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그를 이야기하다 (1)
2018.06.04.
루시펠라와 제드는 그 쉐인이라는 남자를 마련된 침실에 눕혔다.
진통 효과가 있는 약을 먹은 그는 지쳤는지 낮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골이 장대했는데,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경을 따로 본 기억이 없군.”
루시펠라의 말에 쉐인이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렸을 적에 그리 많이 뵈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돌아오시지 않은 겁니까?”
어렸을 적에 많이 봤다고? 그런가? 저 사람의 얼굴을 보며 느꼈던 친숙함이 그웨인과 닮아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리다니?”
그때, 루시펠라는 제드의 의아해하는 목소리에 당황했다.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가진 기억상실에 대해서 제드는 모르고 있었다. 기억상실이란 진짜 루시펠라의 안에 에스텔이 들어가면서 붙여진 병명이었기 때문이다.
“제드, 그건 이따가 말하자.”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쉐인이 그런 루시펠라와 제드를 번갈아 보았다.
“사이가 좋아 보이시군요.”
제드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씁쓸함에, 루시펠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가 좋으면 안 되는 건가?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제드를 바라보자, 제드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러더포드 경, 아이딘 백작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을 듣고 싶은데.”
제드의 말에 그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 참담한 얼굴을 보며 루시펠라는 이 사람에게 조금 시간을 더 줘야 하나 고민했다.
쉐인은 주먹을 쥔 채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두 눈에는, 서슬 퍼런 증오의 빛이 서려 있었다.
“제 눈앞에서, 그놈들에게 끌려가셨습니다! 그러곤 살해당하셨지요!”
“끌려가셨다니? 누구에게?”
“분명히 이드리스 공작 일파겠지요. 그 뱀 같은 인간이 결국 눈치를 챘던 겁니다!”
“이드리스 공작이 대체 왜 아버지를 죽인 거지? 일단, 재산을 노려서라는 건 알겠어. 그런데 아버지는 그쪽 소속이었고 심지어 친척이잖아. 그런데 왜 아버지는 2황자 전하를 도왔던 거고, 이드리스 공작은 아버지를 죽였던 거지?”
루시펠라의 물음에 쉐인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드리스 공작에 대한 것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전혀.”
이드리스 공작을 보면 불쾌감만 떠오를 뿐, 그에 대해 어떤 기억조차 없었다.
설마, 루시펠라와 이드리스 공작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첫 만남부터 멜로즈에게 지나치게 적대적이던 진짜 루시펠라가 떠올랐다.
쉐인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까 부디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설명해 줘. 아버지가 살해당한 정황뿐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생전 어떤 일을 해왔는지. 나는 그것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어. 그래야 추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사실 이것을 들어야 하는 것은 진짜 루시펠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루시펠라는 이미 죽음을 맞이했고, 그녀는 우선 아이딘 백작이 생전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할 수 있었다.
쉐인은 루시펠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펠라 역시도 그 두 눈을 피하지 않았다.
“주인님께서는 그동안 아가씨를 제대로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
“이렇게나 어엿하게 성장하셨는데 말입니다.”
“…….”
“차라리 아가씨와 마음의 짐을 나눴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습니다. 아가씨께 모두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하기 이전에 외람되지만 공작 각하, 혹시 자리를 피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도록 하지.”
제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아이딘 백작의 개인사에 대한 건 루시펠라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루시펠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제드에게 다 말할 생각이야.”
“아가씨.”
“이 이상 제드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싶지 않아. 그리고 알아낸 사실 때문에 이 사람이 나에 대해 마음을 바꾸리라 생각하지도 않고. 어차피 이 사람은 내 남편이 될 사람이니까.”
루시펠라가 제드를 바라보자, 제드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빙그레 웃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손을 잡으며 쉐인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들은 말이 혹 하인트 공작가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고 해도, 루시펠라에 대한 내 태도가 바뀌진 않을 거야. 맹세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쉐인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본 제드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우리 아버지를 아이딘 백작이 살해하기라도 했나? 워낙 적이 많았던 사람이니 그 정도는 감안하고 들을 수 있어.”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쉐인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쉐인은 루시펠라와 제드를 바라보았다.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한 쌍이었다.
만약 아이딘 백작이 저 모습을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주인은 그 모습을 보고 타오르는 질투심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얼샤에서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내게 모든 걸 다 이야기하기로 약속하셨어. 그러니까 쉐인, 이야기해 줘.”
또렷한 은청색 눈동자는 분명 생전의 마님, 루아나를 닮았다.
그러나 분명히 죽은 아이딘 백작을 닮기도 했다.
잃어버린 팔보다 자신이 주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고통이 더 컸다.
인생 대부분을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결국 복수도 하지 못한 채 허망하게 죽어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는 입을 열었다.
“주인님에 대해 아시려면, 주인님의 어렸을 적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루시펠라와 제드는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
“쉐인, ‘사생아’가 뭐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린 루이보스는 쉐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쉐인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사로, 그의 모든 것을 담당하는 형과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루이보스에게 쉐인은 형이자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어제 아버지가 어머니께 ‘사생아’라고 화를 내셨어. 그게 무슨 뜻이야?”
쉐인은 그 말을 듣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루이보스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나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생아’는 루이보스가 처음으로 배운 욕이었다.
루이보스는 자라나면서 사생아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그 사생아였다는 것도.
어머니는 자신의 존재를 알린 후, 그 집에서 서녀로서 살게 되었으며, 처분되듯 아버지와 강제로 혼인을 올린 것도 알았다.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다. 술을 마신 자신의 어머니가 루이보스를 잡고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루이보스는 너무도 소중한 어머니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자신이라도 어머니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기대는 부모의 존재는 아이를 너무도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다.
어머니는 항상 슬픔에 젖어 있었고, 눈물을 보였다. 루이보스는 그런 어머니를 언제나 위로하고자 했다. 그녀의 얼굴에 한 번이라도 미소가 서리길 원했다.
한데 그렇게 안간힘을 썼는데도, 어머니는 너무도 빨리 가버렸다. 원래 몸이 약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했던 것일까.
비록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루이보스에게 사랑을 주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자 그것이 너무 슬퍼 장례식 때 그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루이보스, 나를 용서하렴.”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환한 금발의 남자는 자신을 ‘외숙부’라고 소개했다.
그제야 루이보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왕국의 세도가인 이드리스 공작가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외숙부는 죽은 어머니의 배다른 오라버니, 아니, 소위 말하는 정실부인의 고귀한 피가 흐르는 이였다.
그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어린 나이에 팔려가듯 시집을 가 요절한 누이의 존재를 잊었던 것을 후회하며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루이보스는 이드리스 공작의 등장에 아버지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탐욕의 눈빛이었다.
“이드리스 공작가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 너는 그쪽 피가 섞인 엄연한 혈족이란다.”
아버지는 루이보스를 이용해 수도의 이드리스 공작저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수도의 화려함에 눈이 멀었고, 그렇게 살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부유하지 않은 촌스러운 시골 귀족인 아버지가 낄 수 있는 장소는 수도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몸부림을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노력과는 달리 루이보스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녹아들 수 있었다.
사촌인 루크레치아와 프레드는 이드리스 공작의 명령으로 그를 사촌으로 대해주기는 했다. 그러나 루이보스는 언제나 그들의 뒤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처럼,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만 했다.
평등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루이보스는 그 관계를 받아들였다.
특히 그는 같은 남자인 프레드와 친하게 지냈다.
프레드는 참으로 오만하고 흉포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짜증이 난다며 루이보스에게 폭력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루이보스에게 가해진 폭력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아랫사람들에게는 더욱 잔혹했다.
쉐인은 그에게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며, 프레드를 닮으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쉐인의 충고가 중심이 되어 루이보스는 프레드에게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잔혹함에 기가 질리다가도, 그저 어렴풋 높은 위치에 있으면 저렇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넘겨 버렸다.
루이보스는 프레드와 루크레치아를 비롯한 공작가의 사람들이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했기에 굳이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욕심이 없었고, 아버지처럼 그들을 선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누군가가 되길 바랐던 적은 있었다.
그날은, 프레드를 따라 처음으로 왕궁에 방문한 날이었다.
프레드의 취미는 루이보스에게 기가 질릴 정도로 화려한 문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루이보스가 감탄하면 할수록 프레드는 우월감 어린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는 했다. 루이보스는 이것이 바보 같다고 느꼈으나, 프레드를 위해서 기꺼이 놀라움을 연기해 주었다.
“오늘은 기사들을 보여줄게.”
프레드는 연무장으로 그를 안내했고, 그는 쉐인에게 듣기만 하던 왕궁의 ‘진짜 기사’들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본디 루이보스의 검술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고, 심지어 어머니를 닮아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약해서 병치레가 잦았다. 그는 쉐인처럼 강한 기사가 되길 희망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는 그렇게 홀린 듯, 자신이 절대 될 수 없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중에 단연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저기, 저 사람은 누구야?”
루이보스가 가운데에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분명 멀리서 봐도 자신의 나이 또래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프레드가 그것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인트 공자네.”
“하인트? 공자라면, 공작가라는 말이야?”
그는 그때 ‘하인트’ 가문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래. 하잘것없는 아주 재수 없는 놈이지. 검술은 자기 집에서나 연마할 것이지 왜 여기서 기사들과 검을 써? 딱 봐도 음흉한 놈일 거야.”
“그래?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그에 프레드가 발로 루이보스의 등을 걷어찼다. 그가 기분이 나쁠 때 하는 행동이었다.
루이보스는 프레드의 화를 달래면서도 힐끔거리며 하인트 공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휘두르는 검 하나하나 힘이 있었다. 소년은 키가 큰 기사 사이에 있으면서도 전혀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말 그대로 당당한 모습이었다.
저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는 속으로 우울하게 생각했다.
“저놈, 짜증 나. 아버지께선 만날 저놈을 닮으라고 성화시란 말이야.”
프레드는 하인트 공자가 있는 쪽으로 침을 뱉으며 하인트 공자를 노려보았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그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구석이 있었다.
당시는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루이보스는 프레드 이드리스가 그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자신의 아버지 역시 병으로 앓아누웠다.
그의 유언은 하나였다.
‘이드리스 공작가와 가까이 지내라.’
마지막까지 아버지는 수도의 화려함을 탐했지만, 결국 발도 제대로 들이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루이보스는 그 죽음이 슬펐지만, 그의 유언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아이딘 백작이 된 그는 영지 안에서 조용히 살아갔다. 그는 어려서 경험한 수도의 화려함보다는 영지의 조용함이 좋았다.
영지 관리인인 맷시는 그와 쉐인의 오랜 친구였으며, 자신을 지켜주는 쉐인 역시도 든든하게 그를 보필해 주었다.
가난했으나 그 누구도 배를 곯지 않아도 되는 영지, 물 흐르듯 잔잔한 일상은 그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수도와 멀어지려고 했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도의 호화로움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사촌 누나인 루크레치아가 왕비가 되었다는 소식도, 왕자를 생산했다는 소식도 날아왔지만, 그는 수도에 올라가 보는 대신 축하의 편지만 보낼 뿐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다시 흘렀다. 사람들은 어서 백작가의 안주인을 맞이하길 바랐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곳은 너무나도 작았으며 따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자신을 선택할 여자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가 스물셋이 됐을 때, 그것을 보다 못한 이드리스 공작이 그를 또다시 수도로 불러들였다. 마땅한 신붓감을 찾아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이드리스 공작은 루크레치아의 죽음 이후 상심하여 병을 앓고 있었으며, 아이딘 백작은 하나뿐인 외삼촌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생각에 수도로 올라갔다.
수도는 여전히 복잡했고, 이드리스 공작가는 여전히 호화를 누리고 있었다. 루크레치아가 낳은 왕자, 테미르가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반강제로 수도에서 신붓감을 모색했다. 그의 외모는 나쁜 편은 아니었기에 레이디들은 그에게 쉽게 다가왔지만, 그의 배경을 보자마자 흥미가 없다는 듯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을 함께할 사람인데 이런 형편없는 조건의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누구와도 결혼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당시 주인님께서는, 신부를 찾지 못할 것임을 아셨습니다.”
쉐인의 말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적당한, 아니, 평균 이하의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의탁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사랑’이 전제되지 않았기에 그러했다.
“하지만 마님만은 예외였던 겁니다.”
루아나 바네사. 바네사 남작가의 영애.
그녀는 가족을 모두 잃고 얀스가르에 있는 그녀의 외가에 몸을 의탁하러 찾아왔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아이딘 백작을 만났을까. 드디어 그 대목이 나오고 있었다.
“주인님께서는, 마님을 정말로 사랑하셨지요.”
“…….”
“그리고 마님께서는…….”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루시펠라와 제드를 번갈아 보았다.
제드와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쉐인은 그들을 보며 한숨을 토해내듯 조용히 말했다.
“선대 하인트 공작 각하를 사랑하셨고요.”
루시펠라는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렇다면 루아나는 아이딘 백작을 사랑하지 않았단 말인가?
“적어도 주인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쉐인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부터 그가 꺼낼 이야기는 루아나와 아이딘 백작의 이야기였다.
아이딘 백작은 언제쯤이면 돌아가도 이드리스 공작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지 계산하고 있었다. 그는 무도회장을 바라보았다.
프레드는 어울리는 그 특유의 ‘품격에 맞는 무리’가 있었고, 아이딘 백작에게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였다.
아이딘 백작 역시 굳이 그 무리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죽은 그의 아버지처럼 비굴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신 그는 조용히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보기에도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 발걸음 하나에 자신감이 묻어 나오는 사람들.
대체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인지 그들은 환한 조명 아래서 환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그 화려한 사람들 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하인트 공자, 아니, 공작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두 눈에 있는 것은 프레드와 같은 오만함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덤덤함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는 아버지를 잃고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똑같이 가문을 물려받았음에도 아이딘 백작과 하인트 공작은 이렇게나 차이가 났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다고 했었지? 하긴, 저런 사람을 어떤 레이디가 마다할까.
프레드의 말에 따르면 하인트 공작부인 역시 명망 있는 귀족가의 여식이라 하던데, 그는 왜 프레드가 하인트 공작을 재수 없다고 욕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괜히 초라함을 느낀 그는 한숨을 내쉬며 연회장에서 나왔다. 바깥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복도를 지나가던 그는 한숨 소리를 들었다.
여자의 한숨 소리였다.
보통 때라면 지나가도 되었겠지만, 그는 지루했고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그는 천천히 소리가 난 쪽으로 걸어갔다.
또다시 한숨 소리가 들리고 아이딘 백작이 복도의 모퉁이를 돌자, 한숨 소리의 주인공이 눈에 보였다.
여자는 얼굴을 찌푸린 채 창틀에 몸을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화려한 연회장 안의 불빛과 다르게 복도는 어두웠으며, 그로 인해 희미한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여자의 얼굴을 비쳤다.
어둠 속에서도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린 여자의 옆얼굴은 우아한 곡선을 지니고 있었다. 아이딘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그 얼굴에 집중했다.
그때, 그녀가 인기척을 눈치챈 것인지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워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와 대비되는 새하얀 얼굴이 눈에 보였다. 두 뺨에 어려 있는 복숭앗빛 홍조도.
사파이어 같은 새파란 눈을 한 여자는 아이딘 백작이 보았던 어떤 이보다 아름다웠다.
따라서 그는 그녀의 드레스가 그리 비싼 재질이 아니라는 것도, 한쪽으로 땋아 내린 그녀의 머리 장식이 소박하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너무도 아름답게 비췄기 때문에.
그는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그녀 앞에서, 이렇게 눈을 깜빡이고 숨을 쉬는 것이 멍청해 보이진 않을지 걱정이 될 뿐이었다.
“좋은 저녁이에요. 당신도 저랑 똑같이 도망 나온 건가요?”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목소리가 아이딘 백작의 귀에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그것이, 루아나와 그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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