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은밀한 유산
2018.05.31.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자 루시펠라는 드레스 자락을 꾹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자칫하면 아이딘 백작가에 대한 권리가 이드리스 공작에게 넘어가게 된다.
백작가의 자금을 손에 넣은 공작이 무엇을 할지는 너무도 자명했다. 그는 그 자금으로 다른 귀족들을 끌어모아 결국 테미르를 황위에 올릴 것이다.
지금 여기서 차기 황제가 결정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루시펠라는 테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보자 갑자기 의문이 떠올랐다.
만약 이것이 이미 결정된 거라면 황제는 왜 그녀를 부른 것일까.
루시펠라를 굳이 이곳에 부를 필요까지 없이, 그저 원칙대로 이드리스 공작에게 칙서만 내려주면 되었다.
루아나의 딸이라고 루시펠라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려던 것은 아닐 것이다.
침착하자. 이유 없는 행동은 없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에게 배운 것을 떠올렸다.
황제는 왜 루시펠라를 불렀는가, 그의 진의를 알아야만 한다.
그 순간,
아! 머릿속에 불이 밝혀지는 것 같았다. 황제는 루시펠라에게 이의를 제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의를 제기할 기회가 주어진 것일까.
설마, 황제는 2황자를 지지하고 있다는 건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처음부터 테미르가 아닌 이오지프를 황태자로 올렸을 것이다.
황제는 이드리스 공작가가 그 재산을 가지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루시펠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니요, 저는 아이딘 가문의 마지막 일원으로서 이드리스 공작 각하께서 대리인이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루시펠라!”
이드리스 공작이 노기가 서린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약해진 황제의 앞에서 이드리스 공작은 소리를 높일 정도로 방만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연유를 말해보라.”
황제의 말에 루시펠라가 간절한 시선으로 말했다.
“폐하,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가문의 대리인이 제 약혼자인 제더카이어 하인트가 아니라, 제 당백부께서 대리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해서?”
“폐하께 감히 말씀드립니다. 저희 아버지 루이보스 아이딘은 사고가 아니라 살해당했습니다!”
루시펠라의 말에 알현실 안에 있던 모든 이의 얼굴이 굳었다.
이오지프는 예상했지만 루시펠라가 이렇게 대놓고 말하진 몰랐다는 쪽이었고, 테미르와 이드리스 공작은 루시펠라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지레 찔려 당황한 것 같았다.
“뭐,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루시!”
“루시펠라 아이딘! 아무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정신이 없다고 하지만 폐하께 이건 너무 경솔…….”
황제가 한 손을 들어 이드리스 공작을 막았다.
“이드리스 공은 짐보다 할 말이 많은가 보군.”
황제의 말에 이드리스 공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루시펠라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황제의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상대로, 황제는 그 이유를 물어보고 있었다. 그에 루시펠라는 기회가 주어졌음을 알았다.
“그래, 그 이유가 뭐지, 루시? 터무니없는 대답이라면 벌을 각오해야 할 거야.”
테미르의 말에 루시펠라의 머리가 쉴 새 없이 빠르게 굴러갔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에스텔이었을 적, 강한 마물을 상대하기 전과 같은 느낌이었다.
부자연스럽지 않게 아이딘 백작에게 살해의 정황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머리를 굴리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침묵하자 테미르가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보십시오, 아바마마! 루시는 언제나 정신이 불안한 아이였습니다. 그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때,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제가 납치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황태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납치를 당했기에 알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루시. 적당히 하는 게 어때?”
“테미르.”
황제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노려보자, 테미르가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납치라면, 그 얼샤의 잔당들에게 납치된 것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것이 왜 이유가 되는가?”
루시펠라가 손을 들었다.
“납치당했을 때 저는 손과 발이 묶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국이 며칠 동안 강하게 남았지요. 제 아버지의 손과 발 역시 그런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고사라면서, 아버지의 손과 발에 왜 저와 똑같은 자국이 남아 있었을까요?”
루시펠라의 말에 사람들은 침묵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이오지프가 말했다.
“아이딘 영애의 말에 따르면, 시체에 남겨진 자국은 분명 밧줄 자국입니다. 아이딘 백작은 납치되었던 겁니다.”
“이오지프, 아이딘 백작은 왜 영지로 내려간 거지?”
“광산 쪽에 무언가 일이 있다는 것이 제가 파악한 이유입니다.”
이오지프의 대답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이유가 안 되는 것은 영애도 잘 알고 있을 터.”
역시나. 루시펠라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사주로 제가 납치당할 뻔하다가 우연히 목격한 일 때문에 알게 된 겁니다.”
“누군가의 사주라니?”
루시펠라는 슬며시 테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루시펠라의 시선을 피했다. 그에 황제의 시선 역시 그를 향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저는 그들에게 끌려가다가 마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그 납치범들이 마물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걸 보고 깨달았던 사실은 사람의 피는 생각보다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
“살아 있는 상태에서 치명상을 입으면 더더욱요.”
루시펠라의 말에 황제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리스 공작도 테미르도 이 순간 루시펠라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분명 끔찍한 상처였지만, 피는 겨우 머리를 적실 정도였습니다. 감찰대원들은 제게 아버지의 피를 닦아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
그에 이오지프가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아이딘 백작 영애의 말로 유추하자면 아이딘 백작은 납치당해 살해된 후, 마차 사고로 위장당한 겁니다. 그래서 피가 흐르지 않았던 것이고요.”
“알고 있다.”
이오지프의 말에 황제가 대답했다.
루시펠라는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더 말해보라고 하고 있었다.
더 말해도 되나? 말해도 될까? 무엇을 말해도 되는지 모르는 상황인데? 너무 의심받지는 않을까?
그녀가 이오지프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러설 곳이 없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테미르가 황위에 오르는 것은 물론이요, 아이딘 백작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죽인 사람들에게 재산을 빼앗기게 된다.
루시펠라는 주먹을 꽉 쥔 채 입을 열었다.
“또한 아버지의 손가락은 부러져 있었으며, 손목에는 새파란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옷을 벗겨보진 않았지만 분명 멍투성이일 겁니다. 아버지는 묶인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한 겁니다.”
그녀는 말을 내뱉고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어디에서 얻은 근거인가, 아이딘 영애?”
“딱히 어디서 얻은 근거는 아닙니다. 그냥 유추해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가정하에 그 상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이 묶인 상태에서 폭력을 피할 때 정확히 멍든 그 부분으로 막더군요.”
“그렇군.”
황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된 건가? 루시펠라가 황제의 호의적인 반응에 안심할 때였다.
“그렇다면 아이딘 영애는 내 직속 기사들이 내게 거짓을 고했다는 말인가?”
그 서늘한 음성에 테미르와 이드리스 공작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감찰대가, 황제의 코앞에서 황제를 속이고 테미르에게 매수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그 말이 되는 것이다.
“아바마마, 아이딘 영애의 의견은…….”
“이오지프, 짐은 아이딘 영애에게 묻고 있다. 이곳에서 쫓겨나고 싶으냐?”
황제의 차가운 말에 이오지프가 입을 다물었다. 루시펠라는 황제의 불쾌해 보이는 태도에 슬며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남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이 사람은 자기의 신하들이 자길 따르지 않았다는 게 화가 난다는 건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감찰대는 이전, 이드리스 공작 각하의 행적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전례가 있는 일입니다.”
루시펠라의 말에 이드리스 공작이 호탕한 척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루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게 너무 가혹한 게 아니냐. 그건 나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는 한때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란다. 그걸 굳이 끄집어낸다는 건 내 약점을 자극하는 게 아니냐.”
이드리스 공작의 말에도 루시펠라는 그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짐이 이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도록 세운 기틀이 잘못된 것이라는 거냐?”
“저는 감히 폐하의 위업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감찰대의 말이 틀렸고, 제가 옳았습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루시펠라의 대답에 황제가 잠시 동안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그 두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만약 절 믿지 못하시면, 폐하께서 직접 보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무엄하다! 어찌 폐하께 사사로운 발걸음을 하시라고 하는 거냐! 게다가 시신을 보라니!”
이드리스 공작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것이 루시펠라에게는 발악으로 보였다. 황제 역시도 똑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폐하께서는 제 어머니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신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머니의 딸인 저의 진실됨 역시 믿어주십시오.”
“…….”
“저는 누군가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제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대리인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리인의 지정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루시펠라의 말에 이드리스 공작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 저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아이딘 영애가 미쳐 버렸나 봅니다. 저를 범인으로 지목하다니요. 저 아이는 예전부터 저를 싫어했습니다. 제가 못마땅한 겁니다.”
황제는 생각에 잠긴 듯 얼굴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루시펠라는 황제의 주름이 새겨진 얼굴을 보았다. 결국 모든 것은 그의 결정 하나로 이루어질 것이다. 황제가 눈을 뜨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제1기사단과 2기사단이 공조하여 아이딘 백작에 대한 일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라. 시신은 감찰대원들이 보관하고 있으니 속히 1기사단을 보내 시체부터 확보하라.”
그 말은 황제가 감찰대원을 더 이상 믿지 않겠다는 말과 똑같았다.
그때,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폐하, 시신에 대한 것은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제 약혼자가 미리 사람을 보내두었으니, 혹 시신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겁니다. 만약 제 약혼자가 의심스러우시다면, 감찰대도 옆에 있으니 서로를 감시했을 겁니다.”
그 말에 황제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인트 공이 영애를 위해 그리 행동한 것이더냐?”
“그러합니다.”
루시펠라의 대답에 황제는 할 말을 잃은 듯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에 이드리스 공작과 테미르가 불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드리스 공작이 무어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이드리스 공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뒤로 물러나 있는 게 좋겠군. 아이딘 가문에 대한 관리는 하인트 공작에게 맡겨두는 게 낫겠어. 대신 아이딘 백작가의 재산을 사용하는 걸 금하도록 하지.”
“하지만 폐하! 이건 말도 안 되는 모함입니다! 저는 여기서…….”
“지금은 조용히 돌아가게, 이드리스 공. 내 명을 수용 못 하겠다면 정말로 유산을 원해 사촌을 살해한 걸로 보이지 않겠나.”
황제의 말에 이드리스 공작이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대신 그는 루시펠라를 노려볼 뿐이었다. 루시펠라 역시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루시펠라의 마지막 가족마저도 앗아가 버린 사람이다. 그녀는 질 생각이 없었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 의지를 담아 공작을 노려보았다.
“그럼, 아이딘 백작가의 대리인에 대한 논의는 차후 미루도록 하지.”
황제의 말에 루시펠라는 자신이 시간을 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그러나 내가 죽기 전 다시 볼 일이군.”
황제의 말에 루시펠라가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루시펠라를 향해 있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관찰하다니. 영애는 참으로 대담해. 짐이 그간 영애를 잘못 보고 있었군.”
그야 에스텔은 기사였고, 그녀가 어려서부터 거의 매일 보던 게 사람들의 시체들이었다. 슬프게도 그러했다.
“또한 그토록 영특하다니. 볼수록 어머니를 닮았어.”
“…….”
“영애는 그 영특함으로 다시금 주어진 것을 잃지 않도록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루시펠라의 말에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
이드리스 공작은 화를 내며 돌아갔고, 테미르 역시도 뭐라 반박하려다 황제의 노성에 얼굴을 붉히며 돌아가 버렸다.
이오지프는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제의 눈 때문에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지만 대신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루시펠라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드에게 대략적 사정을 설명하고 아이딘 백작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제1, 2기사단의 검시가 끝나면 바로 장례식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이딘 백작가에 다시 도착했을 땐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손을 잡고 방으로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잘 견뎠어.”
“그래, 내가 생각해도 잘한 것 같아.”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 이제 급한 불은 꺼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아이딘 백작의 장례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하지. 그대는 쉬고 있어.”
“그거 혼자 하기에 힘든 거 아니야?”
“한 번 해봤으니까 익숙해.”
“아.”
루시펠라는 약 1년 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기억해 냈다.
마지막 하나 남은 혈육을 잃은 제드의 기분은 어땠을까? 아버지에게 커다란 애정은 없어 보였지만 분명 그 역시도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서글픔을 느꼈을 터였다.
“똑같구나.”
정말 그랬다. 루시펠라가 아이딘 백작의 죽음을 보고 느낀 것처럼 제드도 비슷한 심정을 느꼈을 터였다.
“뭐?”
“제드도 나도 이제 혼자야.”
그 말에 제드가 소파에 앉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혼자가 아니게 되겠지.”
“…….”
“장례가 끝나자마자 식을 올리자. 그래야 가문에 대한 권리 역시도 이드리스 공작이 넘보지 못할 거야.”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큰일을 치르고 나니 어지러웠다.
분명 아침까지 서로의 체온을 즐기고 있었다는 게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옷 갈아입고 쉬고 있어. 내가 당분간 여기 묵을 테니까.”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저 사람에게 맡겨도 되겠지.
제드가 방을 나가자 하녀들이 갈아입을 옷을 들고 왔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 위에 누웠다.
졸음이 쏟아졌으나, 침대 위에 눕자 오히려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아이딘 백작이 죽었다.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 루시펠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진짜 루시펠라의 감정인 것일까.
한참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드리스 공작에 대한 맹렬한 증오심이 들었다. 루시펠라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러자 눈이 서서히 감겼다.
“……씨!”
겨우 잠이 든 그녀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다급한 목소리.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뭐지? 습격이라도 일어난 건가? 루시펠라가 주위를 둘러보자, 누군가 방 안에 서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집사의 목소리였다. 루시라는 그에 눈썹을 찌푸렸다.
“큰일이라니?”
“그, 그게…… 손님이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가보셔야 합니다.”
루시펠라는 다급히 옷을 걸쳐 입으며 집사가 안내한 곳으로 향했다.
1층 로비에서 제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뭐지?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제드에게 다가갔다.
“제드, 무슨 일이야?”
“깨우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깨웠군.”
제드가 집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이건 아가씨께서…….”
“당분간 이 저택을 관리하게 된 건 나고, 아가씨에겐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내가 두 번 했어야 했나?”
제드가 더 화를 낼 것 같자 루시펠라는 재빨리 물었다.
“무슨 일인데.”
왜 이 난리가 난 거지?
“손님이 왔어.”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는 그제야 앞쪽을 보았다. 두 명은 낯익은 사람이었고, 한 명은 낯선 이었다.
“맷시? 그웨인?”
아이딘 영지의 관리인과 기사였다. 이들은 더러운 몰골이었다. 특히나 그웨인은 낯선 남자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시펠라의 시선이 처음 보는 이에게로 향했다.
그웨인의 부축을 받은 그 남자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풍채가 좋아 보였다. 다만, 팔이 잘린 한쪽 옷자락이 피에 물든 채 어디가 빈 듯 허전했다.
“저 팔, 의원을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공작 각하의 명으로 이미 불렀습니다.”
집사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방문객들을 노려본 채 말했다.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영애를 찾더군. 상황이 정리될 때까진 영애가 잠들었으면 했어.”
“고마워.”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황 정리가 안 되니 어디서부터 물어봐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웨인, 저 사람은 누구지?”
우선 루시펠라는 나머지 한 명의 신원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
갑자기 그웨인 경의 아버지가 대체 왜 팔이 잘린 채 나타났단 말인가.
루시펠라가 의문을 가지자, 그웨인이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께서도 아이딘 백작령의 기사이십니다.”
“기사라고?”
“이전 아이딘 백작령의 기사단장이셨습니다. 은퇴 후 백작님의 호위로 계셨다더군요.”
“호위라고?”
루시펠라의 물음에 팔이 잘린 남자가 루시펠라의 ‘호위’라는 말에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웨인의 부축을 내팽개치고 그녀에게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주인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한쪽 팔을 잃은 남자가 비통함으로 얼굴을 찌푸린 채 울었다.
“그렇게나 아가씨와 행복해지고 싶어 하셨건만, 제가…… 제가 그 행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
“용서해 주십시오, 아가씨!”
루시펠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아이딘 백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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