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그를 이야기하다 (2)
2018.06.07.
“요새 옷차림에 공을 들이는데?”
프레드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딘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대답 대신 크라바트를 다시 맸다. 그것을 본 프레드가 두 눈을 좁혔다.
“잘 되어가는 여자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프레드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해봐. 이번엔 허탕 치지 말고.”
아이딘 백작은 그 격려에 미소 지었다. 프레드는 거칠고 잔인한 면이 있었지만, 이런 다정한 구석도 있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뺏어간 여자는 누군데?”
“그건…….”
그가 우물쭈물하자 프레드가 그의 정강이를 툭 찼다.
“다 자란 놈이 남자답지 못하게 우물쭈물하기는. 그래서 여자들이 널 안 좋아하는 거야.”
그런가. 아이딘 백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프레드는 남자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적당히 들어 넘기며 어두워진 얼굴로 프레드의 방을 나왔다.
루아나는 이런 자신을 싫어할까.
그는 그녀, 루아나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꼭 다른 곳에서 온 사람 같았다. 얼굴은 새하얗고, 눈동자는 사파이어처럼 푸르렀다. 그래서 화려한 장신구가 아니더라도 그 아름다움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그녀의 격 없는 태도였다.
루아나는 아이딘 백작을 피하지 않았다. 싫어하며 부담스러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그리 큰 영지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함에도 그녀는 그런 곳이 최고라며, 수도는 시끄럽다고 말하며 그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아이딘 백작은 수도에서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몇 번의 만남 후, 그는 자신이 루아나에게 매료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루아나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바로 자신의 가문이 이드리스 공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그는 이드리스 공작의 생일 연회에 그녀를 초대했다.
그는 자신이 조금 더 대단한 사람으로 보였으면 했다. 그러나 프레드의 말을 들어보면 이미 처음부터 처참하게 실패한 것 같았다.
조그마한 영지를 가지고, 이런 소심한 성격을 가진 남자는 매력이 없겠지. 자신이 조금 더 남자다워지면 좋을 텐데. 이를테면 하인트 공작처럼.
그 사람을 떠올리자 어쩐지 더 비참해졌다. 그는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 곧 연회가 시작된다.
연회장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귀족들을 지나쳤다.
언제나와 같은 화려한 연회는 자신이 함부로 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익숙한 무관심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끝나는 연회.
그러나 루아나가 있다고 생각하자 이곳이 상당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는 루아나를 찾으러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이는 이는 다른 사람이었다.
‘하인트 공작?’
그의 키는 다른 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기에 그는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하인트 공작가와 이드리스 공작가가 사이가 좋았나? 심지어 프레드는 대놓고 저 사람을 싫어하는데, 프레드가 몇 번 시비를 건 적도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이란 말인가.
다른 이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황궁에서 곧바로 온 모양인지 기사단 제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하지만 연미복과는 확연히 다른 그 차림이 오히려 눈에 띄며 근사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아이딘 백작이 가는 곳마다 하인트 공작이 보였다. 연회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괜스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경계였다.
저 재수 없게 잘난 사람이 여기서 대체 왜 어슬렁거린담. 괜히 그는 프레드처럼 그를 욕했다.
하인트 공작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누굴 찾는 건가?’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갔다. 그는 괜히 하인트 공작을 욕했다며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백작님!”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딘 백작이 뒤를 돌아보자, 루아나가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영애, 와주었군요.”
“사실 오지 않으려 했는데, 외할아버지께서 억지로 절 보냈어요. 이드리스 공작가의 초대를 거절하다니 미쳤다고 하셨다니까요.”
“……억지로 오신 겁니까?”
아이딘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대단해 보이고 싶은 나머지 그녀가 연회를 싫어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만났던 이유가 서로 연회에서 도망쳤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백작님이 초대해 준 거잖아요. 정말 싫었으면 나가는 척하고 멀리 도망갔을 거예요.”
“…….”
“백작님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제 유일한 낙인걸요.”
따스한 말은 그녀 특유의 상냥함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과 이야기하는 게 유일한 낙이라고?
그의 마음속에 환한 불빛이 켜졌다. 의례적으로 한 말이겠지만, 너무도 기뻐 견딜 수 없었다. 쉐인이 이 말을 들으면 분명 기뻐하겠지.
아이딘 백작은 루아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소박한 드레스를 입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황금빛 조명 아래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녀와 춤을 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은 손을 잡는 것 따윈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화려한 연회장의 규모를 보고도 태연했다. 생각해 보니 국왕 전하가 말벗으로 자주 부르신다니 이런 화려한 저택에도 별로 감흥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한 실수가 얼마나 얼간이 같았는지를 깨달았다. 이대로 그녀가 싫어하는 곳에 그녀를 세워둘 수는 없었다. 그는 결심했다.
“영애, 나갈까요?”
“네?”
아이딘 백작의 제안에 그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건 좀 그런가요? 아무래도 레이디가 밤중에 저랑 같이 나가는 건…….”
“아니요, 그 말이 아니라, 공작 각하의 생일 파티에 참여하시지 않아도 돼요?”
“화는 내시지 않을 거예요. 혼을 내더라도 잔소리만 하시니, 적당히 들어 넘기면 되고요.”
“…….”
“제 초대를 받고 오셨으니, 마땅히 제가 영애의 지루함을 책임져야 할 것 같아서요.”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웃자 이내 루아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루아나를 데리고 그 화려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이상했다. 예전엔 도망가는 기분이었는데, 이렇게 루아나와 함께하니 그것을 ‘선택’한 것 같았다. 낯선 행복에 그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정원으로 나가며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대부분 소소한 것이었다.
루아나는 외할아버지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 힘들다고 말했으며, 얼샤가 그립다고 말했다.
그가 그녀의 유년 시절에 대해 물어보니, 그녀는 이내 웃으며 그녀가 나고 자라왔던 바네사 남작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행복한 가족의 이야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백작님?”
루아나의 목소리에 그는 자신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백한 무례에 그가 횡설수설 말을 더듬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이야기하는 영애가 즐거워 보여서 그만…….”
다행히 루아나는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백작님은 가족들과 행복하지 않았나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행복했냐고요?”
가족과 왜 행복해야 하는 거지? 그는 그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본 루아나가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다 이상해요. 가족에 대해서 말하면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아요. 지금 백작님처럼요. 이전에 처음 입궁했을 때도 그 기사, 아니, 하인트 공작 각하께서…….”
“하인트 공작, 말입니까?”
왜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것인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선뜩해졌다.
“그 사람을 아세요?”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요. 그는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인 하인트 가의 사람인데요.”
오히려 루아나가 그 하인트 공작을 ‘그 사람’이라고 지칭한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루아나가 얼굴을 찌푸리자 슬며시 불안감이 들었다.
“공작께서 영애에게 무슨 말이라도 한 겁니까?”
“아니요, 성격이 좀 이상해서요. 우리 외할아버지 같아요, 그 사람.”
“네?”
의외의 대답에 그가 입을 벌렸다. 하인트 공작을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 그녀의 거침없는 말에 아이딘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왜요? 백작님도 제가 이상한가요?”
“아니요, 전혀.”
그는 계속 웃음이 나왔다. 루아나에게 단순히 이상한 사람이라니. 어쩐지 그 사람을 보면 알게 모르게 샘솟던 박탈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루아나가 웃고 있는 그를 보며 울컥한 듯했다.
“이상하니까 웃는 거죠?”
“아니요. 그냥, 이상하기보단 특이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게 참 매력적이에요.”
그에 루아나가 볼을 붉게 물들였다.
“백작님, 인기 많죠?”
“아니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아이딘 백작은 루아나가 농담을 하는 거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들은 발걸음을 옮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백작님, 여긴 어딘가요? 점점 조명이 사라지는 것 같은데…….”
“아, 미안해요. 미끄럽죠? 제 손 잡아요.”
“어, 어?”
아이딘 백작은 최대한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이끌었다.
이윽고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자, 때마침 구름에 가린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곳을 비추었다.
“어머!”
루아나가 그의 손을 놓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두 눈에는 불안감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발치에는 새하얀 숲바람꽃이 피어 있었다.
“여기 정원사가 얼샤 출신이라서 자기 숙소 주변에는 얼샤의 들꽃을 심었더라고요. 사실 장미 화원이 더 유명하지만, 영애에겐 이게 좋을 것 같았어요. 얼샤를 그리워하셨잖아요.”
아이딘 백작의 말에 루아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볼 수 있는 건 루아나의 뒷모습뿐이라,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역시 화려한 장미 화원이 좋았던 걸까? 슬며시 불안감이 생길 때쯤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백작님은 참 섬세하고 다정한 분이시군요.”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젤다라는 제 친구와 숲에 놀러 가면 이 꽃이 피어 있었어요.”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 꽃을 보았다.
아이딘 백작은 아직도 자신이 실수를 한 거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그 기분을 달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얼샤의 꽃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줄 알았어요.”
“…….”
“너무 고마워요, 다정하신 백작님.”
그녀가 환하게 웃자 그의 얼굴에 피가 몰려 붉게 물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원한다면 언제든 볼 수 있어요. 제가…….”
“네?”
“아니, 아무것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물음에 그가 황급히 말을 멈췄다.
자신과 함께하면, 영지에다 얼샤의 꽃들을 얼마든지 심어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이 나오진 않았다.
그는 루아나에게 어떠한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다. 남녀 간의 연인 관계가 아니라 친구 관계로 같이 있어도 좋았다. 그냥, 이대로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했다.
밤하늘에는 보석 같은 별들이 박혀 있었고, 그리운 꽃향기는 루아나의 마음을 누그러지게 했다.
두 사람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고 슬픈 이야기였다.
어둠은 그들을 고요히 감싸주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밤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야 정신을 차린 아이딘 백작은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본저로 향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딘 백작이 뒤를 돌아보다 움찔했다.
라이트 영식과 리프텐 영식, 바반드 영식이 보였다. 모두 프레드가 어울리는 이들이었다. 문제는 저들의 질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루이보스가 여자와 놀아나고 있네. 대단한데?”
라이트 영식이 낄낄거리자 다른 이들 역시 따라 웃었다.
아이딘 백작이 그들이 앉아 있는 벤치 쪽을 바라보았다. 몸매가 훤히 드러난 옷을 입은 여자들이 교태스러운 자세로 있었다.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이 가자, 그는 루아나에게 말했다.
“루아나, 어서 들어가요.”
그에 라이트 영식이 거슬렸는지 그들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야, 사람이 말을 했으면 들어야지. 날 앞에 두고 무시하는 거야?”
“왜 그래, 백작님이잖아.”
그들이 킬킬거리며 웃자, 루아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상당히 무례하시군요. 얀스가르의 귀족 도련님들은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건가요?”
그 차가운 말에 라이트 영식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 루아나를 바라보다가 아이딘 백작을 보며 말했다.
“야, 아이딘 백작님. 저런 여자랑 왜 놀아? 난 저렇게 드센 여자는 싫더라. 얼굴 좀 반반하다고 아무거나 주워 삼키지 마.”
그 모욕적인 말에 루아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 영애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데. 얼샤에서 온 여자 아니야?”
“맞는 것 같아.”
그들은 휘익,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자 아이딘 백작은 얼굴을 굳히고는 루아나 앞에 서서 그들의 시선을 차단했다.
“이야, 꼴에 남자라고 레이디를 지키겠다는 건가?”
그들이 아이딘 백작을 보며 웃었다. 프레드와 함께하는 이들이 질이 낮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그를 하찮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아나를 건드리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영애에게 더 이상 무례를 저지르지 마.”
“무례라고? 난 그냥 궁금했을 뿐이라고. 너 같은 놈이 어떤 여자랑 사귀는지 누구라도 궁금할 거 아니야. 네 사촌도 궁금해하던데,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게 어떻게 무례가 될 수 있지?”
그 말에 아이딘 백작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는 분노로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우선, 그 말투부터 내게 무례야. 나는 백작이고, 아직 작위가 없는 영식이 내게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이런 건 기본적인 예의라고 알고 있는데.”
“뭐?”
그들이 피식 웃으며 서로를 쳐다봤다. 벤치에 여자를 안고 있던 바반드 영식이 걸어 나왔다.
“이드리스 공자 때문에 그간 아는 척을 해줬더니, 이렇게 건방지게 행동하는구나. 사생아 아들인 주제에.”
사생아?
너무도 오랜만에 듣는 말에 그가 움찔했다. 그것은 어머니를 이르던 말이었다.
“사생아?”
“몰랐냐? 저놈 어머니, 서녀, 아니, 서녀도 되지 못하는 사생아야. 따지고 보면 그냥 더러운 피만 이어받았다니까? 공작 각하께서 사람이 좋아서 저놈을 집에 들인 거야. 저놈 외할머니라는 인간이 창…….”
그에 아이딘 백작이 참지 못하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나 무예를 단련한 바반드 영식은 너무도 간단히 배를 걷어차 그를 넘어뜨렸다.
“백작님!”
루아나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딘 백작은 바반드 영식을 노려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저놈들은 일부러 그녀 앞에서 망신을 주고자 시비를 건 것이다.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어머니의 핏줄까지 언급하면서, 어머니를 모욕했다.
그는 저항하려 했으나 바반드 영식이 몇 번 더 배를 걷어차자 고통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와 더불어 가해지는 폭력에 언제나 고개를 숙이던 비굴함이 자리 잡으려 할 때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고개를 들자 장신의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청동색 머리카락과 짙은 밤색 눈동자를 가진 준수한 미남, 하인트 공작이었다.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루아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인트 공작을 보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배에 강하게 느껴지던 충격 따윈 사라져 버렸다.
“공작 각하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바반드 영식이 건들거리며 말하자 그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내가 영식에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나?”
그는 지독히도 귀족적인 얼굴이었다. 바반드 영식이 그 말에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정작 공작은 그 표정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지독히 오만하고 고고한 얼굴로 쓰러진 아이딘 백작을 흘낏 보더니, 그를 지나쳐 루아나에게 다가갔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바네스 영애?”
“제가 아니라 백작님이 다쳤어요.”
루아나의 말에 아이딘 백작은 비참한 감정을 숨기며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을 본 하인트 공작이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하인트 공작이 철없는 영식들을 보며 말했다.
“공작저에서 싸움질이라니. 이드리스 공작의 생일에 이게 무슨 무례인가. 게다가…….”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벤치에 앉은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하인트 공작이 무엇을 문제 삼으려 했는지 깨달았다.
이드리스 공작의 생일 파티에 여자들을 데려와 난잡하게 놀았다는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하인트 공작.”
공작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챈 라이트 영식이 마지못해 말한 뒤 여자들을 데리고 황급히 사라졌다.
아이딘 백작은 바로 옆에서 그 녀석들이 꼬리를 만 개처럼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을 무시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옆에 있었기에 그는 자신과 하인트 공작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
“괜찮아요?”
루아나의 물음에 백작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하인트 공작에게 여전히 부축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나약한 몸은 계속 비틀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중심을 잡고 서서 하인트 공작에게 인사했다.
“신세를 졌습니다, 공작 각하.”
“이런 곳에 레이디를 데려올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지킬 만한 능력은 있어야지 하지 않을까, 아이딘 백작.”
그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자신이 잘 아는 곳에 그녀를 초대했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우쭐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이딘 백작이 새삼 자신의 처지를 느끼며 고개를 숙일 때였다.
“백작님에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영애?”
“백작님은 제게 얼샤의 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이런 무례를 저지르고 백작님을 때린 사람이 나쁘지, 왜 백작님을 탓하세요?”
“영애, 나는 그러려던 게…….”
분명 오만하고 고고해 보이던 그 남자의 표정이 루아나의 힐난에 당황으로 무너져 내렸다. 아이딘 백작은 입을 다문 채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오가는 것을 본 아이딘 백작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제야 왜 하인트 공작이 자주 보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남자가 루아나의 곁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나타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루아나를 찾으러 다녔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인트 공작의 표정을 보고 아이딘 백작은 너무도 쉽게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백작은 다시 루아나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아까 하인트 공작을 보고 지었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화가 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볼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홍조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이딘 백작은 자신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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