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소나기
2018.03.29.
루시펠라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역시 그들을 만나겠다는 것은 너무나 허황된 생각이었다.
아이릭을 만날 때 자신에 대한 단서를 더 흘렸어야 했나?
아니면 제드의 기사들을 제대로 따돌렸어야 했을까.
어느 쪽이든 생각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실패해 버렸는데.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몰라, 망설이고 있을지도 몰라, 마지막에 짠 하고 나타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루시펠라는 그들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지정했던 기간 동안 그녀는 그 비슷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
그래,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녀석들이지.
루시펠라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제드와 헤어졌다. 차라리 그를 따라가며 그와 함께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그녀는 괜히 그 얼굴이 보고 싶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제드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나서 루시펠라는 에스텔의 인생을 매듭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칼리드와 자신. 그리고 살아남은 동료들과 자신.
그냥 루시펠라로서 완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선택지도 존재했지만, 그녀는 에스텔이었고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특히나 시토라 기사단, 이 녀석들은 자신의 죽음을 아직도 되새기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칼리드의 말에 따르면 기사단의 대다수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반 얀스가르 세력이 되었다고 한다.
예전 그린힐에 살인범이 활개를 쳤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잊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에스텔의 의지를 이어받았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을 어떻게 만난다? 이제 키칼 공작령만 돌면 얀스가르로 돌아가는데, 그럼 기회가 생기는 것일까.
얀스가르의 수도에서 그녀가 저택에서 꽃처럼 처박혀 있는 동안, 그 녀석들이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끔찍한 가정에 마음에 조바심이 일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속단하지 말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기회가 정말 없을 리도 없었다.
그녀가 할 것은 이렇게 안달을 하는 게 아니라, 얀스가르에 가서도 이들과 어떻게 접촉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이었다.
우선 아이릭을 통해 이들이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생각은 여기까지 하자.
루시펠라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한숨을 쉬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고개를 돌리니 문득 자신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던 온기가 떠올랐다. 같이 누우며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 얼굴도.
“보고 싶어.”
그녀는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고!”
그녀가 소리쳤다.
그 녀석들은 그 녀석들이고 제드가 보고 싶은 건 보고 싶은 거다!
원래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건가? 빨리 그 온기를 느끼고 싶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두 눈만 바라봐도 행복할 것 같다.
루시펠라는 제드와 함께했을 때의 그 충족감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없을 때의 상실감도.
그와 떨어진 지 열흘,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제드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억눌렀다.
“진짜 어떻게 하냐, 나.”
루시펠라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미친 거겠지? 이 정도면 엄청 심각한 건가? 루시펠라가 덜컥 겁을 먹을 때였다.
똑똑.
그때,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는 화들짝 침대에서 일어나 왠지 모를 기대감을 가지고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로이자였다.
그녀는 왠지 모를 실망에 입을 툭 내밀었다.
이럴 때 딱 때맞춰서 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마음도 모른 채 로이자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공작 각하가 아니라서 실망하신 거예요?”
그 말에 루시펠라가 흠칫했다.
“그렇게 표가 났어?”
“네. 입이 나와 있는 걸요.”
루시펠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잡았다. 그래, 입이 나오긴 했다. 로이자가 입을 막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가 그렇게 혼자서 외로워하실 것 같아서 여기 차를 내왔어요.”
때마침 시원한 차가 나와 루시펠라는 그것을 벌컥거리며 마셨다. 그럼에도 어쩐지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내가 미친 거겠지?”
루시펠라의 물음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로이자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아가씬 그저 사랑을 하고 있는 걸요.”
“그렇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지.”
너무나 많은 것이 걸리는, 겉으로는 평온하고 예쁘지만 거짓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사랑. 할 이유보다 해서는 안 될 이유가 더 많은 사랑.
루시펠라는 이 감정에 너무나 빠져 버린 것이 무서웠다.
“너무 지나치게 빠져 있는 건 아닐까?”
루시펠라가 묻자 로이자가 미소 지었다.
“지나치게 빠지면 뭐 어때요. 서로 사랑하는 걸요. 공작 각하도 아가씨를 사랑하고, 아가씨도 이렇게나 사랑하는데요.”
“그렇지?”
남에게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괜히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 사람이 날 그렇게 좋아하는 게 티가 나?”
“모르셨어요?”
“아니, 말은 하긴 했는데.”
“공작 각하는 아가씨를 보러 갈 때 꼭 저를 만나고 간답니다. 오늘은 기분이 어떤지, 혹 불편해하는 것은 없는지. 항상 귀담아들으세요.”
“…….”
“전장의 흑사자라고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가씨를 대하는 걸 보면 정말 섬세하시다니까요.”
루시펠라의 두 뺨이 달아올랐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그를 만날 때마다 실감하고 있었다.
눈빛, 부드러운 음성, 따스한 온기. 이젠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러나 그가 없을 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큰일이네.”
“뭐가 큰일이에요?”
“네가 그 말을 하니 더 보고 싶어졌어.”
그 말을 들은 로이자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루시펠라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차를 들이켰다.
마셔도 마셔도 목이 탔다. 그러면서 루시펠라는 정말 절감했다.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
루시펠라가 외출을 중단하자 알토와 쟈넷은 밖으로만 나돌던 아가씨가 이제 도시에 붙어 있다고 기뻐했다.
루시펠라는 시토라 기사단의 일만 생각하느라 이곳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어머니의 도시였다. 기억도 잘 안 나고, 유대가 없었던 자신의 어머니지만 그녀가 자라온 이곳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루시펠라는 저택과 이 도시를 샅샅이 구경하기 시작했다. 쟈넷은 이따금 루아나의 이야기와 더불어 젤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제드를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했는데, 바로 바네사 남작가 뒤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작은 숲 안에 위치한 오두막이었다.
이 숲은 나무들이 키가 작고 위험한 동물도 없어 루아나와 젤다가 정원처럼 뛰어놀았던 곳이라고 했다.
역대 바네사 남작가의 사람들이 머리가 복잡할 때 이곳에 있는 오두막에 들어가 머리를 식히던 장소였다.
루아나가 이따금 속상한 일이 있을 때나 반항할 때면 가출한답시고 자그마한 짐을 꾸려 젤다와 함께 이곳에서 잠을 잤다는 얘기를 들은 루시펠라는 미소 지었다.
세상과 단절하는 듯한 작은 창문, 적포도주 빛 카펫, 아담한 벽난로와 그 위에 있는 은색 주전자, 암갈색 폭신한 소파.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장소였다.
그래서 루시펠라는 매일같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방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하녀들의 시중을 받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정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던 탓이었다.
물론, 이곳도 기사들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한 건물의 방안에 혼자 있는 것과 건물 안에 오롯이 혼자 있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이곳은 한적하고,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었다. 에른 숲에서 에스텔이 자주 갔던 그 고목처럼.
그날도 루시펠라는 오두막 소파에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보통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건 제드, 칼리드, 시토라 기사단뿐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얀스가르에서 새로 사귄 친구, 클로렌스에 향해 있었다.
클로렌스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연락이라도 해볼걸. 아니, 클로렌스는 아마 그녀가 소식을 안 보내는 게 잘 지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도 분명 서운해하겠지.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에게 소홀했던 점을 반성했다.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오지프, 그 인간이 잘해주긴 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벌써 얼샤에 넘어온 지도 두 달이 넘었다. 계절은 이제 초가을로 접어들었고, 루시펠라도 두꺼운 옷을 입기 시작했다.
참 이상했다. 얀스가르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니. 그곳에서 발붙이고 살아간 지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에스텔 못지않게 꽤나 긴 삶을 산 것 같았다.
“제드 때문이겠지.”
맞아. 이 모든 건 제드 때문이었다.
“왜 꼭 모든 생각의 끝은 그 녀석, 아니, 그 사람일까.”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투덜거렸다.
빨리 그가 보고 싶었다. 왜 시간이 이렇게 늦게 가는 건지. 루시펠라는 그가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세어보았다. 아직도 사흘이나 남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도시는 다 돌아봤고 책을 읽기는 싫은데. 게다가 저택을 돌아다니는 건 어머니가 생각나 가끔 그녀의 기분은 지나치게 가라앉고는 했다.
낮의 햇살은 따사로웠고, 짹짹거리는 새소리는 평화로웠다.
그런 분위기에 취해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루시펠라는 꾸벅꾸벅 졸다가 그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한참 후, 그녀를 깨운 것은 오두막을 두드리는 빗소리였다.
루시펠라는 창밖을 보았다. 아까까지 보았던 파란 하늘은 사라지고, 잿빛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줄기가 오두막을 때리자 사방이 울리는 것 같았다.
소나기였다.
“아, 이런.”
루시펠라는 이 숲에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들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들은 루시펠라가 혼자 있고 싶다는 걸 배려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채 그녀의 오두막 주변을 호위했다.
‘아니, 이렇게 비가 오면 알아서 안으로 들어와야 할 거 아니야! 왜 그걸 다 맞고 있어!’
호위하는 고충이 얼마나 큰지 알았기에, 루시펠라는 얼른 들어오라고 할 생각으로 오두막 문을 열고 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빗속에서 기사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워너 경! 체티 경!”
그녀가 소리치며 이들을 불렀지만,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며 빗속을 걸었다. 그녀가 다급히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비 때문에 착각한 건가. 그녀는 계속 눈을 깜빡거렸다.
제드다.
제드가 이곳에 서 있었다.
그 역시도 비를 맞아 흠뻑 젖은 채였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루시펠라가 눈을 계속 깜빡이고 그를 쳐다보자 그는 미소를 짓다 표정을 굳히며 무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빗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그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한숨을 쉬다 이내 다시 미소 지으며 살짝 두 팔을 벌렸다.
루시펠라는 왠지 울컥해서 제드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허리를 단단히 감싸는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자 텅 빈 듯한 느낌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따스한 감정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이렇게 그와 만나, 그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루시펠라가 그와 시선을 마주할 때, 그녀는 제드의 두 눈에 서린 진득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도,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제드 역시 그것을 깨달은 듯했다.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했는지, 서로 간에 언어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입을 맞췄다.
차가운 비에 서늘하게 식어버린 피부와 대비되는, 서로의 입술만이 진한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제드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을 감싼 채 거친 입맞춤을 퍼부었고, 루시펠라 역시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그에 응했다.
제드는 그녀를 안아 올린 채 오두막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확인하듯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루시펠라를 내려두고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빗소리가 작게 들리며 세상과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을 바라보던 그녀는 제드와 눈을 마주쳤다. 이글거리는 열기와 진득한 열망이 담긴 눈동자. 눈을 마주치는 것이 또 다른 신호라도 되듯, 그들은 갈급함을 달래기 위해 또 입을 맞췄다.
서로를 담은 눈빛이 뒤엉키고, 그들의 뜨거운 숨결이 뒤엉키고, 서로에게 품었던 열망과 그리움이 뒤엉켰다. 그리고 옷도 채 다 벗지 못한 식어버린 육체에 피어나는 열기가 서로 뒤엉켰다.
이미 젖은 몸이 부딪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루시펠라도 제드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에 몰두했다.
서로에게 품은 욕망이 이미 충분하기에 그것은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제드를 꽉 끌어안았다. 제드 역시 미소 지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두막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여전히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벽난로에 불이 따스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루시펠라는 오두막에 있는 모포를 덮은 채 제드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좀 더 있다가 올 거라 생각했어.”
루시펠라가 손가락으로 제드의 얼굴을 쓸며 말했다. 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그대가 보고 싶어서.”
“…….”
“그대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서둘렀어.”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에게서 듣자 더욱더 행복했다. 루시펠라가 피식 웃었다.
“그댄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
“글쎄.”
그걸 본 제드가 얄밉다는 듯 루시펠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알면서 왜 물어봐.”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어 자신의 이마로 그의 맨 가슴팍을 꾹 눌러 비볐다.
꺼슬한 머리카락의 감촉에 제드가 피식 웃으며 그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었어.”
루시펠라의 귀가 붉게 물든 것을 본 그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군.”
“왜?”
“결혼하게.”
그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잠들 때도 눈을 뜰 때도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그 말을 들은 제드가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대는 이미 내게 결혼하자는 말을 했었군.”
“뭐?”
“술에 취하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역시 사실이었어.”
그는 자못 즐거운 듯했다.
설마, 그때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취한 걸 가지고 그런 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갑자기 나오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데? 다 말해봐.”
“입 맞춰달라고 했었지.”
“그래. 그건 기억나.”
그 말에 제드가 웃었다. 왜 갑자기 거기서 그걸 생각해 내서는.
“아까처럼 잘 때도 일어날 때도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내가 그런 소리를 했단 말이야?!”
그땐 심지어 결혼을 결심하기 전이었는데. 미쳤나 봐. 그것을 본 제드가 웃으며 말했다.
“내 몸이 좋아서 짜증 난다더군. 자기도 그런 몸이었으면 했다고. 생각해 보니 영애는 검사가 되고 싶었던 건가?”
“어, 어…….”
루시펠라가 당황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제드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 몸을 보니 어때? 아직도 내 몸이 되고 싶나?”
“뭐?”
“내 몸이 되는 것도 좋지만, 그냥 내 몸 자체도 좋지 않냐 이 말이야. 특히나 그대에게.”
“이, 이!”
“정확히 말하면 좋지 않았냐고 물어봐야 하나?”
“더, 더 말하지 마! 제발!”
그의 낮은 목소리에 루시펠라는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그의 턱을 밀어 올렸다.
덕분에 그는 입을 꾹 다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제드는 루시펠라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생각해 보니 우습긴 하군. 그때 그대는 정말 우스운 소리를 많이 했는데.”
“또 뭐라고 했는데.”
이제 그녀는 어떤 소리를 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대가 루시가 아니라더군.”
움찔.
몸이 밀착되어 있기에 제드는 그녀가 움찔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보았다.
“내가, 내가 아니라고 말했다고?”
“그래.”
루시펠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 정말 많이 취했나 보네. 그런 소리까지 할 정도면.”
그는 루시펠라의 태도에 뭐라 꼬집을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루시펠라가 술 취해서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그 말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루시가 루시가 아니다’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인가. 그냥 귀여운 주정이지. 제드는 웃으며 루시펠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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