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36화 (136/173)

#136화 그를 이야기하다 (5)

2018.06.18.

루시펠라가 황태자와 가깝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드리스 공작이 지나가듯 몇 번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까. 그러나 이 정도로 깊은 사이일 줄은 몰랐다.

“루시, 그건 불가능하단다. 황태자 전하와 결혼이라니. 그분은 우리 가문과는 다른…….”

“아버지, 저는 그를 사랑해요.”

루시펠라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표정에 아이딘 백작의 마음이 흔들렸다.

저 간절한 표정,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애끓는 마음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지 알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런 부탁 한 적 없었잖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루시.”

황태자의 배필을 누구로 만들지 황제와 황태자파의 귀족들이 철저하게 계산하며 물밑에서 대립하고 있다는 걸 이 철없는 딸아이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루시, 알잖느냐. 우린 그럴 힘이 없어.”

“그럴 힘이 없다고요?”

백작의 거절에 그녀가 차가운 비웃음을 지었다. 아이딘 백작은 자신의 딸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것은 루아나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이드리스 공작 같은 인간에게 그렇게 매달려 놓고서도 그럴 힘이 없다 이 말인가요?”

“루시, 네 당백부에게 무례하구나.”

그는 딸아이의 태도에 낯선 감정을 느꼈다. 낯선 감정은 그 즉시 불쾌감으로 표출되었다.

“듣자 하니 너는 이드리스 공녀에게도 그렇게 무례했다지?”

그 말에 루시펠라의 눈이 놀란 듯 커지더니, 이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를 쏘아보더니 소리쳤다.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무엇이?”

“이드리스 공작이 어땠는지 아버지는 모르시잖아요!”

루시펠라가 새파란 분노가 어린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버지, 그 사람 장례식에서 어땠는 줄 알아요?”

“…….”

“웃고 있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백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착각한 거겠지.”

“이럴까 봐 말하지 않으려 했어! 아버지가 제 이야기를 안 들어주실 걸 알았으니까!”

그녀가 소리쳤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그때 방에 있었고, 아버지는 울고 계셨어요. 제 방 앞에서 그 사람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루시, 그만…….”

“그 사람이 그랬어요. 엄마보고 질기다고, 너무 늦게 죽었다고 투덜거렸어요! 아버지더러 끝까지 멍청하대요. 또 ‘그 재수 없는 놈’이 울부짖는 걸 볼 수 있으니 좋다고 그랬어요! 얼른 수도에서 그걸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만하라지 않느냐!”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어요. 어머니 약을 살 돈을 준다고 해놓고서 계속 미뤘다죠? 그 사람, 일부러 그랬던 거라고요! 엄마가 죽길 바랐던 거예요!”

“루시펠라 아이딘!”

그가 루시펠라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제가 왜 멜로즈, 그 계집애한테 그런 줄 모르시면서! 걔네 아빠는 남의 엄마를 죽이고 잘 살아가는데, 그 애는 엄마랑 같이 행복하게…….”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심지어, 제가 무례했다는 걸 알았는데도 제게 왜냐고 물어보지 않았던 거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명백한 실망의 표정. 그는 마치 루아나가 그에게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대체 절 사랑하시긴 하나요?”

아이딘 백작은 망연하게 딸아이가 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등을 두드려 줄 생각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상하게도 갑자기 손이 가지 않았다.

그간 그렇게 수도에 정착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면서, 가끔 보는 딸아이는 항상 웃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한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우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더라?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낯설어졌다.

그는 자신이 보낸 세월 동안,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시펠라를 루아나처럼 만들지 않기 위해 광산을 발견한 졸부라고 조롱받는 귀족에서, 황태자파로 안전하게 자리매김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권력을 원했던 것은, 두 번 다시 루아나와 같은 삶을 루시펠라가 겪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권력을 탐하기만 하다 죽은 아버지와 지금 자신이 다를 바가 뭔가?

아이딘 백작은 서글피 흐느껴 우는 루시펠라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주먹을 바르르 떨며 입을 몇 번이고 열었다가 닫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쉐인을 시켜 급하게 피존 블러드를 캐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전하, 루시펠라를 받아주십시오.”

테미르가 턱을 괸 채 아이딘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한쪽 입꼬리는 올라간 채였다.

그는 황태자를 따로 혼자 만날 기회가 없었고, 따라서 다른 귀족들이 모인 곳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이드리스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한심하다는 듯 아이딘 백작을 바라보았다.

“외숙,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루시를 받아줘, 내가?”

테미르가 웃으며 이드리스 공작에게 말을 건넸다. 이드리스 공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이딘 백작이 사리분별이 안 되나 봅니다.”

그 정도는 예상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꿇은 무릎이었지만, 딸아이를 위한 것이다. 루시펠라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광산을 내걸고 황태자와 거래할 생각이었다. 그는 품 안에 든 보석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당숙, 루시는 참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그 애를 귀엽게 여겨서 잠깐 동안 곁에 두었다고 덜컥 받아주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될 건지 생각은 해본 겁니까?”

“전하.”

“당숙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아셔야죠. ‘시골에만 처박혀 있다가 그깟 얼마 안 되는 광산 때문에 수도로 올라온 졸부’가 숙부의 위치라는 것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주변의 평판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딘 백작은 품에 있는 보석을 꺼내서 이것이 가치가 없냐고 따져 물으려 했다. 그러나 테미르의 말에 그는 하려던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 애는 자기가 황후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당숙, 지금에 와서야 말하지만, 그 아이는 얼굴과 그 몸을 빼고는 볼 게 없어요. 철이 없고 질투심은 많고, 사근사근한 맛은 없어서 제가 몇 번이고 짜증이 났지요. 하지만 당숙의 얼굴을 봐서 참았답니다.”

“…….”

“어디가 예쁘다고 그 애를 내 안사람으로 들입니까? 아시잖습니까. 그냥, 같이 있어서 즐거울 정도지 평생 함께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게 멍청하고 사회성이 없는 아이를 제 처로 들인다고요? 후처라도 부족합니다.”

루시는 황태자를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말했다. 한데 저놈은 그런 제 딸에게 대체 무슨 폭언을 하고 있단 말인가.

“루시가 나를 많이 좋아하긴 하지요. 그런데 요즘은 너무 절 따라다녀 지겹더군요. 주제를 알라고 말하기까지 했는데,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는지 계속 따라다니더군요. 그렇게 멍청하다니. 설마 당숙, 아직도 그 애가 저를 그리워하는 겁니까?”

테미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테미르는 그것이 흥미로운 듯했다.

자신의 딸아이는 저 인간을 마음에 담았다. 심지어 황태자가 일방적으로 고한 헤어짐을 견딜 수 없이 괴로워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부탁이라는 것을 하면서 무너져 내리며 울었다. 그런데 저놈에겐 그것이 고작 흥밋거리일 뿐인가?

그가 이드리스 공작처럼 잔인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과 루시에게도 향할 줄이야.

자신은 황태자파가 아니었나? 10년 동안 황태자의 밑에서 일해왔다. 그럼에도 왜 그는 자신을 모욕하고, 자신의 딸을 모욕한 것인가.

“그 아이도 절 잊을 수 있을 겁니다. 얼굴도 어여쁘고, 그 아이의 매력은 밤에 있으니까요. 분명 누구라도 좋아할 겁니다. 머리만 조금 영리하면 좋을 텐데, 아니, 좀 아둔한 것도 매력이 되겠지요.”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에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따라 웃었다. 심지어 그나마 믿고 있던 이드리스 공작 역시도 우습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이곳에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자신과 자신의 가문은 있으나 마나 했던 것이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결국, 그는 끝까지 비굴해질 수 없었다.

황궁에서 돌아온 아이딘 백작은 쉐인에게 뒷조사를 시켰다. 그는 이 일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깨달았다. 적어도 이드리스 공작은 피를 이었기에 자신을 다르게 대한다고 생각했지만 똑같았다.

“그 사람, 일부러 그랬던 거예요!”

루시펠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백작은 그제야 루아나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때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기에 몰랐다.

루아나의 약을 살 돈을 모은다고 이드리스 공작이 말했기에, 백작은 하인트 공작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드리스 공작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돈을 주지 않았고, 그가 하인트 공작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을 땐 하인트 공작이 떠나고 없는 바람에 그는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이드리스 공작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마치 그를 농락하듯 그녀의 죽음 뒤에 약을 구해왔다. 그렇게 재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때 약을 딱 구해왔겠는가.

이드리스 공작가의 재력이 정말로 그 약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던 것일까.

그는 처음으로 든 의심에 괴로워하며 생각해 내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계속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루시펠라의 냉대와 외면이었다.

루시펠라는 무능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실망을 대놓고 내비쳤다.

마치 루아나가 내비치는 것 같은 그 분노와 실망에 아이딘 백작은 이후로 더더욱 루시펠라를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루시펠라가 하녀들에게 패악을 부린다는 것을 알았으며, 때로는 발작하듯 소리를 지른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백작은 그것을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쉐인이 뒷조사를 끝내고 돌아왔다.

“우리 영지는 산과 강으로 가로막혔는데 어떻게 전염병이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이상합니다. 백작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드리스 공작이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병자가 발견되었다더군요.”

“아드리스 공작이 다녀가고 나서 첫 번째 병자가 발견되었다고?”

“조사해 보니 당시 의원 말에 따르면 발견된 병자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미 죽은 이였기에 자세히 조사하지는 못했습니다.”

“…….”

“그 환자를 진찰한 의원의 말에 따르면 그 첫 번째 환자가 병을 앓으면서 젠버라는 도시에 다시 데려다 달라고 말하곤 했답니다. 젠버는 이드리스 공작령 안에 있는 도시고요.”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끔찍한 가정에 아이딘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미심쩍어 조사를 명했지만,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루시펠라의 외침이 스쳐 지나갔다.

“‘그 재수 없는 놈’이 울부짖는 걸 볼 수 있으니 좋다고 그랬어요!”

루아나가 죽어서 울부짖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바로 그녀를 사랑했다던 하인트 공작이었다.

“그 재수 없는 인간이 다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인트 공작 각하께선 완벽한 기사니까요.”

영지에 방문한 이드리스 공작은 하인트 공작더러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했다. 루아나와 하인트 공작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 내용은 똑똑히 기억난다.

이드리스 공작은 어려서부터 하인트 공작을 싫어해 그를 대놓고 ‘재수 없다’며 미워했다. 그는 하인트 공작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으나, 불행히도 언제나 망신만 당해 그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인트 공작은 누구보다 루아나를 사랑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도 못할 만큼 절실하게.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 이드리스 공작이 약을 준다면서 시간을 미뤘는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 자신과 그녀의 결혼으로 하인트 공작을 좌절시킨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그는 하인트 공작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싶었던 것이다.

루아나에게 병을 퍼뜨린 것이 이드리스 공작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아나는 병에 걸렸고, 이드리스 공작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그녀의 죽음을 조장했다는 게 중요했다.

아이딘 백작은 당장에라도 그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몸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세상의 온갖 고통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처음으로 유순한 그 눈빛에 살의가 돌았다.

저들은 자신들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에, 그렇게 소소한 행복을 깨부수는 것에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숨 쉬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불행과 슬픔으로 점철되어도 그것이 유희거리였던 것이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피눈물이 흐르는 듯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때 그는 하인트 공작의 연락을 받았다.

연락을 받고 가서 본 하인트 공작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가 생각하는 하인트 공작은 언제나 강건한 무인이었다. 언제나 특유의 단단한 기운이 있었고, 나이를 먹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두 눈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앉게.”

그는 공작의 말에 자리에 앉았다. 아이딘 백작은 공작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설마 저 사람도 루아나의 일을 알아버린 건가? 그러나 하인트 공작이 입을 열자마자 나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죽네.”

아이딘 백작의 굳은 표정을 보고 공작이 피식 웃더니 옷을 걷어 올렸다. 깡마른 손가락으로 힘겹게 셔츠를 올리자, 배를 가로지르는 끔찍한 푸른색 상처가 보였다.

“몇 달 전 마물 토벌전에서 상처를 입었지. 금방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상처가 병이 되더군. 참으로 지독한 상처야. 젊었을 때라면 몰라도 나는 지금 이걸 이겨낼 수가 없네.”

“……하인트 공자에겐 말해둔 것이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왜 하인트 공자가 없는 것인지 의아했다. 그에 공작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돌아올 때까지 버티지 못할 거야. 하물며 군공이라도 세워야 그놈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나?”

실로 치가 떨릴 것 같은 귀족의 사고방식이었다. 아이딘 백작은 그것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일로 부른 것이오?”

“자네가 수도에서 안간힘을 쓰던 걸 계속 봐오고 있었지. 참으로 헛된 몸부림이었어. 그놈들은 자네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 말에 백작이 공작을 노려보았다. 어째서인지 수치심에 몸이 떨려왔다.

그것이 헛되다고? 모든 것을 가진 이에겐 그가 했던 것이 ‘발버둥’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

그는 이드리스 공작이 저놈 때문에 어떤 짓을 벌였는지에 대해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결과적으로, 그놈에게 속아 넘어간 것은 어리석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 남자가 아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때, 하인트 공작이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자네를 업신여기고자 함이 아니네. 나 역시도 안간힘을 썼지. 다른 생각이 나면 미칠 것 같았거든.”

“그게 무슨 말이오?”

“나 역시 루아나를 잊고자 했네. 그래서 선택한 게 나라였지. 난 그간 나라를 위해 다른 길을 만들려 노력해 왔어.”

‘다른 길’이라니? 저 사람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얀스가르에 하나의 미래만 있는 건 아니네.”

그의 말은 무언가 의미심장했다. 하나의 미래만 있는 게 아니라니, 황태자를 이르는 말인가?

그러나 아이딘 백작은 그의 말을 분석할 여유 따윈 없었다.

“이제 날 왜 부른 것인지 말해주었으면 좋겠소만.”

“죽기 전에 자네에게 제안할 게 있어서 불렀네.”

“……무엇을?”

공작이 아이딘 백작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신관의 인장이 찍혀 있는 그것은 하인트 공작이 남기는 유언장이었다. 유언장의 내용은 간단했다.

―하인트 가의 후계자,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아이딘 가의 루시펠라 아이딘과 결혼함으로써 가문에 대해 모든 권한을 위임받는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분명히 하인트 공자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자신의 딸과 결혼을 한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네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네.”

제국의 일등 신랑감이라던 하인트 공자와 부족함이 많은 자신의 딸이 약혼한다.

하인트 공자는 너무나도 뛰어난 이였다. 그런 이가 루시펠라의 남편이 된다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하인트 공작가에 시집을 보내라고?

아이딘 백작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본 하인트 공작이 의자에 기댄 채 말했다.

“루아나의 죽음을 알고 나는 자네를 죽이려고 영지에 찾아가기까지 했어.”

백작은 하인트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힘 빠진 밤색 눈동자에 깃든 살의를 보고, 그는 공작이 여전히 루아나를 잊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죽이지 않았던 거요?”

“루아나를 닮은 딸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지.”

“…….”

“그 긴 머리칼도, 눈매도, 얼굴도 모두 다 루아나를 쏙 빼닮았더군. 그래서 생각했지. 그 아이를 우리 가문에 데려오자고.”

“…….”

“자네의 여식은 루아나를 닮아 아름답네. 한데 왜 그 아이에게 정식으로 구혼하는 사람이 없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은 있는가.”

“설마…….”

“자네는 딸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군.”

루시펠라에게 구혼하는 이가 없던 이유는 루시펠라의 성격이나 보잘것없는 가문 탓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하인트 공작이 손을 썼기 때문이란 말인가?

“대체 왜…….”

“이렇게라도 그녀와 연결되고 싶으니까.”

“…….”

그는 하인트 공작의 얼굴을 보았다. 힘이 빠져 있다고 생각하던 그의 눈동자에는 미처 꺼지지 않는 불길이 자리해 있었다.

그는 삶의 끝에 다가가는 남자의 광기를 보았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아들과 사랑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던 이의 분신과 같은 딸을 맺어서 결국 그녀와 연결되겠다니, 생각지 못한 발상이었다.

“완전히 미쳤군.”

“그래, 그녀는 날 미치게 만들었지.”

그는 주먹을 꽉 쥐며 두 눈을 빛냈다.

“잊으려 했지만 잊을 수 없었어. 나는 그렇게 그녀를 떠나보낸 후 괴로워했다네.”

아이딘 백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저 남자를 진정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저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백작은 이 순간 공작이 진심으로 부럽고 증오스러웠다.

자신은 루아나에 대한 죄책감과 복수심을 안고 살아야 하는데 저 남자는 그저 이루지 못한 사랑 타령만 하다 자신보다 먼저 루아나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이란 말인가.

“자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듣자 하니 그 아이, 황태자에게 농락당하다 버림받았다지? 그런 자네의 여식이 선택할 수 있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기껏해야 자네보다 못한 작위 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겠지.”

“…….”

“내 아들은 나처럼 어리석지 않아. 섬세하고 영민하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해 후처를 들이지도 않을 거야.”

“…….”

“하인트 공작가가 최고의 선택이야.”

그의 눈은 어딘지 모르게 절박해 보였다. 아이딘 백작의 두 눈은 그 절박한 그 시선으로 향했다.

하인트 공작가에 루시펠라가 들어가게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루아나와 아이딘 백작이 겪었던 것처럼 비참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되며, 명예와 부를 거머쥐게 된다. 더군다나 영지 내에 숨겨져 있는 피존 블러드 광맥에 대한 처리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생전 이드리스 공작에게 복수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딸아이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인트 공작가는 너무나도 완벽한 혼처였다. 그가 절실히 원해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키지 않았다. 딸아이를, 루아나의 흔적을 어떻게 하인트 공작가에게…….

그 망설임을 본 하인트 공작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이 유언장을 남길 것이네. 선택은 백작이 알아서 하게.”

“…….”

“드디어 루아나를 먼저 만날 수 있겠군.”

그가 너무도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아이딘 백작은 하인트 공작의 부고를 들었다.

하인트 공작은 끝까지 그를 앞서 나갔다. 언제나, 언제나 그랬다. 그는 이 괴로운 삶을 벗어난 하인트 공작을 부러워하며, 저주했다.

그가 죽은 다음 날, 신전에서 하인트 공작의 유언장이 도착했다.

그는 유언장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결국 마음을 이기다 못해 황궁 호수에 몸을 던져 버린 가여운 딸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걱정 마렴, 내 딸아.”

이 아비의 자존심이 무엇이 그렇게 대수겠니.

그때 그는 루아나를 닮은 그녀와 하인트 공작을 닮은 공작의 아들이 손을 잡고 걸어간다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체와 같은 딸의 얼굴을 본 그는 유언장에 답변을 보냈다. 그렇게 지독한 독과 같은 계약이 성립되었고, 인연 없는 남녀가 약혼으로 맺어졌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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