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16화 (116/173)

#116화 돌이킬 수 없는

2018.04.09.

루시펠라의 멍한 얼굴을 본 발데르가 죄책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

“…….”

“아가씨에게 유감은 없어.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

루시펠라는 알 수 있었다. 발데르는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약 기운 때문일까. 고개를 끄덕일 힘마저 없어서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는 이것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곳과 연결된 곳에 계단이 있다니, 그렇다면 여긴 지하인가. 아직 시야가 회복되지 않았지만, 루시펠라는 이곳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이제 깬 거야?”

“그래.”

“이 아가씨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진즉 이야기하지 그랬어. 괜히 리엄에게 혼났잖아.”

아니카다!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동료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너 같으면 내 목숨을 살려준 사람한테 이런 짓을 하고 싶겠냐? 단장이 그렇게 가르치든?”

“아니, 단장은 절대 그러지 않겠지.”

아니카가 한숨을 쉬며 루시펠라 곁으로 다가왔다. 덕분에 그녀는 아니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조금 고생한 기색을 제외하고 그녀는 여전해 보였다.

그녀를 관찰하는 아니카의 두 눈에 감탄이 서렸다.

“오이겐 놈의 말이 맞네. 소문대로 정말 예쁘네. 나 이렇게 예쁜 사람 처음 봐. 하인트 공작이 반할 만도 해.”

“야, 아가씨 놀라잖아!”

발데르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

“네 아가씨냐? 네 거야? 한 번 봤다고 왜 둘도 없이 친한 것처럼 유세야?”

그녀와 발데르가 투닥거렸다. 루시펠라는 자신을 앞에 두고 싸우는 놈들을 보며 거 참 여전한 녀석들이라고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여전히 멍청한 놈들이라고 울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지금 납치한 사람을 두고 태평하게 대화가 나눠지나?

으, 머리 아파. 저들을 보는 것 때문인지 약 기운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계속 머리가 아프고 어질어질했다.

그녀의 한심하다는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발데르와 아니카가 동시에 루시펠라를 쳐다보았다.

발데르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가씨, 소리 안 지를 거지?”

끄덕.

루시펠라의 끄덕임에 발데르가 입에 묶인 재갈을 풀었다. 재갈 때문에 막인 숨이 뚫리자 한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야, 그걸 풀어주면 어떡해!”

“여기서 뭐 소리를 질러봤자 귀만 따갑지 밖에 들리지도 않아. 아가씨 숨 막힐 거 아니야!”

“어이고, 누가 레이디한테 친절한 기사님 아니랄까 봐. 진짜 가증스럽다, 가증스러워.”

아니카가 짜증을 냈다.

“뭐, 가증스러워? 야, 내가 정말…….”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옅게 한숨을 내쉰 루시펠라는 문득 자신이 무언가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대체 뭘 잊어버린 거지?

아, 팔찌! 루시펠라는 혹 이럴 때를 대비해 위치 추적이 가능한 팔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 제드가 벌써 추적을 했을 거라는 소리인데! 일단 팔찌를 벗어버리는 게 먼저다!

그녀가 몸을 움직여 자신의 손목을 바라볼 때였다.

“이거 찾아, 아가씨?”

“…….”

아니카의 손에 들려 있는 팔찌를 보고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왜 아니카 손에 있지? 별로 비싸 보이지도 않는데도 팔아치우려고 한 건가?

루시펠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자, 아니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럴까 봐 아직 재갈을 풀지 말라고 했던 건데. 아직 이 아가씨 진정하려면 멀었단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인데?”

아니카가 발데르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잘 들어. 이 팔찌 말이야, 원래 한 쌍이래.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위치를 추적하는 게 가능하단 거야.”

“뭐?!”

발데르가 놀란 듯 소리쳤다.

“나머지 하나는 하인트 공작이 가지고 있을 테고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았지?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알기로 이 사실을 아는 이는 그녀와 하인트 공작뿐이었다. 어디서 그 정보가 새어 나간 걸까. 제드의 휘하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일까?

“괜히 희망에 차 있을까 봐 미리 해주는 말이야. 아가씰 납치할 때 제일 먼저 이것부터 뺐으니 하인트 공작이 구하러 온다고 기대하지 마.”

하아, 다행이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제드가 추격해 서로 싸우는 일은 피했다.

아니, 이거 다행이라 해야 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어라? 안 우네?”

“그러게 말이야. 안 우네?”

발데르와 아니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너희들 때문에 그 팔찌 일부러 벗으려고 했던 거거든.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며 지친 듯 벽에 머리를 기댔다.

아직도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정신을 차리려면 한참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 쓸데없는 육체는 술뿐만 아니라 이런 약 종류에도 매우 약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물 좀 가져다줄래?”

“그래, 아가씨.”

루시펠라의 자연스러운 명령에 발데르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흠칫했다.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발데르가 방 밖으로 나가자 아니카가 루시펠라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가씨, 지금 믿는 구석 있지?”

아니카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루시펠라가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지나치게 태연하단 말이야.”

루시펠라는 대답 없이 그녀의 얼굴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거 없어.”

“없다고?”

“응, 없어.”

“이봐, 우리가 누군지 알아? 모르지? 귀족 아가씨가 생전 모르는 곳에 끌려와서, 자길 죽일지 살릴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 손도 발도 묶여 있는데 그렇게 안 무서워하는 게 말이 돼?”

아니카의 지적은 당연했다. 하긴, 원래부터 그녀는 남들이 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는 세심한 면이 있었다. 그것이 반가워 루시펠라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카에게는 다르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비웃는 거야?”

“아니, 전혀.”

루시펠라가 말하자 아니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믿지 못한다는 태도였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들어 정확히 아니카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쪽들의 인간성을 믿는 거야. 날 죽이진 않을 거잖아. 그렇지?”

“글쎄, 그건 모르지. 아가씰 고문할지도 모르고.”

아니카가 겁을 주자 루시펠라가 고개를 저었다.

“고문할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그쪽과 저 남자가 내려와서 날 안심시켜 주지도 않았겠지. 재갈도 풀어주지 않았을 거야.”

“…….”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루시펠라는 벽에 머리를 박듯 기댔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벽에 기대고서도 그녀가 머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아니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약은 지금쯤이면 다 깰 텐데 왜 이러지?”

“내가 이런 종류의 약에 엄청 약해서. 물은 아직 멀었어?”

루시펠라가 창백한 얼굴로 묻자 아니카가 욕설을 내뱉었다. 대충 듣기로 발데르 보고 느려 터졌다고 욕을 하는 것 같았다.

흐려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대충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아는데, 그건 내가 좀 깨어나고 나서 나랑 상의하고 해주라. 나 좀 잘게.”

“야! 야! 아가씨! 야! 아, 진짜 이렇게 약에 약했다면 미리 이야기를 했어야지!”

그걸 미리 어떻게 이야기해.

아니카의 당황스러운 외침을 뒤로한 채 루시펠라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흐릿한 시선 너머 그녀는 제드를 찾았다.

미안, 제드……. 많이, 걱정하겠지?

루시펠라는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그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을 쉽게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반응이 없군.”

제드는 손에 낀 은색 팔찌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일부러 제거할 리는 없을 테고 말이야.”

팔찌에 반응이 없는 건 그녀가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거나, 그녀의 팔에서 팔찌가 제거되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루시펠라가 팔찌를 제거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누군가가 일부러 제거했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왜 팔찌를 빼낸 거지? 설마 팔찌의 용도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나?

제드는 이 정보를 누설한 적이 없었다. 버나드 이외에는. 그러나 버나드가 이런 정보를 흘리고 다닐 리도 만무했으며, 그가 이 정보를 빼돌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쪽에서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이걸 구한 이오지프 쪽에서 문제가 있었던 건가?

제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상 속단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루시펠라를 찾는 게 먼저였다.

팔찌로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지금, 대답은 하나였다.

그는 지금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

그가 루시펠라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 인질범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만약 ‘돈’을 달라고 하면 지불하면 된다. 굴욕적이긴 해도 그만한 방법은 없으니.

남겨진 표식으로 보아 분명 이들은 얼샤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만약 ‘얼샤의 독립’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요구한다면?

제드의 선에서 이뤄줄 수 없는 것이고, 황제는 코웃음 치며 그 요청을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루시펠라는 목숨을 잃게 되겠지.

그리고 만약 자신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렇다면 자신의 목숨이 없어지겠지. 그가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런, 공작께서 보는 앞에서 약혼녀가 납치되다니, 참 안되었소.”

키칼 공작이 자못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약혼녀를 눈앞에서 잃어버렸다는 조소가 들어 있었음을 알았으나 그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그런 비웃음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버나드가 다가왔다.

“각하.”

그는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다. 제드는 그 말을 듣고 표정을 굳혔다.

키칼 공작이 궁금하다는 듯 슬며시 제드를 보았다.

“무슨 보고라도 들어온 것이오?”

“글쎄. 별로 놀랍지 않은 보고로군.”

“놀랍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제드는 대답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키칼 공작은 그것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를 찾으려면 자신의 협조는 꼭 필요했다. 그런데 감히 자신을 또 이렇게 무시해? 그는 젊고 잘생긴 이 얀스가르의 공작이 참으로 못마땅했다.

조금 더 속을 긁고 싶은데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모르니, 그는 점점 대담해져 갔다.

“공작이 놓치는 부분이 또 있을지도 모르니 내게 말해보시오.”

“확실하지 않으니 말하지 않겠소.”

제드는 완고했다.

버나드가 불안한 듯 키칼 공작과 제드를 지켜보았다.

“불확실하고 아니고는 이곳을 담당하는 내가 판단하겠소.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할 것 같은데, 이만 말해주는 게 어떻겠소?”

속을 득득 긁는 그 말에 제드가 그를 바라보았다.

키칼 공작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딘 영애가 위험하잖소? 그놈들 안에서 무슨 고초를 겪을지…… 영애는 아름다우니 한시라도 빨리 구하는 게 낫지 않겠소?”

그 말과 동시에 제드가 그의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키칼 공작이 벽에 부딪친 충격으로 짧은 비명 소리를 냈다. 그가 캑캑거리며 기침했다.

그걸 본 버나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키칼 공작가의 기사들이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제드가 뿜어내는 기세가 워낙 흉흉한지라 차마 다가서지 못했다. 제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확실하지 않은데도 알고 싶다니, 그럼 말해주도록 하지.”

“고, 공작.”

“우선, 왜 내 약혼녀가 성을 벗어나 따라갔냐는 건데, 생각해 보니 그대를 피해서 나를 따라왔더군. 그대가 원인이었다는 거지.”

“……설마 겨우 그것.”

“아직 안 끝났네, 공작. 두 번째로, 알아보니 왜 많은 길 중에 돌이 많아 마차가 뒤처질 길을 선정한 건지 이해가 안 가더군. ‘지름길’이라고 했지? 그런데 다른 길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지.”

“…….”

“세 번째로, 그런 함정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저들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소리인데, 정보 출처가 의심스럽더군. 대체 왜 그렇게 된 걸까.”

“그건 오, 오해요.”

제드는 그의 멱살을 더 세게 틀어쥐며 말했다.

“네 번째로, 내 약혼녀가 마차에서 내려 말을 타려니까 공작이 그걸 말렸지. 위험한 지대니 좀 더 가서 하라고.”

“공작, 그건 내 좋은 마음에서…….”

키칼 공작은 애써 변명했다.

제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서늘한 비웃음에 키칼 공작은 감히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다선 번째로, 말을 움직이는 마부가 어째서 실종되었느냐는 건데, 그 마차의 마부를 이곳에서 고용한 거라더군. 정황상 마부가 한패인 것 같은데, 참으로 수상하지.”

“…….”

“여섯 번째로, 후미에 있던 하인트 공작의 기사는 대부분 죽어 있었지. 그리고 키칼 공작가의 기사들은 대부분 살아 있었지. 그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나?”

“그, 그건 우연히 일어날 수도 있는 게 아니요!”

“그래, 우연. 모든 게 다 우연이라고 설명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사소한 것뿐이지. 하지만 공작, 자네가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내가 이 사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아야지.”

키칼 공작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렸다. 제드가 멱살을 쥔 손의 힘이 아니더라도 그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커다란 맹수를 마주하는 듯, 살기를 담은 붉은 눈동자가 키칼 공작을 응시해 왔다.

그 강렬한 눈동자를 피하면 바로 목이 물어 뜯겨 버릴 것 같은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키칼 공,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 내게 결백을 증명해야 할 거야.”

“…….”

“만약 그대가 이 일에 가담한 것이 드러나면 폐하께 영지전을 하겠다고 청해 내 직접 이곳을 쓸어버릴 테니까 말이야.”

차라리 이성을 잃어 고함치는 목소리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키칼 공작은 생각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루어진 조용한 협박에 그의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인트 공작과 영지전을 해야 한다고?

얼샤 정복전 때 하인트 공작의 기사들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 위명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기사와 병사들은 이곳을 풀 한 포기도 안 나는 황무지로 만들 것이다.

키칼 공작의 온몸에서 비 오듯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자, 이거 잡아.”

에스텔은 쓰러져 있는 리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리엄은 그 손을 쳐내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멍청한 여자에게 지다니, 그는 에스텔의 얼굴을 보며 이죽거렸다.

“평민 여자가 단장인 기사단이라, 재수도 없지. 왜 왕국이 날 기사로 만들어주나 했더니, 겨우 이런 거였나 보군.”

리엄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

미친 여자. 불손하게 굴었다고 이렇게 사정없이 두들겨 패다니.

이렇게 두들겨 맞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맞은 것 때문인지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걸 본 에스텔이 말했다.

“야, 칼리드. 이빨부터 모조리 털어버릴 걸 내가 실수한 것 같지?”

“그래, 에스텔. 저 입부터 닥치게 했어야지. 괜히 그런 소리나 듣잖아.”

“아냐, 기분은 안 나빠. 그냥 후회가 될 뿐이야.”

섬뜩한 말에 비해 지나치게 평범한 어조였다. 예를 들면 점심으로 다른 걸 먹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것 같은.

에스텔의 말에 리엄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방금까지도 에스텔은 자신이 언제든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진짜 이빨이 털리는 건가, 리엄이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귀족은 내가 평민 여자라고 싫어하고, 평민은 내가 여자라고 싫어하고, 여자는 내가 여자답지 않다고 싫어하고. 난 어디서든 미움만 받을 팔자인가 봐.”

그녀는 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엎어진 리엄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히르카 경,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 거야.”

“기회라니, 개죽음당할 기회를 말하는 건가?”

리엄의 말에 에스텔이 웃었다.

“여자인 나, 평민인 경이 기사가 될 기회. 명예롭게 검을 들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기회.”

“……그게 무슨 애들 장난 같은 소리지?”

나라를 지키다니. 저 여자, 같은 평민이 맞나? 세상 물정에 대해 알고는 있는 건가? 지금 그런 걸 위해 나라를 위해 검을 드는 기사가 대체 어디 있냔 말인가.

“왜 그게 장난이지? 분명 기사는 그러기 위해 있는 존재 아니야?”

에스텔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리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꼭 그렇게 비틀리게 생각한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꼭 꿈과 희망을 말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분명 경과 내 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존재해. 그리고 그것이 나라라면 더없이 영광된 자리야. 그 자리엔 여자도, 남자도, 평민도, 귀족도 중요하지 않아.”

“…….”

“경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경을 저버리지 않을게.”

“…….”

“우리 같이 기사가 되자. 함께 싸우는 전우가 되어 나라를 지키자.”

에스텔이 활짝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최후에 아스트라의 품에 안기는 별이 되자.”

그녀의 말은 서툴렀고, 설득력이 없었다.

리엄은 에스텔이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손 치고는 크고 상처가 많은 손이었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무시하기엔, 이 사람도 마냥 평탄한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던 거겠지.

분명히 같잖은 이상만을 이야기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눈을 바라보자 자신도 그녀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손을 잡는다면.

그래, 저 손을 잡는다면.

마치 홀린 것처럼 그가 손을 내밀어 에스텔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신전의 부정한 아이, 떠돌이 검사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기사’가 될 수 있었다.

마냥 이상을 추구하기에 그녀는 너무나 어리석었고, 어리석었기에 순수했다.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들, 세상에 실망할 대로 실망해 찌들어 버린 사람들의 모임.

그러나 에스텔은, 에스텔만은 그곳에서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에스텔은 리엄 히르카에게 너무나 특별한 사람이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하여, 이렇게 복수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 만큼.

에스텔을 회상하던 리엄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는 여자가 보였다. 문득 그는 에스텔과 이 여자를 비교해 보았다.

언제나 튼튼하던 에스텔과 다르게 이 여자는 마취제에 지나치게 약해 정신을 차리다 다시 쓰러졌다고 한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가녀린 여성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고.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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