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마지막 명령
2018.05.03.
그 비정상적인 광기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에스텔을 좋아한다고 공공연하게 고백하던 기사단원들은 대련을 빙자한 칼리드의 폭력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었다.
그것이 재미있어 깔깔거리며 웃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언제나 다른 이에겐 적당한 친절과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놈, 그가 환하게 웃을 때는 언제나 에스텔이 옆에 있을 때뿐이었다.
언젠가 에스텔도 칼리드를 바라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완벽해 보였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새끼가 에스텔은 왜 죽였던 거냐!”
칼리드의 광기를 마주하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녀석은, 그래도 이 녀석만은 에스텔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녀석은 최악의 방법으로 에스텔을, 그들을 배신했다.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했다면 죽이지 말았어야지! 배신하지 말았어야지!”
그들은 루시펠라로서 다시 만난 에스텔을 떠올렸다. 죽음이란 그런 거더라, 라고 말하며 씁쓸하게 웃는 그 모습을.
자신들은 살아 있었기에 복수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러나 살해당하고 다시 태어나, 다시는 에스텔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어떤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검을 쓸 때 그렇게나 빛나던 사람이었는데. 드레스 안에 자신을 가두며, 에스텔의 죽음을 받아들였던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녀가 죽었고, 나라는 멸망해 버렸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에스텔의 감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한데 이 녀석은 무슨 낯짝으로, 에스텔을 그렇게 가둬둔다고 말하는 것인가!
“너희가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러나 그들이 품는 분노와 다르게 칼리드의 대답은 너무나 평온했다. 심지어 그는 입가에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너희도 에스텔의 삶을 기만한 공범들이잖아.”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리엄이 결국 분노하며 어깨에 멘 창을 들었다.
죽여 버릴 거다! 고작 그런 이유로 죽였다니! 저놈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리엄, 진정해!”
“죽여 버릴 거야! 저 새끼는 미친놈이라고!”
“리엄!”
칼리드는 그들의 실랑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질적인 얼굴에 발데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죄책감이라는 건 안 가지는 거냐, 너?!”
“죄책감?”
“단장을 죽인 건 단장이 살았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너 때문에 동료가 죽었는데, 너는 대체 왜 그런 태도지?”
발데르의 말에 리엄이 발버둥을 멈췄다. 그는 대답 여하에 따라서 칼리드를 죽일 생각인 듯했다. 칼리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녀석들이 아직도 그렇게 중요해? 그놈들을 처분하느라 너희에게 추적자가 안 붙은 거 아니야?”
리엄이 창을 날리기도 전에 이번엔 발데르가 참지 못하고 단검을 뽑아 날렸다.
단검은 아슬아슬하게 칼리드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하얀 뺨에 상처가 새겨졌다. 그에 칼리드가 검을 뽑았다. 살벌한 대치 상태가 이루어졌다. 칼리드는 그들을 노려보며 조롱했다.
“욕하려면 이미 죽은 제더카이어 하인트를 욕하는 게 어때? 그놈들을 죽인 건 그 녀석과 그 수하놈들이야. 에스텔을 죽이지 않았어도 어차피 죽을 놈들이었어. 대체 무엇이 문제지?”
“칼리드 가브라인!”
발데르가 또다시 단검을 날리자 칼리드가 그것을 피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옛 동료들을 똑바로 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어차피 그 녀석들도 에스텔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었잖아. 죽음 역시 자신의 선택이었고.”
칼리드의 말에 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증오와 살의를 느꼈다. 리엄은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하인트 공작놈과는 정말 다른 놈이군.”
“뭐?”
칼리드가 거슬린다는 듯 물었다.
리엄의 두 눈에는 제드와 칼리드의 차이가 극명하게 돋보였다. 이놈은 적어도 선택할 수 있었다.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이 존재했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기에 그들을 죽였고, 칼리드 루이르크는 그들이 선택할 기회를 앗아간 채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동료들의 죽음에 일조했어도, 이것은 명백하게 다른 것이다.
“왜 에스텔에게 네가 아니라 제더카이어 하인트였는지 알겠어.”
생각해 보면 에스텔과 제드는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칼리드와 에스텔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어쩌면 서로 비슷한 그들이 끌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에스텔이 내가 아니라 그놈을 선택한다고? 정말 그럴 것 같아?”
“네놈은 평생 알 수 없겠지.”
그때 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준비해 놓은 장치가 준비되었다는 소리였다.
그에 정신을 차린 리엄은 온몸을 타고 흐르는 증오를 갈무리한 채 창을 거둬들였다. 저런 놈에게 직접 손을 더럽히기도 아까웠다.
그는 최소한의 망설임을 버린 채 이슈타르의 석상으로 다가갔다. 그때,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칼리드가 리엄에게로 달려들었다.
“발데르!”
리엄이 소리치자 발데르가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어 리엄을 엄호했다.
에스텔과 호각을 다투던 검사다. 둘이 상대하기엔 버거웠다. 그전에 끝내야 한다.
그러나 칼리드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도망인가? 발데르가 다시 단검을 뽑아 들 때 칼리드는 벽을 향하더니 가득 걸려 있던 성화 중 이슈타르의 성화를 떼 내팽개쳤다. 리엄이 그것을 보며 소리쳤다.
“너!”
성화가 걸려 있던 곳엔 고대의 술식이 새겨진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칼리드가 주저 없이 손을 얹었다. 그와 동시에 우르릉,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개자식!”
리엄의 외침에 칼리드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이슈타르의 석상에도 이런 게 있었지?”
“…….”
“보아하니 그걸 누르면 내가 죽는 함정이라도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군.”
이 미친놈이 어떻게 천장에 있는 것까지 아는 거지?
리엄은 이를 갈았다. 신전은 어두운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신화를 날조한 기록이라던가 귀족과 결탁하여 기우제를 빌미로 헌금을 뜯어낸 기록이라던가 치료를 빙자하여 죄수들을 가지고 인체를 탐구한 기록이라던가.
이들은 자체적으로 신력을 쓸 수 있는 신관들이 발동시킬 수 있는 마법진을 만들어 침입자들을 제거해 왔다.
리엄이 발동시키려 했던 함정은 칼리드가 서 있는 곳 주위로 광범위하게 창이 떨어지는 함정이었다. 손만 대면 끝이 나는 건데, 지나치게 방심했다. 리엄은 이를 으득 갈았다.
“너희가 다짜고짜 검을 들이대지 않고 내게 말을 시킨 게 너무 이상하잖아. 시간을 끌려고 했던 거지?”
칼리드는 능글거리며 웃었다. 이 여우 같은 새끼는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눈치가 빨랐다.
이 마법진의 단점은 발동시킬 신력을 주입하고 나서 발동할 수 있도록 활성화되기까지 시간이 소요되었다. 왕족이라더니 이런 것 역시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손 떼는 게 좋을 건데.”
“왜?”
칼리드가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리엄은 이를 으득 갈았다. 하필 칼리드가 손을 댄 곳이 좋지 않았다. 신전을 지탱하는 기둥을 모두 무너뜨려 신전을 붕괴시키는 장치였다. 여차하면 모든 것을 은닉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보통의 마법진이라면 발동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그의 위협은 소용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저것이 백 년도 전에 만들어진 마법진이라 불완전하다는 거였다.
무언가 잘못되어 기둥 하나라도 쓰러졌다간 신전이 모두 무너진다. 그랬다간 안에 있는 자신들을 비롯한 모두가 죽을 것이다.
“이걸로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 리엄?”
칼리드가 미소 지었다. 이 새끼가 이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게 실수였다.
신력이 없는 일반인이라면 위협이 되지 않았겠지만, 칼리드는 왕족이었다. 왕족은 신의 자손이라더니 신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이대로 칼리드의 농간에 놀아날 수는 없었다.
리엄은 칼리드를 관찰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그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전에 에스텔을 데려오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에스텔은 데려오지 않아.”
칼리드의 말에 리엄이 검을 내려두고 어깨에 멘 창을 빼 들었다.
어차피 저 녀석이 쓰레기 같다는 것은 이미 확인했다. 저기서 그냥 머리만 꿰뚫으면 된다.
“우리 시토라 기사단이 모두 여기서 죽는다니. 생각해 보니 나쁘진 않아. 그렇지, 발데르?”
발데르가 동의하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네놈의 농간에 놀아나느니 뒈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차피 우린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그들의 태도에 칼리드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너, 바로 마법진을 활성화시킬 정도의 신력은 없지?”
리엄의 말에 칼리드가 눈을 크게 떴다. 정곡인 모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놈은 많은 신력을 쓰지 못했다. 본디 손을 대면 신력으로 환한 빛이 나야 했으나 마법진의 빛은 희미했다.
그 말인즉, 신관처럼 ‘원하는 때에’ 마법진을 바로 활성화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소리였다.
“손을 직접 더럽히고 싶진 않았는데, 어쩔 수 없군.”
그가 창을 들었다. 리엄의 창은 꽤나 명중률이 좋았다. 움직이지 않는 목표를 맞히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때, 리엄은 마법진이 강한 푸른빛을 머금은 것을 보았다. 아니, 왜? 칼리드 쪽을 보아하니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제기랄, 오래된 마법진이라더니 이렇게 불안정할 줄이야!
“진짜로 다 죽겠다는 거냐?! 빨리 거기서 손 떼!”
제대로 활성화가 되지 않았음에도 마법진이 발동되려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쩌저적, 하고 벽에 굵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달려 들어왔다.
“야!”
들어온 침입자가 크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칼리드의 눈이 커졌다. 리엄과 발데르가 동시에 소리쳤다.
“이 바보가!”
“이 멍청한 단장이!”
갑작스럽게 쏟아져 오는 욕에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이 새끼들은 왜 갑자기 욕이야? 그녀는 황당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데?”
“보면 모르냐? 이 미친놈이 지금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자고 하는 상황이잖아.”
“…….”
루시펠라의 시선이 칼리드를 향했다. 마법진 위에 손을 얹은 칼리드는 루시펠라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에스텔, 무사했구나.”
그는 기쁜 표정이었다.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것을 간단하게 무시한 뒤, 칼리드 앞에서 그를 등지고 섰다.
“그래, 단장도 나 못지않게 이것을 바랐을 텐데, 내가 간과했어.”
리엄이 루시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칼리드와 리엄을 번갈아 보았다.
대충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것 같았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쉬었다.
리엄은 그 순간까지 루시펠라가 칼리드를 죽이라고 말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이제 그만둬.”
그러나 루시펠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루시펠라의 등 뒤에 있는 칼리드가 미소를 지었다.
“그만둬? 지금 이걸 그만두라는 말이야?”
발데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제더카이어 하인트 같은 경우는 이해라도 하지, 지금 저 새끼를 살리라고?”
발데르가 다시 되묻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데르와 리엄이 동시에 천장을 바라보며 욕을 내뱉었다. 저 인간이 다시 태어나더니 성자라도 된 모양인가. 리엄이 애써 터져 나오는 분노를 눌러 참으며 말했다.
“지금 용서하라느니, 그런 말을 하진 않겠지, 에스텔? 아무리 그러면 단장이라도 이 단검으로 목을 꿰뚫고 싶어지거든.”
그 말에 루시펠라가 피식 웃었다. 심각한 상황에도 웃는 그 모습을 보고 리엄과 발데르가 묘한 향수에 사로잡혔다.
언제나 위기 상황에 에스텔은 웃고는 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죽음 직전에도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루시펠라가 되면서도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용서하지 않았어. 앞으로 용서할 예정도 없고.”
“그러면!”
“내 마지막 부탁이야.”
루시펠라의 말에 발데르와 리엄이 절실하게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들의 목표는 칼리드였다. 드러나지 않는 살해 시도가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그러나 언제나 칼리드는 그들에게서 빠져나갔다. 이제 저놈을 죽일 수 있는데, 저놈이 눈앞에 있는데 왜 단장이 복수를 말린단 말인가.
“에스텔.”
“제발, 저놈만은 죽이게 해줘. 제발!”
“싫어.”
발데르의 애원에도 루시펠라의 대답은 단호했다. 리엄이 소리쳤다.
“제더카이어 하인트에 이어 이젠 칼리드까지 죽이지 말라고? 제정신이냐, 에스텔!”
“…….”
“널 죽인 새끼야. 그런데 저 새끼를 그냥 봐주고 넘어가라고? 넌 모든 것을 잃었잖아. 네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거냐?!”
루시펠라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리엄은 긍정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네가 그러고도 에스텔 슈페르트냐!”
왜, 에스텔이라고 하면서도 이 사람은 에스텔이 하지 않는 행동만 하는 것일까. 지금 이 눈앞에 칼리드가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냔 말이다.
애써 억눌렀던 분노와 배신감이 터졌다. 그는 에스텔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언제나 단순했던 그녀다. 자신에게 위해를 끼쳤으니 복수한다,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네 긍지도, 네 죽음에 대한 분노도 버렸다면, 넌 에스텔이라고 할 수 없어! 에스텔이기를 포기한 거야!”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칼리드를 증오하고, 증오해서 복수해야 한다는 게 에스텔을 증명하지 않아. 어느 순간에도 난 나야.”
“아니, 너는 에스텔이 아니야. 지금의 넌 그냥, 에스텔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루시펠라 아이딘일 뿐이지. 네가 우릴 막는다는 게 바로 그 증거야.”
그 말에도 루시펠라의 눈빛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누가 뭐라 말해도 난 에스텔이야. 난 너희들을 좋아하고, 칼리드를 미워해.”
루시펠라가 또렷한 시선으로 리엄을 바라보았다.
별을 담은 듯한 또렷한 눈동자. 그 익숙한 눈빛에 리엄은 차마 더 분노를 터뜨릴 수 없었다.
“얘들아, 나는 삶을 빼앗겼어. 너희들과 함께할 수 있는 삶. 에스텔로서 내 인생에 내가 정한 방식으로 끝을 맺을 수 있는 삶.”
“…….”
“하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끝내는 거 말이야. 나도 저 새끼를 죽이고 싶어. 그렇지만 너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이런 걸로 시작해서는 안 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에 끝내는 거야.”
“아니, 제드를 살린 시점에서 새롭게 살아가기로 했잖아. 시작은 거기서부터야.”
리엄과 발데르는 제발 그만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마지막은, 이렇게 그들의 복수를 끝내고 싶었다.
그때, 루시펠라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말주변 없는 거 잘 알고 있잖아. 단장의 마지막 명령이야.”
그 말에 리엄과 발데르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루시펠라를 보았다.
“너흰 날 너무 좋아하잖아. 이렇게 멋대로 구는데도 죽이지 못할 만큼.”
그녀의 붉은 입술에는 여전히 미소가 서려 있었다. 얼굴은 달랐지만, 그들이 익히 알고 있던 에스텔의 미소였다.
어떤 잘못을 해도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특유의 장난기 어린 짓궂은 미소.
그들도 안다. 루시펠라는 약한 레이디의 육체를 지녔고, 그녀를 제압하고 칼리드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에스텔이, 그들의 단장이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리엄은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그들이 아는 에스텔은 죽었고, 다시 태어난 에스텔은 분노조차 뛰어넘은 것이다.
이것은 그녀의 복수심을 우선한 게 아니다. 그저 자신들을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이들이 새로운 삶을 다시 피로 시작하길 바라지 않아서.
이것이 그들을 위해 내리는 단장의 최후의 명령이었다.
그럼에도 왜 그녀가 이렇게 원망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리엄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으아아아아!”
그는 창을 던졌다. 그것은 루시펠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저 너머 칼리드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은 바닥에 무력하게 꽂혔다.
리엄은 붉게 물든 눈으로 루시펠라를 노려보더니, 등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리엄을 뒤쫓던 발데르가 뒤를 돌아보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단장이 아니었으면, 단장은 정말 내 손에 죽었을 거야.”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잘 있어.”
루시펠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것을 보며 발데르가 울컥한 듯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많은 단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가 허망하게 사라졌다. 적어도 아름다운 이별을 하길 바랐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제기랄.”
결국 발데르가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자주 내뱉던 짧은 욕설뿐이었다.
그는 등을 돌려 리엄이 간 곳으로 따라 나갔다.
방 안에는 루시펠라와 칼리드만 남았다. 루시펠라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칼리드는 마법진에 댄 손을 뗐다.
“에스텔.”
“네가 예뻐서 널 살리려 했던 게 아니야.”
루시펠라가 차갑게 말했다. 칼리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기뻐하는 것으로 보였다. 루시펠라는 칼리드에게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때, 쿵, 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아무래도 너무 오래된 마법진이라 발동에 이상이 생겼나 보군.”
칼리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신력이 다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집어넣은 것만으로 발동하고 있어. 발동 명령도 내리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뭐?!”
그렇다면 신전이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제기랄, 그녀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서 빠져나가자, 에스텔.”
그가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와 루시펠라의 손을 잡았다.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드, 제드를 데리고 나가야 해.”
칼리드의 얼굴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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