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어리석은 죽음과 숭고한 죽음
2018.04.26.
“머리를 썼군요.”
칼리드가 초대장을 보며 말하자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장에 표시되어 있는 장소는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표기된 장소로 가려면 산을 넘어가야 했다.
산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약속 시각까지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그 시간에 맞추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해당 도시의 영주에 연통을 넣어 군사를 대기시키는 것 역시도 빠듯했다.
즉, 압도적으로 포위해서 이들을 잡는 방법은 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장소가 버려진 신전이라니. 역시 리엄 히르카군요.”
“그놈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보군.”
“어찌 되었든 동료였으니까요. 그는 신관의 간음으로 태어난 부정의 아이거든요. 어렸을 적에 그곳에서 자랐다고 알고 있습니다.”
‘부정의 아이’. 제드는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시토라 기사단의 대부분은 모두 ‘죽어도 될’ 이들이었다. 리엄 히르카 역시 단순한 평민 기사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만큼 신전 안의 비밀 장소는 다 알고 있다는 소리겠지요.”
그렇게나 자세히 장소에 대해 알고 있다면 어디에 매복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따라온 기사들을 숨기는 것도 힘들다. 장소에 대한 명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지금 이 상황은 최악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들이 요구한 대로 혼자 가실 생각입니까?”
칼리드의 미소에 제드가 초대장을 잡아 들었다.
“그렇게 해야지.”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칼리드가 그것을 보고 조소하듯 말했다.
“가면 공은 죽을 겁니다. 경과 경의 기사단이 시토라 기사단원들을 학살한 것에 원한을 품었을 테니까요.”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날 죽이고 싶다는데, 응하지 않을 수 없지.”
제드는 초대장 봉투에 들어 있던 루시펠라의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쥐었다.
“그런데 공은 이 상황이 참 재밌나 보군.”
“내가 말입니까?”
칼리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영애가 걱정되지도 않나 보지?”
“당연히 걱정됩니다.”
“…….”
“하지만 무사할 걸 알아서요. 분명 영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을 겁니다. 원하는 게 얻어진다면요.”
“과연 동료라 이 말이로군.”
제드가 신랄하게 비꼬았다. 제드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저놈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제드 자신이 죽음으로 뛰어드는 이 상황을.
***
“각하.”
버나드가 다시 한 번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제드의 얼굴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이미 이들 사이의 언쟁은 끝난 지 오래였다.
버나드가 처음으로 화를 냈다. 자신의 목숨을 중히 여겨야 한다고, 공작가를 따르는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그러나 제드는 그것을 차갑게 비웃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속박하는 그 어떤 것도 싫어했다. 그냥 이 일을 떠맡았기에, 적당한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건지 솔직히 말해 화가 났다.
그리고 그의 설득에 눈 하나 꿈쩍 않는 제드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시간은,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없어지는 건가, 무력감까지 느꼈다.
“참 우습군.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다 죽는 것은 숭고하다 추앙받고, 왜 이런 식의 죽음은 어리석은 개죽음이라고 하는 건지.”
그 말에 버나드가 할 말을 잃었다. 전쟁터에서도 충성을 바치다 죽느냐, 아니면 비겁하게 살아남느냐를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제드가 감명받았던 기사 에스텔 슈페르트처럼 그저 제드는 사느냐 죽느냐를 택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제드의 선택을 무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를 따라온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버나드의 눈치를 보았다. 언제든지 제드를 제압해서 강제로라도 다시 데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제드가 과연 어떻게 될까. 버나드는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군은 이미 깊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루시펠라 아이딘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저 제더카이어 하인트라는 인간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알았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행복의 원천이 선대 하인트 공작처럼 ‘권력’일 수도 지금의 제드처럼 ‘사랑’일 수도 있는 법이었다.
‘언제나 그런 생각이 유치하다면서요.’
사랑 때문에 죽겠다던 기사를 두들겨 팼던 본인이 그 유치한 짓을 하고 있었다. 그것에 화가 나면서도, 버나드는 제드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된 장소에 들어가기 전 제드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약속한 시간 내에 내가 나오지 않고, 영애가 이곳으로 나오지 않으면 들어와 구하도록 해.”
“…….”
“둘 다 죽어 있으면 쓸어버리도록.”
“…….”
“뒤를 잘 부탁한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도 그의 인사는 참으로 짤막했다.
버나드에게 인사를 남긴 제드가 이윽고 그 옆에 있는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루이르크 공, 뒤를 부탁하지.”
“…….”
제드는 이상함을 느끼며 칼리드의 얼굴을 보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 같던 놈이 아닌가? 한데 왜 저렇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는 거지?
제드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칼리드가 입을 열었다.
“하인트 공.”
“뭐지?”
“나는 참 공이 싫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 솔직하게 말이라도 하려나 보군. 더 말해보지.”
“지금 죽으러 가는데 아무 생각도 없으십니까?”
“생각?”
제드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말아 올렸다.
“대체 무슨 생각?”
“…….”
“공은 내가 싫다면서 막상 내가 죽으니 달갑지 않아 하는 것 같군. 왜, 내가 죽음을 망설임 없이 택한 게 못마땅한 건가?”
제드의 말에 칼리드의 눈동자가 정곡을 찔린 듯 살짝 커졌다.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제드를 노려보았다. 그 어두운 보라색 눈동자는 제드에게 마치, 어서 죽어버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제드는 피식 웃었다.
저 얼굴을 보니 왠지 모르게 자신이 이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놈은 자신이 죽을 선택을 하지 못해 이 자리까지 온 인간이었다.
마지막에 저놈의 얼굴을 보니 생각보다 죽으러 가는 길은 유쾌했다.
“그럼.”
그는 사람들을 둘러본 뒤, 새하얀 신전의 기둥을 지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전 안은 하얗고 따스했다. 제드는 그것을 둘러보다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자 축축하고 습한 냄새가 났다.
일자로 된 복도를 어느 정도 걷자 또 문이 나왔다. 제드는 그 문을 열었다.
방은 지상에서 내려오는 빛과 촛불의 빛에 겨우 분간이 될 정도였다. 제드는 주위를 둘러보다 가운데에 위치한 제단을 보았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루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제단 위에 루시펠라가 누워 있었다.
제드가 바로 루시펠라에게 뛰어가려 했지만 이내 멈춰야만 했다. 루시펠라가 누워 있는 제단 뒤에 시퍼런 단도를 든 한 사람의 인영이 보였기 때문이다.
제드가 그 남자를 바라보자, 단의 양옆에 위치한 화로에 불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그 남자를 비추었다. 제드는 남자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리엄 히르카였다.
“정말 혼자 왔나 보군. 무장도 하지 않고.”
그의 푸른 눈이 제드를 향했다. 제드는 그의 두 눈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무장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렸나?”
“그래, 쓸데없는 짓이지.”
제드는 리엄 앞에 누워 있는 루시펠라를 보았다. 아까부터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불안했다.
제드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리엄이 말했다.
“안심해도 돼. 그냥 잠만 재워뒀으니까.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으면 이 아가씨에겐 손 하나 대지 않을 거야. 우리라고 이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
“…….”
제드가 그를 노려보자 리엄이 말했다.
“정말 일이 이렇게 쉽게 될 줄은 몰랐군. 그 전장의 흑사자라는 놈을 끌어내다니 말이야.”
“…….”
“정말 이 여자가 소중한가 보지? 그 목숨도 중요하지 않을 만큼.”
리엄은 고개를 숙여 한참 동안 누워 있는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제드를 응시했다.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있다면 타인의 목숨이 중하다는 것도 알아야지!”
그렇게 말하는 리엄의 얼굴은 분노와 살의로 얼룩져 있었다. 제드는 그 모습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네가 네 검으로 학살한 우리 동료들도 이렇게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네가 죽인 인간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죽었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상실에 괴로워해야만 했어!”
“…….”
“제더카이어 하인트! 네가 진정으로 그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긴 한 건가?”
제드는 그 분노를 가라앉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죄책감이라,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전에는 확실히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호한 감정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본인 역시 자신의 연인을 납치해 놓고 죄책감 운운하는 건 한심하지 않은가.
“이해가 안 가는군.”
“뭐?”
“경은 내가 그 기사들을 죽인 것이 상당히 유감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경들이 파비아누스와 아렌트를 모시면서 얼마나 많은 얼샤인을 살해한 거지? 그들도 연인이 있었을 텐데 말이야.”
“뭐?!”
“탓하려는 생각은 없어. 당연히 명령에 따랐을 테니.”
“지금, 네놈은 그래서 책임이 없다는 말을 하는 거냐?”
그에 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리엄 히르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들에게 내가 무엇을 했어야 했지? 자비를 베풀었어야 했나? 그래서 그놈들의 목숨이 구해졌으면 대체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 것 같나?”
“…….”
“항복하면 살 수 있었음에도, 얀스가르를 인정하지 않고 검을 들었어. 거기서 그들을 살려뒀다면 그들을 모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어. 에스텔 슈페르트를 따라 최후까지 기사로 죽고 싶어 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살려뒀어야 했나?”
“애초에, 그렇게 선택을 강요하도록 한 건 너희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은 너희들이었지.”
“나는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어!”
“나라고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 같나? 난 살육을 즐기지 않아.”
루시펠라가 그의 손아귀에 있다. 일반적으로 따지자면 이런 언쟁이 루시펠라의 목숨을 위험하게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제드는 저 남자의 멍청한 말을 참아주기 힘들었고, 저 남자가 루시펠라를 죽일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저 남자는 에스텔의 휘하에 있던 기사가 아닌가.
제드는 아직도 그 기사를 기억했다. 분명히 그 기사를 닮아서 여자를 해하지 않는다는 기사도는 제대로 지키겠지.
리엄은 제드의 대꾸에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는 제드를 노려보다가 얼굴에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낄낄거리며 웃는 그의 웃음은 마치 흐느끼는 것 같았다.
“똑같은 말을 하는군. 정말, 똑같은 말을 해.”
“…….”
“네 말이 맞았어. 저놈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누워 있는 루시펠라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 말하는 거지? 제드가 눈썹을 찌푸릴 때, 리엄이 고개를 들었다.
“너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나?”
“틀림없는 내 약혼녀, 루시펠라 아이딘이로군.”
“하.”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죽으러 온 거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리엄은 손을 들어 잠든 루시펠라의 앞머리를 쓸었다.
그 모습에 제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대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어차피 죽을 목숨. 참으로 요구 사항도 많군.”
리엄이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이마에 올려두었던 손을 뗐다. 그는 열띤 시선으로 제드를 노려보았다.
“내 요구 사항을 말하지. 제더카이어 하인트, 네 오른쪽에 있는 황금 잔에 있는 음료를 마셔라.”
제드가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다리가 긴 하얀 테이블과 함께 황금색 잔이 보였다.
제드가가 다시 정면을 보며 말했다.
“누가 봐도 독이군.”
“그래, 독이지.”
제드는 최후의 희망마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라리 그가 칼로 자신을 찌른다면, 어쩌면 시간을 더 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은 일단 마시기만 하면 반드시 죽었다. 그 말인즉슨, 살아 있을 확률이 거의 없다는 말이었다.
제드는 그곳으로 다가가 잔을 집어 들었다. 잔 안에는 초록색 물이 들어 있었다.
그가 잔을 흔들며 말했다.
“이걸 마시면 얼마 정도 후에 죽지?”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그럼 질문을 바꾸지.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내 약혼녀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대로 둘 생각이다. 어차피 네 일행이 여기에 들어와 영애를 구해내겠지.”
그에 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리엄이 물었다.
“시간이 그렇게 중요하나? 깨어 있는 아가씨의 얼굴을 보고 싶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런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아. 그런 약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다만, 혹 영애가 깨어날 때 보고 있는 게 내 시체라는 건 좀 걱정되는군.”
“…….”
그 말에 리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건 안심해도 좋아.”
리엄의 말에 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저 없이 잔을 들어 마셨다. 그러곤 잔을 내던졌다.
황금색 잔이 땅바닥을 뒹굴며 날카로운 금속성을 냈다.
그와 동시에 배에 열이 퍼지는 듯했다. 그는 이것이 끝임을 알았다.
삶에 대해 미련은 당연히 존재했다.
애정을 확인하고, 서로 사랑하는 시간 동안 그는 지극한 행복을 누렸다. 아니, 사실 마음이 통하기 이전에도, 그녀를 마음에 담고 제드는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조차 행복했다.
만약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이 사람과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다.
생각해 보면 루시펠라를 만나고 마음에 담은 순간부터 그는 세상이 생각보다 다채로운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울컥, 피를 내뱉었다.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애써 또렷하게 하며 제드는 뚜벅뚜벅 걸어 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리엄은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잠들어 있는 루시펠라를 바라본 제드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쓸었다. 예전 루시펠라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던 것처럼.
부드러운 피부와 온기에 그의 얼굴에 설풋 미소가 서렸다.
그러다 그는 별안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리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격렬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이제 와 목숨을 잃으니 분하신가, 하인트 경?”
리엄이 조롱조로 묻자 제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손을 대지 않았다면서. 대체 왜 얼굴에 손을 댄 거냐.”
리엄의 시선에 새파랗게 멍이 든 루시펠라의 뺨이 보였다. 그것을 본 리엄이 헛웃음을 지었다.
“죽음의 순간에서, 내게 화를 내는 이유가 그 여자의 뺨을 때려서라니…….”
“……독을 마시기 전에 네놈의 면상을 한 대 때렸어야 했는데.”
그는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리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음을 깨닫고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일어나서 기뻐할지 슬퍼할지 알 수 없군.”
제드는 손을 들어 루시펠라의 자는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눈을 뜬 그녀와 마주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알고 있기에, 그것을 원하면서도 그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았다.
“루시.”
자신의 마지막이 이렇게 무력하게 죽는 거라니, 참 우스웠다. 그러면서도 그 죽음이 싫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내 비겁함을 용서해.”
그는 평생을 루시펠라 없이 살아갈 수 없었다. 그것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선택한 제드의 결론이었다.
“그러니…….”
그는 다시 피를 내뱉었다. 몸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감기는 눈을 애써 뜨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나를 좀 덜 사랑하는 그대가 나를 잊고 혼자 살아가도록 해.’
그는 마지막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을 바라본 리엄이 루시펠라의 입을 열어 약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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