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그를 이야기하다 (4)
2018.06.14.
그들은 자그마한 영지에서 소박하지만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백작령의 안주인이 된 루아나는 격식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으며, 가끔 성 밖으로 나가 영지민들과 시간을 보냈다. 영지민들은 아이딘 백작가의 새로운 안주인을 기꺼이 환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아이를 가졌고, 그다음 해 사랑스러운 딸을 낳았다.
자신과 그녀의 사랑의 결실이 세상에 태어나 첫울음을 운 그때.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 절감했다. 아내의 소원대로 그는 아이를 루시펠라, 샛별이라고 이름 지었다.
루아나를 닮은 외모에 자신의 눈동자를 빼다 박은 딸.
그렇게 둘은 셋이 되었고, 그는 비로소 가족과 함께 있으면 행복한다는 루아나의 말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눈물 나리 만큼 행복한 일상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긴 웬일이야?”
“그냥, 네가 잘 있나 보러 왔어.”
프레드가 영지에 찾아왔다. 그는 기뻐하며 자신의 친척을 맞았다. 프레드가 아니었으면 그는 루아나와 결혼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드리스 공작은 죽었고, 프레드는 이제 그렇게 되길 염원하던 이드리스 공작이 되어 있었다.
이드리스 공작은 1왕자를 다음 대 왕으로 추대하고 싶어 했다. 그는 여전히 화려한 수도의 귀족이었다.
루아나와 그는 간만의 수도의 정세에 대해 들었다.
왕비 루크레치아의 죽음 이후에도 2왕비 프리실다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여전히 사교계를 휘어잡지 못했고, 2왕자 이오지프는 프리실다를 닮아 유순한 성격이라 국왕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에 비해 테미르는 자신감이 넘쳤기에 차기 국왕감이라고 말했다.
국왕은 여전히 정복전쟁에 열심이었으며, 때로 전쟁이 어려울 시 하인트 공작을 불러 정복전쟁에 참여시켰다.
갑자기 나온 하인트 공작의 화제에 그는 루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으나, 치맛자락을 꾹 쥐고 있었다.
“그래서, 공작 각하는 다치지 않으셨나요?”
아이딘 백작은 그녀의 질문에 충격을 받았다. 루아나는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딘 백작의 눈이 흔들렸다.
“그 재수 없는 인간이 다칠 리가 있겠습니까. 하인트 공작 각하께선 완벽한 기사니까요.”
이드리스 공작이 차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대화가 끝날 때까지 아이딘 백작은 하인트 공작과 루아나에 대해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그 저열한 질투심을 숨기고 또 숨겼다.
이드리스 공작이 다시 떠나고, 영지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루아나는 이따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으나, 언제나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지에 전염병이 퍼졌다.
홍열병.
너무나도 강력한 죽음의 병이었다. 쉽게 전염되지는 않았으나 감염된 이는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소박한 그들의 보금자리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람들이 고통받자 루아나는 환자들을 돌보겠다고 나섰다. 아이딘 백작이 말렸으나 루아나는 그의 만류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이들이 죽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아이딘 백작은 최대한 그녀가 무사하도록 의원을 붙여놓았다.
그러나 전염병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미안해요.”
병의 진단을 받은 루아나가 아이딘 백작에게 처음으로 했던 말이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럴까 봐 환자들을 돌보지 말라고 했던 건데, 그녀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를 가둬두기라도 했으면 괜찮았을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했던 것이 잘못된 것일까?
그녀가 병에 걸려 죽는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을 믿지 못했다. 너무나 커다란 행복에 익숙해졌던 그는, 자신의 방심이 자신을 다시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모두 모아 의원들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당시 행하던 홍열병은 얀스가르 전체에 퍼져 있었고, 귀족들마저 감염되어 약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올라 있었다.
가난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작은 영지를 팔아도 약을 살 수는 없었다.
그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루아나는 점점 시들어갔다.
그 아름다운 용모도, 언제나 별처럼 총총히 빛나던 눈도.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보다 고통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이 일을 해결할 수 없다고 깨닫자마자 아이딘 백작은 말을 타고 수도로 향했다.
그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공작위에 오른 프레드 이드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느냐, 아니면 하인트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느냐. 고민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직도 루아나는 하인트 공작을 떠올리면 표정이 흐려졌다. 그리고 가끔 그를 그리워하는 듯했다.
그런 루아나가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것이 하인트 공작이라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어쩌면 루아나는 자신을 버릴 수도 있었다. 겨우 얻은 행복이다.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드리스 공작을 선택했다. 그러나 일은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미안. 우리도 힘들어.”
“제발 부탁이야!”
“내가 힘들다고 했어. 우린 1왕자의 권위를 위해 많은 자금을 썼어. 아무리 우리 공작가라지만 그런 큰 금액을 덥석 주긴 힘들어.”
이드리스 공작은 아이딘 백작의 절실함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이딘 백작은 비굴하게 빌었다. 힘이 없기에,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 다였다.
그가 한나절 동안 꿇어앉아 애걸하는 모습을 본 이드리스 공작은 무언가 생각난 것인지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힘을 써볼게.”
“정말이야?”
“그래. 그래도 자금이 모으기까지 일주일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
그 부드러운 말에 아이딘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그때까지 약만 구하면 된다. 루아나는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겠다고 그와 약속했다.
“걱정 마. 너는 내 사촌이잖아.”
그에 아이딘 백작의 두 눈에서 눈물이 어렸다. 그는 가끔가다 화에 못 이겨 폭력을 썼지만, 그저 거친 성격일 뿐이었다. 언제나 그는 폭력을 저지른 후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더 잘해주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사촌의 선량함을 믿어버렸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드리스 공작이 더욱 비틀리고, 잔혹한 사람이라는 것도 모른 채.
약속한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나 돈은 준비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나흘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약속한 기일이 더 지나 보름이 지났을 때도 약조한 자금은 준비되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서야 이드리스 공작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 아무래도 한 달은 더 걸릴 것 같아.”
여기서 한 달이 넘으면 루아나가 죽을지도 모른다. 아이딘 백작은 그제야 하인트 공작저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부름에 바로 어제, 튀링겐 정벌전쟁에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러 가고 없었다.
가주가 없는 하인트 공작저는 한 여자를 위해 도움 따윈 주지 않았다.
그녀를 아꼈다는 국왕 역시도 출정하여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채였다. 그는 이드리스 공작가에 들어가 다시 애걸했지만, 지금 당장은 도와주기 힘들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는 루아나가 걱정되어 영지로 돌아갔다. 루아나의 병세는 심하게 악화되어 있었다. 그녀는 눈을 뜨지 못했으며 말 역시 하지 못했다. 대신 백작이 들을 수 있는 것은 딸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엉엉, 아버지!”
딸은 아버지를 발견하자마자 그에게 안겨들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끌어안았다.
그때, 루시펠라가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아버지 보고 죽여달래요!”
루시펠라는 잔혹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그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너무도 충격적인 말에 그는 차마 루시펠라를 달래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루아나가, 자신에게 죽여달라고 말한다.
그녀는 명백히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결국 이렇게나 형편없이 무력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드리스 공작이 도움을 주기 전까지 견뎌달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루아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마와 싸우며 루아나는 괴로워했다.
그녀는 발작하는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병든 루아나를 끌어안은 채 울었다.
“제발, 조금만 참아줘. 루시와 내가 있잖아. 제발.”
그렇게 루아나는 애써 살아남으려 노력했고, 희망고문 같은 이드리스 공작의 서신은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는 앓아누운 루아나를 바라보았다.
탐스럽던 검은 머리는 푸석해져 있었고 새하얀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붉었다. 두 눈에는 핏줄이 서 있었고, 백조처럼 우아한 목은 고통에 손으로 잡아 뜯느라 언제나 피딱지투성이였다.
병세는 더욱 심해져 갔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이딘 백작은 그 부탁만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그녀가 나을 수 있을 거라고 어리석게 믿고 있었다.
그날은 참으로 평온한 날이었다. 언제나 가쁜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딘 백작은 안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조금 더 버티면 이드리스 공작이 도움을 주겠지. 조금만 참아보자. 나를 떠나지 마. 나와 루시펠라를 떠나지 말아줘, 루아나.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앞머리를 쓸었다. 그러나 이마에 느껴지는 건 서늘한 감촉뿐이었다.
이런 감촉을 느낀 적이 있었다. 임종을 맞이한 아버지에게서 익히 느꼈던, 생명의 불꽃이 꺼진 차가운 시체의 감촉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고통에 괴로워하다 겨우 평온을 찾아 눈을 감은 루아나의 얼굴을 본 아이딘 백작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겨울나무처럼 비쩍 말라 뼈만 남은 몸은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떠나 버렸다. 루아나가 자신을 두고 떠나 버렸다! 이 세상에, 자신을 혼자 남겨두고 떠나 버린 것이다.
그는 비통함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편히 잠든 루아나를 바라보았다. 죽음은 그녀에게 차라리 안식이었다.
영면에 든 그녀를 보고 아이딘 백작은 깨달았다.
아니다, 그녀가 떠난 게 아니다. 자신이 그녀를 죽인 것이다! 차라리 진작 하인트 공작에게 갔었다면! 그랬다면 그녀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몹쓸 열등감이 그녀를 죽게 했다!
“루아나, 나도, 나도 데려가!”
그의 얼굴에 흐른 눈물이 죽은 루아나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루아나의 그 아름다웠던 얼굴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이 변해 버렸다. 자신이, 그녀를 시들게 한 것이다.
그녀를 품을 자격조차 없었는데 감히 그녀를 탐했기에, 그녀가 이렇게 죽어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루아나아아아!”
그날 이후, 그의 인생은 지옥이 되었다.
***
“주인님께서는 계속 후회하셨습니다. 그때 선대 하인트 공작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고. 그렇게 해야 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하셨지요.”
쉐인의 말에 그녀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력했던 아이딘 백작은 평생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으리라.
그렇다면 그것을 마냥 아이딘 백작의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때 쉐인이 물었다.
“아가씨, 어머니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응, 병중이셨던 모습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
루아나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그저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느낌이 전부였다.
단 하나 선명히 기억나는 것은 죽어가는 루아나가 어린 루시펠라에게 ‘아버지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전해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이 루아나에 대해 기억하는 전부였다.
“아가씨는 마님의 장례식 때 발작을 일으키며 기절하셨습니다.”
“기절이라니?”
“심한 충격을 받아 그렇다고 합니다. 그때 이후로 아가씨는 마님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기억상실이 한 번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거네.”
“그렇습니다.”
너무도 쉽게 기억상실이라는 진단이 떨어지고 모두가 그것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랬구나.
루시펠라는 씁쓸하게 생각하며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는 루시펠라보다 더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드…….”
루시펠라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바로 루시펠라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미안해하지 마.”
“…….”
“선대 공작께서 출정하셨던 거잖아. 그건 제드의 잘못이 아니고 선대 공작의 잘못도 아니야.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어.”
그냥, 비극이 일어났던 것뿐이다. 어느 누구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제드의 어깨를 위로하듯 쓰다듬자, 제드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생각을 가다듬은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이딘 백작을 많이 오해했던 것 같군. 나는 영애를 두고 목숨을 끊으려 했던 백작을 한심하게 여겼어.”
“…….”
“특히나 영애가 먼저 그것을 보았다는 걸 알고, 아이딘 백작에게 분노하기까지 했지.”
제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쉐인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주인님께서도 후회하셨던 일입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혼자 두고 죽으려고 했다며, 주인님께서는 무척 자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대체 왜 날 방치했던 거야?”
루시펠라의 물음에 쉐인이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아가씨의 얼굴을 보는 게 괴로웠던 겁니다. 주인님은 어리석게도 아가씨를 마주 보는 것을 두려워하셨습니다.”
***
루아나의 비보가 전해지자 이드리스 공작이 그제야 약을 가지고 내려왔다.
간발의 차이로 루아나는 죽어버렸다. 사흘, 사흘만 참았으면 루아나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딘 백작을 슬피 울었다. 그렇게 그는 반 미친 상태로 지내다가 목을 맸다.
그러나 목을 고정한 끈은 떨어져 버렸고, 아버지를 찾던 루시펠라는 기절한 아이딘 백작의 모습을 보았다.
깨어난 백작은 충격받은 루시펠라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 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남기고 떠나려 했는지도.
자신에겐 딸아이가 있었다.
루아나와 자신의 사랑의 결실인 딸아이가. 이 아이를 두고 죽음을 선택하려 하다니, 그는 나약한 자신을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이 고단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그의 영지에 위치한 쌍둥이 산에서 산사태가 났고, 광맥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매장되어 있던 보석들은 루아나를 살리고도 남을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아내를 살릴 길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그것도 모른 채 다른 이들의 도움을 구걸하러 다녔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그는 한참 동안 미친 듯 웃으면서 운명의 장난을 저주하며 울부짖었다.
광맥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수도까지 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드리스 공작이 내려왔다.
그는 아직 이드리스 공작에게 앙금이 남아 있었다. 이드리스 공작이 좀 더 일찍 약을 구해다 주었다면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원망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의외로 이드리스 공작은 그를 만나자마자 그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아내의 일은 유감이야. 나도 노력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어. 정말 미안해.”
어리둥절한 그에게 이드리스 공작은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대신 사죄하는 마음으로 너를 수도에 자리 잡게 해줄게.”
1왕자 테미르는 이미 왕세자가 되어 차기 국왕이 되는 것이 확실시되었다.
그는 테미르를 보필하자고 했다. 그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그 토대를 같이 마련해 부귀를 누리자고 했다.
망설이던 아이딘 백작에게 이드리스 공작이 말했다.
“루시펠라까지 그렇게 만들진 말아야지.”
여기서 ‘그렇게’라는 것은 루아나의 비참한 죽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백작은 자신의 아버지가 권력을 얻기 위해 발버둥 쳤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다.
부와 명예가 없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 것인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딘 백작 역시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그것을 습득했다.
루시펠라 역시 자신처럼, 루아나처럼 초라하게 살다가 이 비참함을 겪게 할 것인가?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하인트 공작을 떠올랐다. 자신은 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남자와 비슷해질 수 있다면…….
죽어 있던 갈망과 불행에 대해 보상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일었다. 그는 결국 이드리스 공작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그는 수도의 귀족이 되었다.
이드리스 공작의 도움으로 그는 그렇게나 섞일 수 없었던 수도에서 섞일 수 있었다. 돈과 유력 가문의 비호가 있다면 이렇게나 쉬웠던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입지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수도에 자리 잡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딸에게 해주고 싶은 것은 다 해주었다.
화려한 집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그녀가 입는 드레스는 모두 공작가의 공녀들이나 입을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루시펠라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날로 루아나를 닮아가는 그 아이를 보면 그녀가 생각나 괴로웠고, 루시펠라를 두고 목숨을 끊으려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마주하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는 딸을 사랑하고 아꼈지만, 그녀와는 대화 한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갔다.
“주인님! 광맥입니다.”
그에게 또 다른 행운이 다가왔다. 광맥이 발견된 반대편의 산에서도 피죤 블러드 광맥이 발견된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맷시와 쉐인에게 나머지 산을 조사하라고 했던 게 이런 결과로 다가왔다.
그 엄청난 행운에 아이딘 백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루아나는 죽어버렸다. 이미 그 행운은 얄궂은 운명의 장난일 뿐이었다.
“이걸 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건 분명히 주인님의 입지에…….”
쉐인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쉐인, 사람들이 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백작도 이제 정치인이 다 되어 있었다.
곁에서 본 이드리스 공작은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었다. 탐욕스러운 그는 이제 어린 시절에 약간이나마 있던 온기 따위도 사라진 것 같았다.
최근 그는 혈연으로 엮여 있던 럭셀 백작가를 멸문시키고 재산을 강탈했다.
현재 아이딘 백작가는 약했고, 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다룰 만한 능력이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이드리스 공작은 자신의 가문을 씹어 삼킬지도 몰랐다. 현재 아이딘 백작가에는 정식 후계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딘 백작은 고심하다가 말했다.
“그 산에 마물이 나온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게 좋겠군. 또 따로 기사들을 배치하지 말고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저 산을 방치해 두는 게 좋을 걸세.”
“주인님.”
“자네와 맷시가 그 산을 조사해서 다행이야. 누구라도 광맥의 존재를 알았다간 저걸 뺏으려고 나를 공격하게 될 거야. 그렇다면 루시펠라도 위험해지겠지.”
백작은 자신이 탄탄한 세력을 손에 넣을 때 피죤 블러드의 존재에 대해 밝힐 생각이었다.
이제 누구도 무시 못 할 어마어마한 부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고지가 눈앞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완벽한 수도 귀족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정점에 선다면, 그도 루시펠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작 중요한 것을 잊었다. 방치된 루시펠라가 얼마나 외롭게 자랐는지, 그녀가 수도에 적응하는 데 얼마나 괴로움을 겪는지 알지 못했다. 문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황태자 전하와 결혼하게 해주세요.”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처음으로 그에게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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