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에스텔 슈페르트
2018.03.01.
루시펠라는 눈을 떴다.
아직도 졸음기가 가시지 않아 그녀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어제 너무 늦게 들어온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정확히는 몸을 일으킬 생각으로 몸을 틀었다.
“……!”
그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왜 이 남자가 지금 여기서 자고 있는 건가. 분명 어젯밤에 자신의 방으로 가지 않았던가?
루시펠라는 마음을 진정시킨 채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남자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누워 있는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제드였다. 그는 자신 쪽으로 몸을 튼 채 잠들어 있었다.
왠지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땐 옷을 벗고 있었지 아마.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당연하겠지만 옷은 제대로 입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술도 마시지 않았다.
정신없이 자는 제드를 보며 루시펠라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조금 더 움직이면 그는 금방 깨겠지.
분명 어제 자신을 찾느라 그도 피곤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베개에 몸을 기댄 채 옆으로 돌아누워 그의 얼굴을 보았다.
눈을 뜰 때는 언제나 특유의 날카로움이 존재했기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 사람 자는 모습은 아이처럼 유순해 보였다.
뭐, 생각해 보니 유순한 성격이긴 하네. 성격만 더러운 것 같지 해줄 건 다 해주니까.
제드를 아는 모든 이가 들었으면 경악할 소리를 하며 루시펠라는 계속해서 제드의 얼굴을 낱낱이 바라보았다.
때마침 희미한 아침 햇빛이 들어와 제드의 얼굴을 비췄다.
음영이 진 그 모습을 보며 루시펠라는 속으로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겼네. 성격도 나쁘지 않고, 얼굴까지 이렇게 괜찮고 검도 잘 쓰고, 다 가졌네.’
이런 인간도 존재한다는 게 좀 배가 아프지만. 루시펠라는 입을 쭉 내밀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웃었다.
그래도 이런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는 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비록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이는 에스텔이었고, 루시펠라와 그녀 사이의 그 간극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제드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에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런 것에서까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으로 떨어뜨릴 생각을 계속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루시펠라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제드의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그녀의 손이 제드의 뺨에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멈칫했다.
얼굴에 손대도 되려나. 갑자기 손대면 공격당하는 거 아니야?
에스텔만 해도 잘 때 갑자기 손을 대는 사람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손이 나갔다.
예전, 칼리드의 뺨을 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윽, 고백하고 바로 그다음 날에 연인에게 공격받아 나가떨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루시펠라가 아주 조심스럽게 뻗은 손을 거두려고 할 때 제드가 눈을 떴다.
그가 잠에서 깨자, 아이 같았던 얼굴은 사라지고 특유의 날카로운 얼굴이 드러났다.
깨자마자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고, 루시펠라는 당황했다. 눈만 깜빡이며 서로의 시선이 오갔다.
“…….”
“…….”
그녀는 자신의 손이 아직도 제드의 뺨 위에 애매하게 있다는 걸 알았다.
설마 자신이 뺨이라도 때리려는 걸로 오해한 건가.
사실, 그녀 역시도 잠에서 제대로 깨어난 건 아니기에 그녀의 생각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제드의 못마땅한 표정에 루시펠라가 슬며시 뻗은 손을 거둬들이려 했다.
그러나 제드가 손을 뻗어 루시펠라의 손목을 잡더니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두 눈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듯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만져도 돼.”
깨어 있었던 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제드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와서 보니 기분이 안 좋은 표정이 아니라 영락없이 어딘가가 불만스러운 뚱한 표정이었다.
그의 뺨에 살짝 닿은 손가락이 따스했다. 제드는 그녀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루시펠라는 어정쩡하게 그의 뺨에 얹었던 손을 제대로 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엄지가 그의 볼을 쓸자, 제드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풀고 눈을 감았다. 그에 날카로운 인상이 다시 느긋해졌다.
‘이건 뭐, 맹수를 길들이는 것도 아니고.’
루시펠라는 피식 웃으며 제드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다시 잠이 오는 모양인지 그는 아직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피곤해 보였지만 그 모습마저 잘생겼다.
왜 여기 온 거냐, 내가 자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 거냐 따지고 싶었지만, 그 얼굴에 그런 의문은 쏙 들어갔다.
‘그래, 얼굴이 이유지.’
그것보다 강력한 이유는 없다.
루시펠라는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행동이 싫지는 않았다.
“더 자도 돼.”
루시펠라가 말하자 제드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루시펠라의 허리를 꽉 껴안아 그녀를 품에 안았다. 순식간에 몸이 밀착되었다.
“자, 잠깐.”
제드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어 이마를 비볐다.
쇄골 부근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간지러워 몸을 살짝 틀자, 가만히 있으라는 듯 그가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그는 한참 동안 루시펠라를 껴안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한참 동안 그의 품에 안겨 꼼지락대었다.
한참 후 고개를 들었다. 그에 그녀의 쇄골에 그의 까슬한 입술이 살짝 스쳐 지나가 루시펠라가 몸을 움찔했다.
제드는 고개를 들고서도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루시펠라가 결국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실감이 나지 않는군.”
“뭐?”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무슨 말이냐는 듯 제드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어제 일이 꿈은 아닌지 내 착각은 아니었는지 자는 모습을 보는데도, 지금 이렇게 껴안고 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아.”
그런 이유로 여기에 들어왔다고?
루시펠라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불안감이 자신의 태도 때문이라는 것을 알자 그녀는 미안해졌다.
루시펠라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나랑 똑같은 감정인 게 맞지? 착각하는 게 아니지?”
다소 집요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것이 귀여웠다.
루시펠라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행동해도 그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루시펠라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결국 제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온기가 퍼졌다. 그러나 제드의 표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이전과 뭐가 달라진 거지?”
무슨 말이지?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자 제드가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제드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다시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시범이라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루시펠라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건 뭐랄까, 지나치게 낯간지러웠다. 이건 좀 빠르지 않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몇 번이고 제드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는 의식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드는 계속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다간 계속 기다릴 것 같았다.
그 부담스러움에 루시펠라는 눈을 굴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가 떼었다.
두 사람이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제드의 눈이 부드럽게 휘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 좋은 걸까? 물론, 자신 역시 좋긴 했다. 입을 맞추는 거라던가, 눈을 바라보는 거라던가, 지금 이렇게 그에게 안긴 거라던가.
그런데 제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보다 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이제 실감 나?”
루시펠라의 조심스럽게 물음에 제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그게 무슨 말이야. 루시펠라가 물어보려 할 때, 그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차차 실감이 나겠지.”
그 ‘앞으로 차차’라는 게 무슨 뜻인데.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그 의미심장한 말에 루시펠라는 괜히 오싹해졌다.
그때, 로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아침이에요.”
그에 제드가 움찔했다.
왜 움찔하지? 루시펠라가 의아해할 때 문이 열리고 로이자가 들어왔다.
루시펠라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를 직접 깨우러 온 듯했다.
로이자가 루시펠라의 침대로 다가오더니 제드가 있는 것을 보고 눈이 커졌다.
오해할 만도 한 것이 그녀와 그는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루시펠라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아, 아무 일도 없었어.”
루시펠라가 변명처럼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왜 자신이 지금 변명을 하는 것인지 생각했다.
로이자는 루시펠라의 말에 ‘네’라고 작게 대답하더니 제드를 보며 말했다.
“분명히 아가씨는 취침 중이라고, 들어가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각하께서 들어와 계실 줄은 몰랐어요.”
루시펠라는 제드와 로이자를 바라보았다.
로이자의 시선은 어쩐지 제드를 힐난하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을 피하는 제드를 보며 루시펠라는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했다.
하긴, 아무리 약혼자라고 해도 자고 있는 여인의 방에 함부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제드는 로이자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자 몰래 숨어든 모양이었다.
불안해서 약혼녀의 방에 몰래 숨어들다니, 진짜 전장의 흑사자가 아니라 고양이였다.
그나저나 루시펠라는 새삼 로이자를 다시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제드가 눈을 피하다니, 참 대단한 하녀였다.
로이자의 시선이 루시펠라를 향하자 그녀는 흠칫 놀랐다.
“아가씨는 얼른 씻으셔야죠?”
루시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낯간지럽고도 조금은 어색하지만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
“여기가 가브라인, 아니, 루이르크 공이 소유했던 영지일 줄은 몰랐군.”
제드가 도우비 남작을 보며 말했다.
현재 이들은 간단한 티 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차를 들이켜며 도우비 남작 부부를 바라보았다. 에스텔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네, 정복전이 끝났을 때 루이르크 공작께서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가브라인 공작령의 규모는 큰 편인가?”
“그리 큰 편은 아닙니다. 이곳과 저 강 너머, 가브라인 가의 성이 있는 도시가 전부이니까요.”
“생각보다 상당히 작군. 무슨 이유가 있나?”
“선대 가브라인 공작, 아니, 현 루이르크 공작의 부친께서 파비아누스 왕에게 영지를 반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랬었구나…….
루시펠라는 그 말을 듣고 비스킷을 집어 들려던 손을 멈추며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 아저씨가 영지를 반환했다는 소리는 처음이었다.
아마 파비아누스에게 자신이 무해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였겠지.
그것을 깨닫자 루시펠라는 괴로웠다.
“파비아누스도 참 대단한 사람이군.”
제드의 말에 도우비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브라인 공작께서 그렇게까지 하며 충성을 바쳤는데도 결국 그 목숨을 빼앗다니. 참 집요한 사람이었죠.”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루시펠라는 이 대화로 제드마저도 칼리드의 아버지와 파비아누스의 관계에 대해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모르고 있던 건 자신뿐이었다. 루시펠라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루이르크 공작께선 잘 있으십니까?”
도우비 남작의 말에 제드는 잠시 침묵했다.
얼샤의 귀족들은 대부분 칼리드의 안부를 물었는데, 루시펠라가 보는 제드는 불쾌감을 숨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지, 아주.”
“다행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분인지라 마음이 쓰이는군요.”
도우비 남작은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만날 때마다 칼리드에게 친절했던 사람이었다. 검에만 정신이 팔려 막상 칼리드에게 소홀했던 가브라인 공작과는 다르게.
“잘 지내지 못할 리가 있나.”
제드가 이어붙인 말에는 묘한 냉소가 담겨 있었으나 도우비 남작은 눈치채지 못했다.
“저는 공께서 그런 선택을 하시고 어떻게 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 선택?”
제드가 묻자 도우비 남작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아차 했다.
제드의 표정을 본 그는 행여나 무언가 오해를 살까 봐 걱정했는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에스텔과 루이르크 공작께서는 어려서부터 친밀한 사이였으니까요. 비록 대의를 위한 선택을 했으나 본인도 괴로웠을 겁니다. 물론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요.”
도우비 남작은 행여나 자신이 칼리드의 선택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제드의 관심은 다른 것에 가 있었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알았다고? 그거 흥미롭군. 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
루시펠라는 그것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가브라인 공작께서 어린 슈페르트 경을 공작 성으로 데려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데려왔지?”
“제가 알기로는 아마 도시에서 마물이 나타났을 때 어린 에스텔 슈페르트가 검을 들고 싸우다가 공작의 눈에 띄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선연히 기억난다. 마물이 출현했고, 도시의 사람들을 공격하려고 했다.
마물은 생각보다 수가 많았고, 에스텔은 사람들과 함께 그것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마물들은 꽤나 강했고,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거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다 그녀는 아주 우연히 검을 든 칼리드를 마주했다.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가브라인 공작이 그녀를 데려갔다.
“그렇게 된 거였군.”
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녀가 가브라인 공작 밑에서 검을 배웠다고? 평민에다 여자를 가르치는 데 반발이 없었던 건가?”
“물론 반발은 많았습니다. 기사를 지망하는 귀족 자제들에게도 검술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던 분인데, 평민을 데려왔는데 거기다가 여자라는 것까지 나중에 밝혀져서 수도의 귀족들까지 그것을 비난했습니다.”
“여자인 게 나중에 밝혀졌다니?”
“도저히 여자라고 봐줄 수 없는 외모였으니까요. 저도 어쩌다 봤는데 머리도 짧고 피부도 까맣고, 더군다나 성안에 있는 웬만한 하인 녀석들보다 욕을 잘하더군요. 분명 슈페르트 경도 성별을 숨기려 했던 겁니다.”
루시펠라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닌데! 멋대로 남자라고 말하기도 전에 데려온 건 공작이었다.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브라인 공작은 관심도 없었다.
하인들도 알아서 입으라고 옷을 던져 줬으니, 그녀의 정체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녀도 굳이 밝혀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런 그녀가 여자인 걸 가장 먼저 눈치챘던 이는…….
또다시 칼리드의 얼굴이 생각나자 그녀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래서 어떻게 받아들여졌지? 반발이 더 심해지진 않았나?”
제드는 여전히 궁금한 듯했다.
루시펠라는 에스텔인 자신에게 향하는 그의 호기심을 보며 괜스레 가슴이 아렸다.
죽은 진짜 자신에게 향하는 연인의 관심.
자신이 이렇게 살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걸 알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가브라인 공작께서 사람들 앞에서 그녀와 직접 대련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도우비 남작은 그날을 떠올리는 듯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천재였습니다.”
“…….”
“정말 말 그대로 천재였습니다. 왜 공작께서 그녀를 데려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검에 무지한 저로서는 그저 검과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것만 보이더군요.”
“…….”
“그저 검을 들고 싸우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반발했던 모든 이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드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천재긴 했지. 나도 동의하는 바야.”
“성격 역시도 좋은 편이라서 모두가 경을 따랐습니다. 그 루이르크 공작과 신분을 뛰어넘어 친구가 된 것도 참 대단했지요.”
“그게 그렇게 대단했던가?”
“루이르크 공께서는 사실 말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말이 별로 없으시지요?”
“지금은 말이 지나치게 많은데.”
“네?”
“아니, 아무것도. 그래서 에스텔 슈페르트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지.”
“여하튼 에스텔 슈페르트를 따르는 사람들은 참 많았습니다. 시토라 기사단의 기사들도 모두 그녀를 따랐습니다. 어떠한 배경에서 그녀가 기사단장이 되었든지, 모든 이가 그녀를 따랐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말인가. 참 대단하군.”
“그녀는 참 순수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 점은 변하지 않더군요. 언제나 슈페르트 경의 눈은 빛이 났습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끌렸을 겁니다.”
“길잡이 별처럼, 말인가?”
“그렇습니다. 꼭 밤하늘의 별처럼.”
푸흡, 그녀는 마시던 차를 내뱉을 뻔했다.
자기 자신이 별에 비유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이슈타르라고 불린다고 할 때 그녀가 얼마나 방방 뛰었는가.
눈이 빛난다고? 내가 고양인가? 그녀는 계속해서 온몸에 올라온 소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녀를 따르던 이들은 그녀에게 맹목적인 구석이 있었지요. 시토라 기사단의 생존자들이 아직도 얼샤를 다시 일으키네 마네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루시펠라는 찻물을 들이켰다.
얼샤의 독립을 주장하는 반 얀스가르 세력.
자신의 휘하의 기사단 단원들.
차향을 음미하는 척하며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게 보면 남작도 에스텔 슈페르트에게 상당히 끌린 모양이군.”
“아, 아닙……!”
“저,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루시펠라가 참지 못하고 말하자, 제드와 도우비 남작이 동시에 그녀를 보았다.
이 타이밍에 일어나는 게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견딜 수 없었다.
“소화가 잘 안 되어 걷고 싶군요.”
“그래? 그럼 같이 걷지.”
“그럼 제가 저택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으으! 루시펠라는 결국 도망치는 데 실패했다.
제드와 도우비 남작은 걸어가면서도 에스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참아야만 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