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꿈에서 깨어날 때
2018.04.16.
아니카와 발데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눈빛이었다.
루시펠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기억나지? ‘단장, 너 말이야. 여자니까 여자의 마음을 잘 알 거 아니야. 걔는 왜 나를 싫어하지?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라고 찌질댔잖아.”
“…….”
“그래서 정신 차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며 술을 얼굴에 부었었지? 그러고 나서 주점 한가운데에서 춤췄잖아. 생각해 보니 그거 이상하네. 정신 차리겠다고 술을 얼굴에 부은 이유가 뭐야?”
발데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것은 발데르가 간혹 기억나면 수치심에 몸부림치는 기억 중 하나였다. 그건 같이 술을 마셨던 에스텔만이 아는 사실일 텐데?
아니카가 굳은 얼굴로 발데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수치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것이 명백한 진실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루시펠라가 정면에 서 있는 리엄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엄, 내가 널 죽도록 패고 나서 했던 말 기억나?”
“…….”
“이빨부터 털어버려야 했다고 후회했던 것 같은데.”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갑작스럽게 들어온 정보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루시펠라가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시간을 두고 머리를 써서 어떻게 내가 나일지 입증할까 생각했는데, 빠르든 늦든 어차피 믿기 힘든 거 그냥 지금 이대로 다 말할게.”
“…….”
“이해해, 나조차도 납득이 안 가고 실감이 안 나는데, 너희도 믿지 못할 거야.”
루시펠라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절대 잊혀지지 않은 죽은 존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키도 더 작고 외모도 다르다. 그럼에도 대체 왜 저기 저 말투와 표정, 자세에서 그녀, 에스텔 슈페르트가 보이는가?
오이겐이 홀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장님?”
루시펠라가 정답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단장님’이라는 말에 마력이라도 깃든 것처럼, 그들의 눈빛에 희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오이겐이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자, 발데르가 손을 뻗어 그를 말렸다.
“아니야, 만약 단장이었다면 그때 그린힐에서 내게 알렸을 거야. 그런데 나를 모르는 척했잖아!”
믿고 싶지 않아 한다. 루시펠라는 그렇게 느꼈다. 마치 믿으면 안 된다고 세뇌하듯 발데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단장이라면 대체 그때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지금도 이 자리에서 나를 의심하는데 그때 내가 나라는 걸 밝혔으면 안 그래도 날 죽이려던 네가 그 단검으로 내 목을 찔렀을까, 아니면 단장이라고 그대로 얌전히 믿어주었을까?”
발데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단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루시펠라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돈이 아무리 급해도 그 와중에 그 브로치 하나를 팔자고 수도로 다시 돌아오다니, 네 멍청함에 경의를 표한다. 발데르, 넌 여전히 한심하고 또 한심했어.”
“나, 나는!”
발데르가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그녀는 발데르를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너무도 익숙한 그 시선에 발데르의 눈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루시펠라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설령 네가 날 믿더라도 너였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날 데려갔을 거잖아?”
루시펠라의 말에 발데르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걸 바라지 않았어, 발데르.”
그 말에 발데르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구구절절 정답이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그녀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야, 발데르.”
아니카가 발데르의 팔에 손을 얹었다. 발데르는 더 이상 그녀가 ‘왜 에스텔이 아닌지’에 대해 말하는 걸 포기한 듯했다. 그녀는 말하는 대신 입술을 덜덜 떨었다.
그때, 오이겐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왜 아무도 모르는 거야! 난 알 수 있어! 단장님이야. 단장님이라고!”
흡사 그는 이성을 잃은 듯했다. 루시펠라는 의외로 오이겐이 자신을 믿어준다는 게 놀랍고도 또 고마웠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아니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카.”
루시펠라가 그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너, 더 말하지 마. 날 설득하려고 하지 말란 말이야!”
아니카가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나 없이 혼자서 저 바보들을 데리고 고생이 많았어.”
“아니야, 넌 단장이 아니라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계속 ‘아니야, 아니라고!’라며 부정했다. 그것이 꼭 발악과도 같았다.
“왜 아니라고 생각해?”
루시펠라의 물음에 아니카가 소리쳤다.
“만약 믿었는데 아니면 어떻게 해!”
“…….”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그냥 장난이라고 말해! 제발 부탁이야! 이런 기적이 일어날 리가 없어! 믿고 싶지 않단 말이야!”
이들은 정확히 믿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실인 ‘에스텔이 살아 돌아왔다’가 거짓이라면 믿었다가 후에 느낄 배신이 절망스러웠기에.
루시펠라는 한숨을 쉬며 리엄을 응시했다. 리엄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너도 내가 에스텔이라고 믿는 게 무서운 거야, 리엄?”
그녀의 말에 리엄이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글거리는 감정을 담은 눈동자가 루시펠라를 향했다. 그러곤 팔을 벌려 루시펠라를 끌어안았다. 그 격렬한 포옹에 루시펠라가 미소 지었다.
“너라면 믿어줄 거라 생각했어.”
그녀는 손을 뻗어 리엄의 등을 끌어안았다.
“제기랄, 네가 단장이 아니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리엄이 소리쳤다. 그녀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려는 듯, 리엄은 숨이 막힐 정도로 꽉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
“이 기적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야! 이게 꿈인지도 모르겠군.”
리엄이 욕설을 계속 내뱉었다. 그녀는 리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이 아니야. 내가, 에스텔이 돌아왔어, 리엄.”
그녀의 입으로 직접 ‘돌아왔다’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일제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기적과 같은 재회 속, 루시펠라 역시 눈물을 흘렸다.
루시펠라는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들에 얼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그들은 루시펠라가 어떻게 눈을 깜빡이며, 어떻게 숨을 쉬며, 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관찰했다.
“역시 맞네, 단장 맞네!”
아니카가 소리쳤다.
“그래, 그래서 내 머리도 만졌던 거네!”
아니카가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 소리치자 루시펠라가 참다못해 그녀를 노려보았다.
“봐봐, 저렇게 노려보는 게 딱 단장이 노려보는 거라니까?”
“야. 내가 무슨 동물이냐? 그만해.”
루시펠라가 짜증을 내자 발데르가 입을 열었다.
“와, 어떻게 목소리가 다른데 말투가 이렇게 똑같냐. 아이릭이 말투가 똑같다고 말한 게 이해가 가네.”
이들은 모두 신이 나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리엄은 힐끔거리며 그녀를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막상 믿긴 했지만, 또 마냥 믿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한 거지? 우리 단장이 이렇게 살아 돌아올 줄이야. 진짜 아스트라의 멱살을 잡기라도 한 거야?”
그 말에 루시펠라는 피식 웃었다.
“나도 놀랐어. 깨어나 보니 이 모습이 되어 있잖아. 게다가 얀스가르 한복판에 떨어졌다고. 너희 소식은 들리지도 않지, 리엄이 연쇄살인범이 되었다고 추적당하고 있지, 정말 다신 못 만나는 줄 알았다니까.”
“와, 그 연쇄살인범 소리 오랜만에 듣네.”
발데르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때 그래서 우리가 그린힐에 가자마자 바로 떠나야 했잖아. 애꿎은 리엄이 여자만 골라 죽였다고 소문이 나서.”
“역시 수도에 왔던 거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리엄을 찾으려다가 진짜 연쇄살인범한테 죽을 뻔했다니까.”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 진짜 연쇄살인범한테 죽을 뻔했다고?”
리엄이 물었다.
루시펠라는 이들이 자신을 걱정하는 건가 생각했다.
“그 연쇄살인범이 불쌍한데.”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발데르의 말이 신호라도 되듯 리엄을 포함한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이 녀석들이 자신을 걱정할 리가 있나. 참으로 여전한 인간들이었다. 그녀 역시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자신을 꾸미거나 숨기지 않아도 되는 대화에 그녀는 오랜만에 에스텔로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되살아난 거지?”
리엄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루시펠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깨어난 날에 아마 별이 떨어졌던 것 같아. 그 별이 내 영혼이 아닐까? 2황자도 그렇게 추측했어.”
“2황자라고? 얀스가르의 2황자?”
리엄이 되물었다. 발데르 역시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2황자에게 정체를 들켰다는 건가?”
“그게, 사정이 있어. 칼리드 녀석과 이야기를 한 걸 그놈이 훔쳐 들었거든.”
“칼리드와 이야기를 나눠?!”
리엄이 버럭 소리쳤다. 그에 루시펠라가 귀를 막으며 리엄을 노려보았다.
목소리가 우렁차다는 걸 알면 좀 줄이지, 하여튼 배려가 없다니까. 루시펠라가 투덜거렸다.
“그럼 그 녀석도 네 정체를 안다는 거네.”
“어. 처음 재회할 때부터 눈치챈 모양이더라고.”
“하하…….”
리엄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놈이 모르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그 새끼가 알아차렸다고 하니 갑자기 단장이 그 모습으로 되살아났다는 게 더 신뢰가 가는군.”
“야, 너 내가 에스텔이라는 거 믿는 거 아니었냐?”
루시펠라가 툴툴거렸다. 그에 리엄이 루시펠라의 입에 빵을 밀어 넣었다. 서운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루시펠라가 빵을 잘근잘근 씹어 먹으며 말했다.
“그런데 네가 그 말을 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었단 거네?”
“뭘?”
“칼리드가 날 좋아했었다는 걸.”
“…….”
“…….”
“…….”
사람들이 말이 없어지자 루시펠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카가 그걸 보며 말했다.
“죽을 때까지 모르고, 죽었다 살아나서 알았다는 게 뭐랄까,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심각하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정말 단장이 단장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한숨을 쉬어야 할까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펠라는 그 말에 뭐라 말하려 했으나 오이겐이 우유를 내밀자 그것을 잠자코 마실 수밖에 없었다.
루시펠라가 오이겐을 바라보자 오이겐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오이겐은 루시펠라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우스운 새끼. 그렇게 좋아한다고 해놓고 단장을 왜 죽여?”
리엄의 분노 섞인 말에 루시펠라가 입을 다물었다. 현재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보다 더 격렬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은 이들을 바라보며 루시펠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단장이 괜히 칼리드를 피해 다녔던 게 아니었다니까. 단장도 그놈의 음험함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던 거야?”
발데르의 물음에 루시펠라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칼리드를 피해 다녔다고? 진짜로?”
그랬었나. 루시펠라는 눈썹을 찌푸렸다.
“응, 며칠 동안 안 만나려고 했잖아. 식사도 혼자 하고.”
“내가?”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다만, 그 이유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세세한 건 기억이 안 나는데, 분명 싸워서 그랬을 거야. 뒈지기 직전이라 다들 날카로웠잖아? 너랑 리엄도 주먹다짐하지 않았어?”
그 말에 리엄과 발데르가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시선을 피했다.
아니카가 루시펠라에게 물었다.
“단장도 그놈을 죽이고 싶지?”
“당연히 죽여 버리고 싶어.”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니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잘됐네. 같이 복수하자.”
“뭐?”
‘같이 복수하자’라는 말이 어쩐지 어색하게 들렸다.
아니카가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이제 옛날로 돌아온 것 같아! 복수도 수월할 거야. 단장이 있으니까.”
“단장이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 든든하네. 단장은 일당백이잖아? 모든 게 다 잘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니카와 발데르가 번갈아 말했다. 그 희망 어린 얼굴을 보며 루시펠라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꾹 쥐며 말했다.
“미안한데 얘들아, 난 이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경직되었다. 왜냐고 묻는 듯한 그 시선을 보며 그녀는 헐렁한 옷의 소매를 걷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이 드러났다.
“난 이제 에스텔의 육신이 아니거든.”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카가 물었다. 리엄과 발데르는 그 손을 보고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은 듯 표정이 굳었다.
“말 그대로, 검을 쓰는 에스텔의 육신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레이디의 육신이라는 거야. 이 몸으로 검을 잡을 수는 없어.”
“수, 수련하면 되잖아!”
발데르가 소리쳤다. 그러나 루시펠라가 미소를 지었다.
“발데르, 검이 이제 와서 수련만 하면 될 정도로 간단한 거야?”
“…….”
“동체 시력과 전투 센스가 있더라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없어. 나는 지금 검을 들기에도 벅차. 그런데 내가 옛날처럼 검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아?”
그들의 참담한 표정을 보며, 루시펠라가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는다는 게 뭔지 몰랐는데 그런 거더라. 과거 에스텔의 육신은 죽었고, 그리고 되살아난 나는 에스텔의 검술을 잃어버렸지. 이미 죽은 사람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어.”
“무슨 그런 불공평할 데가 있어! 죽고 싶어서 죽은 것도 아니었는데!”
아니카가 소리쳤다.
“아니야, 단장. 노력하면 될 거야. 분명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어.”
“노력해 봤는데 체력을 키우는 게 고작이었어. 검을 드는 것은 불가능해.”
기사였던 에스텔이 검술을 잃어버렸다. 이제 이들과 재회해도 더 이상 같이 싸우지 못한다.
루시펠라가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알아차렸을 때 그녀도 한동안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이들 역시도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은 듯했다. 그들이 아는 에스텔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되살아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녀가 담담하게 말하자 이들은 동의의 의미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체된 분위기에 정적이 흘렀다. 그때였다.
“아, 그래서 그런 소문이 퍼졌구나!”
갑자기 아니카가 생각이 난 듯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소문?”
루시펠라가 일부러 크게 되물었다. 그녀는 아니카가 일부러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제더카이어 하인트 공작과 칼리드 새끼가 단장한테 빠져 있었다는 소문 말이야!”
“……그런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어?”
루시펠라의 말에 아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칼리드 새끼야 당연한 거고 우리 단장이 하인트 공작을 유혹했던 거지. 저런 몸 상태로 죽이긴 힘들 테니까.”
루시펠라가 설명하기도 전에 발데르가 대답했다.
“아, 그런 건가?”
그 말에 오이겐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린힐의 마차 안에서도 단장은 하인트 공작이 싫다고 하지 않았어? 이야, 연기가 수준급이던데, 하인트 공작도 그렇게 꼬드겼던 거네.”
그가 웃었다. 리엄이 미묘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오이겐 역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하인트 공작은 진심인가 봐. 소식을 들으니 눈이 빨개져서는 약혼녀를 찾아다닌다는데?”
눈이 빨개져서 자신을 찾는다고? 그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제드는 분명 애가 타서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안전하게 있는지도 모르고.
이들을 만나고, 자신이 어떻게 에스텔인지 증명하려고 그녀는 제드에 대한 걸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새삼 그에 대해 떠올리자, 그녀는 말 못 할 정도로 괴로워졌다.
“참 웃기네, 그놈 적이었던 사람인 줄도 모르고 약혼녀를 사랑해 버리다니 말이야.”
리엄이 조롱하자 발데르와 오이겐이 미소 지었다. 그에 루시펠라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마치 타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드의 마음과 사랑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게 비웃음을 당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비웃는 이들은 사랑하는 자신의 동료들이었다.
자신이 에스텔이라는 것을 이들은 믿어주었고, 제드는 애타게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미룰 순 없겠지. 그녀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런데 너희들, 나한테 설명 안 한 게 있는데.”
“뭔데?”
“나 왜 납치했냐? 요구 조건이 있을 거 아니야.”
루시펠라는 그렇게 물어보고서도 이놈들이 그저 돈을 원해서라고 대답하길 원했다.
“하인트 공작 놈을 죽이려고.”
리엄의 말에 루시펠라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이들에게 듣자 차가운 쇠사슬이 자신을 칭칭 감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래, 마냥 꿈속에 빠져 있기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어떻게 죽일 생각인데?”
“본래라면 단장을 인질로 삼아서 그 공작을 데려와 죽일 생각이었는데, 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단장, 판은 우리가 마련할 테니 직접 죽일래?”
“…….”
제드를 자신이 직접 죽인다라. 그들은 너무도 제드의 죽음을 가볍게 이야기한다. 루시펠라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짝 입술을 떨더니 입을 열었다.
“얘들아.”
“응?”
그 안온함 속, 루시펠라는 이대로 계속 멈춰 있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지니며, 그렇게 자신을 속이고 싶었다.
하지만 에스텔은 죽었고, 그녀의 능력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제 이들의 단장이 될 수 있을까? 이미 자신은 제드를 죽이고 싶어 했던 에스텔 슈페르트가 아닌데.
“너희들을 꼭 만나고 싶었어.”
“알아.”
루시펠라의 말에 그들이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조금 더 오랫동안 에스텔로서 이 녀석들과 꿈속에 빠져 있고 싶었는데, 이제는 깨어나야 했다. 왜냐하면 제드가 자신을 찾고 있을 테니까. 분명 미칠 것처럼 괴로워하고 있겠지.
루시펠라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자, 얘들아.”
그 말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