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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09화 (109/173)

#109화 상속

2018.03.15.

라흐시 공작령에 머무르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얼샤에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로웠다.

라흐시 공작은 다른 이들보다 루시펠라와 같이 있는 것을 더 즐겼고, 그들은 퍽 친해진 사이가 되었다.

루시펠라가 그녀에게 몰래 품은 죄책감을 제외하곤 이들의 관계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라흐시 공작은 자신의 삶을 존중해 주는 루시펠라에게 호감을 느꼈다.

마치, 루시펠라가 클로렌스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처럼.

두 사람은 티 타임을 가지기도 하고, 때로는 말을 타기도 하며 친목을 다녔다.

제드가 이 도시와 도시 근교를 전부 다 돌았을 때,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라흐시 공작이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다.

물론, 그 말은 제드가 아닌 루시펠라에게 향해 있었다.

그것을 본 제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라흐시 공작과 루시펠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시펠라가 라흐시 공작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각하가 원할 때면 언제든.”

그녀의 말에 라흐시 공작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루시펠라는 그녀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자리를 노리는 숙부와 그의 아들 엘리언, 그녀의 어린 남동생.

그녀는 그녀 나름의 싸움을 계속하겠지. 루시펠라는 라흐시 공작이 존경스럽고, 그런 삶을 만든 자신이 미안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영애.”

“네?”

“걱정하는 그런 표정 말이에요.”

라흐시 공작이 속삭였다. 그녀는 루시펠라가 미안해서 짓는 표정을 걱정해서 짓는다고 착각한 듯했다.

“여태껏 잘해왔어요. 잘할 거고요.”

루시펠라는 마음속에 씁쓸함을 꾹 눌러 감추었다.

그녀가 자신의 세력을 구성한 것도 알고 있다. 다른 이들이 그녀를 무시하면서 인정하는 것도.

분명 그녀는 승리할 것이다.

인사를 마친 루시펠라가 마차에 오르기 바로 전이었다.

“아이딘 영애!”

엘리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제드의 눈치를 보았다. 일단 보기에 제드는 아무런 동요가 없어 보였다. 엘리언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 경험은 아무래도 공작 각하를 따라가진 못할 것 같아요.”

그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가 나이를 먹으면 그만큼 노련해진다는 걸 깨달았어요!”

“…….”

“저는 젊고 잘생겼고! 그때쯤엔 경험도 많을 테니 분명히 영애께서 만족할 만한 사람이 될 거예요.”

“…….”

“그때 봬요. 안녕, 내 사랑!”

엘리언이 그녀의 손등을 끌어 입을 쪽 맞추더니 쪼르르 도망갔다.

라흐시 공작이 기함하는 표정을 지었다. 루시펠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슬쩍 제드를 보니, 그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어린애한테 일일이 질투하는 것도 우습긴 했다.

“가지.”

“응.”

제드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마차에 태우고, 자신도 마차에 올라탔다.

“응? 오늘은 왜 마차를 타는 거야?”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는 못마땅한 듯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불쾌함에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방금 엘리언의 행동에 기분이 상한 건가?

“참 힘들군.”

“뭐가?”

“단둘이 있기 말이야. 이렇게 사람 없는 곳에서 단둘이 얼굴을 마주 보는 게 얼마 만인 줄 알고는 있나?”

루시펠라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이곳에서 제드와 싸웠을 때부터니까, 약 일주일 정도는 된 것 같았다.

“일주일?”

“그걸 말하는 게 아닌 걸 알 텐데.”

“그래, 상당히 오랜만이네.”

루시펠라의 태평한 말에 제드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제드도 언제나 바빴잖아? 그리고 다녀와선 항상 피곤해했고. 나랑 대화하는 것도 힘들어할 것 같아 그랬어.”

제드는 기사들을 무장시키고 일부러 공작과 함께 도시를 활보하고 다녔다. 그것은 얼샤 부흥 세력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여름 햇살은 뜨거웠고, 제드가 입은 제복은 두꺼웠으며 얀스가르의 위엄을 보여야 해서 한 점의 흐트러짐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아무리 제드라도 성에 들어오면 기진맥진까진 아니지만 피곤한 상태였고, 루시펠라는 굳이 그를 찾아가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렇게 피곤한 때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나 짜증 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드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두 눈에는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참 지나치게 배려해 주는군. 정말 눈물겨울 정도야.”

제드가 툴툴거렸다. 이상하게도 루시펠라는 그 얼굴이 귀여워 보였다.

그는 루시펠라의 입가에 서린 미소를 보고도 아직도 더 남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참으로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라흐시 공작과 꽤나 사이가 좋더군. 얀스가르에서 내가 인기가 좋았다는 건 순 거짓말임을 저들도 알아야 할 텐데. 내가 그대보다 한참은 못 할 것 같거든.”

“그래?”

“시간이 나서 찾아보면 항상 라흐시 공작과 같이 있더군. 누가 보면 그대의 연인이 내가 아니라 라흐시 공작인 줄 알겠어.”

“그것도 나쁘진 않네.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그녀가 해맑게 웃자 제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않나?”

“무슨 말인지는 아는데, 이렇게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제드는 그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참으로 얄미운 말이다. 그럼에도 저 얼굴에 대고 화를 낼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제드는 또다시 루시펠라에게 품은 불합리한 감정에 대해 고찰했다.

“라흐시 공작, 참 대단한 사람 같아. 여자 몸으로 작위를 물려받고 그걸 지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루시펠라의 입에서 다시 라흐시 공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제드는 그 화제 전환이 못마땅했으나, 이곳을 떠나는 루시펠라가 상당히 서운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맞춰주었다.

“숙부가 대단히 탐욕스러운 사람인 것 같더군.”

“알고 있었어?”

“몇 번이고 개인적으로 나를 만나러 찾아왔으니까.”

“엘리언이 해맑아서 다행이야.”

“일부러 철없는 척하는 거겠지. 영악한 녀석.”

제드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

제드는 대답하지 않고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꼬맹이 놈, 노는 걸 좋아하는 척하는 걸 보면 영락없이 이오지프와 판박이였다.

물론, 이오지프는 황제가 되기 위해 몸을 숙였던 것이고 엘리언은 자신의 아버지가 욕심을 그만 품길 바라며 멍청한 척하는 것이 좀 달랐다.

그러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루시펠라에게 접근하려는 것이, 새싹부터 남달랐다. 어쩌면 이오지프보다 더 악질일지도 몰랐다.

다만 엘리언이 간과했던 것은, 루시펠라는 그에게 심각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접근을 그저 그런 만남 중 하나로 치부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샤와 얀스가르는 쌍둥이 형제가 동시에 세운 나라잖아? 왜 상속법이 다른 거야? 쓰는 언어도, 풍습도 대부분 다 비슷한데.”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면 얀스가르도 여성 상속이 불가능하다는 법은 없어. 다만 신전에서는 인정하지만 황실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뿐이야. 건국 시 얼마 되지 않아 여성 상속인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역사가 있거든.”

“문제를 일으켰다고? 무슨 문제?”

“영원한 아름다움을 위해 영지민의 피로 목욕을 했다나.”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으, 미쳤구나.”

“제정신은 아니었지.”

“그런데 그게 여자가 상속을 못 받을 이유가 되나?”

“그러게 말이야. 멍청하기론 훨씬 더 멍청한 남자들이 더 많은데 말이지.”

루시펠라는 제드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왜?”

“아니, 아무것도.”

제드가 뭔지 말해보라며 루시펠라를 쳐다봤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잖아.”

“그런가?”

그 말에 어느새 못마땅한 감정이 풀렸는지 제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성별을 가지고 판단하기엔 너무 얼간이들을 많이 봐서 그래. 전쟁터에 나가 봐, 상상 이상으로 멍청한 놈이 많아.”

루시펠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에 그 이상 동의할 수 없었다. 얼샤에 있었을 때도 그런 놈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그러고 보니 그런 놈들도 다 남자였다.

“그게 그렇게 웃긴 말이야?”

제드가 웃음기 어린 말로 말했다. 그는 이 순간이 참 꿈만 같았다.

마차의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루시펠라를 비추었고, 그녀는 그의 말이 대단한 농담이라도 된 것처럼 웃었다.

“루시.”

“응?”

자신도 모르게 그는 루시펠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손을 뻗어 루시펠라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루시펠라는 제드가 자신의 손을 매만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드 역시 그녀의 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약혼이 결정될 때 약혼반지를 제작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가 계속 끼워져 있었을 텐데.

괜한 후회가 들어 제드는 엄지손가락으로 루시펠라의 손가락을 쓸었다.

루시펠라가 반지를 끼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자신 역시 반지를 끼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았다.

결혼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봐야지. 그는 루시펠라의 반응에 대해 생각하다가, 결혼이 루시펠라에게 결심하기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다.

우선, 성이 바뀌고 거처를 옮겨야 한다. 삶이 뒤바뀌는 것인데,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될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다시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도 그를 바라보았다.

따스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행복함이 물씬 가슴에 피어올랐다.

그녀와 함께하는 삶은 언제나 즐거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루시펠라를 더욱 웃게 하고 싶었다.

“루시, 알고 있어? 다음 행선지 말이야.”

“어딘데?”

루시펠라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드가 자신의 손을 가지고 노는 데 재미가 들린 건지 계속 만지작거리자 간지러웠던 탓이다.

“영애 어머니가 있었던 곳이야. 아주 작은 도시지. 도시라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규모라더군.”

벌써 거기에 왔나.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제드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시펠라가 생각보다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아니, 아무것도.”

제드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가 살았던 곳이기에 얼샤에 왔다고 하지 않았나? 어머니가 태어났던 고향에 가는데 왜 감흥이 없어 보이지? 이번에 따라온 목적이 아닌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자 제드는 당황했다.

“별로 기쁘지 않은 건가?”

제드의 물음에 루시펠라가 바로 대답했다.

“아니, 기뻐.”

별로 기쁘지 않은 것 같은데. 제드의 눈이 루시펠라를 관찰했다. 그녀는 무언가 숨기는 것 같았다.

“빨리 가봤으면 좋겠다. 어떤 곳인지 궁금해.”

루시펠라가 환하게 미소를 짓자, 제드는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했던 건가 생각하며 이내 그 생각을 버렸다.

***

그녀의 어머니가 나고 자랐다는 부르그는 그녀가 그동안 돌아봤던 도시보다 가장 규모가 작았다. 거대한 마을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도시의 구성원 대부분이 구경 나왔다.

“저 마차는 누구여?”

“아가씨래.”

“뭔 아가씨?”

“이 도시 아가씨래. 여기 나으리는 여길 관리하는 사람이고, 진짜 나으리는 얀스가르에 있다는구먼.”

“저어기 앞에 있는 훤칠한 남자는 누군디?”

“아가씨 약혼자래.”

심지어 이들은 그런 수군거림이 마차 안에 있는 루시펠라에게 들린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들리는데 말을 타고 기사들의 선두에 선 제드는 더 잘 들리겠지.

“잘 어울리는구만.”

“얼굴도 안 봤는데 그걸 어찌 안다냐.”

“마차만 보면 잘 알지. 마차가 이쁜데 아가씨도 이쁘겄제.”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여?”

그 대화를 들은 루시펠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화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그녀에게 이 방언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살았던 곳은 그리 크지 않은 저택이었다.

수도의 아이딘 백작가만 한 저택. 작은 크기는 아니었지만 보통 영주가 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노부부가 나와 인사했다.

“저는 이곳의 관리를 맡고 있는 알토라고 합니다. 여기 이 사람은 쟈넷이고요.”

알토, 쟈넷. 루시펠라는 이름을 되뇌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던 노부인이 루시펠라를 응시하자 루시펠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이가 지긋한 노부인은 그녀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아가씨와 이렇게 똑 닮았다니. 아이고.”

그녀가 흐느끼자 알토가 쟈넷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이들 사이에 왠지 모를 서글픔이 번져 나갔다.

루시펠라는 그 서글픔이 불편했다. 이것은 루시펠라의 것이지 에스텔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정신을 차린 알토의 말에 루시펠라는 제드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백작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루아나 아가씨가 살았을 적 모습대로 저택을 다시 꾸몄으나, 여의치 않더군요.”

알토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딘 백작께서 이 저택을 다시 꾸몄다는 거라면 이 저택은 지금 이 모습이 아니었다 말인가?”

제드의 물음에 알토가 대답했다.

“네, 루아나 아가씨께서 얀스가르에 가시고, 저희를 포함한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나 이곳은 사실상 빈집이 되었지요. 아무도 관리해 주지 않은 집이라 백작님이 부르셔서 다시 돌아왔을 땐 지금 이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화병, 액자 등은 아이딘 백작가에 있는 것처럼 고가의 가구들은 아니었지만,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그녀는 루시펠라에게 말을 걸었다.

보고 있니? 네가 이걸 보고 기뻐했으면 좋겠어.

그녀는 자신 속 루시펠라가 이것을 기억하길 바라며 최대한 세심하게 저택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알토의 안내를 따르던 루시펠라는 벽 위에 걸린 초상화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한 소녀의 초상화였다.

“알아보시는군요.”

쟈넷이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제드가 그 초상화를 보며 루시펠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의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푸른색이었으며, 그녀의 손에는 수국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루시펠라의 얼굴과 똑 닮았다.

“루아나 아가씨예요. 아가씨의 어머니시죠.”

발그레한 복숭앗빛 뺨이 사랑스러웠다. 새파란 그녀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열 살 때 모습이에요. 저때 아가씨가 얼마나 말괄량이였는지…….”

쟈넷이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많이 닮았군.”

제드가 루시펠라와 초상화 속의 소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다고 느꼈다.

제드가 슬며시 루시펠라의 손을 잡았다. 그에 제드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를 안타까운 빛이 담겨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루시펠라는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신 제드의 손을 꾹 잡을 뿐이었다.

“아이딘 백작께서도 한참을 여기에 서 계셨어요.”

“…….”

아이딘 백작. 그는 어떤 감정으로 저 초상화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기억 속에도 죽어가던 루아나의 절규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비참하게 죽은 아내의 모습과 달리, 행복해 보이는 이 모습은 그에게 어떻게 다가갔을까?

그때, 루시펠라의 시선이 그 왼쪽에 있는 초상화로 향했다.

“아가씨의 외조부 되시는 분입니다.”

백발이 성성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호박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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