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25화 (125/173)

#125화 과거로 남은 남자

2018.05.10.

“왜?”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창가에 서 있는 루시펠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약의 후유증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없던 시간이 꽤나 길어서 그런 것일까.

깨어나서부터 그는 다른 일은 버나드에게 미루고 티테이블에 앉아 계속 루시펠라만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자야 할 시간인 지금까지도.

“내일 당장 얀스가르로 출발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아파서 안 돼.”

루시펠라가 멍든 뺨을 가리켰다. 그것을 본 제드는 피식 웃으며 일어서더니 루시펠라에게 다가와 그녀의 볼을 손으로 감쌌다.

그는 마치 거짓말을 판별하려는 듯이 루시펠라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결국 루시펠라는 그의 두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안 아파. 안 아픈데, 당신이 쉬었으면 좋겠어.”

그 말에 제드가 피식 웃더니 루시펠라의 목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재 이곳은 신전에서 가까운 도시를 관리하는 귀족의 성이었고, 제드와 루시펠라는 이곳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특히나 제드는 섭취했던 독이 전부 다 빠져나가지 않아 안정을 취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루시펠라가 사라진 이래로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많이 상해 있었다. 따라서 그가 섭취한 독물은 아니카가 말했던 두 시간이 지나도 쉽사리 제거되지 않고 있었다.

“난 괜찮아.”

제드가 말했다.

“아니, 보는 내가 안 괜찮아. 내가 사라지고 나서 식사도 안 했지, 잠도 안 잤지, 아무리 건강한 기사라고 해도 그러면 몸이 괜찮겠어? 건강한 몸으로 날 찾을 생각을 해야지, 대체 멍청하게 왜 그런 건데?”

루시펠라의 말은 기분이 상할 정도로 과격했지만 듣고 있는 제드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서려 있었다.

“살아 있을 가치를 못 느꼈으니까.”

그 선뜩한 말에 루시펠라는 자신의 목을 감싼 제드의 팔을 내리고 제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해?”

“진심을 말한 것뿐이야.”

인질범의 요구에 어떠한 대비도 안 하고 들어갈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는 정말로 루시펠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번 일로 충분히 잘 알았다.

“다신 그러지 마.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준비 없인 들어가지 말라는 소리야.”

“준비라……. 아예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 들어는 두지.”

“준비했다고?”

“글쎄. 했다곤 했지만 안 한 것과 마찬가지라 뭐라 말을 못 하겠군. 여하튼 영애의 말은 명심하지. 다음부터는 영애가 납치당하면 철저한 준비 끝에 납치범들을 죽이겠어.”

“또?”

“그리고 이렇게 내 몸을 상하도록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루시펠라는 그에 입술을 깨물었다. 두 번 다시 그가 자신 때문에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얼굴을 보아하니 적당히 그녀의 기분을 맞춰준 것이 표가 났다.

제드가 입가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그 장면은 아직까지도 루시펠라의 머릿속에 각인처럼 남아 가슴을 후벼 팠다. 아마 평생 그 장면은 머릿속에 남아 사라지지 않겠지.

루시펠라가 씁쓸한 표정을 지을 때 제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군. 대체 왜 그놈들이 날 살려둔 건지.”

그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살아서 이 얼굴을 다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심지어 무너진 건물 밖으로 날 빼놨다니, 참 이상해. 알 수가 없군.”

“그냥, 그놈들이 생각보다 나쁜 놈들이 아니었단 말이겠지.”

“그대의 얼굴에 손을 댔는데도?”

제드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루시펠라가 말했다.

“내가 저항했으니 그놈들도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

“어쩔 수 없다고? 그대는 상당히 그놈들에게 관대하군. 잘해줬나 보지?”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었어!”

자칫하다가 그녀를 납치하고 제드를 죽음까지 몰아넣은 납치범들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상한 오해는 이제 정말 싫다.

그녀는 제드의 마음이 상하게 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더 의심을 사기 전에 루시펠라는 제드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 빨리 몸을 회복해야지.”

그녀는 제드를 침대로 이끌었다. 제드는 순순히 끌려가 침대 위에 누웠다.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먼저 침대에 눕히다니, 도발적인데? 색달라서 좋군.”

이 인간이 진짜. 루시펠라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몸이 안 좋으면 무리하지 말고 얌전히 쉬는 게 좋지 않을까?”

“무리라니? 내 몸은 지극히 정상인데? 시험해 볼 수도 있어.”

제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루시펠라는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 인간이 이렇게 능글맞게 된 거지? 처음 만났을 때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루시펠라는 제드의 코를 꼬집었다. 그에 제드가 낮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루시펠라가 제드의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제드.”

루시펠라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그녀의 얼굴을 감싸더니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말캉한 입술이 떨어졌다.

루시펠라가 제드를 노려보자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제드는 그것이 싫은지 집요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제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냥 곁에 있어줘.”

그 말에 루시펠라가 한숨을 쉬며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의자에 앉기까지도 제드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루시펠라의 손등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까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약 기운 때문인지 자주 악몽을 꾸게 되더군.”

“악몽? 어떤 악몽?”

“그냥 여러 가지.”

제드는 말하기 싫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루시펠라는 그 얼굴을 보고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제드가 계속해서 손을 만지작거리며 루시펠라를 보았다. 설마 자신과 관련된 꿈이었던 걸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약 기운 때문에 그래.”

“그러게. 상당히 오래가는군. 빌어먹게 짜증 나.”

제드가 욕설을 내뱉자 루시펠라가 다른 손으로 제드의 손을 잡았다. 그에 제드가 누그러진 표정을 하며 루시펠라를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잠들면 좀 편하게 잘 수 있을 텐데.”

“제드.”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했어.”

꼭 아이처럼 조르는 것 같다.

루시펠라는 마음이 약해졌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안 된다니?”

“이상한 쪽으로 오해할지도 몰라. 그냥, 얌전히 자.”

“오해를 해도 뭐가 어떻다는 거지? 알아봤자 상관없는데.”

“난 상관있어.”

“누구에게. 루이르크 공작에게?”

“제드.”

또다시 나온 칼리드에 대한 화제에 루시펠라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악몽을 오랫동안 꾼 탓일까. 제드의 언사는 정제되지 않아 직설적이었다.

오늘만 해도 칼리드에 대해 몇 번이나 이야기를 꺼낸 건지. 그는 심지어 질투심까지 드러냈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루이르크 공작이 왜?”

“그대도 알고 있잖아? 그 녀석은 영애를 마음에 두고 손에 넣고 싶어 안달 나 하지.”

그것은 칼리드가 그녀에게 사냥대회 때 브로치를 바쳤기 때문일까, 아니면 제드의 직감인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대신 루시펠라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의 마음 따위 알아서 뭐 해. 어차피 난 당신 옆에 있는데.”

“…….”

“평생 같이 있다고 지겨워하지나 마.”

“내가 그대를 지겨워할 틈이 있을까?”

제드가 빙그레 웃으며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대도 내가 질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응?”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단 말이야.”

그 말은 어딘지 모를 짙은 외로움이 느껴졌다. 몸이 약하기 때문에 약한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

그녀는 제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루시펠라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곧이어 숨소리가 고르게 났다. 그가 잠이 든 것이다. 루시펠라는 한참 동안 그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는 다 큰 성인이었지만, 그의 자는 얼굴은 언제나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루시펠라는 그 얼굴을 조용히 감상했다. 시간이 지나 그녀의 손을 잡은 힘이 약해지자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왔다.

방문을 닫은 루시펠라는 착잡한 표정으로 제드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미안, 어쩔 수 없었어.”

저렇게 매달리는데, 제드의 곁에서 그가 일어날 때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따로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복도 끝 또 다른 방 쪽으로 가 조용히 노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루시펠라가 고개를 들어 방주인을 응시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칼리드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무언의 시선과 시선이 오갔다.

희미한 빛에 음영진 그의 얼굴은 기이한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굳은 표정으로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등을 켜놓아 환한 제드의 방과는 달리 칼리드의 방은 초 하나만 있어서 어두웠다. 간간이 들어오는 달빛 때문에 그녀는 겨우 주위를 분간할 수 있었다.

“앉아.”

“아니, 서서 이야기할게. 짧은 이야기니까 말이야.”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말을 거절하고 문가에 서 있었다.

루시펠라가 서 있자 칼리드 역시 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촛불을 담은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칼리드.”

루시펠라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칼리드는 그 부름에 증오가 사라져 있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루시펠라는 이름을 부른 채 또다시 칼리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쪽도 불편해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미안해.”

루시펠라의 입에서 나온 것은 사과의 말이었다.

“얼샤를 돌아봤어.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더라. 적어도 네가 왜 이 나라를 배신했는지는 알 수 있었어.”

“…….”

“친구로서, 단장으로서 네 아픔을 몰라서 미안해.”

“…….”

“정말 미안해, 칼리드.”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칼리드는 그녀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다 이내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싶은 걸 간신히 내렸다.

언제나 그녀는 이랬다. 항상 그를 미워하다가도 막상 속사정을 들으면 미안해하며 그를 더욱 그녀의 깊은 곳으로 끌어들였다.

그의 ‘진실’을 늦게 알면 알수록 그만큼 죄책감에 기반한 달콤한 애정이 주어졌다. 이것이 자신이 아는 사랑스러운 에스텔이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그녀다. 분신처럼 반평생을 함께해 온 사이다.

그녀가 자신을 두고 그놈을 따라 죽는다고?

미친 소리였다. 역시 그녀가 자신을 두고 떠날 리가 없다. 제더카이어 하인트에게 갈 리가 없었다.

루시펠라가 팔을 뻗은 채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촛불에 일렁이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칼리드는 그 포옹에 움찔했다. 이것까진 예상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나 이내 그는 황홀함에 전율했다. 이 얼마나 갈망하던 그녀의 품, 그녀의 온기인가. 그녀가 자신을 안아주었다. 마치 예전처럼.

“이젠 옛날처럼 네 머리를 끌어안을 수는 없구나.”

루시펠라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에 칼리드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칼리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칼리드는 느른한 만족감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

“네 옆에 있었으면서도 네 고통을 몰라서 미안해, 칼리드.”

“…….”

“혼자서 많이 힘들었겠구나.”

어째서일까. 루시펠라의 말에 눈물이 고였다. 그간의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

촛불이 일렁이며 그림자가 흔들렸다. 칼리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루시펠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가 그의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에스텔…….”

그는 꺼져 가는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펠라는 움직이지 않은 채 묵묵히 그를 끌어안았다.

한참의 포옹이 끝나고 칼리드가 미소를 지으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이제 옛날처럼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손을 잡아주며 함께해 주겠지.

그러나 미안하다는 듯 울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루시펠라의 표정은 생각과는 달랐다. 동정 어린 표정도 아니었고, 슬픈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칼리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에스텔.”

칼리드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루시펠라는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녀는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칼리드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들었다. 루시펠라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때, 루시펠라의 입이 열렸다.

“이제 너에 대해 품는 미안함은 여기까지야.”

“…….”

“나에게 복수하라고 했었지? 이게 내 대답이야.”

“…….”

“아직도 난 날 죽인 네가 미워. 너를 증오해. 하지만 복수심에 날 불태우진 않을 거야.”

“에스텔.”

“과거는 과거로 묻어둘래. 시간이 지나면 너에 대한 미움도 사라질 거라고 생각해.”

“…….”

“에스텔로 살아 있다면 난 평생 눈을 가리고 아무것도 못 봤겠지. 두 번째 삶을 얻은 지금 조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어. 세상에 대해서도, 살아가는 방식마저도.”

“…….”

“사람을 미워한다고 꼭 복수를 할 의무는 없지. 난 언제나처럼 편하고 쉽게 살아갈 거야. 그렇게 하기 위해 너를 미워하는 것도, 그래서 네게 복수하는 것도, 미안해하는 것도 여기 이 자리에서 끝내겠어.”

“……에스텔.”

“그러니, 우리 이제 이만 끝내자. 너도 나를 포기하도록 해.”

루시펠라의 말에 칼리드가 이를 갈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건 그가 예상했던 범위 밖이었다.

루시펠라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 표정을 보고 칼리드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끊어낼 생각이었다.

“잘 있어.”

그녀가 짤막한 작별 인사를 하며 등을 돌렸다.

칼리드는 그녀가 자신에게 뒷모습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 언제나 그는 그녀의 옆자리에서, 그녀의 옆을 바라보았으니까.

이게 지금 끝이라고? 끝을 낸다고?

칼리드가 손을 뻗어 그녀를 거칠게 돌려세웠다. 그는 루시펠라의 어깨를 꽉 잡고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복수를 포기한다고? 에스텔?”

“…….”

“제대로 말해. 지금 내게 복수 하고 있는 거지? 너 지금, 이게 나한테 하는 가장 잔인한 복수라는 걸 알고 있는 거잖아.”

“…….”

“날 끊어낸다고? 널 사랑하는 나한테 가장 잔인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솔직해져. 넌 내게 복수하고 싶은 거야!”

그의 말에도 루시펠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려면 그렇게 생각해. 결국 너만 괴로워질 테니까. 얀스가르로 돌아가면 제드와 결혼할 생각이야. 그리고 그의 곁에서 살 거야.”

“에스텔!”

그가 루시펠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에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칼리드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았다.

모든 것을 알고 나서 루시펠라는 칼리드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미웠다. 여전히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복수를 말렸을 때 이미 그녀는 복수를 포기했다.

만약, 제드의 옆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에스텔로서가 아니라 루시펠라로서 살아갈 것이다.

이 녀석에게 복수하지 않겠다. 그것이 이 녀석의 괴로움을 알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속죄였다. 이 녀석에게 끊어내자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배려였다. 언제까지고 그녀를 바라볼 것 같았으니까.

그가 죄책감을 품었는지, 에스텔에게 얼마나 깊은 사랑을 품었는지 따윈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에스텔이었을 때 중요했지, 그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 없는 것이었다.

칼리드는 루시펠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물 젖은 눈이 이내 서늘한 분노의 빛을 품기 시작했다.

“아니야!”

“뭐?”

“난, 네 과거 따위가 되자고 이런 짓을 했던 게 아니야!”

“…….”

“그러자고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에스텔, 나는 네 과거로 남아 있지 않을 거야!”

그는 분노한 듯 소리쳤다. 절절한 말에 루시펠라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칼리드에게 일말의 동요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처절하게 자신을 사랑한다는데, 이렇게나 절절한 마음이었는데 그는 왜 에스텔에게 고백하지 않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일까. 그들의 관계는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달라질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두 번째, 레이디로 되살아날 운명이 주어진 거라면, 다시 만난 그들은 또 다른 인연이 되어 아무 속박도 없이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망해가는 나라의 죽음이 예정된 기사들이 아닌 기사와 레이디로서.

그러나 칼리드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거기서 그녀와 칼리드는 두 번 다시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칼리드는 억지로 그 관계를 이어 붙이려 했다.

“대체 왜 그 녀석이야! 대체 왜!”

“…….”

“대체 왜 그놈이냐고! 알잖아, 그놈은 네가 가장 증오했던 적국의 기사였잖아! 동료들을 죽이고 네 소중한 나라를 멸망시킨 놈이 그놈이야! 똑같은 놈인데, 대체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루시펠라는 그 절규 어린 목소리를 듣고도 담담하게 말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제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 절절한 마음에 대해 보답해야 할 필요는 없어.”

“…….”

참으로 서늘한 끝맺음이었다. 그것이 에스텔의 성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드는 여전히 애절한 시선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안녕, 칼리드.”

루시펠라는 등을 돌려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다행히 그는 루시펠라를 더 붙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포기할 거라고 생각해?”

“…….”

“후회하게 될 거야.”

그 목소리가 품은 음산함에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했으나, 이내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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