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한여름 밤의 춤
2018.03.12.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꼈다. 얀스가르에서도 주목받는 편이었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개를 돌려 제드를 바라보자 그 역시도 주목받고 있었다.
그도 자신도 얀스가르인이라서 그런 것일까. 자신과 제드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보며, 루시펠라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까부터 제드는 루시펠라와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고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아직도 엘리언의 말이 기분이 나쁜 걸까? 그러다 루시펠라는 아직도 제드가 자신에게 서운해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이 자세가 부담스러워졌다. 그녀는 제드의 팔 위에 손을 올린 채 서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슬며시 그와 팔짱을 풀자 그가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시펠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자세는 불편해서.”
“…….”
“나 돌아보고 올게.”
아까부터 다가오는 이들은 모두 남자였다. 항상 그들은 제드와 인사를 나누다가 루시펠라를 관찰하듯 훑어보았고,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냈다.
루시펠라는 그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초면에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상하게 불쾌했다.
‘아름다움도 사람이 가진 장점 중 하나니까 칭찬해 주는 거야.’
루시펠라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구경하고 온다는 말에 제드는 루시펠라를 쳐다볼 뿐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느 파티와 마찬가지로 음식은 먹음직스러웠으며, 참석한 사람들 역시 얀스가르와 다를 바 없이 남자와 여자의 무리가 나뉘어 각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라?’
라흐시 공작을 본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
‘왜 그런 거지?’
루시펠라는 남자들이 모인 쪽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녀의 숙부가 그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다르게 그녀는 어딘지 외로워 보였다.
라흐시 공작과 이야기하는 이들은 그녀의 수하나 인사를 올리러 온 사람이 전부였고, 이내 용건이 끝나면 전부 다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어머나, 이게 얀스가르식 드레스로군요.”
루시펠라는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얼샤의 레이디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루시펠라는 사교적인 미소 지었다.
얼샤의 레이디들은 서로 자신의 가문을 소개했는데, 그녀가 이름을 들어봤던 가문도 있고, 모르는 가문도 많았다.
그녀들은 루시펠라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지닌 것인지 그녀의 드레스를 계속 칭찬했다.
“너무 예뻐요.”
“얀스가르식 드레스는 역시 세련되었네요. 주름이 좀 더 우아하게 잡힌 것 같아요.”
언제부터 얀스가르 문화가 얼샤에서 더 세련되고 진보된 것으로 받아들여진 걸까.
루시펠라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라흐시 공작이 누군가를 찾는 듯 루시펠라가 있는 쪽을 지나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루시펠라에게서 라흐시 공작 쪽으로 향했다.
무리 안에 있던 나이 든 귀부인 한 명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이곳에서까지 바지를 입고 나오다니, 공작은 여전히 특이하군요.”
“작위를 물려받은 모든 여자가 저런 차림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참, 특이한 취향이셔.”
여자들 사이에 묘한 동의의 시선이 오갔다.
루시펠라는 라흐시 공작이 왜 이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들은 라흐시 공작이 소위 말하는 ‘남성복’을 입고 있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우리 공작 각하께선 참 특이하신 분이시죠? 영애께서도 불편하셨을 거예요. 저희 저택은 그런 면에서 불편함이 없답니다.”
루시펠라는 어렵지 않게 이들과 라흐시 공작의 사이를 짐작했다. 라흐시 공작은 이들에게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에스텔이 그랬던 것처럼.
물론, 그녀가 에스텔이었을 때도 여자들 사이에 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녀에게 이들은 따분하고,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불완전한 존재였으니까.
더구나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우아를 떠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던 적 또한 많았다.
게다가 에스텔은 검술과 칼리드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쉽게 남자들 사회에 녹아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라흐시 공작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에스텔과 그녀의 차이였다.
에스텔은 무척이나 특별하고 희귀한 경우였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그녀는 같은 여자들을 보호해 줄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답답하며 때로는 한심한 존재로 여기고는 했다.
루시펠라는 새삼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불편함 따윈 없답니다.”
루시펠라가 부드럽게 대답하자 이들이 재차 말했다.
“여기서는 솔직하셔도 됩니다.”
“맞아요.”
“저는 정말 불편하지 않았답니다. 그냥, 옷을 다르게 입은 분이시잖아요. 그런 분이 관리하는 성이 대체 왜 불편하게 되는 거죠?”
루시펠라가 무례하다시피 말한 건, 어차피 이들은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표정이 굳은 걸 눈치챘지만 루시펠라는 무시한 채로 라흐시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 존경스럽네요. 레이디가 드레스를 벗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여자 무리 중 몇 명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라흐시 공작의 편이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나 보다.
“그냥 좀 다른 종류의 옷을 입은 것뿐이에요. 생각하면 특이한 것도 아니에요. 그렇죠?”
루시펠라의 말에 귀부인과 레이디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귀부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도 남자들이 좋아하진 않을 거예요.”
루시펠라는 그 말에 화가 나지도, 그 말을 한심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이들이 원래 그렇게 살아왔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과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건 별개니까요.”
그 말이 몇몇 귀부인의 심기를 상하게 했는지 그중 한 명이 물었다.
“하인트 공작께서는 어떤가요?”
“네?”
“만약, 영애가 그런 옷을 입으면 싫어하지 않을까요?”
루시펠라는 그녀가 남자처럼 옷을 입을 때를 떠올려 봤다.
에스텔이었을 때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별생각이 없었지만, 진짜로 그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승마복을 입을 때도 별말이 없었는데.
“궁금하긴 하지만, 싫어한다고 해서 뭐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네요.”
“문제될 것 같지 않다니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제 옷차림에 대해 강제할 수는 없잖아요.”
루시펠라의 말에 그녀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편 될 사람이 싫어한다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어디 있냐는 표정에 그녀는 더 설명하길 포기하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라흐시 공작에게 가봐야겠군요. 좋은 밤 보내세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곧장 라흐시 공작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혼자 서서 연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연회를 여는 주인임에도 그녀는 다른 이들과 동떨어져 보였다.
그녀는 루시펠라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딱히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연회를 열기 전 이야기를 나누었고,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능숙하게 루시펠라에게 말을 건넸다.
“연회는 어떤가요? 얀스가르에 비해 소박하지 않나요?”
“소박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초라하진 않아요.”
“참 솔직하시네요.”
“비하하거나 나쁘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루시펠라의 말에 라흐시 공작이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왜 제게 오신 거예요? 영애라면 다른 사람들이 대화하고 싶어 안달했을 텐데, 혼자 있는 제가 외로워 보였나요?”
참으로 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 그에 루시펠라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외로우신 건가요?”
“아니요.”
라흐시 공작이 말을 이었다.
“이곳의 공작은 저고, 이 연회를 개최한 것도 저이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혼자 있죠. 새삼스러울 건 없어요.”
당연하게도, 그녀는 기가 죽거나 침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루시펠라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각하.”
“물어보세요.”
“저번에 우리가 나눴던 대화 기억하시나요? 에스텔에 대해 이야기했잖아요.”
“그랬지요?”
“에스텔을 싫어하신다고 해놓고서, 왜 이렇게 에스텔처럼 남자 옷을 입고 다니는 건가요?”
그 말에 라흐시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루시펠라로서는 엄청난 무례를 저지르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스텔로서는 궁금한 일이었다.
그땐 에스텔의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이전 에른 숲에서 제드는 그녀가 생각하지 못했던 걸 말했었다.
제드는 왜 라흐시 공작이 에스텔을 싫어하면서도 그녀를 따라 하는지를 궁금해했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녀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녀는 에스텔을 따라 한 것일까?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사과할게요.”
라흐시 공작은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더니, 그녀가 비꼬려는 의도가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성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에스텔 때문에. 아버지는 얀스가르를 지원했고, 그녀는 그걸 알고 아버지와 아버지가 모시던 공작이 있던 도시를 쓸어버렸죠.”
“…….”
“당시 어머니는 절 데리고 도망쳤고,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논공행상이 이뤄져 라흐시 가는 황제 폐하께 공작 위를 받을 수 있었지요.”
“…….”
“그때 당시 전 겨우 성년이었어요. 따라서 제가 공작 위를 이을 자격이 있는지, 이 땅을 다스릴 자격이 있는지 수없이 검증받아야 했지요. 저는 결코 제 아버지가 물려준 이 도시와 이 작위를 잃어버릴 생각은 없었어요.”
“…….”
“참 쉽지 않았어요.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곳에서 레이디처럼 점잖고도 불편한 치마를 입고, 차를 마시거나 수를 놓으며 사람들이 요구하는 공작이 되는 건 불가능했어요. 자칫하다간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었지요.”
라흐시 공작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바라보았다.
“그때 에스텔이 생각났죠. 제가 동경했던 기사이자, 제가 가장 미워했던 기사 말이에요.”
“…….”
“그녀를 증오하지만, 저는 그녀처럼 남자들 사회에 끼어들기 위해 바지를 입었어요.”
루시펠라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 공작 위를 물려받아, 자신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녀를 가장 이해하는 건 아마 저일 거예요. 바지를 입으니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놀랍게도 넓어지더군요. 치장에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말을 탈 때도 불편하지 않으며, 언제나 몸가짐을 조심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 게 얼마나 커다란 건지 몰랐어요.”
루시펠라는 라흐시 공작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시종에게서 잔을 받아 들더니 입에 머금었다.
“남자와 싸우기 위해서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되어야 해요. 레이디로서 교육받았던 나 자신은 되도록 드러내지 않고, 이곳 세상에 뛰어들어야 하죠. 그러나 완벽히 동화될 수는 없었어요. 전 여자니까요.”
라흐시 공작은 자신의 숙부가 있는 쪽을 보았다. 루시펠라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 남자를 보았다.
작위가 없는 저 사람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이곳에 녹아들고, 작위를 가진 라흐시 공작이 끼어들지 못하는 삶.
생각해 보면, 얼샤에서도 여성이 작위를 가질 수는 있어도 그녀들은 이렇게 라흐시 공작처럼 나서지 않았다.
그녀들은 되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가 마땅한 남성 후계자가 생기면 곧바로 작위를 물려주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루시펠라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 사람을 저렇게 살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는 기사였고, 나라를 배반했던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것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삶을 살게 한 것에 책임은 있었다. 그녀가 에스텔을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루시펠라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본 라흐시 공작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실 저도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봤거든요.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한 거예요. 지나치게 솔직해 부담스러웠나요?”
루시펠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리고 전 각하의 말에 동의해요.”
“동의한다고요?”
“저는 참 각하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살아온 각하의 모습도 멋있고, 그렇게 살기 위해 주저 없이 모습을 바꾼 것도 멋있고요.”
“…….”
“이곳에 오면서 도시를 봤는데, 얀스가르의 그린힐 못지않게 발달한 도시 같았어요. 각하는 충분히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더욱 존경스럽고요. 이렇게 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해 오셨던 거잖아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라흐시 공작은 눈을 크게 뜨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의례적으로 하는 말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진심이었고, 라흐시 공작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니,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이네요.”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영애가 이런 말을 한다니, 참 의외고요. 저는 영애가 좀 재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말에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같은 생각이네요. 저도 각하가 좀, 재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음악의 박자가 바뀌며 흥겨운 왈츠가 울려 퍼졌다.
“춤을 출 시간이네요.”
“그러게요.”
“본래대로라면 숙부와 춤을 춰야 하는데 그건 내키지 않고, 어쩐다…….”
라흐시 공작이 중얼거리다가 루시펠라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와 같이 춤을 출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그녀가 손을 내밀자 루시펠라가 그 손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면 하인트 공작께서 서운해하실까요?”
“그럴 것 같긴 하지만…… 이런 귀한 기회를 제게 주시면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라흐시 공작의 말에 루시펠라가 그녀의 내민 손을 잡았다.
라흐시 공작과 루시펠라가 손을 잡고 플로어로 나가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라흐시 공작이 속삭였다.
“남자 춤은 처음 춰보는 거라 실수할 수도 있어요. 사실 긴장되네요.”
루시펠라가 그녀의 얼굴을 보니, 얼굴에 긴장이 한 가득이었다.
“그럼 바꿔서 할래요?”
루시펠라의 제안에 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
“남자 춤을 배웠나요?”
“배운 건 아니지만, 많이 봐서 따라 할 수 있어요. 재미있지 않나요? 드레스를 입은 제가 남자 춤을 추고, 바지를 입은 각하가 여자 춤을 추다니 말이에요.”
루시펠라의 말에 라흐시 공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펠라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었고, 그녀가 루시펠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뀐 걸 깨닫자 사람들이 더 크게 수군거렸다. 그러나 루시펠라도 라흐시 공작도 그에 신경 쓰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능숙하게 그녀를 리드했고, 라흐시 공작 역시도 잘 따라왔다.
춤은 만족스럽게 끝났고, 그들은 서로에게 미소를 보냈다.
“유쾌한 춤이었어요.”
“저도요. 영애는 다음 춤은 꼭 하인트 공작과 추도록 하세요.”
라흐시 공작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루시펠라도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루시펠라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알 수 없이 답답한 무언가에 한 방 날린 것 같았다. 그녀가 기묘한 해방감에 기쁨을 느낄 때였다.
“기분이 상당히 좋은가 보군.”
제드의 목소리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들었다. 제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영애는 가만두고 볼 수가 없어. 여자와 춤이라니.”
그는 낮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루시펠라가 물었다.
“이제 화는 다 풀린 거야?”
“영애야말로 나와 이야기 나눌 마음이 든 거지?”
“응?”
“어?”
동시에 말을 내뱉은 제드와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자신이 화가 난 거라고 생각했나? 일방적으로 서운함을 토로하고 간 것은 이 사람이 아니었나?
“나는 영애가 나와 별로 이야기를 안 해서, 영애가 내게 화가 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아니, 먼저 화내고 간 건 그쪽인데 내가 왜 이야기를 해.”
루시펠라의 의아한 표정을 보자 제드는 아, 하고 납득했다.
생각해 보니 루시펠라에게 화를 내고 마차 밖으로 나갔던 건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찔리는 게 생각보다 많았기에 그 부분을 가볍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청혼도 하지 않고 결혼을 생각 안 한다며 멋대로 화를 냈다고 루시펠라가 화가 나 있는 줄 알았다. 게다가 이 연회에 억지로 참석하게 된 것도 그렇고.
게다가 루시펠라를 찾다가 우연히 만난 라흐시 공작과 같이 있는 모습을 그녀가 보았으니, 그는 루시펠라가 화가 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다시 음악이 시작되었다.
제드는 음악 소리를 듣다가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민 뒤 루시펠라의 귀에 속삭였다.
“영애의 두 번째 춤이라니 자존심이 상하지만, 나와 춤추지.”
루시펠라가 그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광입니다, 내 약혼자님.”
제드가 피식 웃으며 루시펠라의 손을 끌고 플로어로 나갔다.
루시펠라가 다시 플로어에 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그 둘에게로 향했다.
손과 손을 잡고, 그의 손이 허리를 받치고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그러곤 그들은 서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음악 소리에 발을 움직이며 루시펠라가 말했다.
“이상하네. 꼭 첫 춤을 추는 것 같아.”
“그럴 만도 해. 영애는 얀스가르에서 춤이 아니라 내 발을 밟으려고 그리도 열심이었으니까.”
“그, 그랬었나?”
루시펠라가 눈을 굴렸다.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래서 발을 밟았나, 안 밟았나. 루시펠라가 생각에 빠질 때였다. 곡이 멈추었고, 루시펠라가 그의 발을 밟고야 말았다.
그녀가 깜짝 놀라 얼른 발을 떼었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달라졌군.”
“뭐가?”
“영애 말이야. 내 발을 밟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발을 밟고 미안해서 피하는 거라니,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아니, 왜 자꾸 옛날 일을 말할까.
루시펠라가 따지려고 하는 그때, 제드가 루시펠라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루시펠라의 입술에 제드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이렇게 입을 맞출 수도 있고 말이야.”
“정말.”
루시펠라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어려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루시펠라는 자신의 연인과 두 눈을 마주하며 춤을 추었다.
오가는 시선 속에 충만한 애정, 그 속에서 그녀는 행복을 느꼈다.
한참 후, 곡이 끝나자 루시펠라는 제드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다음 곡은 좀 쉴까 생각하던 그때, 음악이 다시 울리며 제드가 몸을 움직였다.
“제드, 나 쉬고 싶은데.”
“안 돼, 오늘은 나와 함께해.”
“어?”
“두 번째가 된 대신에 나와 계속 함께해 달라는 말이야.”
루시펠라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그녀는 왜 제드가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리언이 그녀에게 춤을 신청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드의 이런 유치한 행동에도 루시펠라가 같이 춤을 췄던 이유는,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춤을 추는 시간 동안 그들은 오로지 그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나 오랜만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이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하고 싶다.
뱅글뱅글, 제드의 손에 의해 몸을 돌리자 치맛자락이 우아하게 부풀어 올랐다. 다시 그의 품에 안기며, 루시펠라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환한 샹들리에 아래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태양처럼 환하게 빛났다.
의심할 수 없는 애정과 기쁨을 담고 있는 눈을 마주하며 루시펠라 역시 미소를 지었다.
너무도 행복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쩌면 이날의 기억은 평생 갈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