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를 이야기하다 (3)
2018.06.11.
“주인님께서는 그 일에 크게 상심하셨습니다.”
루시펠라는 혀를 찼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한 채 모욕을 당했다면, 심지어 그것을 다른 이가 해결했다면 박탈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다. 분명히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결국, 루아나 마님을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주인님이 아니라 하인트 공작이었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셨지요.”
루시펠라가 제드를 바라보니 그는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그로서는 불쾌할 법했다.
루시펠라는 왜 쉐인이 제드를 내보내려 했는지 이해했다. 그때, 제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어.”
“응?”
“아이딘 백작 말이야.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었단 말이야.”
“…….”
“아이딘 백작이 낸 건 용기였고, 우리 아버지가 한 건 그냥 ‘대응’에 불과했어.”
루시펠라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는 루아나와 선대 하인트 공작의 이야기에 불쾌함보다는 아이딘 백작이 받은 상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새삼 그녀는 저 사람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아무 권력도 없는 인간이, 루아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에게 반발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반면, 선대 하인트 공작은 그들과 부딪혀도 보복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하인트 공작과 아이딘 백작의 차이였다.
아이딘 백작은 그 용기에 대해 자랑스러워해도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자책했다.
“주인님께서 각하께 그 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군요.”
쉐인이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평생을 선대 하인트 공작 각하에 대한 열등감으로 괴로워하신 분이니까요.”
“……대체 왜?”
루시펠라의 물음에 쉐인이 답했다.
“마님께서 하인트 공작을 사랑하셨다고 주인님은 굳게 믿고 계셨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왜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신 거야?”
“…….”
“이상하잖아. 하인트 공작가는 대단한 가문인데. 어머니가 백작가를 선택했다면, 그건 분명 사랑해서가 아니야?”
“그건……”
쉐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
퍽!
프레드의 발길질에 아이딘 백작은 나가떨어졌다. 프레드는 쓰러진 백작에게 다가가 그의 옆구리를 툭툭 찼다.
“너 때문에 근신당했잖아, 루이.”
이성을 잃은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아이딘 백작은 울컥했다. 그의 탓이 아니다. 그는 그저 그 일행에게 운 없이 걸려들었던 것뿐이다.
심지어 그 일이 있었다는 걸 이드리스 공작에게 알렸던 이는 자신이 아니라 하인트 공작이었다.
공작의 분노에 프레드 패거리들의 아버지들도 덩달아 분노했다.
그 패거리는 프레드도 같이 여자를 끌어들여 놀았다고 실토했고, 하인트 공작은 그에 분노하여 프레드에게 근신을 내렸다.
프레드는 하인트 공작이 그랬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딘 백작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그 노친네, 골골대며 꽤나 오래 사는데, 빨리 죽어버리지!”
그는 아이딘 백작의 손을 꾹꾹 밟으며 말했다. 아이딘 백작이 고통에 신음 소리를 삼켰다. 그러자 프레드가 더욱더 세게 손을 밟았다.
“아아악!”
아이딘 백작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자 그제야 그는 그 손에서 발을 뗐다. 프레드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 새끼, 나보다 일찍 공작이 되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
“언젠가 그 재수 없는 면상을 갈아버릴 거야.”
“…….”
“기대되지 않아, 루이? 난 언젠가 그 녀석이 괴로워 견딜 수 없게 만들어 버리겠어. 난 그 녀석이 싫거든. 너도 그렇지?”
“…….”
아이딘 백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프레드는 아이딘 백작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이딘 백작의 꼴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안,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어서 일어나.”
“…….”
“하인을 시켜서 약을 가져오라고 할게.”
프레드는 아이딘 백작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제법 정성스레 툭툭 털어주었다. 그에 아이딘 백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그런데 그 여자 말이야.”
“그 여자?”
백작이 몸을 경직시켰다.
프레드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그 여자 마음에 들지?”
“…….”
아이딘 백작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프레드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말 잘 들어. 그 여자와 결혼해. 나와 아버지가 도와줄게.”
“……그건 이미 틀렸어.”
아이딘 백작이 우울하게 말했다. 그에 프레드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왜, 하인트 공작이 그 여자에게 열을 올려서?”
“뭐?”
“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소문이 다 돌고 있더라. 그 여자가 처음에 입궁했을 때부터 하인트 공작이 그녀를 쫓아다녔대.”
“그렇구나.”
대충 짐작한 사실이라 놀랍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에게 확인받자 절망감이 들었다.
“그놈 얼굴에 엿을 먹이려면 네가 그 여자를 쟁취해야지. 너도 그놈을 싫어하잖아. 안 그래?”
“…….”
프레드는 아이딘 백작이 한심한 듯했다. 그러나 아이딘 백작은 프레드의 말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인트 공작과 루아나.
아이딘 백작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딱 한 명, 바로 하인트 공작이었다. 그는 하인트 공작처럼 당당하며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 아이딘 백작이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딱 한 명, 루아나 바네스였다. 그러나 그들은 완벽한 한 쌍이 되어,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왜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일까. 그렇게 그는 혼자만의 외로운 세상을 부유하고 있었다.
아이딘 백작이 이드리스 공작의 성화에 또 다른 연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는 어렵지 않게 자신을 찾아 헤매던 루아나를 만날 수 있었다.
“백작님?”
루아나는 결 좋은 검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려 꽃으로 고정시켰다. 그 싱그러운 꽃향기에 저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걱정했어요. 편지도 답장해 주시지 않고, 어떻게 된 건가요?”
그는 이드리스 공작저에 처박힌 채 그녀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별로 밝히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의 진실이 루아나의 귀에 들어간 것도 싫었고, 자신이 그녀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나약한 이였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것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하인트 공작과 비교하는 자신은 얼마나 형편없는 남자일까! 그 박탈감이 그를 병들게 했다.
“몸이 아파서 어쩔 수 없었어요, 영애.”
그럼에도 백작은 도저히 그녀에게 차갑게 대할 수는 없었다. 이런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고, 그 감정의 크기가 커다란 만큼 그녀가 너무도 소중했다.
하인트 공작이 구혼한다면 루아나는 분명히 그를 선택할 것이다. 가난뱅이인 자신 따윈 그녀의 안중에도 없겠지.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행복해서 견딜 수 없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그녀가 걱정스레 말하며 손을 들어 상처 입은 그의 입가를 쓸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렇게 격의 없는 만큼, 그녀가 자신을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영애.”
그때, 하인트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아나가 화들짝 놀라 그의 입술에 닿은 자신의 손을 떼며 뒤를 돌아보았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하인트 공작은 이제 드러내어 그녀에게 다가갈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이딘 백작을 견제와 경계가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하인트 공작의 시선을 받아내는 것도 힘들었다. 아이딘 백작이 눈을 피하자 그는 묘한 웃음을 보이며 루아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 좀 하지.”
“무슨 이야기요? 저는 지금 백작님과 이야기 중이에요.”
아이딘 백작은 그 말을 하는 루아나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았다.
왜 그녀가 손을 뗐겠는가. 공작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자신이 빠져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하께서 중요한 이야기가 있나 봅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백작님?”
“배려해 줘서 고맙군.”
하인트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의적인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은 아이딘 백작이 봐도 무척이나 준수했다. 생각해 보니 저런 인간이 자신을 경계할 리가 없었다.
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가서 루아나와 하인트 공작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때때로 루아나는 화를 내는 듯했고, 하인트 공작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 둘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가 손을 내밀자 루아나가 마지못해 손을 잡았다. 그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악몽처럼 되풀이되던 장면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것은 잔혹하리만치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아이딘 백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연회장을 나가 버렸다.
당연히 그녀는 하인트 공작의 후처가 되는 것을 선택하겠지. 그것이 그녀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일 테니까.
하인트 공작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프레드 무리의 수다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받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포기해야겠지.
그는 자신이 당할 실연에 대비했다.
그렇게 아이딘 백작의 일상은 계속되었다. 그는 그 후로도 여러 연회에 참석해 루아나를 지켜보았다. 도저히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인트 공작은 대부분 그녀 옆에 있었으며, 루아나 역시도 그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심지어 미소 짓기도 했다.
그러나 루아나는 때때로 아이딘 백작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럴 때면 하인트 공작이 다가와 눈치를 주었고, 그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이딘 백작은 루아나에게 자신이 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루아나에게 좋은 친구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하나의 계절이 지났다. 그동안 그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졌고, 까만 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삶은 때때로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러워 그가 처음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한 행복을 안겨다 주었다.
그날은 쌀쌀한 가을 저녁이었다.
아이딘 백작은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며칠 전, 그는 자신의 외숙부에게 영지로 내려가겠노라고 말했다.
이드리스 공작은 반대했으나, 아이딘 백작답지 않은 단호함에 마지못해 그러라고 했다.
오늘 왕궁에서 열리는 연회가 그가 마지막으로 참석하는 연회였다.
한껏 차려입은 그는 왕궁으로 향했다.
연회는 언제나처럼 화려했고, 언제나처럼 그에게 낯설었다. 낯설다는 것은 결국, 그에겐 끝까지 이곳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화려한 연회장을 바라보며 루아나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를 찾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루아나는 이 연회장에서 단연 찬란한 빛이 나는 존재였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아이딘 백작은 그녀가 이곳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그녀는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겠지.
아이딘 백작은 구질구질한 작별 인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몇몇 이와 인사를 하고는 그는 공작저로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그가 낄 수 있는 연회는 아니었고, 돌아갈 준비를 쉐인만 혼자 하게 두는 것도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영지로 돌아가자고 생각하니, 수도의 일은 모두 잊고 싶었다.
그는 피로함을 느끼며 연회장을 나갔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돌아갈 때였다.
“백작님!”
그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찔했다. 루아나의 목소리였다. 그가 뒤를 돌아볼 때 루아나가 별안간 달려오더니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영애?”
무엇이 그렇게 서글픈지 별안간 그녀가 흐느끼고 있었다.
“오늘, 떠난다고 하셨지요?”
“…….”
“왜 떠나시는 건데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이딘 백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루아나를 내려다보았다. 루아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아이딘 백작을 쏘아보았다.
“백작님이라면 저와 계속 같이 있어주실 줄 알았어요. 제게 인사도 안 하실 생각이었나요?”
“미안합니다, 영애. 영애가 바빠 보여 차마 말하지 못했어요.”
“그게, 그게 다인가요?!”
그녀가 답답해 보이는 표정으로 소리를 높였다. 아이딘 백작이 의아해할 때,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백작님은 분명 절 사랑하시잖아요!”
그 소리에 아이딘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숨기려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는데……. 대체 어떻게 알았지?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을 골라야 했다.
“영애가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드리스 공자께서 말해줬어요. 백작님이 오늘 떠난다는 것도 그분이 말해주셨고요.”
자신의 마음이 들키자 그는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말했다.
“왜 제게 그 마음을 숨기셨나요?”
“……그거야, 제 마음이 영애에게 부담이 되니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고백을 하는 건 거추장스럽잖습니까.”
그 말에 루아나가 울컥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짙은 원망이 서린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신붓감을 찾는다고 하셨지요?”
“…….”
“그럼 절 신부로 맞이해 줘요.”
“영애, 하지만……!”
“전 백작님이 좋아요. 백작님처럼 다정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요.”
내가 좋다고? 하인트 공작이 아니라, 내가?
아이딘 백작은 심장이 쿵쿵거리며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 너무 들뜨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영애, 저는 가진 게 없습니다. 영지도 좁고, 평생 저와 함께하긴 따분할 거예요.”
“전 커다란 저택이나 영지 따윈 싫어요! 제 모국에서도 작은 영지에서 살았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작은 곳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이곳 수도는 너무나 넓어요.”
그 말에 아이딘 백작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일까? 루아나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것일까?
“전 단 하나뿐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백작님은 절 하나뿐인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잖아요.”
“…….”
“그렇지요?”
루아나의 말에 아이딘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서녀임에도 외조모의 출신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만들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는 루아나 외에 다른 이를 사랑할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럼 됐어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루아나!”
아이딘 백작과 루아나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인트 공작이 서 있었다. 그는 그녀를 쫓아온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이딘 백작은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루아나가 하인트 공작의 부름에 자신을 떠나는 게 아닐까? 그녀의 고백은 그저 변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가슴이 불안감으로 뛸 때였다. 루아나가 아이딘 백작의 손을 잡았다.
“제 마음은 이미 전해 드렸어요, 공작 각하. 저는 공작 각하와 결혼하지 않아요.”
“……!”
“저는 누군가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길 원해요. 공작부인과 이혼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걸 어떻게 믿지요? 설령 이혼하더라도 각하께는 아들도 있고요. 저는 그 가족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요.”
“루아나, 그대는 이미 내 유일한 사람이야!”
“각하, 저는 각하와 함께할 수 없어요. 전 이 사람을 선택할 거니까요.”
그녀는 아이딘 백작의 손을 힘주어 꽉 잡았다. 하인트 공작의 시선이 꼭 잡은 손으로 향했다. 아이딘 백작은 하인트 공작의 얼굴이 처음으로 절망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았다.
“가요, 백작님.”
루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여기서 아이딘 백작은 그녀를 남겨두고 가야 하나 아니면 그녀를 데려가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결심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다. 사랑에 절망하는 하인트 공작을 내버려 두고, 백작은 말없이 그녀를 데리고 왕궁을 떠났다.
찬바람이 그들에게 불었다. 그러나 아이딘 백작은 루아나의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아이딘 백작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여기서 걸음을 멈추면, 하인트 공작이 뛰어와 그녀를 데려가 버릴 것 같았다.
만약, 하인트 공작이 아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그저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 줄 사람으로서 그를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과연 승리한 것일까? 이것은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는 치밀어 오르는 어두운 마음을 애써 숨겼다.
알고 있다.
그는 루아나에게 하인트 공작 대신 선택받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루아나를 차마 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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