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작별
2018.05.07.
“그 새끼를 데리고 나가자고?”
칼리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간이 없어. 어서 빠져나가야 해.”
“싫으면 먼저 나가. 나는 제드를 데리고 나갈게.”
“에스텔!”
칼리드가 루시펠라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가 몸을 피했다.
“말리지 마. 제드가 죽으면 나도 여기서 죽을 거야.”
그 말에 칼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깃든 눈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이런 쓸데없는 말싸움을 할 시간이 없었다.
루시펠라는 칼리드를 지나쳐 달려갔다. 그가 쫓아오든 쫓아오지 않든 상관없었다.
제드의 죽음을 경험하고 루시펠라는 제드의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달았다. 동료의 죽음과는 분명 달랐다. 온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
삶에 집착이 없는 게 아니었지만, 제드의 죽음을 본 루시펠라는 자신의 죽음을 절실하게 바랐다. 이곳에서 제드가 죽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삶은 제드와 함께하기로 생각했으니, 제드가 없으면 미련 없이 포기할 것이다.
루시펠라는 치마를 걷은 채 뛰어갔다. 우르릉거리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돌 조각이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루시펠라는 재빨리 그것을 피했다.
“에스텔!”
칼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는 더욱더 발걸음을 서둘렀다.
저 녀석은 분명 자신을 억지로라도 끌고 나가려 할 것이다.
그녀는 제드가 쓰러진 지하로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 지하는 아직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제드를 찾았지만 정작 쓰러져 있어야 할 그는 없었다.
“……?”
루시펠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간 거지? 어디로? 설마, 그가 깨어난 걸까?
루시펠라가 제드를 부르려고 입을 열 때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루시펠라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리엄이었다. 그는 어깨에 제드를 둘러멘 채 서 있었다.
“리엄.”
리엄은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돌가루가 흩날려 내리는 하얀 건물 속, 빛이 쏟아져 내려 그들을 비추었다. 시선과 시선이 얽히며 루시펠라는 한참 동안 리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루시펠라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이 무엇을 하려는지 정도는.
그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울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리엄이 미소를 지었다.
“에스텔.”
“…….”
“미안했다.”
왜 사과를 한단 말인가. 어떻게 보면 사과를 해야 할 것은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환상에 빠져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 죽어서는 이 녀석들을 복수에 얽매이게 했으며, 되살아나서도 이들을 실망시키며 배신했다.
그런데 왜 저놈이 사과를 한단 말인가. 그들이 원망스럽긴 했지만, 그건 증오가 아니라 서운함이었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끝까지 바보 같은 놈.”
이것이 마지막 인사다. 이제 이들은 두 번 다시 에스텔의 두 번째 생에 끼어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자신이 원망스러울 텐데. 죽이고 싶을 텐데. 이 녀석들이 결국 택한 건 용서였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들의 단장을 위해 행동했다.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는 놈들이었다.
“애들은 이미 나갔으니 걱정하지 마. 나는 이놈과 저쪽으로 나갈게. 어서 서둘러.”
루시펠라는 눈물을 닦으며 리엄을 보았다. 마지막 모습이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바뀌어도, 우는 모습은 여전히 못생겼구만.”
“…….”
“앞으론 울지 마.”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엄은 제드를 둘러멘 채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루시펠라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잘 살아. 행복해야 해. 따위의 낯 뜨거운 인사는 서로 필요 없었다.
이 녀석들과 함께해서 행복했다.
행복을 행복이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더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같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들이 자신을 기만했건, 기만하지 않았건 그녀와 이들이 강한 유대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에스텔로서도 루시페라로서도, 자신 쪽에서 먼저 인연을 끊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위해 이들과의 인연을 끊어내자, 텅 빈 느낌이 듦과 동시에 생살을 잘라낸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이제 동료들 속에서 둘러싸여 있던 에스텔은 사라진 것이다. 리엄이 ‘너는 에스텔이 아니야’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였다. 그녀는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게 성장한다는 건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허한 감각에 루시펠라가 중얼거렸다. 그 씁쓰레하고 아릿한 감정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에스텔!”
그때, 칼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울고 있는 루시펠라의 손을 급하게 잡고 그녀를 이끌었다.
루시펠라는 별달리 저항하지 않고 그의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루시펠라는 쫓아가며 칼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의 손을 언제 이렇게 제대로 잡아봤더라?
익숙하면서도 참으로 낯설었다. 예전에는 그의 손을 잡는 게 이렇게나 당연했는데. 칼리드는 여느 때처럼, 루시펠라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이 증오스러운 남자는 참으로 끔찍하게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었다.
그들이 신전 입구로 빠져나가자 기둥이 쓰러져 내리는 듯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파편이 튀어 오르자 칼리드는 결국 루시펠라를 안아 들었다.
“조금만 참아, 에스텔.”
다정한 염려의 말. 루시펠라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드가 그것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내 건물이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신전의 어느 지점을 지나가자 루시펠라는 신전 앞에 모여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버나드가 루시펠라에게 뛰어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들이 칼리드와 루시펠라를 에워쌌다. 루시펠라는 힘없이 버나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드가 신전 주변에 버려져 있을 거예요. 어서 찾으세요.”
그에 버나드의 눈빛이 변했다. 참담하게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보고 루시펠라가 말했다.
“살아 있으니까 어서.”
그 말에 버나드를 비롯한 기사들이 작은 환희의 탄성을 내뱉었다.
버나드의 지시에 따라 기사들이 모두 제드를 찾으러 흩어졌다.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자,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칼.”
루시펠라가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안 잡히게 해.”
혹시나 그 녀석들이 붙잡힐 수도 있으니 그에게 상황을 통제하여 벗어나게 해달라는 말이었다.
‘칼’이라는 자신의 애칭에 칼리드가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끝으로 루시펠라는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피곤했다.
***
정말로 악몽을 꾸는 모양이군. 제드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시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쓰러져 꿈틀거리는 시체들은 이미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그 지옥 속에서 제드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선명한 걸 보면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절규하는 이오지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시체가 된 사람들을 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이상했다. 상황을 보는 제드는 그대로 있는데, 어린 제드의 모습이 보였다. 제드는 그것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날 밤의 일이다.
“가지 마.”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꿈. 말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는 나지 않았고, 그의 존재는 시야로서만 존재하는 것인지 그저 어린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어린 제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밤새 검술에 매진했고, 검술 선생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부모님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칭찬을 받을 생각이었다.
제드는 아직까지 밤중에 부부침실을 찾아가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그의 부모는 제드가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방심했다. 여기서부터가 비극의 시작이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방 너머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어머니의 것이었다. 제드는 잊을 수 없는 대화의 도입부를 듣고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악몽도 시간 순서대로 꾸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것은 아까 꾸었던 악몽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이다. 제드는 그걸 멍청하게 듣고 있는 어린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후계를 생산해 줬으면 이만 여기서 제가 떠나도 되지 않을까요. 그가 날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가면 제드는 누가 양육하지?”
“그 녀석이야 당신을 닮아 잘난 녀석이니 알아서 잘 크겠지요.”
분명 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대화 내용은 부모의 입에서 나온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머니의 미덕 따윈 당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 가식적인 말투도 버리는 게 어때? 듣기 역겨운데.”
그에 깔깔거리며 웃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이제 알았어? 당신도 알면서 우리 가문을 씹어 먹으려고 결혼한 거잖아. 그리고 당신 역시 마찬가지 아니야? 당신도 제드를 아들이 아닌 후계자로만 보잖아. 내 말이 틀려?”
“…….”
“당신과 난 똑같아. 가끔 그 녀석이 우리의 혈육이니 사랑스럽긴 하지만 거기까지지. 굳이 말하자면 제드는 우리의 애완동물 아닐까? 사랑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귀엽잖아”
“…….”
“차라리 그 여자를 후실로 들였으면 이 저택 생활도 좀 재밌을 수 있었으려나. 제드가 괴롭긴 했겠지만 나는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말이야.”
“로제.”
“농담이었어.”
아버지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리자 그녀가 마지못한 듯 사과했다.
어린 제드는 그 대화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것을 본 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어떻게 되었더라? 아버지가 먼저 그의 기척을 눈치채고 문을 열었다.
차라리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저 잘못 들은 것이려니 생각했을 텐데. 참으로 얄궂게도 문 안에 있는 이들은 분명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문을 연 아버지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제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척을 죽이는 데 조금 더 수행이 필요할 것 같구나.”
자신이 말을 들었음에도 아버지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 손길이 애정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제드는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문 사이로 보이는 어머니는 티 테이블에 앉아 제드를 보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제드에게 미소를 지었다.
“남의 말을 엿듣는 건 별로 좋지 않은 버릇이야. 그렇지, 제드?”
“…….”
“알지 말아야 할 걸 알아버렸잖니.”
“…….”
“그리고 제드, 알았어도 이렇게 얼굴에 드러내면 안 된단다. 알겠지?”
부드럽게 야단치는 그 목소리. 제드는 그것에 자신이 알던 세상이 무너졌음을 절감했다.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었다. 애정은 진실이었지만 또한 거짓이기도 했으니. 그러나 그가 알던 세계는 생각보다 따스한 세상은 아니었다.
제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음을 그날 일로 알았다. 완벽한 가족의 모습은 완벽히 거짓이었다.
어머니는 공작가를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1년 후, 아이를 낳다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임신하고 있던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제드는 그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악몽’이라고, 이것을 자신과 떼어놓을 순 없었다.
이제 자신은 관찰자가 아닌 어린 제드가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 어머니의 죽음과 전쟁터를 전전하는 제드를 나무라는 아버지. 그들 사이에 언제나 일어난 불화. 그리고 전쟁터에서 들었던 그의 부고.
그 순간, 과거 경험했던 모든 장면이 사라졌다.
그는 이제 이 악몽이 끝나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어딘가에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본 제드는 진짜 악몽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죽였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내보였던 원망과 저주가 귀에 들리며, 자신이 죽였던 이들의 시체들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풍기는 썩은 내에 정신이 아찔했으나, 이 꿈속 공간에서는 정신을 잃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날 왜 죽였어?!”
“왜 죽였어!”
“저주한다. 제더카이어 하인트!”
“가장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아스트라 역시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죽임을 당한 이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억센 손아귀로 제드의 몸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제드는 피하려 하지 않은 채 그들의 원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더없이 끔찍한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어’라고 회피해 봤자 저놈들이 납득해 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서도 별이 되어 영원히 기억되고 싶어.”
그때, 목소리가 들리며 반짝하고 빛이 났다. 제드가 그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에스텔이 빙그레 미소 지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제드는 잠시 동안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에스텔이 다가오자 제드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시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드, 나는…….”
그녀는 ‘제드’라는 애칭을 입에 담았다. 마치 루시펠라처럼.
그에 제드가 눈을 크게 뜨며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에스텔이 붉은 피를 토하더니 쓰러졌다.
제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달려갔다. 쓰러진 그녀를 받쳐 안자 그는 숨을 들이켰다.
쓰러진 이는 에스텔이 아니라 루시펠라였다.
“루시!”
피를 토한 채 쓰러진 루시펠라를 보고 그는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루시. 루시. 그 이름을 부르며 제드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악몽’이라는 자각이 있기에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지만, 결국 그는 루시펠라의 죽음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완벽하게 꿈에 동화된 것이다. 제드는 그저 루시펠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였다.
“제드?”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가 제드를 부르고 있었다. 예전 그가 선물해 주었던 예쁜 드레스를 입은 채.
제드는 자신이 안아 든 시체를 바라보았다. 루시펠라가 아니라 에스텔이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를 착각했던 것이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텔을 내려둔 채 루시펠라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그가 다가서자마자 이번에는 루시펠라의 등 뒤로 검이 뚫고 나오더니, 그녀가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
“루시!”
그는 루시펠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루시펠라를 끌어안았다.
그때, 제드는 또 자신을 부르는 루시펠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루시펠라가 저 멀리 서서 제드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제드는 다시 품에 안은 이를 보았다. 품에 안긴 이는 에스텔이었다.
제드는 이를 악물며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자마자 루시펠라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녀를 안고 절규하노라면 또다시 새로운 루시펠라가 나타났다.
그는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를 만지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기에.
그러나 마치 그를 농락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루시펠라는 그의 손이 닿으면 죽음을 맞이했다.
제드는 자신이 이 꿈속에 갇혀 미칠 것을 예견했다. 그는 절규하고 또 절규했다.
그때, 볼에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분명 손바닥의 감촉이었다. 그는 의아했다. 이곳 어디에도 손은 보이지 않는데 이 감촉은 뭐란 말인가.
“헉!”
제드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제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그리운 목소리.
제드는 옆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펠라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숨을 계속해서 헐떡였다. 그리고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가 생각했다. 이것 역시 악몽인 모양이었다. 그는 옆에 있는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그 음성에도 제드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을 너무 많이 목격했다. 제드는 차마 그녀에게 손을 뻗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손을 뻗으면 마치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또 그녀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루시펠라가 그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제드.”
따스한 품의 감촉에 그제야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느른한 안도감이 퍼지며 제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루시펠라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것이 또 다른 악몽이라도 상관없었다. 찰나의 순간 이렇게 안을 수 있다면, 이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루시펠라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절박하고 필사적이었기에 언제나 조심해서 그녀에게 손을 댔던 때와는 달랐다.
“제드, 숨 막혀.”
괴로워하는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팔의 힘을 풀었다.
몸이 살짝 떨어지고, 제드는 루시펠라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오고 가는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며 햇살이 방을 비추었다.
그녀의 뺨에 서린 멍 자국을 본 제드는 눈을 크게 떴다. 꿈속, 루시펠라의 깨끗한 모습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 나야, 제드.”
그는 자신의 현실을 자각했다. 그녀와 그가 살아난 것이다.
살아 있다. 그도 살아 있고, 그녀도 살아 있었다. 그의 두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제드도 울보였구나.”
루시펠라가 웃으며 말하자 제드는 대답 대신 루시펠라를 끌어안았다. 이 사람의 죽음을 몇 번 본 것만으로도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미안해.”
루시펠라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제드는 고개를 저은 채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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