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29화 (129/173)

#129화 원망과 사랑

2018.05.24.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얀스가르 황실 제1기사단의 부단장, 커셔 에런트는 자신의 보좌관과 눈을 마주하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장인 제더카이어 하인트가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탓이다.

물론, 제드가 일을 안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예직이라는 말에 걸맞게 제드는 정말 ‘적당히’ 일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인가, 집중도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뭐랄까,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이 있는 따스한 집으로 퇴근하기 위해 일을 하는 가장의 집념이 느껴졌다고 할까. 제드는 그야말로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하지.”

제드는 한숨을 내쉬며 깃펜을 놓았다. 커셔는 제드가 내민 서류를 보고 놀랐다.

기사단 내 무기 교체에 대한 건 내일 처리해도 되는 일이었다. 2기사단과의 합동훈련 계획 역시도.

내일 해도 될 일을 지금 했다는 것은 설마, 내일 출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대체 왜?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커셔 에런트가 답을 내리기도 전에 제드가 바람처럼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제드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

루시펠라는 하인트 공작가의 복도를 구경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저 조금 오래 있고 싶은 마음에 던졌던 말인데, 제드가 그렇게 좋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줄은 몰랐다.

그 얼굴에 대고 루시펠라는 차마 ‘그냥 말해본 거였어’라고 할 수 없었다. 루시펠라는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금 되새겼다.

‘그래도 좋아하는 얼굴, 엄청 귀여웠지.’

루시펠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생각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을 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는 루시펠라의 말에 고개를 빠르게 끄덕끄덕 거리더니, 곧장 공작저에 연통을 넣으러 허둥지둥 뛰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루시펠라는 계획 없이 하인트 공작저에서 그의 집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인트 공작저는 과연 기사의 집안다운 가풍이 느껴졌다. 화려한 장식이 최대한 절제되어 있었고, 벽지의 색은 어두웠다. 화려함과 꽃으로 장식된 아이딘 백작가와는 정반대였다.

“와, 저택에 진열된 갑옷이 많네. 기사의 집이라는 게 표가 나.”

“아가씨께서 마님이 되시면 이제 원하시는 대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집사가 속으로 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제드로부터 급히 온 연통 중 그가 강조한 지시는 살풍경한 집 안 분위기 좀 어떻게 해보라는 것이었으나, 사실 진열된 갑옷들과 검을 치우지 않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집사는 루시펠라가 오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저것들을 치우고 다른 걸로 대체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대신 그녀가 묵고 가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결국 지적이 나오다니, 분명 주인님이 알면 크게 상심할 것이다. 역시 무리해서라도 치워야 했나, 그가 후회할 때였다.

“별로 바꾸고 싶지는 않아.”

“네?”

“집안 고유의 분위기가 있잖아. 로에르 후작가는 고급스럽다던가, 우리 집은 눈부시도록 화려하다던가. 하지만 이곳은 이런 분위기인 것도 좋지. 멋있잖아.”

“…….”

“저기 저 검은색 갑옷은 뭐야? 저것도 새로 개발된 거야?”

“그렇습니다.”

집사의 예상과는 다르게 루시펠라는 장식되어 있는 무구들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이 ‘신기하다’라는 일시적 호기심이 아니라 관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집사는 갑옷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오, 이건 그럼 내구도는 그대로인데 다른 갑옷보다 더 가볍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공작가에서 후원한 대장장이 중 한 명이 개발해 낸 겁니다. 가장 먼저 각하께 바쳤고요.”

“공작가에선 이런 데에 자금을 후원해?”

“네, 그렇습니다. 하인트 공작령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대장장이 길드가 형성되어 있으니까요. 그들의 가장 큰 후원 가문이 하인트 가입니다.”

“그래? 그럼 요즘에는 어떤 무기를 후원해? 공성 무기?”

“아니요, 공성 무기는 사실상 전쟁이 끝났으니 주인님께서 후원을 중단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대 마물 병기나 방어 무기를 개발 중입니다.”

“그럼 이런 새로운 무기들이 더 많이 개발된다는 거야? 그러면 마물에게서 사람들을 더 많이 구해낼 수 있겠네. 보고 싶어.”

“곧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대답에 루시펠라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무기도 변하는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얀스가르에서 공성 무기가 아니라 다른 무기들도 개발할 줄은 몰랐다.

루시펠라를 바라보는 집사의 얼굴에 안심과 더불어 흐뭇한 미소가 서렸다. 아무래도 주인님과 아가씨는 참 잘 지낼 것 같았다.

루시펠라는 생각보다 하인트 공작가에서 지내는 게 꽤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걸 평생 봐도 질리진 않을 것 같았다.

루시펠라는 저택을 좀 더 돌아보다 아이딘 백작가에서 갈아입을 옷이 도착하자, 하녀의 안내로 목욕을 하러 갔다.

새하얀 욕조에 몸을 담근 루시펠라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묵을 집에서 목욕을 하는 건 당연하지만, 제드의 집에서 이렇게 목욕을 하는 것은 어딘지 이상했던 탓이다. 게다가 그녀의 착각일까? 목욕물은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 났다.

왠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자고 간다고 했으니, 그런 의미도 되는 걸까?’

루시펠라가 손을 움직여 몸을 찰랑거렸다. 괜스레 귀가 빨개졌다.

자고 간다고만 했지 잠자리를 가진다고 말하진 않았다. 꼭 그게 그런 의미가 되어야 하는 건가.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루시펠라를 열렬히 바라보는 제드의 눈빛이 떠올랐던 탓이다.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 목욕물에 얼굴까지 담갔다. 어느새 우울한 아침의 기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목욕을 마친 루시펠라는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하인트 공작가의 하녀들은 떠들썩한 아이딘 백작가의 하녀와 달리 조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하녀들까지 데려와 달라고 할까. 영 심심했다. 머리를 어느 정도 빗어 말리자, 하녀들이 다시 그녀의 머리를 예쁘게 묶어주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이제 이것이 일상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이 집안에 살면서 그의 집을 돌보며 그가 돌아오길 바라며, 이렇게 단장을 해야 하는 걸까.

사실 루시펠라가 ‘레이디’로서 살아온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것을 평생 한다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미리 경험해 보는 기분이랄까. 어쩐지 갑갑해졌다.

“창문 좀 열어주겠어?”

루시펠라의 말에 하녀 중 한 명이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방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바람을 맞았다.

목욕하기 전 무구들을 봤을 때와는 다른 감정에 루시펠라는 괜히 답답해 가슴을 쳤다.

단장을 마친 루시펠라는 일층 복도에서 초상화를 구경하는 척 현관 주변 복도를 얼쩡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제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돌아올 것 같더니, 그는 생각보다 늦는 것 같았다.

복도에 걸려 있는 초상화 중에서 제드의 아버지로 보이는 인물의 초상화를 볼 때였다.

현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도.

제드다!

루시펠라는 그 목소리에 온 신경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너무 기다렸다는 표를 내는 것은 왠지 자존심이 상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젓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사람이 왔다는데 반가워할 수도 있지, 오히려 남의 집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다.

루시펠라가 로비에 가자 들어오는 제드의 모습이 보였다. 망토를 집사에게 건네던 제드와 루시펠라의 두 눈이 마주쳤다.

제드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러자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앞으로 달려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역시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보고 싶었어.”

그의 ‘보고 싶었다’는 말은 마치 며칠 이별한 것 같은 그리움이 묻어 나왔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좀 전까지 느꼈던 갑갑함이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루시펠라는 괜히 투정을 부렸다.

“너무 늦었잖아.”

사용인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물러가기 시작했다. 루시펠라와 제드는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

제드는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따스했으며, 잠자리는 더없이 편안했다.

사실 그는 잠자리의 편안함 따윈 느낀 적은 없었으나 그냥 그의 기분이 그랬다.

그는 자신의 옆에 누워 잠든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맨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춥지 않을까. 그는 이불을 끌어 당겨 덮어주었다. 그러곤 손을 뻗어 루시펠라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머리카락을 치우자 정갈한 검은 눈썹과 기다란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간밤은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아니, 행복했다.

사실 제드 역시도 루시펠라와 잠자리를 가질 생각까진 하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열기가 피어났다.

제드는 자신에게 변명했다. 루시펠라에게서 그간 맡은 향과는 다른 달콤한 향기가 나서 거기에 매혹되어 버렸다고.

심지어 루시펠라도 적극적이었다. 꼭 그가 욕정에 미쳐서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긴 밤 동안 서로를 열렬히 탐닉했다.

따라서 아침이 늦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드는 아직도 세상모르게 잠든 루시펠라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제, 그는 충만함이라는 게 어떤 건지 느꼈다. 집에 돌아오니 당연하게 그녀가 있었고, 그를 보고 미소 지었다. 당연한 듯 저녁을 함께했으며, 밤을 같이 보냈고, 이렇게 자고 일어나니 옆에 루시펠라가 있었다.

함께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자, 그는 비로소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았다.

자신은 줄곧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결혼이라는 거 생각보다 좋지 않은가. 이런 날이 앞으로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행복함이 밀려왔다.

루시펠라의 평온하게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그녀를 깨우느냐, 다시 한 번 자신의 욕구를 채우느냐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쳤어.”

“뭐?”

울음을 터뜨리는 듯 그녀의 숨이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그러곤 움찔하더니 이윽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루시?”

“이젠 지쳤어. 지쳤다고…….”

지쳤다고? 제드는 이전에도 그녀가 이런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이런 악몽을 자주 꾸는 건가? 그가 얼굴을 굳히곤 루시펠라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루시, 정신 차려.”

그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멍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루시?”

그가 이름을 부르자 루시펠라의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누운 채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악몽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앞에서 두 번이나 꾸었다는 건, 꽤나 자주 꾸는 꿈일 수도 있다는 거였다.

“무슨 꿈을 꾼 거야?”

“기억 안 나.”

루시펠라가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거짓말.

제드는 그녀의 거짓말을 한눈에 알아챘다. 하지만 만약 그게 거짓이라면, 왜 그녀는 저리도 처연하게 웃고 있는 걸까?

지금 감정조차도 추스르지 못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루시펠라는 눈물을 닦아내며 제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치 자신의 얼굴을 숨기려는 듯.

“제드.”

“그래.”

“난 지금이 행복해.”

제드는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가슴에 이마를 댔다. 마치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려는 것처럼.

제드는 한참 동안 루시펠라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드, 제드, 제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절박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시펠라의 두 눈에는 눈물이 서려 있었다.

왜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루시펠라가 곁에 있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그는 호기심을,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추궁하고 싶은 충동도.

설령 묻더라도 그녀는 어차피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겠지.

루시펠라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녀가 숨겨온 진실에 단 한 발자국도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평생이 될지도 몰랐다.

제드는 묵묵히 그 사실을 되뇌며 그녀의 눈물 어린 두 뺨을 쓸었다.

그러자 루시펠라가 별안간 제드에게 입을 맞춰왔다. 자그마한 입술이 그의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그녀 쪽에서 입을 먼저 맞춰오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지만, 지금 이 입맞춤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위로해 달라는 말이었다.

제드는 조용히 입맞춤에 응한 채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손가락을 세워 제드의 맨 등을 긁어내리듯 쓸었다. 부드러운 살과 살이 접촉하자 식어 내렸던 열기가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제드의 다른 손이 루시펠라의 보드라운 살결을 더듬었다. 입맞춤 특유의 질척이는 소리가 귀가에 울렸다.

그는 루시펠라의 입에서 입술을 떼며, 그녀의 턱과 목선을 타고 입을 맞췄다. 단단하면서도 적당히 말랑한 그 입맞춤에 붉은 자국이 새겨졌다.

그는 입맞춤을 멈추었다. 그러자 왜 멈추냐는 듯 루시펠라가 그를 쳐다봤다.

한참이나 그 시선을 마주하던 그는 루시펠라의 목을 살짝 깨물었다.

영원한 반려가 될 연인에게, 원망과 사랑을 담아서.

***

“아이딘 영애가 다녀갔다면서? 좋았겠네.”

이오지프의 말에 제드는 얼굴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데?”

“네놈이 온다는 말에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갔으니까.”

제드의 두 눈에 서린 명백한 원망의 기색에 이오지프가 식은땀을 흘렸다.

“난 분명 너를 만나려고 했어. 하지만 어젠 바쁘다고 했고 오늘은 안 나온다잖아. 난 나를 피하는 사람에게 더 집요하지.”

이오지프의 말에 제드가 정색하며 말했다.

“이유 있는 집요함이라 믿어. 재미없는 일로 왔다면 어떻게 될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제드의 말에 이오지프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내일 올걸, 대체 왜 오늘 와서는!

“키칼 공작에 대해서는 폐하께서도 가만두지 않으실 모양이야. 얼마 후 황제의 군대가 내려가 그를 포박해 오기로 했어. 얀스가르 독립 세력과 연관된 정황이 잡힌 것 같더군.”

“…….”

그걸 말하려고 온 거야? 라는 시선에 이오지프가 하하 웃었다.

“그리고 내가 준 팔찌에 대해 누가 정보를 흘렸는지 조사해 봤는데, 우리 쪽에서 발설한 사람은 없었어. 그래서 생각하던 중, 제일 중요한 부분을 간과했다는 걸 깨달았지.”

“뭘 간과했는데?”

“팔찌를 준 사람이 너에게 그 팔찌를 주라고 했어. 그리고 그 사람은 네가 아이딘 백작 영애와 팔찌를 나눠 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제드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팔찌를 받은 게 맞는 건가?”

“그 사람은 정말 믿을 만했어, 제드. 너라도 믿었을 거야.”

이오지프의 말에 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사람 쪽에서 새어 나갔다고 한다면, 애초에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마저 믿을 사람이라고? 대체 누굴 말하는 거지?

“누구지?”

“비밀…… 이라고 하면 화내겠지?”

이오지프의 말에 제드가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풀었다. 이오지프는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내 말 잘 듣고 함부로 입 놀리지 마.”

“네놈 하는 거에 따라서 결정하지.”

“네 사랑하는 약혼녀가 위해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뭐?”

“팔찌를 준 사람, 아이딘 백작이야.”

그 말에 제드는 눈을 크게 뜨다 이내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렇게 된 거였군. 이제야 모든 게 납득이 갔다. 그는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안 놀라? 그 가난한 영지의 백작이 그 귀한 팔찌를 준 거라고. 그리고 서부 지역 화재 기부금도 그 사람이 나에게 줬어. 놀랍지?”

“…….”

“왜 안 놀라? 제드, 설마 너, 아이딘 백작가의 재산에 대해 알고 있었어?”

제드가 대답하지 않자 이오지프가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중요한 걸 알면서 대체 내겐 왜 말하지 않은 거야? 말을 할 수도 있잖아. 정말로 냉정하군, 냉정해.”

그의 장난기 어린 말에도 불구하고 제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너를 지원하는 거지?”

“그 사람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뻔하잖아. 우리 형님이 아이딘 영애에게 했던 짓만 해도 이미 돌아설 명분은 충분할걸.”

완전히 겁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군.

같은 2황자파니, 계파가 달라 갈등할 위험은 줄었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어쩐지 안심이 들었다.

제드는 백작이 루시펠라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날 도와주면서 한 가지 부탁을 하더군.”

“무슨 부탁?”

“그게…… 아니, 여기까진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이오지프가 제드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조금 김이 빠지긴 했지만 제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부탁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정리한 것을 말했다.

“아이딘 백작이 얼샤 쪽 사람이고, 그가 흘린 정보가 얼샤에 흘러들어 갔다고 생각하면 그놈들이 팔찌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도 납득이 되는군. 설마 그가 독립 세력과 연관되어 있었던 건가?”

“아마 아닐 거라 생각해. 그럼 아이딘 백작 영애가 납치되진 않았을 테니까.”

이오지프의 말에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건 아이딘 백작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그래서 지금 아이딘 백작은 어디에 있지?”

제드의 물음에 이오지프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연락이 안 돼.”

“뭐?”

“영지에 연통을 보냈는데 연락이 안 되더군.”

사람을 풀어 찾아봐야 하나? 그런 대단한 인물이라면 이오지프도 찾아보고 있을 텐데? 더 자세히 물어보려던 그때였다.

“전하!”

“각하!”

버나드와 윈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동시에 응접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노크조차 생략된 채 다급히 문이 열렸다. 이오지프와 제드는 저들이 똑같은 소식을 가져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오지프와 제드가 눈짓을 교환하며 그들을 바라보자, 버나드와 윈터 역시도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동시에 말했다.

“전하, 당장 황궁에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아이딘 백작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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