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새로운 것과 익숙한 것
2018.03.08.
라흐시 공작의 도시는 다른 얼샤의 도시보다 부유해 보였다.
마차의 창 너머로 도시를 구경했던 루시펠라는 얼샤의 다른 곳보다 더 발전된 모습에 내심 감탄했다.
라흐시 공작은 확실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잠시 후 공작 성에 도착한 것인지 마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제드가 루시펠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난 거 아닌가?’
분명 서운해하는 것 같았는데, 일단 예의는 차려주겠다 이건가?
루시펠라는 그 손을 잡고 내렸다. 라흐시 공작이 다가와 환영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공작, 그리고 영애.”
여전히 그녀는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얼굴은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헤어졌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라흐시 공작은 제드에게 인사를 하더니 루시펠라에게 다가와 그녀를 관찰하듯 바라보며 물었다.
“그때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괜찮아진 건가요?”
“네,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에요, 저는 절 만나고 갑자기 그렇게 아프시기에 제가 무슨 결례라도 범했나 생각했네요.”
“설마, 그럴 리가요.”
라흐시 공작은 저번 만남 때, 그 대화 이후로 갑자기 루시펠라의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걸 꼬집었다. 그녀가 연기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루시펠라가 그녀와의 대화 이후 충격에 빠져 있는 동안 제드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추궁했을 테니 기분이 나빴을 만도 했다.
“라흐시 공자는 자리를 비운 건가?”
그 대화를 지켜보던 제드가 물었다. 보아하니 그도 눈치채고 적당히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라흐시 공작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또 놀러 간 모양이에요. 아마 엘리언과 함께 놀러 갔겠죠.”
“엘리언?”
“제 사촌이에요. 대체 어디 간 건지, 원.”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떴다.
가족들 때문에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녀가 인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재클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라흐시 공작의 뒤에서 들렸다. 그녀의 뒤에서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걸어 나왔다.
루시펠라는 약간 그의 걸음이 거들먹거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오셨군요, 숙부.”
“손님이 오셨으면 내게도 인사를 시켜줘야지.”
“만찬 때 소개해 드릴 생각이었어요.”
중년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제드에게 인사를 건넸다.
“타론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리히트 라흐시라고 합니다.”
“반갑군.”
제드가 짤막하게 인사했다.
그는 제드에게 더 말을 붙이려다가 제드가 더 말을 이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루시펠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의 레이디는 너무도 아름다우시군요”
갑자기 자신의 외모를 칭찬하는 리히트를 보며 루시펠라는 그를 관찰했다.
“참 레이디다운 기품과 미모를 가지고 계시군요. 타론에서 이런 레이디를 보는 건 아무래도 힘들지요.”
순수한 칭찬인가. 루시펠라는 라흐시 공작과 남자 뒤에 서 있는 가신들의 표정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지금 라흐시 공작이 레이디답지 못하다는 말이겠지?
숙부인데도 이런 자리에서 공작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대충 감이 잡혔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 살짝 고민하다가 말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라흐시 경. 아 참, 공작 각하. 우리 저번에 말을 타자고 했지요? 제가 머무는 동안 같이 승마를 할 수 있을까요?”
갑작스럽게 물어오는 말에 라흐시 공작이 눈을 크게 뜨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
“말이라면 얼마든지 준비되었습니다. 다만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괜찮아요. 마차 여행만 했더니 몸이 굳은 것 같아요. 제드도 같이 참여하실 거죠?”
루시펠라가 그를 바라보며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제드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래도 영애와 내가 같이 말을 타는 건 피하고 싶군. 영애의 기마 실력은 너무 뛰어나니 내가 질 것 같거든.”
그에 리히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눈치를 힐끔 보며 제드가 약혼자 역할은 해줄 생각이라는 걸 깨닫고 안도했다. 아주 많이 화가 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이걸 어떻게 풀지?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
에스텔은 고개를 돌려 연회장 쪽을 바라보았다. 연회장 안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참으로 흥겨웠다. 마치 불행 따윈 없을 것 같은 꿈과 같은 행복한 풍경.
에스텔은 그것을 빤히 쳐다보다가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참고로 그녀는 연회장 바깥의 복도에서 순찰을 하고 있었다.
“왜?”
옆에 서 있던 칼리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은 이렇게 열심히 근무하는데, 참 팔자도 좋다 싶어서.”
“무슨 노인네 같은 소리야.”
칼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잖아, 거의 매일 먹고 마시고 춤추고. 그러고 보니 너는 왜 안 갔어?”
에스텔의 말에 칼리드가 대답 대신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에스텔이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칼리드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저렇게 사는 게 좋아 보여?”
“나쁘게 보이지는 않아.”
“저렇게 살고 싶어, 에스텔?”
“응? 저렇게 사는 게 좋아 보인다는 게 저렇게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니지 않아?”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칼리드가 말했다.
“너도 저기 다른 레이디들처럼 예쁜 드레스를 입고, 세상의 모든 불행을 모르는 것처럼 살수도 있어. 너라고 불가능한 게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지만 칼리드가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너도 레이디가 될 수 있다는 거야.”
“내가?”
“그래, 네가.”
꽤나 진지한 표정에 에스텔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칼리드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가라앉은 그의 눈은 분명 더없이 진지했기에 때로는 간절함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푸하하! 내가 드레스를?!”
그러나 그녀는 그 감정을 파고드는 것보다 그것을 농담으로 가볍게 넘겨 버렸다.
“기사단 녀석들이 그걸 보고 기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드레스를 입은 에스텔의 모습. 바지와 검을 고집하던 에스텔이 드레스 입는다는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진지한 모양이었다.
“너도 입으면 잘 어울릴 거야. 넌 예쁘거든.”
“벌써 노안이라도 왔어? 아니면 공작 나으리께서 뭐가 부족해서 나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부를 할까.”
에스텔은 자기 자신의 외모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드는 가끔씩 저런 미친 말을 하고는 했다.
“그런 삶을 사는 건 단 한 번도 생각 안 했어.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런 치렁치렁한 옷 입고 달달 떨며 남자들에게 지켜지면서 ‘꺅∼ 살려줘요, 기사님!’이라고 말하는 역할은 내가 하기 싫어.”
“…….”
“난 지켜지는 역할보다 지키는 역할이 더 맞아.”
그 말에 칼리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좋겠다.”
그는 연회장을 다시 한 번 보더니 중얼거렸다.
“저런 곳에 네가 있는 것보다,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
연회는 도착한 바로 그다음 날에 열렸기에 루시펠라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준비를 해야 했다.
다행이라 할 점은 가져온 드레스가 한정되어 있어서 루시펠라가 드레스를 고르는 데 시간이 허비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짙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바다색처럼 짙은 사파이어 귀걸이를 찬 채 긴 검은 머리는 그대로 늘어뜨렸다.
거울을 본 루시펠라는 치맛자락을 살짝 쥐며 들어 올렸다. 그녀가 쥔 주름 모양대로 실크의 광택이 반짝거렸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보자,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은 확실히 이상했다. 언제나 에스텔인 그녀는 연회장을 지키는 쪽이었고,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여하는 쪽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런데 이젠 반대가 되었다.
자신이 얀스가르의 귀족이 되어 드레스를 입고 얼샤의 연회장에 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너도 입으면 잘 어울릴 거야. 넌 예쁘거든.”
루시펠라는 에스텔이었을 때 연회장을 같이 호위하는 도중 칼리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여기서 그 생각이 나서는. 그때 그 말을 하고 있던 칼리드는 진지해 보였다.
그 녀석,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아직도 칼리드와 얼샤에 대해 생각하면 그녀는 심란해서 견딜 수 없었다.
“준비 다 됐어요.”
로이자가 장갑을 건네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펠라가 문 쪽으로 다가가던 때였다.
“아가씨, 공작 각하를 기다리셔야…….”
“제드에게는 미리 가 있겠다고 전해줘. 조금 걷다가 가고 싶거든.”
루시펠라는 그때의 일로 제드가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인지했다. 분명 그녀가 기분이 가라앉아 있다면 그 원인을 알고 싶어 할 것이며, 알아낼 수 없다면 답답해하겠지.
그는 생각보다 섬세한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느끼는 답답함은 그들의 관계에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시펠라는 바깥으로 나가 여유를 가지고 성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성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사용인들은 모두 연회를 준비하러 갔는지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기에 루시펠라는 적막함을 즐길 수 있었다.
루시펠라는 돌바닥에 굽이 닿아 복도에 울려 퍼지는 맑은 소리를 즐기며 아주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한참을 걷던 그때,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돌아 나오더니 루시펠라 쪽으로 걸어왔다.
키가 큰 남자였다.
누구지?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들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그녀와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잘 차려입은 것으로 봐서 귀족이 분명했다. 얼핏 본 얼굴은 상당한 미남이었다.
관찰하던 루시펠라의 두 눈과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관찰하는 듯하더니 몽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여신의 현신을 보는 것인가…….”
나는 미친 사람을 보는 것인가.
루시펠라는 그 얼굴과 말을 보고 생각했다.
“누구신가요?”
루시펠라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남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말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저는 엘리언 라흐시입니다. 첫눈에 보고 반했습니다. 레이디의 존함을 알려주십시오!”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얀스가르에서는 제드가 있어서 그런 건지 그녀에 대한 소문 때문인지 이런 경우는 없었다.
첫눈에 반했다고 다짜고짜 이름을 알려달라니, 이런 경우가 진짜로 존재한단 말인가.
이름이 익숙한 걸 보니 남자는 라흐시 공작이 어제 말했던 그 사촌인 듯했다. 그에 대해 말하며 어쩐지 피곤한 표정을 짓던 라흐시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루시펠라 아이딘입니다.”
“아, 아이딘 영애라면 이번에 손님으로 오셨다는 그……!”
“네, 맞아요.”
“그렇군요!”
그는 웃으며 루시펠라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여, 여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제가 약혼자가 있어서, 이런 종류의 관심은 부담스럽네요.”
루시펠라가 그의 말을 딱 자르고 복도를 걸었다. 그에 엘리언이 그녀를 따라왔다.
“영애, 목소리가 아름다우십니다.”
루시펠라는 그 말을 무시한 채 계속 걷기만 했다. 저런 칭찬에 일일이 대꾸하면 더 달라붙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영애, 연회장은 그 방향이 아니라 저쪽인데요.”
루시펠라는 뒤를 돌아보더니 얼굴을 찌푸리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방향대로 걸었다. 괜히 짜증이 났다.
“어라! 제 말 듣고 계신다! 듣고 계신다!”
그 깐족거림에 루시펠라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영식, 자꾸 이렇게 행동하시면 제게 커다란 부담이 되며, 저를 불쾌하게 만들 뿐이에요.”
“제가 불쾌합니까? 저 잘생겼는데요.”
그 말은 맞았다. 그는 주홍색 머리카락과 파란 눈동자의 조화가 기가 막히게 완벽한 미남이었다.
루시펠라는 그 얼굴을 쳐다보다 남자의 얼굴이 좀 앳되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열일곱이요.”
열일곱. 한참 어린 애였다.
물론 루시펠라와 나이 차이가 세 살밖에 나진 않았지만, 에스텔로 살아왔던 그녀는 스물세 살이었고, 저 성년도 안 된 놈은 한참 꼬맹이였다.
“죄송한데, 제 약혼자도 그만큼 잘생겼거든요.”
루시펠라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연회장 쪽으로 향했다.
엘리언이 가르쳐 준 길이 맞았는지,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며 연회장으로 보이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이른 시간인지라 아직 바깥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때, 루시펠라는 반대쪽 모퉁이를 돌아온 제드를 발견했다. 제드와 라흐시 공작은 함께 있었다.
아니 왜, 저 둘이.
루시펠라는 미묘한, 아니, 노골적인 불쾌감을 꾹 참으며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 역시 루시펠라를 보자 당황해하는 듯하다가 뒤에 있는 남자의 존재를 알고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엘리언, 너 여기 있었구나!”
라흐시 공작이 소리쳤다.
“누나야말로,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오셨다면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레이디께 인사를 못 드렸잖아! 소중한 첫 만남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난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을 본 적이 없어. 저 하늘의 샛별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분이랄까.”
‘이 애가 진짜.’
루시펠라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표현이 너무 촌스러워서 귀를 틀어막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딘 영애께 무례는 범하지 마.”
“싫어. 첫눈에 반했단 말이야!”
“엘리언! 지금 여기 계시는 분이 영애의 약혼자야. 공작 앞에서 무슨 실례야!”
“오, 누나가 말하던 그 하인트 공작 각하가 여기 계신 분이셨구나! 안녕하세요.”
꾸벅.
그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린 소년다운 가벼운 태도였다.
제드는 그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엘리언의 인사보다 루시펠라에게 눈으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게 더 중요한 듯했다.
‘어떻게 되긴, 보다시피 이런 상황이지.’
루시펠라는 엘리언에게 눈짓하며 억울하다는 표현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라흐시 공작을 보며 다시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 역시도 똑같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억울한 사람이 눈으로 대화하고 있을 때, 라흐시 공작과 엘리언은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누나, 책 좀 봐라. 역사서도 로맨스 소설도, 약혼자가 있는 약혼녀를 사랑하는 경우는 아주 많았어! 이렇게 닫힌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단 말이야.”
“그리고 대부분 그런 사람은 여자의 약혼자에게 죽었지.”
“안 죽고 사랑의 도피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거든?”
“이제 처음 만난 사람과 무슨 사랑의 도피야!”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될 거야. 난 운명처럼 아이딘 영애에게 반했거든!”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엘리언은 그에 아주 자신만만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하인트 공작 각하께서는 스물일곱이라고 하셨지? 나는 열일곱이야. 무려 열 살 차이가 난다구.”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아이딘 영애와 내 나이 차이가 더 많을까, 아니면 하인트 공작 각하와 아이딘 영애의 나이 차가 많을까.”
“너? 너!”
무슨 말이지?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반면, 라흐시 공작은 말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젊고 어리니까, 영애는 내가 더 좋을 거야. 왜냐면 나는 이제 싹이 터서 한창 꽃피울 나이란 말이야. 비교가 안 된다고.”
라흐시 공작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펠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놀라웠다. 그 자신감의 근거로 삼은 게 나이라니.
물론 뭐, 사귈 사람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 좀 더 어린 사람이 좋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건 취향이니까.
하지만 루시펠라가 놀랐던 건 어떻게 저 말 하나로, 이렇게 연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분위기를 완벽하게 망쳐 버릴 수 있는지에 대한 순수한 놀람이었다.
엘리언의 비유를 들자면, 열 살이나 많은 제드는 시들어가는 남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루시펠라가 제드를 바라보니, 제드는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구라도 제드의 심기가 많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작, 제가 사과드립니다. 이 녀석이 보다시피 철이 매우 없습니다. 엘리언, 어서 너도 사과드려!”
라흐시 공작이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때렸다. 철썩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왜 때…… 죄송합니다아.”
제드는 열일곱이라는, 심지어 성년인 열여덟도 지나지 않는 나이라는 걸 듣고는 화를 내기도 뭐했다. 심지어 마지못해서 하긴 했지만 엘리언은 사과까지 했다.
“라흐시 영식.”
제드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드가 입꼬리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모르는군. 무조건 어린 게 좋은 것만은 아니야.”
그는 루시펠라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기분이 좀 나빴을 뿐이지, 그는 어른의 여유로움을 보여줄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그의 어른스러움에 감탄했다.
“노련함과 익숙함이 더 중요하지. 어설픔은 짜증을 유발하는 법이거든. 경은 내 약혼녀와 함께하기엔 세상을 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군.”
아니, 여유롭고 어른스럽다는 말은 취소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손을 아주 꽉 잡은 제드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 루시?”
제드가 갑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에 그녀가 움찔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아니라고 말하면 안 된다. 어리고 새로운 게 좋다고 말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만약,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그는 아주 크게 화가 날 것이다.
루시펠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제드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요.”
그러면서 루시펠라는 제드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새로운 거라고 좋은 건 아니었으니, 예를 들어 검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새 검보다는 함께 잡아온 검이 좋았다.
“일단 경험부터가 비교가 되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딱 맞잖아요.”
루시펠라가 무심결에 말하자 라흐시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경악하며 그녀와 제드를 번갈아 보았다. 제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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