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10화 (110/173)

#110화 소녀들의 약속

2018.03.19.

루시펠라가 복도에 걸린 남작의 초상화들을 보러 앞으로 걸어가자 그녀는 점점 젊어지는 남작의 초상화들을 볼 수 있었다.

젊은 남작은 제법 날카로운 인상에 준수한 얼굴을 가진 흑발의 미남이었다.

루시펠라는 왠지 모르게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루시펠라의 느낌인 것일까? 하지만 루시펠라는 단 한 번도 이 사람을 본 적이 없을 텐데……. 그녀는 의아했다.

“어떤 분이셨나요?”

“무뚝뚝하신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면 참 다정한 분이셨지요. 루아나 아가씨에 대한 사랑이 아주 지극하셨답니다. 분명 아가씨도 이전처럼 만났으면 기뻐하셨을 거예요.”

그렇게 말해도 정작 그녀에겐 와 닿지 않았다. 자신은 어차피 진짜 루시펠라가 아니었으니까.

“이전에도 그러하셨다니? 언제요?”

루시펠라가 되묻자 알토가 쟈넷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 루아나 아가씨가 태어났을 때를 말하는 거예요.”

‘이전에도 그러했다’라는 말은 뭘까? 태어난 딸을 보통 만났다고 표현하나?

쟈넷을 바라보니 그녀는 슬픈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루시펠라를 보고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루시펠라는 그녀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다음 날에도, 루시펠라는 이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낌새를 느꼈다.

오전부터 제드가 기사들이 묵는 곳을 방문해 자리를 비웠고, 그녀는 쟈넷에게 저택을 조금 더 안내해 달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저번 마차에서 제드가 보낸 눈빛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좀 더 철저하게 연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쟈넷은 기뻐하며 루시펠라에게 생전 바네사 남작과 남작부인 루아나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어린 시절 루아나의 방을 본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책장에 꽂힌 책을 빼 들었다.

“어?”

책 사이에 책갈피처럼 끼어 있던 종이가 바닥 위로 팔랑 떨어졌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주워 들었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는 풀밭에 앉아 인형 놀이를 하는 소녀들의 뒷모습이 거친 펜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야? 한쪽은 어머니인 것 같고, 한쪽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을 보아서 이 소녀도 귀족인 것 같은데?

그림 아래에는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글귀가 쓰여 있었다.

―노아 아저씨가 그려주신 그림, 젤리와 함께.

“젤리?”

젤리가 누구지? 그 말에 쟈넷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아가씨, 그건.”

“응?”

“죄송해요!”

쟈넷은 거의 빼앗다시피 그 종이를 가져갔다. 그림을 확인한 쟈넷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루시펠라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뭔가가 있구나.

“이게 뭔데?”

“루아나 아가씨의 어렸을 때 모습을 그린 거예요.”

“옆에 있는 여자애는?”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묻자 그녀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녀 아이입니다. 동무가 없어서 아주 가끔 주인마님께서 입혀주신 드레스를 같이 입고 놀고는 했지요.”

“그래?”

그런데 왜 저 여자아이를 자신이 알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걸까.

루시펠라는 쟈넷의 얼굴을 유심하게 지켜보았다. 묘하게 그림 속 그 하녀 아이가 신경 쓰였다.

***

자신을 쓰다듬어 주는 거친 손길에 에스텔은 미소를 지으며 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자장가가 울려 퍼졌다.

에스텔은 어머니가 그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이 지저분하고 시궁창 같은 곳에서도 어머니의 자장가는 이상하게도 다른 세상의 것처럼 신비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는 어머니의 표정은 언제나 꿈꾸는 것 같았다. 자장가를 들어서 좋았지만 그럴 때마다 에스텔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어쩐지 어머니의 곁에 자신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엄마, 무슨 생각 해?”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손을 잡아주지 않고 놓아버렸다.

그것에 한기를 느끼면서도 에스텔은 어머니의 자장가와 손길에 행복감을 느끼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

이 땅을 관리하는 준귀족의 신분이 되었음에도 쟈넷은 아랫사람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루시펠라를 보살폈다. 마치 친손녀를 대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쟈넷이 젖은 머리를 천천히 말려주었다.

루시펠라는 섬세한 손길에 기분이 좋아 절로 눈이 감겨왔다.

“예전에 루아나님은 이렇게 머리를 말려 드리면 꾸벅꾸벅 졸으셨답니다. 때때론 어서 머리를 빗고 잠자게 해달라고 졸랐지요.”

“…….”

“아침에 머리를 묶어드리면, 쟈넷이 해준 머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웃으시곤 했죠. 어찌나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던지.”

그녀는 아직도 추억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빗는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루아나에 대해 애틋함과 그리움을 느끼는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쟈넷에 대해 알아낸 건, 그녀는 상당히 감정적이고 말이 많은 편이며 무언가를 숨기지 못하고 얼굴에 다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얼샤의 왕궁에서 일하셨다고 하던데, 왜 거기에 가신 거야?”

루시펠라는 어느새 그녀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쟈넷은 그것이 퍽 기쁜 듯했다.

“그 당시 마을은 흉작이 들어 거둘 만한 것이 없었답니다. 마님께서 돌아가시고, 주인님께서도 똑같이 몸져누우셨지요.”

“…….”

“당시 왕궁에 간다면 여러모로 얻을 수 있는 게 많았답니다. 높은 급료를 받을 수 있었고, 얼샤의 중앙 귀족과 연이 닿을 수 있었지요. 만약,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게 된다면 이곳도 다시 되살아날 수도 있었을지도 몰랐지요.”

그랬구나. 루시펠라는 이소타 왕비를 떠올렸다. 그녀의 시녀들은 귀족 출신의 레이디라는 걸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다행히 루아나 아가씨가 모셨던 왕비 전하께서는 다정한 분이셨어요. 갑자기 주인님의 병세가 악화되지만 않았다면 괜찮았을 거예요.”

“외조부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얀스가르에 가셨던 거구나.”

“네, 영지에 대한 권한은 얼샤에 반환하고 루아나 아가씨께서는 외조부를 찾아간다고 가셨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가씨께서는 외로우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혈육이 없었으니까요.”

혈육. 루시펠라는 그녀는 그 단어가 왠지 무거우며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때,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혈육, 그래, 이 집에 또 다른 혈육이 있었던 게 아닐까?

“혈육이 정말 없었던 거야?”

루시펠라의 물음에 쟈넷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다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루시펠라는 쟈넷이 숨기려던 게 이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여기 말이야, 우리 어머니 말고 또 한 사람이 더 있던 것 같아. 느낌이 그냥 그래.”

쟈넷이 루시펠라의 눈을 피했다. 역시나 그녀는 거짓말을 못했다.

여기서 더 알아볼까? 그렇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데?

하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은 꼭 제 속의 루시펠라가 찾으라고 시키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녀 안에 있는 직감이 그러라고 계속 종용하거나.

“내 외조부께서 날 만나면 이전처럼 기뻐할 거라고 했지. 그 ‘이전’이 정말 뭐야? 내가 보기엔 우리 어머니를 만나서 기뻐한 걸 말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녀가 몸을 움찔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쟈넷, 숨기려 해도 너무 티가 나서 못 견디겠어. 내게는 말해주면 안 돼?”

“아가씨.”

“이 집에 유일한 혈육이 남아 있고, 만약 주인을 따진다면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되니, 이 부분에 대해 분명 내가 알아야 해. 쟈넷도 지금 내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거 아니야?”

“…….”

“강요는 안 할게. 말해주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난 얀스가르로 돌아갈 거고, 내게 두 번 다시 이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어.”

쟈넷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망설이는 듯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의 머리만 빗어 내렸다.

“그 불쌍한 것이 이대로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겠죠.”

쟈넷은 한숨을 푸욱 쉬더니 말했다.

그 불쌍한 것이라니, 역시 잘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로구나.

“그 아이는 이미 죽었답니다.”

‘그 아이’라니, 그 혈육을 말하는 것인가? 루시펠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죽었다고?”

“네, 죽었더라고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죽었더라고요, 라니. 직접 죽음을 보지 못했다는 소리인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어?”

루시펠라가 거울 너머 쟈넷과 눈이 마주쳤다. 쟈넷은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망설이더니 중얼거리며 말했다.

“루아나 아가씨께서 아셔야 했을 일이지요. 하지만 말하지 못했고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마님과 결혼하시기 전 주인님께서는 하녀와 사랑에 빠지셨답니다.”

루시펠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녀와 사랑에 빠져? 귀족과 평민의 사랑이라니, 정말 가능했구나.

“다만 주인님의 어머님, 그러니까 아가씨의 외증조모께서는 강경하게 반대하셨고, 그 하녀는 쫓겨나고 말았지요.”

“그래서?”

“사실, 그 하녀는 임신 중이었고 다른 도시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어버렸대요.”

“…….”

“딸이었어요.”

루시펠라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것은 꽤나 흔한 일이었다.

“주인님은 그 하녀가 당신을 떠났다고 생각하시어 크게 상심하셨습니다. 당연히 자식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 우연히 얀스가르에서 얼샤에 방문하신 마님을 만나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셨어요.”

“…….”

“후에 알토가 그 아이를 데려와 우린 그 아이를 딸처럼 길렀지요. 알토는 끝까지, 심지어 제게도 그 일을 숨겼어요.”

“왜?”

“만약 이 사실이 드러났다간 주인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아일 딸로 받아들이셨겠지요. 그에 마님과의 관계가 틀어지셨을 것이고, 루아나 아가씨도 상처받았을 거예요. 알토는 그 행복을 부수고 싶지 않아 했어요. 하지만 그 아이를 가엾게 여겨 차마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고 해요. 그래도 이곳은 아버지가, 혈육이 있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아이는? 그 아이가 부모를 잃은 대가로 이 가족의 행복이 유지되었던 건가. 그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데?”

“그 아이와 루아나 아가씨의 나이 차이가 얼마 되지 않아서 마님께서 그 아이가 아가씨를 모시도록 했어요. 그래서 그 둘은 자매처럼 붙어 다녔죠.”

“하녀와 아가씨인 관계인데, 서로 배다른 자매였다는 소리네.”

꽤 서글픈 이야기였다. 한쪽은 하녀, 한쪽은 귀족 아가씨라니.

“그래서 그 여자애는 어떻게 되었어?”

“주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알토가 비밀을 털어놨지요. 주인님은 기뻐하셨어요. 루아나 아가씨는 왕궁에 계셨고, 그 아이는 마지막까지 주인님의 임종을 지켰어요. 그리고 어째서인지 루아나 아가씨를 기다리지도 않고 이곳을 뛰쳐나가 버렸죠.”

“…….”

“그 후로 소식이 없었어요. 아이딘 백작께서 이 땅을 사시고 다시 우리를 불러 모았을 때, 우린 그 아이를 찾아 헤맸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병으로 죽었다더군요.”

이 나라에서 병으로 죽는 사람은 너무나 흔했다. 전염병에 대한 확실한 대책도 수도 근처가 아니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시펠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듣자 하니, 슬하에 딸이 있었다더라고요. 그런데 확실하지 않아요.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에서는 그녀 혼자 살았던 흔적밖에 없었으니까요. 아마 그 딸도 죽었던 거겠죠.”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가문이라고 해서 사건 사고가 없었던 게 아니었구나.

참으로 기구했다. 귀족으로 살다가 아이딘 백작과 결혼해서 병으로 비참하게 죽어버린 루아나,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서 하녀로 살다가 출생의 비밀을 알고 집을 뛰쳐나가 병으로 죽어버린 여자의 이야기.

“그 아이와 루아나 아가씨는 정말 사이가 좋았답니다. 마치 피가 통한다는 것을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요. 전 그것도 모르고 아가씨에게 지나치게 격의가 없다며 그 아이를 항상 야단쳤어요. 그때, 그 그림처럼 드레스를 입었던 날은 제게 혼이 나고는 했지요.”

그녀는 코를 훌쩍였다.

“그렇게 사이가 좋았어?”

“항상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었어요. 어느 정도 자라서는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어떤 이름을 붙일 건지 서로 이야기까지 나눴답니다.”

“정말 친했나 보네.”

그녀의 말에 쟈넷이 빗질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아가씨와 그 아이가 제게 이러더군요. 자기들은 아이를 낳으면 꼭 이름을 ‘별’에서 따오겠다고요. 그러면 아스트라의 가호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사랑스럽고 행복한 모습이었죠.”

루시펠라는 상상했다. 이름을 모르는 하녀와 루아나가 재잘재잘 떠들며 훗날 자식을 낳으면 이름을 어떻게 지을 건지 이야기하는 그 모습을. 소녀들의 눈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반짝반짝 빛났을 것이다.

결국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도 모른 채.

“그래서 내 이름이 루시펠라구나.”

“네, 얀스가르식으로 샛별이라는 뜻이에요.”

자넷이 웃었다.

“우스웠던 게 뭔 줄 아세요? 하마터면 아가씨의 이름이 그 유명한 여기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어?”

갑자기 나온 자신의 말에 루시펠라가 몸을 움찔했다.

“타라, 에스텔, 스텔라, 이슈타르, 아리스타, 온갖 이름이 나왔지만 아가씨는 에스텔이란 이름을 특히나 마음에 들어 하시더군요. 하지만 루아나 아가씨는 아가씨의 이름을 결국 얀스가르 식으로 지었네요.”

“…….”

“아가씨?”

루시펠라는 망연히 거울을 보고 있었다.

루시펠라의 원래 이름이 에스텔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순간 루시펠라는 바네사 남작의 눈동자가 호박색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네 눈동자는 네 외할아버지를 꼭 빼닮았구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 가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하녀 여자애는 자식의 이름을 뭐로 짓겠다고 했어?”

“글쎄요? 그 아이도 그 이름을 마음에 들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쟈넷이 피식 웃었다.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손이 덜덜 떨렸다.

“그 하녀 여자, 이름이 뭐였어?”

“이름은 왜……?”

“아니, 그냥 궁금해서. 알아두는 게 좋잖아. 어떻게 보면 내 이모인데.”

루시펠라가 미소 지었다. 쟈넷은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젤다예요.”

젤다.

그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바로 그녀의 어머니 이름인데.

의자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거울을 바라보며 빨라지는 호흡을 진정시켰다.

“머리가 다 말랐네요, 아가씨. 이제 주무실 시간이에요. 어서 침대에 누우셔야죠?”

쟈넷이 그녀를 이끌어 침대로 갔다.

쟈넷이 정성을 들인 듯 침대의 이불 시트는 포근했으며 좋은 냄새가 났다. 그곳에 누운 루시펠라는 이불을 끌어안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쟈넷, 자장가 불러줄 수 있어?”

“자장가요?”

“응, 우리 엄마도 자장가를 불러 줬거든. 그런데 잘 기억이 안 나서…….”

‘어머니’라는 호칭이 ‘우리 엄마’라는 호칭으로 변했으나, 쟈넷은 그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랬군요. 자장가는 오랜만이라 아가씨께서 불렀던 것과 똑같을지 아닐지 모르겠네요.”

주름진 거친 손이 루시펠라의 이마를 쓸었다.

그녀는 침대 옆 의자를 끌고 와 앉아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밤이 까만 이불을 들고 오면

어서 잠이 들어야지, 착한 아가야.

달은 창밖에서 너를 지켜보며

별들은 내일의 약속을 이야기할 거야.

사랑하는 나의 아가

조용히, 조용히 잠들려무나.

나긋한 목소리에 루시펠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그것을 닦아내며 자는 척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 자장가를 듣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자장가를.

에스텔의 어머니는 대부분 신경질적이었다. 에스텔을 볼 때마다 무언가 견딜 수 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그녀는 에스텔이 일곱 살을 먹었을 때 그녀를 떠났다.

아니, 버렸다.

역설적이게도 떠나기 전날 에스텔은 너무나 행복했다. 평소엔 먹을 수 없었던 맛있는 음식과 어머니의 다정한 미소가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녀가 좋아하는 자장가를 불러주었고,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매일매일이 오늘과도 같았으면 하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일어났을 때,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이곳의 억양이 익숙했던 이유는 어머니가 가끔 쓰던 억양이었기 때문이다. 쟈넷이 부르던 자장가는 그녀가 잊어버렸던 어머니의 자장가였다. 그녀의 호박색 눈은, 바네사 남작의 눈동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이래서, 알고 싶었던 거구나.’

루시펠라의 육신이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녀의 직감이 가리킨 건지 유달리 상관없는 일에 집착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왜 자신이 하필 다른 이도 아니고 루시펠라의 육신에 들어온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아스트라의 안배였다. 에스텔과 루시펠라는 혈연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촌 동생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충격과 더불어 이유 모를 서글픔이 몰려왔다.

자는 척하며 일부러 숨소리를 고르게 내자, 쟈넷이 자장가를 멈춘 뒤 불을 끄고 자리를 떠났다.

한참 후, 루시펠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이 계속해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훌쩍이며 그것을 닦아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어떤 방의 방문을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희뿌연 달빛이 새어 나오며, 창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루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이야?”

아, 그의 목소리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가슴속에 느른한 안심이 퍼져 나갔다.

루시펠라는 망설이지 않고 뛰어 들어가 그에게 안겼다.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건지 그의 머리는 물기에 젖어 번들거렸고, 그의 몸에서는 아주 좋은 향기가 났다. 그녀는 그의 품에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비며 파묻었다.

그에 제드가 움찔했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좋으면서도 그는 곤란함을 느꼈다.

갓 목욕하고 나와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에, 루시펠라의 육신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제드는 속으로 또 자제심을 되뇌며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루시, 왜 이러는지 말해봐.”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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