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시작
2018.04.05.
“하여, 황태자를 폐위한다.”
황제의 칙서를 읽어 내리는 서기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알현실에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황태자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으며 이오지프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황제는 단단한 바위처럼 선 채 자신의 아들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귀족들은 아무 말 없이 시선만 교환하고 있었다.
“테미르.”
황제가 테미르를 불렀다. 그의 음성은 예전과도 같은 강한 힘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테미르가 고개를 들었다.
“억울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나 테미르의 두 눈에는 명백한 굴욕감이 드러나 있었다. 언제나 남들 위에 차기 황제로 군림해 왔던 그는 오늘부로 평범한 황족으로 돌아갔다.
황태자, 아니, 오늘 이 순간 이후부터 1황자는 이오지프처럼 황위에 불확실함을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그의 세력도 이전만 못했다. 이드리스 공작의 악행으로 그의 위세가 주춤했고, 바반드 백작은 황태자파이긴 했으나, 이드리스 공작과 사이가 틀어졌다.
포에르 백작 역시도 명예와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딘 백작가가 남아 있었으나, 그의 딸인 루시펠라 아이딘은 2황자파인 제더카이어 하인트의 약혼녀였다. 즉, 아이딘 백작은 완벽한 테미르의 사람이라기엔 애매했다.
그도 귀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할 것이며, 더 이상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로에르 후작과 미스라발 남작을 비롯한 2황자파 귀족들은 입가에 지어지려는 미소를 애써 삼켰다.
“안심하거라, 테미르. 짐은 아직도 너를 아끼고 있다.”
“…….”
“짐의 첫째 아들은 너이니라. 이것은 네게 자질을 보일 기회를 주는 것이다. 더 이상 태만하게 행동하지 말고 네가 이 나라를 이끌어갈 재목이라는 것을 내게 증명해 보이거라.”
“아바마마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테미르가 공손하게 말했다. 이오지프는 곁눈질로 테미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와 그의 두 눈이 마주쳤다. 아무 표정도 읽을 수 없지만 이오지프는 이 상황이 황제가 일부러 유도한 상황임을 알았다.
사실 폐위가 될 것은 알고 있었다. 이미 황제는 폐위를 언급했었고, 황태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그깟 백성을 죽인 게 무엇이 대수냐며 회의 때 망언을 했고, 이는 황제의 진노를 샀다.
그러나 귀족이 다 모인 곳에서 폐위를 말하다니, 그는 끝까지 순순히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테미르가 독이 오를 대로 오르게 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피를 이은 자신의 아버지라지만, 그는 황제의 이러한 방식이 끔찍하게 싫었다.
이런 식으로 망신을 당하면 테미르는 어떤 마음을 가지겠는가. 이것은 칼을 겨눈 형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비인간적인 행동에 대한 반감이었다.
그는 대체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긴 하는 것인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가지고 노는 그는 대체 어떻게 대가를 치르려고 하는 것인가.
기쁜 마음보다는 혐오감이 앞섰다.
폐위가 끝난 이후 이오지프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전하!”
로에르 후작과 마스라발 남작, 그리고 윈터 경이 그의 뒤를 따랐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오지프는 경직된 표정을 풀고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전하, 저는 이날만을 기다렸습니다.”
마스라발 남작의 얼굴에 눈물이 서렸다.
그는 이오지프의 외할아버지였다. 이오지프가 아무 권력이 없었던 황자였을 때도 그는 이오지프를 아껴주었다.
이오지프는 그의 얼굴을 보며 무어라고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가진 감정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딸이 황후가 되었음에도 남작가는 이드리스 공작 부부의 무시와 견제를 받았다.
황후가 황태자에게 모진 고초를 당해왔음에도 그는 권력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황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어느 날, 황후는 황태자의 패악에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딸의 얼굴에 새겨진 상처를 본 그의 참담한 표정을 이오지프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되었습니다.”
로에르 후작 역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스라발 남작을 바라보던 이오지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하나뿐인 딸이 황후가 되고 그도 더욱 견고한 입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심지어 이오지프는 후비를 들일 생각이 없으니 제국의 유일무이한 외척 가문으로 남게 될 것이다.
딸을 황태자에게 팔아넘기려던 그의 행실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그는 꽤나 안정적으로 그를 지지했다.
“그건 그렇고, 칼리드 루이르크가 보이지 않는군.”
이오지프가 윈터 경을 바라보자 그가 대답했다.
“폐하께서 시찰을 내보내셨답니다.”
“시찰? 2기사단과 함께 말인가?”
“네.”
“이런 시기에 시찰이라니 부황께서도 참, 경계심이 많으시군.”
테미르를 거의 대놓고 지지했던 제2기사단인 칼리드 루이르크를 그린힐 바깥으로 내보내고 폐위를 발표한 것을 보아, 아무래도 황제는 혹시나 황궁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듯싶었다.
‘자식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댈 거라는 의심은 하면서도, 왜 그 칼을 들이대는지는 모른다는 말인가.’
이오지프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역시 들어갈 걸 그랬나.”
루시펠라는 마차 안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쿵!
“윽!”
천장에 머리가 찧을 뻔한 것을 루시펠라는 재빨리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녀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이 모든 게 다 키칼 공작 때문이었다.
그는 제드의 순방에 바쁘다는 이유로 동행하지 않고 보좌관을 보내려 했다.
졸지에 제드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그녀는 키칼 공작과 함께 성에 남게 된다.
그게 싫어 루시펠라는 제드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제드 역시도 그 마음을 아는지 힘든 길임에도 따라간다는 데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따라가겠다고 하니 키칼 공작도 자기가 따라가겠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만약 싫다고 하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그를 꺼린다는 걸 드러내기에 그녀는 그대로 따라가는 입장을 고수했다.
‘뻔뻔해도 그냥 성에 남아 있겠다고 할걸.’
아니, 생각해 보면 키칼 공작의 연막일지도 모른다.
만약 거기서 또 안 따라가겠다고 하면 키칼 공작도 성에 남을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후회하는 마음이 조금 가셨다.
제드가 가야 하는 길은 산길이었지만 다행히 마차가 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문제는 이곳은 산을 깎아 만들어 길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쿵쿵거리는 마차 안에서 윽, 엑, 하며 나는 온갖 비명 소리를 삼켜야만 했다.
차라리 말을 탈걸 그랬다.
하지만 말을 타지 않은 것도 키칼 공작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제드와 타면 되지 않았을까. 그러면 어느 정도 보기 싫은 감정도 희석될 테니 말이었다.
루시펠라는 제드에게 말을 타겠다고 말하려 했으나, 그는 공작과 함께 행렬의 앞에 있었다.
선두에 있던 마차는 어느새 거친 길 때문에 속도가 느려져 맨 뒤로 처져 있었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도착이니 참을 때까지 참아야지.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한편, 말을 타던 제드는 문득 땅을 바라보았다.
“이런, 길이 별로 좋지 않군.”
“길이 좋지 않다니 무슨 말이오?”
키칼 공작이 묻자 그가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차를 타기에 좋지 않다는 말이오. 분명 안은 흔들리고 있을 텐데, 영애가 염려스럽군. 아무래도 말에 태워야겠소.”
그가 행렬을 멈추려고 할 때 키칼 공작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왜냐고 묻는 제드의 시선에 그가 말했다.
“지, 지금 여기서 마차를 세우고 영애를 말에 태우기엔 너무 길이 좁지 않소?”
제드가 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긴 했으나, 행렬을 거슬러 루시펠라를 앞으로 데려가 말에 태우기엔 길이 넉넉하지 않았다.
이 길은 산을 깎아 만든 길이었고, 길을 벗어나면 바로 경사가 있는 산이었다. 자칫 중심을 잃어 떨어지면 크게 다칠 위험성이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좀 넓은 곳이 나올 거요. 거기서 영애를 태우는 게 좋지 않겠소?”
제드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는 걱정스럽게 루시펠라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 안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항상 활기차고 건강해 보여도 몸이 꽤 약한 편인데, 억지로라도 성에서 쉬게 할 걸 그랬다.
자신이 악수 한 번에 지나치게 불쾌함을 드러내서 그녀가 무리해서 따라 나온 건 아닌 건지, 제드는 그때 루시펠라에게 툴툴거렸던 것을 후회했다.
한 번 불편함을 인식하자 제드는 이 길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따금 돌을 밟아 덜컹하는 마차 소리조차 귀에 거슬렸다.
그가 행렬을 살짝 서두르려고 할 때였다.
쾅!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뒤쪽을 바라보니 땅 아래서 폭죽놀이 할 때 쓰는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웬 불꽃이?! 놀람도 잠시, 제드의 눈이 더욱 커졌다.
“루시!”
그가 몸을 돌려 뒤쪽을 바라보자 그의 두 눈에 보이는 것은, 길을 벗어나 산비탈 길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루시펠라의 마차였다.
불꽃에 흥분한 말들이 길을 벗어나 버린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 침착했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어느 정도 이성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그는 차마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연인이 지금 사고를 당한 것이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큰 사고를.
“루시!”
그가 고함쳤다. 그는 길 아래 비탈길을 뛰어 내려가려고 했다.
“안 됩니다!”
버나드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제드는 너무나 쉽게 버나드를 뿌리치고 나무뿌리들을 잡은 채 급한 경사길을 달려 내려갔다. 버나드의 눈짓에 일제히 기사들도 따라 그곳에 내려갔다.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거의 미끄러지듯 내려가니,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었다.
제드는 루시펠라가 탄 마차를 찾기 시작했다.
“루시, 루시!”
그는 미친 듯 고함을 치며 그녀를 찾았다. 아직도 떨어지는 마차가 눈에 선했다. 어서 찾아야 한다! 어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머릿속은 루시펠라로 가득 찼다.
제기랄, 왜 그녀를 이곳에 데려왔을까. 차라리 그녀를 말에 태웠어야 했다.
그는 참담한 자기 후회와 루시펠라에 대한 걱정으로 이성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각하! 여깁니다!”
기사 한 명의 목소리가 들리자 제드가 그곳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다. 분명 자신을 보고 웃어줄 것이다. 어쩌면 가끔 놀라운 행동을 하던 루시펠라이니, 이미 탈출했다며, 왜 이제 왔냐고 그를 맞이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너무나 잔혹하게 부서져 버린 마차의 잔해였다.
제드는 근처에 모여든 기사들이 잔해를 내려다본 채 아무 행동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거지?
자신의 약혼녀가 저기 있지 않은가.
설마?
그는 피어오르는 엿 같은 걱정을 애써 내리눌렀다.
제드가 다가서자 기사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각하, 이것 좀 보십시오.”
제드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기사가 내민 두꺼운 종이 쪼가리를 보았다.
그 종이를 본 그의 두 눈에 불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왜 기사들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인지 깨달았다.
부서진 마차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하, 조하르라.”
종이에 그려져 있는 건 얼샤의 표식이었다.
새파란 오망성이 새겨진 종이를 주먹으로 꽉 쥐며 제드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
“뭐 해? 도와줘?”
에스텔이 힘들여 삽으로 땅을 파고 있는 아니카에게 물었다. 아니카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안 그래도 단장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나 때문에 뭘 하는 건데?”
“언제나, 항상 단장 뒤처리는 내가 하지. 그렇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직접 발탁한 아니카는 에스텔이 신경 쓰지 못했던 섬세한 부분을 신경 써주고는 했다. 칼리드와 다르게 좋은 동료였다.
“야, 리엄. 넌 뭐 하냐?”
“보면 몰라? 단장 하나 잘못 둬서 이게 뭔 고생인지.”
투덜투덜, 리엄은 칼리드 이외에 에스텔과 가장 친한 동료 중 하나였다.
이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말장난을 하는데, 자신보다 훨씬 연상임에도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리엄은 에스텔에게 반항적이었다. 그러나 에스텔에게 마음을 열자 누구보다 굳은 신뢰로 그녀를 대했다.
기사단 내에서 그녀에게 반발하는 세력이 생기면 그녀와 칼리드의 손을 거치기 전에 이미 리엄이 손을 쓴 뒤였다.
친구 같은, 우직한 신뢰로 자신의 등 뒤를 지켜주는 동료. 에스텔은 그가 좋았다.
에스텔은 오이겐을 바라보았다.
“오이겐?”
“단장님, 잠시만 이것 좀 하고요.”
오이겐 녀석은 실력이 뛰어남에도 마음이 약한 녀석이었다.
피치 못하게 식량을 구하기 위해 숲속 동물을 사냥할 때, 오이겐은 그것을 요리하면서 꼭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그는 에스텔을 잘 따르긴 했지만 에스텔은 그가 칼리드를 좋아하기 때문에 칼리드가 따르는 에스텔을 따르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칼리드와 오이겐을 보면 꼭 형제 같아 에스텔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야, 발데르. 뭐 하는데. 너도 말 안 해줄 거냐?”
“아, 진짜, 누구 때문에 이 개고생인데. 입 좀 다물어라.”
발데르가 투덜거리며 삽으로 땅을 파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열심인지 단장보다 이 일이 중요한 모양이었다.
“야, 그런데 칼리드는 어디 있어?”
“칼리드?”
발데르가 얼굴을 서늘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때, 모두가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묘한 분위기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단장이 그 녀석을 왜 찾아?”
발데르가 섬뜩한 분노를 담아 에스텔에게 물었다.
“왜, 왜?”
“그 녀석이 단장을 죽였잖아.”
에스텔은 그 말을 듣고 이게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차가운 현실을 맞닥뜨린 듯했다.
“그럼 너희 지금 뭐 하는데.”
에스텔은 자신의 앞에 있는 구멍을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새카만 검은 구멍은 마치 그녀를 당장에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섬뜩했다.
그것을 본 리엄이 입을 열었다.
“보면 몰라? 단장의 무덤을 파고 있잖아.”
***
어지러웠다. 루시펠라는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다. 그러곤 몸을 일으키려 하자 몸이 부서지듯 아팠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흘리다 자신의 입에 재갈이 물려 있다는 걸 알았다.
팔을 내려다보니, 자신의 손목에는 밧줄이 묶여 있었다. 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험한 취급은 루시펠라가 아니라 에스텔이 받던 건데 설마, 에스텔의 육신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건가. 그러나 슬프게도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은 드레스였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흘리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되짚었다.
별안간 난리가 나는 듯 시끄러워지더니 누군가가 루시펠라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입을 틀어막고 기절시켰다.
거기에 약이라도 발라져 있었던 모양이다. 바로 의식을 잃은 걸 보니. 심지어 머리까지 한 대 맞은 듯 아팠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시야 때문인지,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서 그런 건지 이곳이 어디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시야가 희뿌예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루시펠라는 재빨리 정신을 잃은 척 눈을 감았다.
“안 자는 거 다 알아.”
루시펠라가 그 말에 눈을 떴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멍한 시선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너무 어둡지?”
그가 램프에 불을 붙이자 주위가 아주 살짝이나마 분간이 되었다. 루시펠라는 눈을 깜빡였다.
적갈색 남자가 걸어와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아가씨, 오랜만이야.”
흐릿한 시야의 초점이 맞춰지자 그녀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발데르였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