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20화 (120/173)

#120화 영원한 별

2018.04.23.

시토라 기사단은 사람들이 흔히 동경하던, 강하고 용맹한 ‘기사’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귀족의 사생아, 후계 구도에서 밀린 이. 검을 잘 쓰는 평민, 무력을 지녔지만 쓰다가 버려져도 아무 상관도 없는, 버림받을 자만을 모아놨다.

그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국왕이 쓰다가 버린 말로 발탁되었다는 것을.

그 허울뿐인 기사 직을 내려놓고 모든 걸 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을 쉬이 놓을 수가 없었다.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몰랐으며, 그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에스텔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 나이를 먹고도 아이 같은 이상을 지녔다. 그러나 그렇게 어리석은 무지가 순수함이 되어 빛이 났다. 그리고 그녀는 별을 담은 듯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말했다.

“아스트라에게 안기는 별이 되자.”

아스트라에 안긴 별이 되자. 같이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자.

에스텔은 웃으며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은 삶이 충만한 이에겐 코웃음 칠 만한 이야깃거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모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내일의 희망 따윈 없는 사람들, 어떤 견고한 목적도 없는 이들.

그리하여 이들에게는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목표가 생겼다.

에스텔이 이끈 길은 그들의 어둑한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선택지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든 기사라니. 버려지고 쓸데없어 처분되는 패배자가 되는 길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길인가.

어린 여자인 그녀가 검을 들었다. 이 얼마나 신성하고 아름다운가.

게다가 그녀가 가진 무력은 명실상부한 얼샤 제일이었다.

에스텔은 경이로운 존재였다.

이슈타르. 밤의 시작을 알리는 그 조용한 별처럼. 기사들은 그 빛에 매료되었다. 에스텔이 이끄는 대로 그녀의 등만 보고 걸으면 그 어떤 조롱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스텔 슈페르트는 그런 사람이었다.

평민이고 여자임에도 얼샤의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검술을 지녔으며, 목숨을 걸고 동료들을 구해주었다.

그 치열한 생존의 끝에서 사람들은 모두 시토라 기사단을 두려워하며 경외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길은 옳았다. 틀리지 않았다.

어두운 밤과 같던 자신들의 인생에, 길잡이별이 생긴 것 같았다.

저것, 저것만 따라가자. 저것만 따라가면 우린 무언가가 될 수 있다.

밤하늘의 헤아릴 수 없는 별처럼, 우리 역시 명예롭게 죽어 별이 되자.

그것은 맹목보다 더 앞서 나간 광기였다.

이들은 에스텔과 달리 주변을 볼 수 있는 자들이었다. 모든 걸 에스텔처럼 모르지 않았으니까.

다행히 그녀는 이런 쪽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을 가지더라도 다른 쪽으로 돌리면 그대로 따라왔다.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에스텔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녀의 충성이 사실 나라를 망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부관인 칼리드의 아버지를 죽인 게 그녀가 충성을 바친 국왕이라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소타 왕비가 사실 학대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면?

그녀는 그때도 똑같이 순수할 수 있는 것일까?

“단장님께는 함구한다.”

칼리드는 이런 어두운 진실들을 에스텔에게는 철저하게 숨기도록 명령했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나 굳이 칼리드의 명령이 아니었더라도 이들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말함으로 혹 국왕의 미움을 살까 두려웠고, 소중한 단장이 힘들어하는 게 무서웠고, 그리고 또 에스텔이 ‘그런’ 걸 알고 변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새벽별 이슈타르를 따르는 기사.

그들은 에스텔이 그 변함없는 별이 되기를 기원했다. 살아 있는 별. 그렇게 그 순수함으로 그들을 온전히 보듬어주길 바랐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검을 들고 그 고귀한 이상을 외치면 된다.

더러운 건 우리가 다 할 테니. 그리하여 이들은 밤의 어둠이 되었고, 오직 에스텔만이 고고히 빛나는 별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한 것은 에스텔 슈페르트가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

“각하.”

버나드의 걱정 어린 말에 제드는 눈썹 하나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이내 말을 타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이 남겨놓은 메시지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키칼 공작령의 모든 곳의 구석구석을 다 뒤졌다. 그러나 이들에게 남겨진 것 따윈 없었다.

“참 이상하지. 보통 이런 짓을 벌이면 며칠 후엔 요구 사항이 오는데 말이야. 한데 소속만 밝히고 아무 연락도 없어.”

“…….”

지금 당장에라도 군사를 보내 이곳을 쓸어버리고 싶다. 자신의 사람을 데려가 버린 그 새끼들에게 지옥을 보여주고 싶다.

그들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곳을 아무것도 살아 있지 않은 폐허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욕구대로 한다면 이곳이 폐허가 되기 전에 그녀가 목숨을 잃을 것이기 때문에. 제드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얀스가르에선 어떤 연락도 없나?”

“아이딘 백작께서 보낸 연통이 전부입니다. 얀스가르 황실에서는 따로 연락이 없습니다.”

“그렇군.”

제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딘 백작이 보낸 서신의 말은 아주 짤막하고 살벌했다.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드는 그것을 보고 그리하겠다는 말밖에 보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만이 아름다울 뿐이었다.

만약 저 별 중 하나가 그녀가 있는 장소를 알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미친 것 같다며 피식 웃었다.

“각하!”

기사 중 한 명이 제드를 불렀다. 설마 새로운 소식이라도 온 것인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오랜만입니다, 하인트 공.”

“…….”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이 사태 때문에 지친 사람들과 대비되어 보였다.

칼리드의 창백한 얼굴이 달빛에 비쳐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아이딘 백작 영애가 시토라 기사단에게 납치당했다니, 이게 무슨 참담한 상황입니까.”

“여긴 어쩐 일이지?”

“마침 제가 시찰을 나와 수도를 떠나 있었습니다. 황실에서 이 소식을 듣고 저보고 가보라 하더군요.”

“…….”

“그 녀석들, 제 이전 동료들이 아닙니까. 분명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드는 그의 표정에 살의가 솟구쳤다.

마치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자안이 제드를 훑었다. 제드가 그를 보며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었다.

“큰 도움을 기대하지.”

제드가 그 말을 남기고 말 머리를 돌렸다.

칼리드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네놈도 나처럼 미쳐 가겠지.”

***

“아야.”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좀 참아.”

아니카가 짜증을 내며 그녀의 얼굴에 연고를 발랐다. 루시펠라는 아니카를 바라보았다.

“왜 아프게 바르는 거야?”

“그럼 뭐가 예쁘다고 살살 발라.”

퉁명스러운 그 말에 루시펠라는 피식 미소를 지으려다가 아파서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리엄, 그 녀석도 정말 그 녀석이다. 어떻게 이렇게 무참하게 때릴 수 있어? 단장은 지금 이렇게나 가녀린 레이디인데 말이야.”

“화가 나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거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이해는 해, 개자식.”

욕을 내뱉지만 결론은 이해는 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아니카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장은 사람이 좋은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

“생각해 보면 단장이 어떤 생각을 하며 누굴 사랑하는 건 자유인데 말이야. 단장은 단장의 새로운 삶을 선택한 거잖아.”

“엉? 갑자기 왜 태도를 바꾼 거야?”

루시펠라의 물음에 아니카가 웃었다.

“단장을 믿는다면서도, 단장이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건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걸 내가 잊고 있었어.”

“…….”

“우린 그렇게 단장을 무시해 왔던 거지.”

“뭐? 날 무시했다고? 아야!”

루시펠라가 화를 내려 하자 아니카가 움직이지 말라고 꾸중했다. 볼이 부어올라 여간 말하기 괴로운 게 아니었다.

“단장이 날 가지고 뭐 한 거야, 라고 말하니 그제야 정신이 들더라. 아마 리엄도, 발데르도, 오이겐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야.”

“…….”

“나는 그게 단장을 위한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고. 리엄은 그게 뭔지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모두 단장에게 미안해하고 있어.”

그것을 묵묵히 들었던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고?”

“단장, 어떻게 단장을 미워할 수 있겠어. 이렇게 밉다가도, 살아 돌아와 숨 쉬고 있는 게 기쁘기만 한데.”

아니카가 한숨을 내쉬며 루시펠라의 옆에 앉았다.

“기억나? 베가스 상단에서 단장이 날 구했잖아. 난 단주 놈한테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어.”

“…….”

“비록 나는 검이 아니라 활을 들었지만, 그래도 기사가 될 수 있었어. 단장 덕분에 삶에 의미가 생겼어. 모든 이가 그랬어.”

“…….”

“그런 단장을 왜 미워해. 오히려 미안해해야지.”

그 말에 루시펠라는 울컥했다. 그녀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루시펠라도 저들에게 미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끝까지 저들이 원한 사람이 되어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저들의 인생을 멋대로 바꿔놓고 도망가 버렸다는 죄책감이 마음을 괴롭혔다.

“미안해.”

루시펠라의 말에 아니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더니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러면 우리 여자끼리 수다나 진하게 떨어볼까?”

“어?”

아니카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 거지? 그녀의 의아한 표정에 아키가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하인트 공작 놈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야, 그건 갑자기 왜?”

바로 하루 전에 하인트 공작 때문에 화를 냈던 아니카다. 한데 이런 대화를 나누어도 되는 건가?

“에이, 단장. 알잖아. 그놈은 밉지만, 미운 건 미운 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지. 솔직히 안 그래?”

그건 맞았다. 사실 자신이 아니카의 입장이 되어도 궁금해하긴 할 것 같았다.

“일단 다른 건 다 제쳐 두고서라도 무려 단장의 첫 애인이잖아! 어서 말해봐.”

아니카가 웃으며 루시펠라를 간지럽혔다.

“아,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아프잖아!”

“좀 아파도 돼!”

그녀가 깔깔 웃었다.

“난 그 인간 얼굴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잘생겼어?”

“그 소문이 여기까지 돌아?”

“그렇더라. 잘생겼다고 해.”

“그래, 얼굴은 잘생겼어.”

“성격이 그렇게 개차반이라던데, 진짜야?”

“음, 좀. 그런데 나한테는 친절한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겐 성격이 개차반인데 단장한테만 다정하다고? 그럼 그건 좀 위험한 거 아니야? 사랑이 없어지면 단장에게도 개차반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럴 사람은 아니야.”

루시펠라는 끄덕거리며 협탁 위에 놓인 컵의 물을 들이켰다. 만약 그렇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카가 물을 마시는 루시펠라를 바라보며 눈가를 좁혔다.

“그래서 몸은 좋아?”

“어?”

“기사니까 당연히 몸은 좋겠네.”

그 말에 루시펠라는 컵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그걸 본 아니카의 눈이 커졌다.

“단장, 지금 내가 헛것을 보는 거지?”

“뭘?”

“지금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인 거잖아. 세상에! 얼굴 빨갛게 물든 거 봐.”

“……조용히 해.”

루시펠라가 그녀의 어깨를 쳤다.

“그런 표정을 지은 걸 보니까, 설마.”

“…….”

아니카가 비명을 지르듯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펠라의 귀까지 빨갛게 물드는 걸 본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펠라는 왠지 목이 말라서 또 물을 벌컥벌컥 마셔야만 했다.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는구나?”

“아니야!”

루시펠라가 소리쳤다.

“왜? 그것도 엄청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아니카가 깔깔거렸다. 어쩐지 아니카와 남자 이야기를 하니 좀 쑥스러웠다.

루시펠라는 제드를 떠올렸다. 아직도 그의 손길이 기억난다.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기억난다.

“그 사람 말이야, 남들은 다 한심하다고 비웃는 나를 비웃지 않았어. 겨우 며칠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도.”

“…….”

“칼리드를 볼 때마다 그 새끼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 그런데 그 사람이 있어서 신기하게도 내 입장을 자각하며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어. 그냥, 그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이상했어. 싫으면서도 싫지 않았지.”

그녀는 조용히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어디서부터였는지 기억나지도 않아. 그래도 그 녀석에게 마음을 연 건 그때부터인 것 같아.”

“그때라니?”

“칼리드가 나에 대해 모욕할 때, 유일하게 그 사람이 편을 들어줬어. 그리고 말했지. 에스텔 슈페르트는 훌륭한 기사였다고.”

“……정말로?”

“검 한 번 부딪치고 대화를 몇 번 나눈 것만으로 내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나를 기억에 새기며 나더러 훌륭한 기사라고 했어.”

“…….”

“그게 말이 돼?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국의 기사였던 내가 훌륭한 기사였다는 거야. 그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칼리드마저 비웃던 나를 제드가 변호해 주었어. 화까지 내가면서.”

“…….”

“내가 얼샤에서 진실을 알고 절망했을 때 에스텔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내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어. 검을 들어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기사의 삶이 과연 잘못된 거냐고.”

“…….”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나는 절망하기를 그만뒀어. 그가 에스텔의 삶을 긍정했어. 그래서 난 살아갈 수 있었어.”

“…….”

“믿겨져? 그 사람에게 에스텔 슈페르트는 기사였어. 여자가 아니라, 검을 들어 나라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

루시펠라가 가슴 벅찬 표정으로 말하자 아니카가 눈을 크게 떴다.

제드.

그에 대해 말하자, 그에 대한 그리움이 차올라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그를 보고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이미 죽어 없어진 적국의 기사에게, 그런 평가를 내린 사람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겠어? 그런 내가 좋다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

“그와 함께 그의 손을 잡고 멸망한 얼샤를 돌아다녔어. 그런데 오히려 이 사람이 얼샤의 멸망에 기여했다는 원망은 사라지고, 그에 대한 마음만이 남았지.”

“…….”

“가르쳐 줘, 아니카. 내 삶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존중하며, 눈앞에 있는 나를 사랑한다며 자기를 내던지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 말이야. 그걸 알았다면 난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의 간절한 표정을 본 아니카는 그것을 보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아니카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다.

“단장,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지금도 보고 싶어.”

“…….”

“아마 지금 날 엄청 찾고 있겠지. 그래서 더 보고 싶어.”

“그럼, 단장은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 말에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리엄에게 잘 말해볼게.”

“정말?”

그때,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잠이 오지?

그녀는 자신의 몸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녀는 애써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런, 벌써 졸리나 보구나.”

아니카의 목소리에 루시펠라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아니카.”

“미안, 에스텔. 눈을 뜨면 모든 게 다 끝나 있을 거야.”

일부러 자신을 방심시키기 위해 제드의 이야기를 꺼냈던 거구나.

그래, 갑자기 그녀를 이해하려는 게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다. 루시펠라는 치 떨리는 배신감을 느끼며 아니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졸음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녀는 애써 눈에 힘을 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니카를 보았다.

“명심해, 그를…… 죽이면 나도…….”

죽을 거야.

루시펠라는 차마 그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잠이 든 루시펠라를 바라본 아니카는 그녀를 다정히 안아 침대 위에 눕혀주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

아니카가 수건을 들어 루시펠라의 입술에 새로 새겨진 상처를 닦아주었다.

“부디 좋은 꿈 꾸길, 에스텔.”

그녀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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