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갈등
2018.04.19.
“그게 무슨 소리지?”
리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카와 발데르가 굳은 표정으로 리엄과 루시펠라의 눈치를 보았다.
“그 말대로야. 이제 그만해.”
루시펠라의 말에 아니카가 물었다.
“왜?”
루시펠라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제드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들에겐 더없는 배신이겠지. 어쩌면 이들은 배신감에 자신을 죽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가 하려던 말은 사랑에 눈이 먼 것처럼 보여서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들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제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말리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녀는 그 사실을 나중에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샤를 돌아보았어. 참 많이 달라졌더라.”
“…….”
“사람들은 더 이상 가난에 찌들어 있지 않았지. 항상 웃고 있었어.”
“…….”
“그걸 보고 깨달았어. 우리가 지켰던 건, 그 사람들이 아니야. 그 사람들을 괴롭게 하던 모든 것이었어.”
“에스텔.”
발데르가 만류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내 말 들어. 얼샤는 최악의 나라였어. 그래서 마땅히 멸망한 거야. 그저 그뿐이야. 더 이상 얼샤를 독립시킨다거나, 복수 같은 걸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의 말에 서늘한 정적이 일었다. 리엄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루시펠라를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
“너도 얀스가르 사람이 다 된 모양이구나. 그렇지?”
“……아니야.”
“그렇다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리엄이 루시펠라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너무나 가볍게 그녀의 몸이 딸려 올라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
“세상에 멸망당할 나라는 없다면서! 네가 네 입으로 분명 그리 말했어!”
“…….”
“너는 그저 국왕놈의 실책 하나 때문에, 전쟁이 나서 나라가 없어진 게 옳다는 소리냐!”
“…….”
“이소타 왕비 전하의 일이 사고인지 아닌지 여부도 알려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군사를 끌고 와 나라를 짓밟은 것, 그게 어떻게 옳은 일이지? 황제는 이미 얼샤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그게 어떻게 마땅한 일이야!”
“…….”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너의 말 한마디에 목숨을 바쳐 뛰어든 기사들이 몇인데, 죽은 우리 동료가 몇인데! 목숨을 잃은 사람이 몇인데!”
리엄의 눈은 붉게 달아올랐으며 목과 이마에는 핏줄이 서 있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살의가 느껴졌다.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던 루시펠라가 말했다.
“말은 다 끝났냐?”
“뭐?”
“이 미친 새끼가 돌았나, 누가 얀스가르에게 멸망당한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줄 알아?”
“…….”
“국왕이 미쳐 돌아서 스스로를 멸망시킨 거라고. 얀스가르는 그저 거들었을 뿐이야! 그 차이를 모르겠어?!”
“…….”
“왜 전쟁이 일어난 거냐고? 그놈이 얼샤의 국왕이었으니까! 너희도 알 거 아니야. 이소타 왕비가 어떻게 살았는지. 진짜로 몰랐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
“내가, 아니, 우리가 그 쓰레기 같은 놈에게 충성을 바쳤어. 그래서 나라의 멸망에 기여했어. 그랬기에 누군가에게 분노를 떠넘기는 게 헛된 일이라고 말하는 거야! 난들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게 쉬운 줄 알아?!”
“에스텔.”
“지금 이 평화를 깨뜨리지 마. 이미 망한 나라라고! 내 원수를 갚으려 한다면 고맙지만 됐어. 마지막까지 나라를 지키려 했던 내 정신을 이어받고 싶은 거라면, 살아 있는 내 정신도 존중해 줘.”
그녀의 단호함에 발데르가 무어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루시펠라가 먼저였다.
“너희도 알고 있잖아, 지금 얼샤가 어떤 상황인지! 옛날과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왜 보고도 외면하는 거야?”
“…….”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건 화풀이일 뿐이라고!”
쾅!
루시펠라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루시펠라를 벽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그 고통만으로 몸이 떨렸다.
“너, 지금 너 때문에 죽은 동료들을 생각해. 그 녀석들은 다 잊어버린 거야?”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아무 행동도 안 한다고 해서 그 녀석들을 잊어버린 게 아니지. 그리고 복수를 한다고 해서 그 녀석들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이 말을 하고 싶어. 너희들의 복수는 에스텔인 내가 바라지 않았다고.”
루시펠라의 차가운 말에 리엄은 거의 내팽개치듯 그녀의 멱살을 놓더니 그녀를 뿌리치고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단장, 단장이 이런 말을 하다니 놀랐어.”
오이겐이 루시펠라를 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데르 역시 배신감이 느껴지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 역시 단장이 단장이라 믿고 싶지 않을 정도야.”
아니카는 아까부터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그녀를 흘낏 바라보더니 발데르와 오이겐의 팔을 잡아끌더니 말했다.
“일단 나가자. 단장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 믿어.”
그들은 일제히 방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숨 쉬기가 버겁게 느껴졌다.
정말 이들이 같은 동료가 맞았던 것일까? 왜 이들을 만났는데도 자신은 외로운 걸까.
***
리엄은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애써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발데르는 팔짱을 낀 채 벽에 얼굴을 기댔다. 오이겐 역시도 씁쓸한 표정을 했다.
“변했어, 변한 거야.”
리엄이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본 발데르가 말했다.
“그걸 ‘변했다’라고 하는 거야? 저건 단장이 아닐 거야.”
그의 말에 아니카가 물었다.
“발데르, 너는 저 여자가 단장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생각을 해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루시펠라 아이딘은 그, 하인트 공작의 약혼녀야. 얀스가르의 중앙 귀족이고. 그렇다면 저 아가씨는 황제를 볼 수도 있었어. 심지어 2황자를 볼 수도 있었다고 하잖아.”
“…….”
“나라면 만약 그 아가씨가 되었다면, 황제를 만나자마자 죽이겠어. 아니면 2황자를 죽이던지. 아니면 제더카이어 하인트를 우선 죽이던지. 난 이 부분이 이상해.”
“그거야 단장의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까 그렇지. 단장은 지금 기사가 아니라 레이디라고.”
아니카의 말에 발데르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너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게다가 칼리드를 살려두고 있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자길 죽인 사람을 그대로 뒀단 말이야? 하인트 공작과 서로 약혼한 사이로 지내면서? 수상해.”
그때 가만히 있던 오이겐이 입을 열었다.
“아니, 저 사람은 단장이야.”
“오이겐, 너 아까부터 저 사람이 단장이라고 너무 믿고 있다?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오이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알 수 있어. 틀림없이 단장이야. 확실해. 나는 이 의심을 하는 것 자체가 싫어. 만약, 단장을 죽이려고 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답지 않은 날카로운 기세에 발데르와 아니카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단장이라면 목숨을 걸고 지켜야지.”
“…….”
“그래서 리엄, 어떻게 할 거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엄은 심란한 표정으로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장이 살아오는 기적이 벌어졌는데 왜 마냥 즐겁지 않은 건지. 이들은 모두 각자의 생각을 가지며 한숨지었다.
***
“자, 먹어.”
아니카가 내민 빵조각과 수프를 받아 들며 루시펠라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 안은 그녀와 아니카 단둘밖에 없었다.
“밥 안 먹었잖아. 먹어.”
“생각 없어.”
“지금 단장 몸이 약하다는 거 알고 있지? 안 먹으면 안 돼.”
걱정 어린 어조에 루시펠라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단장이라는 걸 믿긴 하나 봐? 그런데 너희는 왜 나를 가둬두는 건데?”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루시펠라와 리엄의 언쟁 이후 혼자 남겨진 그녀는 자신이 방에 가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거야…….”
“왜, 내가 말없이 너희들을 떠날 것 같아서? 아니면 에스텔이 아니라 루시펠라일 것 같아서?”
그녀가 서늘한 눈으로 아니카를 노려보자 아니카가 침묵했다. 루시펠라는 그것이 긍정의 뜻임을 알았다.
“참 얄팍한 신뢰네, 너희랑 나.”
루시펠라의 표정을 본 아니카가 갑자기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장, 진짜 비꼬는 거 늘었다.”
“뭐?”
“정말이야. 예전에는 욕부터 하더니, 얄팍한 신뢰라는 단어를 쓰네. 신기해.”
“아니카,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지금 난 분명히……!”
“단장도 레이디로 사는 거 힘들었겠네. 치마 입고 춤 연습하는 거 힘들었지? 구두도 엄청 높아서 걷기 불편했을 거 아니야.”
“맞아, 엄청 불편…… 야!”
에스텔의 말에 아니카가 킥킥 웃었다. 루시펠라는 화를 내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꼭 화를 내려 하면 아니카는 이런 식으로 빠져나갔다. 무얼 해도 웃으니 화를 낼 수 없다.
루시펠라는 아니카가 가져온 쟁반 위에 놓인 빵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화가 나진 않았다. 다만 조금 서운할 뿐이었지. 그러다 문득 그녀는 그들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3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
어제, 재회 후 이들은 에스텔의 사후 3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행복한 일에 그 어두움을 한 톨이라도 물들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죽지 못해 살았어.”
아니카의 말에 루시펠라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오이겐이 빠져나가는 통로를 발견해서 끌고 나왔는데, 나머지 녀석들에게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나 봐. 그 녀석들은 성안에서 최후까지 맞서 싸웠다고 해.”
“…….”
루시펠라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드가 단장의 목을 자르고, 단장의 목이 성에 걸렸어. 그리고 동료들의 시체는 쓰레기처럼 쌓여 버려졌지. 리엄과 발데르는 죽을 위험을 각오하고 그들의 머리카락을 가져와 장례를 지냈어. 하지만 단장의 목은 가져오지 못했다고 한참을 통곡했지.”
루시펠라는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일어났던 일. 마냥 비참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비참할 줄은 몰랐다. 만약, 자신이 그것을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녀석들의 시신이 쌓여 있는 걸 본다면?
“리엄의 말수는 줄었고, 반대로 발데르가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지. 오이겐은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졌어. 다들 변했지.”
“…….”
“그래서 우린 목표를 세운 거야. 단장의 의지를 이어받아 망한 나라를 되살리자, 되살릴 수 없다면 적어도 복수를 하자. 그러자 무너져 있던 사람들이 점점 삶의 의미를 되찾았지.”
루시펠라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스텔의 삶의 비밀을 깨닫고 죽어가던 루시펠라가 제드를 만나 살았던 것처럼, 이들에게 복수 역시 그런 의미였다. 루시펠라는 이를 악물었다.
“난 그냥 너희가 너희의 삶을 살아가길 바랐어.”
아니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솔직히 말할게. 처음엔 너희의 소식을 듣고 기뻤어. 나를 배신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고마웠지. 하지만 지금의 얼샤를 보고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어.”
“…….”
“그리고 내가 틀렸다는 걸 깨달았지.”
그것을 본 아니카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단장, 단장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면 단장을 따르던 사람들이 틀렸다는 게 되는 거야. 단장을 따르다가 죽은 녀석들도 그릇된 삶을 살았던 게 되는 거라고.”
“아니야, 그게 아니야!”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릇된 행동을 했다고 어떻게 삶 전체가 그릇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 나라를 지키던 사람들이 목숨을 바친 삶은 틀리지 않았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제드가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비록 권력의 앞잡이였지만, 그녀도 그녀의 동료들도 끝까지 신념을 지켰다. 과오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 삶 전체가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말이었다.
“아니카, 그렇다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틀렸다는 자기반성도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런 인생 자체가 진짜로 틀린 거 아니야?”
“단장.”
루시펠라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카는 얼굴을 찌푸리며 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도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듯했다. 루시펠라가 말했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그것만큼 끔찍한 게 없다고 했어. 어떻게 보면 나는 이 얼샤 사람들에게 끔찍한 사람이었던 거지.”
그녀가 지친 표정으로 말하자 아니카가 울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절대 그렇지 않아! 단장은!”
“아니카. 리엄을 설득해 줘. 여기서 더 나가지 마.”
루시펠라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에스텔은 복수를 원하지 않아. 부디 이 멍청한 짓을 멈춰. 그리고 하인트 공작을 건드리지 마.”
그 말에 아니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눈에 힘을 주고 루시펠라를 한참을 노려보더니 도전적으로 물었다.
“왜?”
“그거야, 하인트 공작은…….”
“하인트 공작의 기사들이 우리 애들을 죽인 걸 알고 있잖아? 그런데 왜 그러면 안 된다는 거야? 기회도 마련되어 있고, 우린 성공할 자신이 있는데. 우리가 얼마나 준비해 왔는데 이걸 포기해야 해?”
“…….”
“대답해 봐. 단장, 대체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아니카가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아니카는 눈치가 꽤나 빠른 편이었다. 루시펠라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을 죽이면 얀스가르의 황제가 얼샤를 뒤집어놓을 거라 생각은 안 하는 거야?”
“글쎄, 우리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얀스가르에 항복한 이들 따위 짓밟히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고.”
아니카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이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에 루시펠라가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카!”
“참 예쁘다. 그 하인트 공작이 빠질 만큼.”
아니카가 손을 뻗더니 루시펠라의 얼굴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루시펠라가 흠칫했다.
“남자들은 참 멍청해서, 진짜로 외모가 예쁘면 모든 게 다 합당한 이유라고 생각하더라고.”
“합당한 이유라니? 뭘?”
“사랑에 빠질 이유 말이야.”
“…….”
“내가 아는 단장이라면 하인트 공작을 결코 용납했을 리가 없어.”
“…….”
“그리고 자길 맹렬히 싫어하는 사람에게 지극한 사랑을 주는 사람은 없지. 원래 사람이 그렇잖아.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걸 원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주지도 않으려 하지. 사실 외모는 중요하긴 해도 부수적인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단장도 어느 정도 그 사랑놀음에 응했을 거란 말이야. 다른 녀석들은 단장이 그 사람을 유혹했다고 생각하는데 단장은 그럴 성격이 아니잖아?”
“…….”
“나는 단장을 너무 잘 알고 있어. 단장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건 단장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거지. 단장은 누굴 잘 속이지 못해.”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정곡이었다. 이미 아니카는 루시펠라와 제드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인트 공작과는 어떤 사이야?”
그 말을 물어보는 아니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계속 이들을 속여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이들은 이미 마음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사랑하는 사이.”
망설임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에 아니카가 눈을 크게 뜨다 이내 표정이 일변했다.
“어떻게, 단장이 그럴 수 있어?”
그녀의 두 눈에 서린 원망, 그리고 배신감. 오롯이 와 닿는 그 감정은 루시펠라가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부터 이미 각오한 것이기도 했다.
“어떻게 단장이 그럴 수 있냔 말이야!”
아니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루시펠라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으면서도 아니카처럼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내 마음이 가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겠어. 내가 어떤 점에서 그 녀석을 마음에 담았는지 말해도 네겐 쓸데없는 말의 나열일 텐데.”
“단장, 그 녀석은 우리 동료들을 죽였어!”
그녀의 외침에 루시펠라는 눈을 감으며 고통스럽게 말했다.
“만약, 거기서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생각해 봤어?”
“…….”
“얀스가르에서 투항하는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지? 우리도 들은 적이 있잖아. 끝까지 수성을 고집하던 이자힐의 도시에서 황제의 명령에 도시민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때의 그 지옥도에 관한 묘사는 에스텔도, 시토라 기사단원도, 똑똑히 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잡아먹고, 사람이 사람으로 취급받지도 못하는 그 지옥도. 그것을 만든 이가 얀스가르의 황제였다.
“살아남았다면 그 녀석들, 분명히 기사로서 온전히 죽지 못했을 거야.”
분명히 시토라 기사단은 ‘본보기’로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그 기세를 꺾었을 것이다.
왜 제드가 그들을 전부 그 자리에서 몰살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 최소한 기사로 죽을 수 있도록, 그들의 의지에 따라준 것이다.
그때, 문이 부서지듯 세게 열렸다. 루시펠라와 아니카가 바라보자 리엄과 발데르, 오이겐이 들어오고 있었다.
리엄은 루시펠라에게 걸어와 그대로 그녀의 뺨을 내려쳤다.
“리엄!”
루시펠라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얼굴에 불이 난 것처럼 얼얼했다. 심지어 잘못 맞은 건지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지?”
“…….”
“하인트 공작과 사랑하는 사이? 그 녀석들이 죽는 건 당연해?”
“…….”
리엄의 목소리가 우웅거리며 울렸다. 귀까지 다쳤나 보군. 리엄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죽일 것 같았다.
“이미 얼굴까지 때려놓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나?”
루시펠라가 차디찬 웃음을 지으며 입에 고인 피를 퉤, 내뱉었다. 이빨이 빠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적어도 안심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그녀는 울컥했다. 이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이 상황이 지겨워졌다. 사랑하는 동료들, 너무나 애정했던 동료들이다. 그러나 그녀도 할 말이 많았다.
“그래, 욕쯤은 얼마든지 들어주지.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아. 말이 안 되겠지.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
“궁금해? 내가 왜 그 사람을 택했는지. 그는 내 삶을 인정해 준 사람이라 그랬어!”
루시펠라가 소리쳤다. 그에 리엄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심지어 허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네 삶을 인정했다고? 에스텔, 우린 네 삶 그 자체였어. 네 삶을 인정했기에 널 따른 거라고!”
그 말에 루시펠라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뺨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혹 루시펠라가 눈물을 흘리나 싶어 발데르가 걱정해서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그 웃음소리에 그들은 당황했다.
“내 삶을 너희가 인정했다고?”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은청색 눈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분노였다. 심지어, 그녀에게서는 지독한 원망마저 느껴졌다. 예전엔 단 한 번도 짓지 않았던 표정이다.
“너흰 날 가지고 놀았던 거잖아.”
그 말에 싸한 분위기가 퍼져 나갔다. 그녀의 비틀린 미소를 보고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리엄, 너는 왜 칼리드의 아버지를 죽인 게 우리의 국왕 폐하라는 걸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
또렷한 원망. 그 말을 들은 리엄의 눈동자가 커졌다.
“내가 얼샤를 돌며 그 이야기를 안 들었을 리가 없잖아. 파비아누스가 그 녀석을 괴롭혔다는 걸, 왜 나는 모르고 있었지?”
“…….”
“분명 나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 이것만이 이유였을까? 정말 그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엄에게 다가갔다. 리엄은 어째서인지 그녀를 두려운 듯한 눈으로 보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기사단의 눈을 보았다. 모두가 다 죄인이라도 된 듯 그녀의 눈을 피했다.
“계속 생각했어. 너흰 나를 믿었다고 했지. 그런데 왜 그 누구도, 이 충성이 잘못된 거라고 얘기해 주지 않았던 걸까? 왜 단 한 번도 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던 걸까? 심지어 내가 진실에 근접하면, 너희들은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리기까지 했지.”
“…….”
“나 사실 말이야, 얼샤를 돌아보고 진실을 알게 된 후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너희들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왜 너희들은 어리석고 멍청한 기사 에스텔을 따랐던 건지.”
“…….”
“그랬더니 결론이 나오더라.”
그녀는 분노에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더니 리엄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대체 날 가지고 뭘 한 거야?”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너희에게 난 사람이 아니었던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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