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과거 (2)
2018.02.19.
제드와 라흐시 백작은 그 길로 급하게 방을 나가 각자의 목적지로 뛰어갔다.
그들이 듣기로 그 여자는 감옥에서 자신에게 접근한 기사의 허리에 찬 검을 빼 들어 능숙하게 휘둘렀다고 했다.
왜 그 여자가 이곳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뺄 기회가 있었는지, 제드는 그 추잡한 이유에 대해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성문을 폐쇄하고 어서 그녀를 잡아!”
라흐시 백작이 창백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 그녀가 이곳을 벗어나 수도에 가서 이 일에 대해 보고를 하면 익서스 공작령은 그야말로 끝이었다.
라흐시 백작의 지시에 따라 도시의 성문이 폐쇄되었고, 본성의 모든 인원이 그녀를 찾는 것에 동원되었다.
“우리 쪽 기사들은?”
“연무장에 있습니다.”
제드가 아직 명을 내리지 않았으니 그곳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제드는 자신의 기사들 역시 그녀를 수색하는 데 지원시킬 요량으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자 얀스가르의 기사들이 일제히 제드를 바라보았다. 버나드가 다가왔다.
“단장님, 그 이슈타르가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당장 수색…….”
제드가 명을 내리려 할 때 별안간 누군가가 연무장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제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얀스가르의 기사들 역시 제드의 시선을 따라가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을 들고 있는 잿빛 머리카락의 수상한 사람.
에스텔 슈페르트였다!
‘기껏 숨어들어 도망친 곳이 연무장이라니!’
얼마 살아오지 않은 그의 삶에 이렇게 황당한 일은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다 드러나 있었다.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몸을 틀어 뒤로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를 쫓아온 익서스 공작가의 기사들이 그녀의 뒤에 서 있어 퇴로도 막혀 버렸다.
제드의 기사들과 익서스 공작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칫, 하고 혀를 차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챙강!
검이 번쩍, 하더니 순식간에 그녀가 검을 내려친 기사를 지나쳤다. 이윽고 다른 기사가 달려들자 그녀는 허리를 꺾어 그것을 피하곤 그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제드가 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날쌔고 빨랐다.
그녀는 마치 곡예를 부리는 듯 기사들의 검격을 피하거나 쳐내며 이곳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제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적들 한가운데에 있다고 방심하다가는 놓칠 게 뻔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어 에스텔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과 에스텔의 검이 맞부딪쳤다.
챙!
강한 힘과 힘이 맞부딪쳐 검이 부르르 진동했다.
검을 맞부딪치며 제드는 그 여자와 시선을 교환했다. 치켜 올라간 그녀의 호박색 눈은 맹수처럼 섬뜩하게 번뜩였다. 제드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이 한 합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는 에스텔 슈페르트다.
검과 검이 계속해서 맞부딪쳤다.
제드는 틈을 내주지 않으려 했고, 에스텔은 벗어나기 위해 그를 쉴 새 없이 밀어붙였다.
검에 깃든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검술은 놀랍도록 정교하며 재빨랐다.
또한 하나하나가 살수였기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
에스텔은 몇 번 검을 마주하더니, 그 얼굴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미친 사람인가? 그러나 깊게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챙! 챙! 챙!
계속해서 그의 검과 그녀의 검이 맞부딪쳤다.
가빠지려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제드는 침착하게 그녀의 공격을 방어했다.
도망가려는 그녀와 막으려던 그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여자였다.
시간이 흐르자 더 많은 사람이 연무장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거의 대련이 되어버린 그들의 싸움을 홀린 듯 지켜보았다.
그때, 아슬아슬한 검격이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볼에 뜨뜻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에스텔의 몸에 상처 하나도 낼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제드는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 제드는 순간 에스텔의 빈틈을 발견하고 검을 내리그었다.
그것을 본 에스텔이 능숙하게 그 부분을 방어하며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그 또한 예상하던 바였다.
제드는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공격을 옆으로 흘려보낸 뒤 무릎으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퍽, 소리와 함께 그녀가 날아가 연무장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제드는 숨을 헐떡이며 쓰러진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미친.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인간이 존재할 수 있지?
라흐시 백작의 말대로였다. 저 여자는 얀스가르에서도 손꼽힐 만한 이였다.
아니, 어쩌면 그의 아버지의 전성기 시절보다 더 뛰어날지도 몰랐다.
그녀가 지치지만 않았다면 더 오랫동안 검을 맞대고 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패배한 것은 그였을지도 몰랐다.
기사들이 쓰러진 그녀를 잡아 든 그때, 에스텔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는 상당히 강한 무릎차기를 날렸고, 복부에 통증이 상당할 터였다. 남자라도 나가떨어질 텐데 여자가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니 놀라웠다.
그녀는 피 섞인 침을 내뱉더니 경멸 어린 말로 말했다.
“이, 배신자 새끼들.”
이글이글한 호박색 눈동자가 연무장에 모여든 이들을 노려보았다. 그녀에게서 뿜어 나오는 서슬 퍼런 살기에 모두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얀스가르의 기사도, 익서스 공작가의 기사도 모두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에스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드는 끌려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꼭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손발을 모두 묶어 탑에 가두도록.”
어느새 연무장에 도착한 라흐시 백작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큰 신세를 졌습니다, 하인트 공자!”
제드는 한참 후에 익서스 공작을 알현실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감격한 표정으로 제드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제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성이 이 지경이 되는 동안 그쪽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묻고 싶었으나 공작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당연한 일이니 감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이곳 사람들의 입단속을 좀 더 엄중히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드의 말에 공작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의 옆에 서 있던 라흐시 백작이 제드의 눈치를 보았다. 제드가 공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 보러 가실 생각입니까?”
“무엇을 말하십니까?”
“얼샤의 이슈타르.”
제드의 말에 공작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백작과 지금 갈 예정이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갈 수 있겠습니까?”
제드의 부탁에 공작이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대체 왜……?”
“이슈타르가 궁금합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상황이 아닌 개인 대 개인으로 검을 맞대며 느꼈던 위협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두 눈과 두 검을 맞댔을 때의 느낌에 아직도 몸이 찌릿했다.
얼샤의 ‘이슈타르’라는 말이 허명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도 볼의 상처가 화끈거리고 아팠다.
공작이 라흐시 백작의 눈치를 보자, 라흐시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공작이 말했다.
“좋소.”
그들은 에스텔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그녀가 갇힌 감옥은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가는 데만 해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에스텔의 손은 뒤로 묶여 있었으며, 다리 역시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웅크려 있던 그녀는 제드를 비롯한 이들이 방문하자 고개를 들었다.
라흐시 백작이 입을 열었다.
“이런 일로 보게 되어 유감입니다, 슈페르트 경.”
그녀의 형형한 호박색 두 눈이 공작과 백작을 훑어보더니 마지막으로 제드를 향했다.
마치 눈에서 불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라흐시 백작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입에 물려 있던 재갈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몸을 구부려 재갈 때문에 흘러나왔던 침을 무릎으로 닦았다.
라흐시 백작이 뒤로 물러나자 에스텔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참으로 유감이군, 익서스 공작. 그리고 그쪽은…….”
“라흐시 백작입니다.”
“그래, 라흐시 백작.”
사지를 결박당하고 수감되어 있는 초라한 모습이었음에도 그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렇게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해주는 걸 보면, 나를 죽일 생각인 것 같군. 안 그래?”
“당연한 걸 왜 묻나?”
“그래, 이미 그쪽 기사들이 저놈의 정체를 친절하게 불 때부터 눈치는 챘어. 되게 입이 싸던데, 좀 주의해야 하지 않을까?”
에스텔이 미소를 지었다. 그에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드의 지적에 이어 에스텔까지 같은 부분을 지적하자 그는 기분이 더러운 듯했다. 에스텔이 말을 이었다.
“물자가 부족해 지원할 수 없다면서, 숲에 그렇게나 많은 물자를 숨길 줄은 몰랐네. 국민을 죽인 얀스가르 놈들을 먹여 살린 새끼들이 이렇게 전하의 코앞에 있을 줄이야.”
“…….”
“슈페르트 경, 그렇다고 우리가 전하께 병력을 지원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지.”
“아, 언제 적군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놈들 말인가? 전하께서 이걸 알면 그놈들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래서, 알릴 수는 있는 건가? 보아하니 기사단장이나 되는 인간이 찾아와 조사할 정도면 증거가 어지간히 없었던 모양인데.”
그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에스텔이 얼굴을 찡그렸다. 라흐시 백작이 말을 이었다.
“만일에 대비해 도시 내에 들어온 이들의 신원은 모두 파악했습니다만, 대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에스텔이 웃으며 말했다.
“이곳 기사들, 여자를 정말 좋아하더라고. 여자들은 아예 검사도 하지 않더라. 여기 기사들 기사 맞아? 꼭 시정잡배 같던데.”
그녀의 비아냥거림에 라흐시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으며, 공작은 기분이 상한 듯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 기사들은 계집을 두려워하지 않지. 그러고 보면 얼샤의 이슈타르라는 것도 별거 아니었군. 그 검술 때문에 평민 계집이 그 자리까지 올라왔는데도 이렇게 잡혀서 갇혀 있지 않나? 그 검술도 하찮았던 게지.”
그 조롱에 에스텔이 이를 악물었다. 공작은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제드가 말했다.
“얀스가르의 기사들, 특히 우리 가문의 기사들 앞에서 그런 발언은 하시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공작 각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자?”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은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지 않고 선발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저 여자의 검술은 나와 비등했으며, 그게 형편없다는 건 나와 내 아버지, 나를 기사로 만든 얀스가르에 대한 모독입니다.”
공작이 그에 못마땅한 듯 뭐라 말하려 했으나 제드의 서늘한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라흐시 백작이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경을 멀리서 봐왔습니다. 제 딸아이가 경을 동경하더군요. 당신처럼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거 기쁜 일이네. 그런데 그 따님께서는 안됐어. 동경할 만한 아버지가 아니잖아?”
에스텔의 조롱에도 라흐시 백작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에스텔의 바로 앞에 다가가더니 앉아 말했다.
“슈페르트 경, 차라리 전쟁을 재빨리 끝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건 경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기회라니?”
에스텔은 더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경이 우리에게 협력한다면 경의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습니다. 전쟁 후에는 질서가 필요하며, 당신 같은 사람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니까요.”
“배, 백작! 그건 너무나 위험하지 않은가!”
익서스 공작이 라흐시 백작을 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는 것 같았다.
“진정 나라를 위해서 검을 쓰는 게 뭔지 경도 그 본질을 아신다면 이렇게 얼샤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을 겁니다. 이렇게 계속 전쟁을 벌이다간 얼샤는 그야말로 멸망할 겁니다. 얀스가르는 강대국이잖습니까?”
“…….”
“만약 협력을 약속하겠다면. 시토라 기사단원들 역시 불러들여 설득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동료분들도 나라가 새롭게 바뀌면, 그곳에서 똑같이 이곳을 위해 일하면 되는 겁니다.”
“내 동료들의 목숨을 구한다라.”
“경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건 이미 진 전쟁입니다. 심지어 경께서는 하인트 공자께 이미 패하셨습니다.”
그에 그녀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제드는 그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긴, 지금 와서 에스텔이 얀스가르 쪽에 돌아선다면 얼샤는 빠르게 멸망할 것이다.
목숨을 가지고 하는 거래.
과연 저 여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목숨을 위해 항복할까?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항복한 척할까? 아니면 동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숙일까?
“경의 고강한 긍지는 모두가 알 것입니다. 아무도 경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라흐시 백작은 계속해서 에스텔을 설득했다. 그 어조는 꽤나 진심으로 들렸다.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그 말을 듣고 있던 에스텔이 말했다.
“그…… 미안, 이름을 까먹었네, 백작. 백작이 이야기 한 건 잘 들었어.”
“…….”
“본인들이 그렇게 쓰레기라는 걸 알려주어서 고맙군. 얼샤가 패하는 건, 그쪽 같은 더러운 귀족놈들 때문이라는 걸 잘 알겠어.”
“…….”
“새 나라의 기사로 목숨을 부지한 채 살아가라고? 나라를 배신한 기사가 기사일 수 있나? 그렇다면 목 잘려 죽는 게 낫지.”
그녀의 말은 상당히 서늘했다. 제드는 그 독한 말에 상당히 놀랐다. 그녀는 여자가 아니라 ‘기사’로 행동하고 있었다.
“시토라 기사단원들이 모두 몰살당할 텐데 말입니까?”
“걔들은 나랑 같이 죽을 거야. 그렇게 맹세했거든.”
그녀가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드는 그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죽는다는데,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가. 저것은 억지로 내비치는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제드는 에스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즉결 처형을 당할 수 있다는 본인의 입장을 자각하고는 있나? 왜 저렇게 확신하는 표정을 짓는 거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제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흘 동안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조금이나마 숨 쉴 시간은 준다니 감사하게 받아두지. 그럼, 날 이런 죄인 취급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난 엄연히 업무 수행 중인데 말이야.”
에스텔이 뒤로 묶인 손을 들며 말했다.
“그건…….”
공작이 말하려 하자 라흐시 백작이 나섰다.
“말씀드리지만, 이곳은 성의 최상층이며 기사들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망치긴 힘드실 겁니다.”
“아, 알고 있어. 지하가 아니라는 데 감사해야 하나?”
에스텔이 어깨를 으쓱했다. 라흐시 백작이 제드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에스텔이 허튼짓을 하더라도 여차하면 제드가 나설 것이다.
라흐시 백작이 손과 발을 풀어내자, 그녀가 얼얼한 듯 손과 발을 턴 뒤 얌전히 구석에 가서 앉았다.
“더 이야기할 게 없으니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가봐. 아, 식사에 장난치기 없기다?”
에스텔이 손을 까딱였다. 참으로 이상한 만남이었다.
***
“이슈타르는 어땠습니까?”
버나드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에 제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좀 멍청한 사람이더군.”
“멍청하다고요?”
“보아하니 권력이나 부귀를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닌 모양이야. 자기 목숨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하더군.”
“적이지만 기사의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사람이로군요.”
버나드가 대답했다. 제드는 그 말을 듣고 차갑게 웃었다.
“기사의 귀감? 사람이 진짜 동화 속에 나온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게 가능한가? 목적이 뭘까? 여자가 검까지 들면서 왜 저렇게까지 하지?”
버나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에스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저런 알 수 없는 질문을 시작하는군. 버나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럼 직접 물어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뭐?”
“모처럼 전장에서 만난 것도 아니고, 단장님께서 감옥 출입이 제한되는 것도 아닌데 한번 만나서 이야기해 보는 게 어떨는지요?”
“경, 제정신인가?”
“창살을 사이에 두면 서로 검이 아니라 입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단장께서도 궁금하시잖아요? 이건 절호의 기회입니다.”
버나드의 가벼운 말에 제드는 생각에 잠겼다.
“너는 살아가는 목적이 없구나.”
목적. 자신의 아버지는 예전 그에게 그런 말을 하고는 했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욕구가 없으니 목적도 불분명하다며, 혁혁한 공을 세움에도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살아가며 드는 욕구란 그에게 당연히 존재했다. 그러나 목적 따윈 없었다.
원하는 것은 이미 손에 얻었고, 원했던 것은 모두 허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부모의 사랑은 거짓이었으며, 정복전쟁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겠다던 그 역시 학살자에 불과했다.
국왕에게 바치는 귀족들의 충성도, 기사들이 내세우는 기사도도 권력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어디에도 자신을 내걸 만한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따라서 그는 목적 자체를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원하는 것이 따로 생기지 않으니 목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다른 것일까?
제드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신에 찬 눈동자는 꼭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고민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