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37화 (137/173)

#137화 진정한 상속자

2018.06.21.

“그렇게 약혼이 이루어졌습니다.”

루시펠라와 제드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생각해 보니 선대 공작이 대신관의 도장까지 찍힌 유언장을 남기면서까지 왜 그녀와 제드의 약혼을 시키라고 한 것인지, 이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딘 백작과 선대 하인트 공작, 그들에게 그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선대 공작은 루아나의 딸인 루시펠라와 그의 분신인 자신의 아들을 맺어주려 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광기도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제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드 역시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의 목울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분명히 할 말을 찾고 있겠지. 루시펠라는 그에게 말을 거는 대신 다시 고개를 돌려 쉐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2황자 전하께 도움을 드렸던 것이군.”

“네. 그랬습니다. 당시 주인님께서는 복수하고 싶으셨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2황자 전하가 비로소 두각을 드러내면서 그분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했지요.”

이드리스 공작가라는 거대 가문에 복수하기에 그는 힘이 없었다.

그 광산을 소유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건 더욱 위험한 짓이었다. 그는 바로 제거당하고, 재산은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선택한 것은 조용히 지내는 것이었다. 황태자가 황제가 될 때, 그의 권위를 흔들리게 하여 이드리스 공작을 제거하는 것이 그가 세운 목표였다.

그런데 이오지프가 나타났다.

루시펠라가 루아나의 모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수상하여 조사한 결과,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에게 접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로에르 후작 영애를 둘러싼 분쟁에서 이오지프의 본모습을 알아챘다.

그는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게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무시당했던 자신이 어떻게 복수를 하는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딸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만 했다.

딸아이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루시펠라에게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테미르는 그가 혹시라도 앙심을 품진 않을지 경계할 것이다.

“아가씨는 아마도 주인님께 많은 서운함을 느끼고 계셨을 겁니다. 매정한 아버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주인님께서는 아가씨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결국 자신을 사랑했다는 말만큼 허망한 말은 없었다.

심지어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루시펠라가 들었어야 했던 말이다. 그녀는 씁쓸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렇게 복수하시려다 실패했군.”

쉐인이 그 말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황자 전하에게 자금을 댄 것이 들통 난 것 같습니다. 나머지 산에 있는 광맥의 존재도 들켜 버렸고요. 이드리스 공작은 2황자 전하께서 내신 자금의 출처를 꽤나 집요하게 추적해 왔습니다.”

“…….”

“아가씨가 얼샤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셨던 주인님은 광산에 침입자가 있다고 해서 영지에 급하게 내려가셨습니다. 저도 함께였지요.”

“…….”

“한데 기다리던 건, 주인님을 납치하려는 무리였습니다. 그중 한 명은 이드리스 공작가의 수하였지요. 저항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팔을 잘린 채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쉐인은 생각하기도 고통스럽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의 잘린 팔 위에 손을 얹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두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평생을 지키자고 맹세했습니다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수에 저와 제 수하들은 죽어 나갔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절벽 틈에 떨어진 채 살아남아 주인님의 고함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나머지 한 손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쉐인은 그때의 참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런 소리 하지 마. 혼자 살아남은 게 경의 탓은 아니잖아.”

그녀의 말에도 쉐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억울하게 가시다니, 그분의 생을 생각하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쉐인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딘 백작의 인생은 너무나 가엽고 비참했다.

열등감과 무력감, 절망이 그의 인생에 함께했으며, 사랑하는 이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복수심도 그와 함께했다. 루아나가 죽은 뒤 그는 행복한 적이 있었던 걸까.

딸을 보면서도, 아니, 딸을 보며 그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조용히 불태웠을 것이다.

루시펠라는 그간 아이딘 백작이 딸을 사랑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듯한 그 무관심의 간극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딘 백작은 역시 딸을 사랑했던 것이다.

루시펠라가 된 에스텔이 병에 몸져누웠을 때, 자신을 대신 데려가라고 했던 기도가 그의 진심이었다. 그녀가 느꼈던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걸 루시펠라가 알았어야 했는데.

호수에 몸을 던진 것이 그저 사랑에 눈먼 이의 어리석은 행동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모든 것에 절망하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루아나와 아이딘 백작의 생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쉐인 경, 그런데 정말 내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그 물음에 쉐인은 고개를 들어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옆에 서 있는 제드에게 몸을 돌렸다.

“제드도 내 어머니가 선대 공작 각하를 사랑했을 거라고 생각해?”

제드는 그 말에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아니라고 생각해.”

루시펠라가 단언했다.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결국 어머니가 선택한 건 아버지였잖아.”

“하지만 그건 마님께서 하인트 공작 각하의 후실이 되기 싫어서…….”

“그 말은 후실이 될 정도로 그분을 지극하게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지. 반대로 따져 보자면 그 대단한 하인트 공작가에서 호사를 누리는 것보다, 가난함과 초라함을 감수할 정도로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거야.”

그 말에 쉐인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물었다.

“딸이니 알 수 있다는 겁니까?”

“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었기에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거야.”

그녀가 진짜 루시펠라 아이딘이 아니었으므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아이딘 백작은 평생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루아나가 다른 이를 사랑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들어보니 그건 분명 아니었다.

“어머니는 항상 웃었다고 했잖아. 날 낳고 더 웃으셨고.”

“…….”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웃으셨겠어?”

“하지만 주인님의 말대로라면 가끔은 후회하는 표정을 지으시지 않았습니까. 선대 공작께서 잦은 출정으로 다치셨을까 염려도 하셨고요.”

“어머니가 그래서 그렇다고 말했어?”

“…….”

“그리고 지나간 사람이긴 해도 공작 각하를 걱정할 수는 있잖아. 가볍게 생각하면 알고 지내던 사람이 전쟁터에 나간다고 하면 누구라도 걱정하지 않을까?”

“결혼을 결정하시기로 한 날에 눈물을 보이셨던 건…….”

“그건 좀 어렵네. 그래도 선대 공작 각하가 제드를 닮았다면 꽤나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말일 테고, 꽤나 끌려서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닐까?”

그 말과 함께 루시펠라의 시선이 제드에게 향하자, 제드가 헛기침을 하곤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제드를 닮아 꽤나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그러는 듯했다.

“그 말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 끌렸다는 게 꼭 사랑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거야.”

“…….”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와 만나서 행복했고, 날 낳았던 걸로 되었던 건데 아버지는 생각이 너무도 많으셨어. 지나치게 자신이 없으셔서 당신을 의심하고, 그게 큰 화를 불렀지.”

“…….”

“병에 걸려서 어머니께서 아버지보고 죽여달라고 했던 것도, 난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

“그냥, 원망하기 싫었던 거야. 점점 더 아파가고 나약해져 가면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게 싫었겠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보다는 빨리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 거고.”

“…….”

“아버지에게 상처가 되겠지만, 자길 죽일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으니 그렇게 부탁한 걸 거야.”

그렇게 말하던 루시펠라는 문득 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죽는다면 말이야, 그 녀석 손에 끝나고 싶어.”

예전, 에스텔이었을 적, 분명히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야 기억났다. 비참하고 비굴하게 죽느니 차라리 저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끊어주길 바랐다.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그녀는 루아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백작에게 커다란 상처가 되었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쥐었다. 모든 게 정리되고 진상이 밝혀졌다. 아이딘 백작은 이드리스 공작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하나네. 이드리스 공작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말이야.”

본래 성격 같았으면 그 목을 따버렸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녀는 이를 갈았다.

“어머니도 죽이고, 아버지도 죽이고, 대리인의 권한까지 빼앗으려 하다니.”

외사촌 동생인 루시펠라 아이딘, 그녀에게 이 얼마나 잔인한 상황이란 말인가. 그녀는 이드리스 공작에 의해 모든 가족을 잃었다.

그때였다.

“대리인의 권한을 말씀하십니까?”

쉐인의 물음에 제드가 대신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아이딘 백작의 시신이 발견되자마자 이드리스 공작은 대리인의 권한을 손에 넣어 가문에 대한 통솔권을 가지려고 했어.”

“그런! 하지만 대리인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을 텐데요? 이미 대리인은 지정되었습니다!”

“대리인이 지정되었다고?”

제드의 물음에 쉐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서히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그 사람이 배신했다면…….”

“‘그 사람’이라니?”

그때, 제드가 갑자기 루시펠라를 자신의 뒤로 세웠다.

제드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철컥이는 소리가 들렸다. 갑주를 입은 이들의 발소리였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드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 노크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루시펠라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그를 응시했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칼리드였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이들은……

‘신전기사단!’

신전에 소속된 기사단이었다.

신전은 신전의 권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면 함부로 기사단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이 왜 갑자기 들어온단 말인가. 게다가 칼리드는 대체 왜 저 자리에 서 있는 거지?

그때, 칼리드가 제드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각하. 무례를 용서하시길.”

“여긴 무슨 일이지? 이곳을 시끄럽게 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제드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에도 칼리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여유롭게 쳐다보던 칼리드의 두 눈이 이내 루시펠라를 향했다.

루시펠라는 그 시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알고 있던 칼리드의 시선이 아니었다. 이제는 숨기려 하지도 않은 채, 그는 노골적으로 루시펠라에 대한 탐욕과 갈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제드가 몸을 움직여 칼리드의 시야를 차단하자 칼리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더니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뭐지?’

그때, 신관 중 한 명이 루시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펠라 아이딘 백작 영애에게 알립니다.”

“…….”

“루이보스 아이딘 백작은, 생전 칼리드 루이르크에게 ‘대리인’의 권한을 주었습니다.”

“뭐……?”

루시펠라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제드 역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리드가 우아하게 신관에게서 서류를 받아 펼쳐 들었다.

신관의 인장이 찍혀진 종이가 보였다. 신관이 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스트라의 신전은 루이보스 아이딘이 남긴 유언에 신의 이름을 새기고, 그 집행을 보증합니다. 유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 루이보스 아이딘은, 내 사후 아이딘 가의 대리인의 권한을 칼리드 루이르크에게 위임한다. 이는 칼리드 루이르크가 평생 혼인하지 않거나 다른 여자를 취하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진다. 대리인이 된 칼리드 루이르크는 가문을 이끌어가며, 루시펠라 아이딘이 마땅한 후계자를 생산할 때까지 그 권한을 가진다.”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아이딘 백작이 칼리드에게 대리인의 권한을 주었다고? 이런 미친 경우가 또 어디 있는 거지? 아이딘 백작과 칼리드가 그런 사이였나?

그러다가 루시펠라는 최근 들어 칼리드가 자주 백작저를 방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도 안 돼.”

“영애는 신전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신관의 서늘한 말에 루시펠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신전은 진실을 상징한다. 특히나 이런 서류에 신전의 ‘인장’이 찍혔다는 것은 대륙 전역에 있는 신전의 이름을 내걸고 그것을 보증한다는 소리와 똑같았다.

신전과의 대립은 별로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본관들과 신전기사단은 하인트 공작의 기사들이 아이딘 가를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전에서는 유언의 집행을 요구하며, 하인트 공께서는 기사들을 속히 물려주시기를 청합니다.”

말이 청한다는 거지, 이것은 물러나라는 명령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아이딘 백작가 내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는 말이었다.

제드도 루시펠라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칼리드와 아이딘 백작의 유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칼리드였던 것일까. 왜 아이딘 백작은 칼리드를 대리인으로 선택한 것일까.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쉐인은 ‘배신’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만약 칼리드, 저 녀석이 이걸 노리고 있었다면…….

“네 짓이구나.”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며 말했다. 그에 제드가 눈을 크게 뜨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칼리드에게 지나치게 말을 편하게 했다는 자각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아이딘 영애?”

칼리드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네가…….”

네가, 아이딘 백작을 죽였던 거야. 그녀는 비로소 주위의 눈치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녀는 칼리드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후회하게 될 거야.”

그 독기 서린 말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리드는 달랐다. 그는 이미 그녀를 손에 넣을 덫을 놓고 차근차근 준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 신관분들의 말을 들었으니 하인트 공께서는 이곳에서 나가 주시겠습니까. 이제 이 저택의 관리인은 접니다.”

그는 막강한 신전의 권한을 등에 업은 채 이곳에 왔다.

제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아이딘 백작의 살해용의자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미심쩍은 대리인의 존재에 대해 나보고 납득하라는 건가?”

칼리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심지어 웃고 있었다.

“듣자 하니, 이드리스 공께서 대리인의 자격을 주장했지만 폐하께서 그 이유를 들어 보류하자고 하셨다더군요.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제겐 신관의 인장이 있어요. 신전이 이 권한을 보증한다는 겁니다. 그건 폐하도 거부할 수 없어요. 폐하가 신과 싸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알아들었다면, 이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칼리드의 말은 모욕적이었다. 그러나 제드는 그것에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목소리로 말했다.

“내 기사들은 물리도록 하지. 하지만 난 약혼녀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그는 끝까지 루시펠라의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루시펠라는 그 와중에 제드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안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었다.

“아이딘 가의 루시펠라 아이딘과 하인트 가의 제더카이어 하인트의 약혼은 오늘부로 파기합니다.”

칼리드의 말에 루시펠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제드 역시도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굳은 표정 속, 칼리드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약혼자의 자격을 주장하신다면 약혼을 파기하는 수밖에요. 이로써 약혼은 끊어졌고, 아이딘 백작가와 하인트 공작가는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되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루시펠라와 제드의 약혼이 끊겼다. 이제 이들은 아무 사이가 아니게 된 것이다. 칼리드 루이르크의 한마디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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