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04화 (104/173)

#104화 끌림의 이유

2018.02.26.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제드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 창살 너머 에스텔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신호를 보냈어, 국왕 전하께.”

대체 무슨 수를 부린 건지, 에스텔이 수도의 군대를 불러온 것이다. 이 감옥 안에서!

그녀가 있는 곳은 탑이었고, 그녀는 몸수색을 했기에 소식을 보낼 만한 어떠한 것도 소지하지 않았다.

“경이 잡혔던 게 그쪽 기사단 중 한 명이 이미 소식을 보낸 시점이었던 건가?”

제드의 물음에 에스텔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 진실로 말하는데 이곳에 잠입했던 건 나뿐이야. 아니카는 그런 데 소질이 없고 잠입에 소질이 있거든. 주점에서 일하느라 꽤나 힘들었을 거야.”

에스텔이 자랑스러운 듯 말했으나, 그는 에스텔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캐묻는 대신 그는 자신이 묻고 싶은 것을 먼저 물었다.

“처음부터 국왕군이 온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말했잖아, 내가 국왕 전하께 신호를 보냈다니까?”

에스텔이 창살 바로 앞으로 다가와 제드와 눈을 마주하더니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쪽 기사들 입단속을 했어야지.”

입단속이라니, 그럼 이들 사이에서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말인가?

제드가 캐물으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제드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에스텔이 말했다.

“충고하는데, 여기 있지 말고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어때?”

제드는 그 조롱 어린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텔!”

계단 위로 올라온 남자는 물빛 머리카락의 청년이었다.

제드는 에스텔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 건가.’

제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칼리드!”

제드는 이 청년이 에스텔의 동료라는 판단을 내리자마자 검을 뽑았다.

칼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의와 살기가 뒤엉킨 두 개의 시선이 오갔다.

제드는 이 남자가 상당한 미청년이라는 것과 더불어 꽤나 실력자라는 것을 알았다.

성이 국왕군에게 공격당하는 상황에서 한가롭게 이 녀석과 검을 맞대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렇다고 도망치긴 싫고 이를 어쩐다. 제드가 생각에 잠길 때였다.

“야, 그만하고 문이나 따줘!”

에스텔이 창 너머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에스텔…….”

순식간에 칼리드를 감싸던 첨예한 살기가 푹 꺼졌다. 칼리드는 꼭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어허, 지금 날 앞에 두고 쌈박질을 하겠다는 거야? 지금 여기서 저놈이랑 같이 싸우다간 다른 애들이 오기 전에 우리가 죽을 것 같은데?”

칼리드는 그 와중에도 제드에게 겨눈 검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제드를 서늘하게 노려보더니 물었다.

“누구야?”

경계심이 담긴 시선엔 살기는 없었으나, 제드는 이 남자의 눈에서 기묘한 음습함을 느꼈다.

어쩐지 저 남자의 눈은 늪과 같았다. 기분 나쁜 부류였다.

“아직은 알 필요 없어. 그쪽도 거기까지 하고 도망가는 게 어때? 내가 나가면 그쪽부터 잡아 죽일 거 알고 있지? 그래도 그쪽에게 신세를 졌으니 친히 갚아주도록 하지.”

그녀가 허락해 줘서 도망을 가다니,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그는 당장 기사단을 이끌고 도망가야 했다.

칼리드가 제드를 노려보며 검을 거두자, 제드가 에스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시선이 마주하자 그녀가 웃었다

“다음번을 기약할게.”

다음번. 적과 다음을 기약하다니,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제드는 어이가 없어 미소를 띠었다. 미소와 미소가 마주하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도 알고 있다. 성이 함락되고, 에스텔이 그를 붙잡는다면 그녀는 그를 주저 없이 죽일 것이다.

창살이 있기 때문에 그도, 그녀도 안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주는 기회였다.

에스텔이 갇힌 감옥에서 내려와 복도를 뛰어가자 칼리드라는 남자가 그런 것인지 쓰러져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는 복도의 커다란 창문으로 내려다보았다. 도시는 이미 뚫렸으며, 본성마저 공격받고 있었다.

완벽하게 저 여자, 아니, 저 기사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처음부터 죽을 생각 따윈 없었던 거다.

성 너머에서는 이따금씩 불화살이 넘어오고 있었다.

“하인트 공, 이쪽입니다!”

그는 기사들의 숙소 쪽으로 뛰다 라흐시 백작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라흐시 백작은 다행히 얀스가르의 기사들을 모아두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국왕이 왕사(王師)를 보냈습니다. 수를 보아하니 이곳을 쓸어버릴 계획인 듯합니다.”

“빌어먹을!”

예상했던 바였다. 정렬된 기사단의 앞에 선 제드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부 전선으로 복귀하도록 한다.”

제드는 라흐시 백작을 쳐다보며 말했다.

“가시죠.”

그 말에 라흐시 백작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을 겁니다.”

그 말은 라흐시 백작이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드는 그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차피 다 죽는다면 적어도 도망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라흐시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익서스 공작은 이곳을 지키지 못할 겁니다. 보셔서 아셨다시피, 이곳의 총관리자는 접니다. 제가 아니면 이곳은 순식간에 함락될 겁니다.”

“…….”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혹 이럴 때를 대비해 제 아내와 제 자식들을 이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 데려다 놨습니다. 부디 그 아이들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셨으면 합니다.”

가족에 관해 이야기하자 그의 눈가에는 물기가 서렸다. 그는 자신의 뒤에 있는 하인을 부르더니 말했다.

“여기, 이놈이 비밀통로와 마을을 안내해 줄 겁니다. 막히기 전에 어서 빠져나가십시오.”

제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말로 붙잡기엔 그와 보낸 시간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제가 얀스가르와 같은 나라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것이 라흐시 백작의 마지막 말이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제드는 사는 것을 선택했고, 라흐시 백작은 죽는 것을 택했다.

제드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기분이 더럽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이 신세는 갚도록 하지.”

제드는 그 기분을 뿌리친 채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기사들이 전부 비밀통로를 따라 나오자 강이 보였다. 비밀통로는 성이 위치한 절벽 아래로 뚫어놓은 모양이었다.

“이 강을 따라가면 선착장에 배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제드는 하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을 옮기기 전 제드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자신이 빠져나왔던 공작의 성이 보였다. 함락되기 직전의 성이.

어두운 밤하늘에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은 붉은 불길과 불에 타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들뿐이었다. 불길은 탐욕스럽게 모든 것을 삼켜 나갔다. 언제나 그랬듯.

그때, 제드의 두 눈에 다른 색의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에스텔이었다.

그녀의 회색빛 머리카락은 어째서인지 마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자그마한 인영은 똑똑히 보였다.

검을 든 채 그녀는 적을 베어 쓰러뜨리고 있었다.

제드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멍하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갇혀 있는 에스텔이 국왕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인지 그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건 그녀는 마냥 멍청한 기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국왕에게 이용당하는 기사. 어리석은 기사.

그러나 겨우 며칠간 본 에스텔은 그런 멍청한 기사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복잡한 것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것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 그것이 에스텔의 본모습이었다.

나라를 지킨다는 아주 단순하고 유치한 이상을 위해 목숨을 내건 모습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는 왜 그녀에게 끌렸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제드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부모님의 거짓된 애정, 미래를 위해 변질된 우정, 생과 사의 갈림길에 너무나 가볍게 파괴되는 윤리. 그런 복잡한 것을 너무나 많이 알아 냉소를 품은 그와는 다르게 그녀는 지독하리만치 단순했다.

단순하기에 그녀가 선택한 길에 누구보다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복잡했던 제드의 삶에, 에스텔의 삶의 방식은 일종의 혁명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실마리를 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밤하늘의 길잡이별처럼.

그는 계속 성채를 바라보았다. 점점 멀어지는 에스텔의 모습을 보며 제드가 입을 열었다.

“다음을 기약하지.”

그는 입꼬리에 미소를 지었다. 결말이 둘 중 하나가 죽는 걸로 마무리되겠지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그런 결말 역시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분명히 그녀는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리고 자신 역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전장의 불꽃 속에서 검을 든 채 뛰어든 저 여자, 아니, 저 기사야말로 이슈타르의 현신이었다.

***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을 응시했다. 에스텔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씁쓸해 보였으며, 때로는 신이 나 보이기도 했다.

“단순하게 살아가는 삶이 꼭 나쁜 삶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 에스텔은 어리석은 삶을 살았어. 그 삶이 모범적인 삶은 아니었지.

루시펠라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제드가 에스텔에게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받을 줄 모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제드의 말에 따르면 에스텔은 제드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

그런 제드는 또 루시펠라가 되어버린 에스텔에게 영향을 주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 그렇다면 자신과 제드의 관계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런 걸 바로 ‘운명’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그것은 기쁘기도 하며, 씁쓸하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는 두 번 다시 에스텔로서 그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루시펠라는 자신이 느낀 경이로움을 제드와 공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생각해 보면 참 적군임에도 이상하게 친근했군. 보통은 말도 안 섞으려 들 텐데, 역시 붙임성이 좋았던 건가? 동료들보다 더 친근하게 말을 나눈 느낌이었어.”

‘그것은…….’

루시펠라는 말을 잇고 싶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은 에스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스텔이 제드에게 말을 붙였던 것은 그녀가 친근한 성격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드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봤던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그야말로 영웅과 같은 기사의 모습이었다. 에스텔은 그의 모습에 아주 잠시 넋을 잃었었다.

그러나 제드의 입에서 나온 특유의 삐뚜름한 말과 더불어 그가 침략자라는 것을 깨닫자 그녀는 그런 생각을 품은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검으로 꺾었다.

제드는 에스텔이 지쳐 있었다고 말했지만, 당시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설령 지치지 않았더라도 이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에스텔은 제드를 미워하며, 한편으로는 그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람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었다.

마냥 저주하고 증오할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것도 한몫했다.

에스텔은 제드가 찾아오는 게 싫지 않았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과 감옥 밖에 있는 사람 사이에 생기게 된 불안정한 평화.

그 안에서 에스텔은 그를 관찰했다.

분명, 그는 다른 이보다 선명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주제에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그렇게 나약한 소리를 해대니, 에스텔은 그것에 화가 났었다.

그러면서도 저런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적이었고, 검으로 자신을 패배시킨 이였다.

그가 군공을 세울 때마다 그녀의 얼샤의 입지는 좁아졌고, 멸망은 가까워져 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를 증오하며 이를 갈았다.

그것은 마치 그를 증오해야 한다는 의무감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를 계속 입에 담았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또 다른 종류의 관심이었다.

‘마지막도 저 녀석에게 맞이하길 바랐지.’

잠깐, 내가 이런 생각을 한 적 있었나?

루시펠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아직도, 어떻게 에스텔이 신호를 보냈는지 잘 모르겠더군. 분명 도시 내 외부인은 없었고, 설령 외부인이 있었다고 해도 에스텔이 감옥 바깥의 외부인에게 붙잡혀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건 불가능했을 텐데.”

제드의 얼굴을 보며 루시펠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직도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제드의 말을 들어보면, 그 기사들 입이 엄청 싸다고 했는데. 에스텔도 기사들 입단속을 하라고 했잖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에스텔이 붙잡혔고 제더카이어 하인트가 여기 왔다고 도시로 퍼뜨릴 정도로 멍청한 놈들이었다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말만 듣고 증거 없이 국왕이 군대를 움직이진 않았을 텐데. 적어도 기사단장의 요청 정도는 되어야 해.”

맞는 말이었다. 국왕이 움직인 건 수도에 주둔하는 군사들이었고, 이를 움직여 귀족들을 공격하는 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그에 맞는 명분이 필요했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을 관찰했다. 아직도 그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스텔이 도망칠 때 연무장으로 도망쳤다고 했잖아. 그거 진짜 에스텔이 바보 같아서 그런 거 맞아?”

“뭐?”

“그렇잖아. 연무장으로 통하는 길은 보통 그 표시가 있지 않아? 도망간다고 그걸 못 봤을까?”

루시펠라가 눈을 깜빡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제드를 보았다. 제드는 그 말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니까, 영애는 그녀가 연무장에서 기사들을 만났던 게 의도적이었다고?”

“응.”

그래도 제드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요란하게 일을 벌이면 침묵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침묵을 지키기 힘들잖아. 분명히 어딘가에 이야기할 곳이 필요했을 거야. 예를 들어 주점 같은 곳.”

“…….”

“에스텔은 그런 곳에 자신의 사람을 숨기고 그 사람과 특별한 행동을 지정하고 거기에 따른 대응방침을 정해둔 거 아닐까? 내가 너무 과장해서 생각한 걸까?”

제드가 굳은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보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탈옥해서 연무장에 가서 싸움을 벌이는 것 자체가 바깥에 보내는 암호였단 말인가?”

제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그는 피식 웃더니 중얼거렸다.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그때 봤던 불꽃도 역시나 암호였겠군.”

힌트를 주니 역시나 옳은 방향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그건 같이 숨어든 아니카가 도시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군사를 동원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파란 불꽃은 진격 신호였다. 에스텔은 그것을 보고 국왕군이 올 것을 알았다.

“탈출 후 행동으로 신호를 보낼 정도라면 에스텔은 언제든 탈출이 가능했다는 말이로군. 그렇다면 탈출은…….”

일부러 안 하고 있었지.

자신이 탈출하게 되면 주점에 잠입한 아니카가 위험해질 테니까.

모든 이에게 아주 당연하게 기사는 남자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무력이 달리는 여자인 아니카를 기사단원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따라서 시토라 기사단에 여성 단원으로 알려진 이는 오로지 에스텔뿐이었다.

그러나 아니카는 그녀의 몫으로 주어진 일을 훌륭히 해내는 기사단원이었으며, 그녀는 에스텔과 같이 이곳에 잠입했다.

아니카가 주점에 숨어들어 있다가, 성내의 정보를 받아 도시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게 가장 안정적인 방식이었다.

감옥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꽤나 여러 번 감옥에 갇혔었다. 어린 그녀가 보기에 감옥은 생각보다 허술한 점이 많았다.

일정한 감시자의 교대시간, 고정되지 않은 철장, 바로 눈앞에 걸린 열쇠.

감옥이란 특수하고 폐쇄적인 공간은, 오히려 사람들의 긴장을 풀리게 만들었고, 따라서 탈출하는 게 의외로 쉬웠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감옥을 탈출하는 데에도 재능이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칼리드가 굳이 숨어들어 열쇠로 감옥 문을 열지 않았더라도 에스텔은 어떤 방법으로든 탈출이 가능했을 것이다.

도시의 경계가 삼엄해서 남자들이 들어갈 수 없었기에 이번 작전에 실질적으로 참여한 건 아니카와 에스텔 둘뿐이었다.

결국 저들은 입단속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도 한몫했지만, 여자를 무시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그 기사단원 중에 여자가 정말 없었어?”

루시펠라는 제드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보고 미소 지었다. 제드는 조금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의아한 듯 루시펠라를 보았다.

“그런데 영애는 거기까지 생각이 가능한 건가?”

“어?”

“내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이 가능했냐고 묻고 있어.”

그 질문에 루시펠라의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너무 들떠서 지나치게 나댄 건가. 그녀는 지레 찔려 움찔했다.

그녀는 제드의 시선을 피하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화제를 돌리는 게 나을까. 그때였다.

“그대는 참 똑똑하군.”

“…….”

루시펠라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을 고백하고 키스를 나눈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볼 수 있을까. 그는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똑똑한 거 아닌데, 이거 좀 수상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제드는 자신의 호기심이 어느 정도 풀렸다는 후련함과 더불어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한 기쁨 때문인지 그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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