크였다.
당시 아이딘 백작은 수도에 체류하면서 기묘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황태자는 마치 보란 듯 검은 머리의 여자에게 잔혹한 벌을 내렸다. 그것이 루시펠라를 겨냥하는 것 같았다.
루시펠라가 안전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했지만, 아이딘 백작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느꼈다.
얼마 후 영지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딸아이가 상단으로 위장한 도적들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냉정한 아버지가 되어야 했고, 대신 쉐인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야 그는 영지로 내려갔다.
쉐인의 보고에 따르면 칼리드 루이르크와 제더카이어 하인트가 딸아이를 구했다고 했다.
아이딘 백작은 점점 더 제더카이어 하인트의 존재가 껄끄러웠다.
그러나 루시펠라가 살인범에게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보였던 제더카이어 하인트의 무성의한 태도와 영지에 먼저 내려갔던 쉐인의 보고는 그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그래도 결혼하자마자 이혼할 약혼녀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주다니, 그쪽도 나쁜 사람은 아니네.”
백작령의 성안에서 루시펠라는 분명 그렇게 말했고, 하인트 공작은 부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딘 백작은 그것으로 루시펠라와 제더카이어 하인트 사이에 이혼이 협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하인트 공작이 순순히 약혼에 응했다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유언을 이행하기 위해 루시펠라와 결혼을 하고 바로 이혼을 한다니. 이혼하는 여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는 건가? 루시펠라가 철이 없어 그렇다고 하지만, 대체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영민하며 섬세한 이라고? 저 남자가 대체 다른 귀족놈과 다를 게 뭐지?
황태자가 루시펠라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을 알고 분노했다. 그런데 하인트 공작 역시 자신의 딸을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것인가.
루아나가 그래서 죽었다. 그녀는 그저 선대 공작을 괴롭히기 위한 도구로 이용당했다.
그는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선대 공작은 루아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배제된 약혼 관계에서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루시펠라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날 밤, 누군가 그의 방에 찾아왔다. 칼리드 루이르크였다.
그는 그 얼굴을 보고 애써 분노를 억눌러야만 했다. 보고를 듣자마자 그는 칼리드가 황태자의 명령을 받고 딸아이에게 위해를 끼치려 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기 때문이다.
방 안에 들어온 칼리드 루이르크는 백작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백작.”
갑작스러운 루이르크 공작의 깍듯한 사과에 백작은 할 말을 잃었다.
“처음부터 아이딘 영애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공작의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의례적인 사과라고 생각하며 백작은 적당히 받아주는 척 넘기려 했으나 칼리드 루이르크는 집요했다.
“정말입니다. 임무를 성공시킬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백작께서 저를 믿지 않고 있…… 으윽!”
칼리드가 괴로운 듯 등을 감쌌다.
“공작?”
“괜찮습니다. 거의 다 나았습니다. 가끔 쓰릴 뿐입니다.”
아이딘 백작은 그제야 칼리드 루이르크가 루시펠라를 구하려다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다란 마물들 사이에서 루시펠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 쉬운 일일까?
백작은 예전, 황태자를 따라 루시펠라를 비웃던 귀족놈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놈들은 절대 딸아이를 구하지 않겠지. 황궁의 개인 저 사람이 거부할 권한이나 있었겠는가.
백작의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다.
“의원을 부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사실 이곳에서 치료를 받는 것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백작은 선량해 보이는 루이르크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간신히 진정을 하곤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이딘 백작, 제가 산에서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내민 것은 보석의 원석이었다. 아이딘 백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게 대체 왜 거기서 나온 것인가.
“이 정도 크기가 되는 원석이 산에 굴러다닐 정도라면, 아이딘 백작께서는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셨단 말씀이겠군요.”
아이딘 백작은 예전, 보석을 채굴하다가 마물의 흔적을 발견하고 급하게 내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흔적이 산 곳곳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낭패다. 설마 이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알리기라도 했다가는…….
루이르크 공작이 그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 비밀을 아는 것은 저뿐입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것뿐이니까요. 전 황태자 전하께 이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왜 내게 그러는 겁니까?”
“아이딘 백작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훅 찔러오는 그 말에 아이딘 백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백작의 침묵에도 루이르크 공작은 별 상관이 없는 듯했다.
백작은 칼리드 루이르크가 다른 이들과는 다른 것 같다는 자신의 판단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칼리드 루이르크도 자신을 관찰해 왔다는 것도.
아이딘 백작의 경계 어린 시선에 칼리드가 웃으며 말했다.
“백작, 저는 백작의 적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칼리드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아이딘 백작은 이 의뭉스러운 남자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루이르크 공작은 그에게 친밀감을 표시하는 일이 갈수록 잦아졌다. 아이딘 백작은 루이르크 공작의 부탁에 말을 낮추기 시작했다.
그는 겸손했으며, 생각보다 권력에 대해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루이르크 공작은 가끔 황태자파가 어떤 일을 꾸미는지 알려주어 백작이 소외되지 않게 했으며, 때로는 이들의 화풀이를 피하도록 도와주었다.
황태자파의 귀족들이 비틀린 폭력성을 발휘할 때, 때때로 대신 그것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아이딘 백작은 그에 대한 신뢰가 점점 쌓인다는 것을 느꼈다.
때때로 칼리드는 얼샤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배신자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탓했다.
자신을 낳자마자 얼샤의 국왕에게 암살당한 어머니, 그가 기사가 되자마자 왕에게 축출당했던 아버지. 마치 그를 조롱하듯 평민 여기사 밑에서 일하게 한 국왕.
그것도 모자라 끊임없는 목숨의 위협을 당해왔다는 그의 고백을 듣고, 아이딘 백작은 그가 왜 나라의 배신자가 되었는지 진심으로 이해했다.
루이르크 공작은 참으로 선량하고 가여운 이였다. 그는 자신이 수도에 섞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황태자의 명령을 따르기가 때론 힘들다는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것은 아이딘 백작 역시도 마찬가지였기다.
이것은 약한 사람들의 유대였다.
아이딘 백작은 깨달았다. 칼리드 루이르크와 자신은 동류였다.
그렇게 그들의 사이는 친밀해졌다.
루이르크 공작은 자주 그의 집에 왕래했다. 혹여나 눈에 띌까,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비밀스러웠기에 그 누구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아이딘 백작은 칼리드를 의심했다. 대체 왜 저 청년이 자신에게 살갑게 접근하는지.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백작저에 방문한 칼리드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한 지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루시펠라의 방 창문이 보였다.
칼리드는 오랫동안 그것을 응시했다.
그 짙은 갈망의 시선에 아이딘 백작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내 그는 괴로운 듯 눈을 감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짙은 슬픔이 녹아든 그 얼굴을 보며 아이딘 백작은 그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내 딸을 마음에 둔 건가?”
아이딘 백작의 물음에 칼리드 루이르크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칼리드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아릿했다. 아이딘 백작은 무어라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걱정 마십시오. 귀찮은 일은 아무것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일으킬 생각도 없고요.”
그러나 칼리드가 한 말은 ‘포기’였다. 마치 루아나를 마음에 담았을 때 그가 느꼈던 감정처럼 그 역시 포기를 먼저 말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는 하인트 공작이라는 약혼자가 있지 않습니까.”
“…….”
“제게 남아 있는 것은 허울뿐인 작위밖에 없습니다. 그런 제가 영애를 탐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렇게 씁쓸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아이딘 백작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루아나와 선대 하인트 공작을 보며 괴로워하던 자신이 저기에 있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절로 향하는 마음은 멈출 수가 없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깊었고, 포기할 수 없기에 그만큼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는 칼리드 루이르크의 마음을 절실히 이해했다.
그는 고민했다.
루시펠라를 사랑하는 루이르크 공작, 그리고 루시펠라를 사랑하지 않는 하인트 공작.
그는 제드와 루시펠라가 나란히 걷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자 묘하게 속이 들끓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 기이한 비틀림을 억지로 숨긴 채 백작이 말했다.
“오늘부터 내 집에 오면 루시를 만나고 가도록 하게.”
루시펠라가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관없지 않은가. 결혼하자마자 이혼할 남자와 평생 소중히 아껴줄 사람.
어쩌면 그는 칼리드 루이르크의 처지에 자신을 지나치게 이입했는지도 모른다.
루시펠라의 자살 시도로 약혼을 진행한 게 자신의 실수였다고 그는 후회했다. 그는 선대 공작의 뜻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
그가 완성하려던 사랑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싶었다.
칼리드 루이르크는 일종의 대안이었다.
그는 그렇게 두 남자를 비교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칼리드 루이르크는 꽤나 끈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칼리드는 루시펠라에게 끈질기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꽃을 짓밟혀도 다시 꽃을 가져왔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림에도 칼리드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온 마음을 다했다.
그런 칼리드 루이르크가 눈에 들어오자 자연스레 하인트 공작이 거슬렸다.
그는 선대 공작을 닮은 하인트 공작의 오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루시펠라와 하인트 공작의 사이가 좋다고 하지만 틀렸다. 공작은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비틀린 망집에 눈이 가려졌기에 백작은 루시펠라가 정작 하인트 공작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사이가 점점 깊어짐을 알지 못했다. 아니, 그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했을지도 몰랐다.
그 남자의 아들과 루아나의 딸이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오지프를 비밀리에 후원하며 그는 이오지프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그가 황위에 오른다고 해서 칼리드 루이르크를 처벌하거나 정치적으로 보복하지 않을 것.
이오지프는 그 조건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받아들였고, 비로소 그는 자신이 원하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마법 팔찌를 구해달라 말씀하신 거로군요.”
“아무래도 루시가 걱정되어서 말이야.”
“그래도 그 팔찌가 있으니 안심입니다. 아이딘 영애가 먼 길을 떠난다고 하니 걱정했거든요.”
“이번 얼샤 원정에 돌아오는 길로 결정할 생각이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칼리드가 묻자 아이딘 백작이 대답했다.
“루시펠라의 배필이 될 사람을 말일세.”
“그게 무슨…… 아이딘 영애는 하인트 공작이 있지 않습니까?”
“공께서 내 딸아이에 대한 마음을 드러낼 때부터 딸아이의 배필로 공을 고려하고 있었네.”
칼리드가 놀란 듯 입을 다물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이딘 영애의 배필로 적당하지 않습니다. 백작, 그것은 성급한 선택인 것 같은데요.”
“공이 가지지 못한 것은 영지와 재력이지. 영지는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재력만은 내가 안겨줄 수 있네. 알고 있지 않나.”
“……그러고 보니.”
루이르크 공작은 아이딘 백작이 가진 재산에 대해서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 순진한 모습에 아이딘 백작은 피식 웃었다.
“난 루시가 그 원정길에 다녀와서도 하인트 공작을 선택하지 않으면 약혼을 파기할 생각이야. 내가 아는 루시는 하인트 공작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 영지에서도 이곳에서도 싸운다는 보고를 받았어.”
“…….”
칼리드는 그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해주십니까.”
“공을 믿기 때문일세. 하인트 공작이 내보이는 게 의례적인 마음인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네. 하지만 자네는 달라. 자네의 마음만은 확실하지.”
“확실하다. 제 마음이 그렇게도 뚜렷이 보인다는 말입니까?”
칼리드의 말에 아이딘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드는 고개를 숙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제 마음과는 달리 하인트 공작의 마음은 의심스럽고요?”
“몰랐나? 저들은 이혼할 사이였다네. 그러니 저리 완벽하게 위장을 해왔던 거라네. 나는 그를 믿을 수 없어.”
“백작께서는 하인트 공을 싫어하십니까?”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작께서는 꼭 약혼을 원하시지 않는 것 같군요.”
그 말에 아이딘 백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칼리드의 말에 그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자각했다.
마치 루아나와 선대 공작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평생 보고 싶지 않았다. 지독한 고집임에도 그러했다. 칼리드는 조용히 백작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만약 아이딘 영애가 하인트 공작과 결혼을 원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이딘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당연히 루시펠라가 하인트 공작을 거절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인트 공과 아이딘 영애가 행복하게 산다면 더 바랄 것은 없습니다만, 분명 공작께서는 결혼하자마자 ‘이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백작께서 염려하는 것은 그 부분이고요.”
“그랬지.”
“그 부분에 대해 조금 생각이 필요할 것 같군요.”
칼리드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백작에게 말했다.
“백작, 저는 평생 아이딘 영애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녀가 하인트 공작에게 버림당하든 당하지 않든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다른 여자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은 이미 그녀의 것이니까요.”
그의 두 눈은 열정에 반짝였다. 루시펠라를 지켜보는 칼리드의 두 눈을 보면 누구라도 저 사람이 지극히 깊은 사랑에 빠졌음을 알 것이다. 그는 결심한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를 안전장치로 쓰십시오. 그녀가 이혼을 하더라도 저는 그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뭐? 안전장치라니, 그런…….”
“제가 원하는 일입니다.”
칼리드의 눈은 단호했다. 아이딘 백작은 그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발, 백작께서 제게 주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칼리드 루이르크는 간절했다. 그 간절함에 아이딘 백작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이기심 따윈 버리기로 했다.
“안정장치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저 백작께서는 방비책만 마련해 주시면 됩니다.”
칼리드가 미소 지었다. 그가 내건 방비책이라는 것은 너무도 간단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도, 애인을 만들지도 않을 테니, 백작의 사후를 대비해 아이딘 가의 대리인의 자격을 달라는 것. 그것은 루시펠라만을 평생 바라보겠다는 그의 맹세였다.
그 조건은 칼리드 루이르크에게 너무나 불리한 것이었다.
자신이 죽은 뒤 루시펠라가 이혼을 당한다면, 가문을 지키는 칼리드 루이르크가 그녀를 보살펴 주게 된다.
심지어 칼리드는 그 서약서 안에 루시펠라 이외에는 평생 결혼도, 연애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었다. 백작의 ‘사후’까지 루이르크 공작은 혼자 살아야만 했다.
딸아이가 하인트 공작과 이혼하든 이혼하지 않든.
칼리드 루이르크는 지금 루시펠라를 위해 인생을 던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루시펠라와 하인트 공작이 얼샤로 떠나자, 그는 칼리드의 조언에 따라 신관에게 유언장을 작성했다.
보통 신관의 인장이 없더라도 유언장에 쓰여진 내용을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굳이 거금을 지불하여 신관의 인장을 받은 이유는 하인트 공작이 유언을 거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혹 무슨 사고로 자신이 죽게 되면 루시펠라의 재산은 하인트 공작에게 넘어가게 되기 때문에 이는 필수적이었다. 그는 몇 가지의 세부 사항을 지정하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됐다. 이것으로 안심이다.
아이딘 백작은 지나치게 칼리드에게 자신을 대입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죽음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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