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부고
2018.05.28.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는 것뿐이었다.
아이딘 백작이 죽었다고? 왜?
충격을 받았냐고 물어보면, 조금 받긴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상황에 대해 어이없다는 감정이 먼저였다. 맨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갑자기 왜? 라는 생각뿐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고, 실감하더라도 거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죽음을 너무도 많이 겪었다. 게다가 아이딘 백작은 그녀와 그렇게 친밀했던 사이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녀는 아버지를 잃고 홀로 남은 딸이 보여야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루시펠라를 보고 사용인들은 오히려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루시펠라에게 차를 내오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루시.”
언제 도착한 건지 제드가 루시펠라의 방 안에 와 있었다.
그러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약혼자인 이 사람이 가문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가문에 대한 모든 처리는 저 사람이 하겠구나. 루시펠라는 차분하게 분석했다.
“아이딘 백작의 시신을 보러 가야 할 것 같아.”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드는 따로 위로를 하지 않았기에 루시펠라는 제드 앞에서 슬픔을 연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차가 시신보관소에 도착하고, 루시펠라는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시신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직계 가족뿐이었기에 루시펠라는 혼자 그곳으로 향해야 했다.
시체를 보관하는 곳답게 그곳은 서늘했으며, 죽음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났다.
그 가운데에는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금색 제복을 입은 황실 직속 감찰대 몇몇이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루시펠라는 그제야 귀족이 죽으면 황실 직속 감찰대가 시체를 확인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귀족 중 누군가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기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혈육을 죽이고 후계에 오른 이들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였지만.루시펠라는 클로렌스에게 들었던 내용을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루시펠라는 가운데에 있는 작은 가죽 침대를 보았다. 그 위에는 피 묻은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여기다. 여기에 그 시신이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루시펠라가 그것을 바라보자, 옆에 서 있던 감찰대원이 덮여 있던 하얀 천을 걷었다. 그러자 시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눈을 부릅뜬 채 누워 있는 중년 남자. 연갈색의 머리칼에 은청색 눈.
그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아이딘 백작이었다.
시체는 많이 봐왔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제야 그의 죽음이 실감났다.
이 사람, 진짜로 죽어버렸구나.
죽음이 갑작스럽다는 것은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가브라인 공작이 죽었을 때도 그러했으니까.
그 강철같이 강인한 남자가 수습도 못 할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을 보며 그녀는 얼마나 놀랐던가.
이 남자의 죽음 역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상했다.
그를 아버지로 생각하며 따랐던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쓸쓸한 느낌이 밀려왔다.
이건 루시펠라가 느끼는 감정일까, 아니면 에스텔이 느끼는 감정일까.
루시펠라는 숨을 멈춘 채 한참 동안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루시펠라의 시선이 그의 머리로 향했다.
마차가 비탈길에서 굴러 머리를 크게 다친 게 사망 원인이라고 했다. 그의 머리카락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피는…… 닦으신 건가요?”
루시펠라가 감찰대원에게 묻자,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시신은 변형시키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루시펠라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체를 바라보았다. 사후 아주 오랜 시간은 아니었는지 부패가 많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루시펠라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매만지고, 그의 발을 매만졌다. 그의 시신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그것을 본 루시펠라는 호흡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빠르고 크게 뛰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흐르며 위험신호가 울려 퍼졌다.
감찰대원들이 이상하다 느낄 때쯤 루시펠라는 일부러 다리에 힘이 풀린 척하고 주저앉아 흐느꼈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네, 어딜 봐도…… 아버지시네요. 아버지가 틀림없어요. 세상에, 너무 끔찍해. 더 이상 못 보겠어요.”
“이해합니다. 보우 경, 어서.”
감찰대원 중 하나가 다시 백작의 시신 위에 하얀 천을 덮었다.
루시펠라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감찰대의 팔에 손을 얹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그녀는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며 처연히 말했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루시펠라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정중하게 말했다. 이들의 부축이 거슬렸지만, 지금 그녀는 철저한 약자인 척해야 했다.
지금 이 새끼들은 모두 한패였으니까.
시신보관소에서 나온 루시펠라가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자마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느릿하게 뛰며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그의 품에 뛰어들자, 제드는 가만히 루시펠라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을 느끼며 그녀는 생각했다.
감찰대가 그 시신을 보고 ‘사고사’라고 말하는 것은 대놓고 그녀를 기만하겠다는 말과 똑같았다.
이건 살인이었다.
아이딘 백작은 살해당한 것이다.
“영애의 몸이 좋지 않군. 인사는 생략하고 영애를 데려가도 되겠는가?”
다행히 제드는 루시펠라를 배려해서 이곳을 벗어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십시오.”
감찰대원들의 말에 제드가 루시펠라를 마차에 태웠다.
아직도 멍했다.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그녀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이딘 백작이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것도 살해당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지?
루시펠라는 바로 옆에 있는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루시펠라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서린 건 명백한 걱정이었다.
“안색이 안 좋군.”
“…….”
“하긴 시신을 보고 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
“…….”
루시펠라는 이 사람에게 아이딘 백작이 살해당했다고 말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무엇을 근거로 댄단 말인가.
루시펠라가 눈치챈 시체의 부자연스러움?
레이디로 산 루시펠라 아이딘이 시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처럼 말이 안 되는 일이 또 있을까?
현재 약혼자인 제드는 아이딘 백작가의 대리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시체를 볼 권한이 있는 게 아니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이것을 자신 혼자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중요한 일을 혼자만 알고 무리하게 처리하려다 망치느니, 그에게 말하는 게 나았다.
“제드.”
그 말에 제드가 움찔했다. 갑자기 그녀가 입을 열 줄 몰랐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번 망설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 같아.”
그는 루시펠라의 말에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역시, 이건 허무맹랑한 소리일까? 루시펠라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다.
그녀는 제드에게 앞으로 해야 할 거짓말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유를 물어볼 거라 생각했던 제드는 루시펠라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생각에 잠긴 듯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행은 없는 것 같으니 안심해.”
아, 대답이 없었던 게 기척을 확인하려 그런 건가.
제드는 여전히 이유를 물어보지 않고 루시펠라의 손을 꽉 잡은 채 경계하는 듯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눈을 좁혔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불과 어제까지는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달콤한 이유 때문에 그의 집으로 향했지만, 지금은 혹시 모를 위협 때문에 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루시펠라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하인트 공작가에 당도했다.
제드의 지시로 하녀들은 진정에 좋은 차를 내왔고, 그녀는 말없이 그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드는 그녀의 건너편에 앉아 루시펠라가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 진정을 찾은 루시펠라가 제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믿어주는 거야, 제드?”
“못 믿을 이유가 뭐가 있지?”
“나를 믿기엔 사안이 너무 엄청난 것 같지 않아? 지금 나는, 아버지를 잃고 이성이 없는 상태에서 당신에게 헛소리를 하는 걸 수도 있어.”
“아버지가 죽어서 이성이 없는 상태라고?”
제드가 그 말을 되물었다. 그러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만약 그대가 이성이 없었다면, 그 건물 안에서 무사히 나오진 못했을 테지. 시신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하고도 그렇게 연기를 하다니 놀랍더군.”
“…….”
루시펠라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녀가 시신보관소에서 나올 때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린 건가? 어쩐지 그녀를 서둘러 마차에 태우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는 루시펠라가 왜 아이딘 백작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짐작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김이 빠질 정도로 덤덤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영애의 말을 들으니 나 역시 짐작 가는 바가 있으니까.”
“뭔데?”
“아이딘 백작은 남몰래 이오지프를 지원해 왔어.”
“뭐?”
1황자파에 끼어 있던 이가 아이딘 백작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오지프를 지원했다고? 대체 백작은 무슨 생각이었던 것일까.
“대체 왜?”
“이유는…… 정확히는 몰라, 확실한 건 아이딘 백작은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루시펠라가 어렴풋이 짐작한 것을 제드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는…….”
제드가 말을 이으려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벌컥 열렸다.
주인의 허락도 없는 무례한 침입에 제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2기사단원들이었다.
“이게 무슨 무례인가.”
제드의 분노한 음성에 기사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제드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각하. 황명입니다!”
황명이라니? 루시펠라와 제드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제드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서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드가 왜 저러지?
루시펠라가 이유를 가늠해 보려 할 때, 기사 한 명이 그녀 앞으로 다가와 종이를 내밀었다.
루시펠라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황가의 인장이 찍힌 칙서였다.
“아이딘 백작 영애를 지금 당장 황궁으로 소환하라는 폐하의 명령이십니다.”
나를 황궁으로? 루시펠라는 눈을 깜빡였다. 아이딘 백작이 죽었기 때문에 그런 건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제드의 물음에 2기사단 중 한 명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반역.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 제드는 루시펠라를 보내려 하지 않고 있었다.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는 것인가? 그녀는 제드의 설명이 필요했다.
“폐하를 뵙기 전에 단장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폐하를 뵐 몰골이 아니네요.”
루시펠라의 말은 그녀가 간신히 생각해 낸 핑계였다.
“폐하께선 영애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지체하지 말고 그대로 모셔오라는 명입니다.”
마지막 버티기도 실패했다. 루시펠라는 얼굴을 굳힌 채 일어났다. 여기서 제드가 황명을 여겨 혹 꼬투리라도 잡히면 안 된다.
“그렇게 할게요. 다만 제 약혼자와 함께하고 싶네요.”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루시펠라의 물음에 2기사단이 말했다.
“폐하께선 영애 혼자 모셔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여…….”
“경이 날 모셔갈 필요는 없지. 내가 알아서 영애의 마차를 따르겠네.”
제드가 삐뚜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지금 영애는 불안해하고 있네. 폐하께서 문제 삼으신다면 책임은 내가 지지.”
그 말에 2기사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루시펠라는 황좌에 앉아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못 본 사이에 황제는 더 말라 있었으며, 눈 밑에는 거무스름한 빛이 돌고 있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때와는 달랐다. 그에겐 완연한 죽음의 기색이 서려 있었다.
“얀스가르의 태양이여 영원하라! 폐하를 뵙습니다.”
죽어가는 이에게 ‘영원’을 말하는 것만큼 허무한 일이 있을까.
어색한 인사 후 루시펠라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이들에게 인사했다.
“황자 전하들을 뵙습니다.”
황제의 옆에는 테미르와 이오지프가 서 있었고, 이드리스 공작 역시 있었다.
왜 이드리스 공작이? 루시펠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 참으로 힘들었겠구나.”
이드리스 공작은 그간의 태도와는 다르게 처음 보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루시펠라에게 말을 건넸다.
저 인간이 미친 건가? 그녀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제드의 설명을 듣는 데는 실패했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곁에 있었지만, 2기사단원들은 ‘황명’이라는 명목으로 루시펠라와 제드가 대화하지 못하도록 했다.
따라서 제드는 루시펠라와 제대로 말도 못 한 채 그녀를 알현실로 보내야 했다.
대신 제드는 헤어지기 전에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영애가 생각하는 게 진실일 거야.”
루시펠라는 제드의 말을 떠올리며 최대한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장례는 내가 알아서 맡아주마. 널 혼자 두진 않겠다.”
그 가식적인 표정을 경계하던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치 설명을 요구하듯.
이윽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드리스 공은 아이딘 백작가의 대리인의 자격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빠져 있었으나 루시펠라는 그에 놀랄 여유는 없었다.
이드리스 공작이 아이딘 백작가 대리인이 된다고?
대리인은 가주가 죽고 가문을 이어받을 남자가 없을 때, 자격이 있는 남자 중 한 명이 대신 가문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루시펠라의 약혼자인 제드가 하는 게 아니었나? 왜 갑자기 저 사람이?
그는 의아해하는 루시펠라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아비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이란다. 그러니 너와 네 가문을 맡는 건 당연한 일이지. 게다가 너와 나는 친척이잖느냐.”
“아이딘 백작가에 대한 권리는 제가 아니라 제 약혼자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얀스가르의 법이 아니던가요?”
루시펠라가 딱 잘라서 말하자 이드리스 공작이 억지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혼이 아니라 결혼을 말하는 거겠지. 영애와 하인트 공작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루시, 너는 사실상 혼자와 마찬가지란다.”
약혼. 정식으로 결혼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정식 배우자가 아니니 혈연이 더 우선된다는 건가?
루시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너는 고개만 끄덕이면 된단다. 하인트 공작과 결혼만 하면 너는 다른 가문 사람이 되잖느냐. 네가 후계를 생산할 때까지 가문에 대한 건 내가 맡아주마.”
그 말이 맞았다. 아이딘 백작의 재산에 그녀는 딱히 욕심이 없었다. 그러나 마냥 고개를 끄덕이기엔 루시펠라는 찝찝함을 느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이오지프가 말했다.
“아이딘 영애, 아이딘 백작령에 피존 블러드가 매장되어 있다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피존 블러드? 루시펠라는 어렵지 않게 그것이 최고급 루비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비둘기가 흘린 피처럼 붉은 루비라기에 기억에 남았던 보석이었다.
“아이딘 백작가는 사실 얀스가르 제일의 부유한 가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문의 대리인을 맡는다는 건, 그 재산에 대한 권리도 일부 인정하는 것이고요.”
루시펠라는 그에 이드리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드리스 공작은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본디 마지막 남은 이가 배우자가 없거나 지정한 이가 없다면 대리인으로 인정되는 건 가주의 가장 가까운 혈연이다, 영애.”
황제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자 루시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된다면 이드리스 공작가가 그 ‘나라에서 손꼽힌다는 재산’을 가지게 된다는 건가? 루시펠라는 이오지프의 얼굴이 굳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테미르의 얼굴에 은근슬쩍 서린 미소도. 테미르는 아까부터 희열이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 명확한 어조를 띠고 있었다.
‘거 봐. 내게 알아서 기었어야지. 기분이 어때?’
테미르의 노골적인 시선에 루시펠라는 깨달았다. 이것은 이드리스 공작가와 테미르가 믿고 있던 마지막 보루였다. 그들이 여유로워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제드는 아이딘 백작을 누가 살해했는지 짐작이 간다며 루시펠라에게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루시펠라 역시도 이젠 알 수 있었다. 제드의 목소리가 귀가에 들렸다.
“영애가 생각하는 게 진실일 거야.”
누군가가 살해당했다면, 그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취할 놈들을 의심해야 옳았다.
아이딘 백작이 죽고, ‘대리인’의 자격을 가져 커다란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아이딘 백작을 살해한 건 저놈들이다.
그녀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