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과거 (1)
2018.02.15.
아쉬운 듯, 하나처럼 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입맞춤의 여운으로 아직도 그녀의 입술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온기가 담겨 있었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은근한 열기가 식지 않은 채였다.
그가 다시 입을 맞추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다 갑자기 몸을 떨어뜨렸다.
“왜?”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기서 더 입을 맞추다가는 나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난 상관없는데?”
제드는 그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진도를 더 나가자는 건가. 저번 술주정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처음 그녀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적어도 이런 곳은 아니어야 했다. 좀 더 귀하게 대해줄 수 있는 곳. 조금 더 안전한 그의 저택 같……. 아니, 여기까지 하자.
괜히 아쉬운 듯 그는 루시펠라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동그란 어깨와 말랑한 살의 느낌이 자극적이라 다시 거기서 손을 떼야만 했다.
제드는 애꿎은 루시펠라의 머리카락만 쓸었다.
“날씨가 추워지는군. 돌아갈까?”
“아니, 조금 더 있다가. 아깝잖아.”
“아깝다니?”
“언제 이런 광경을 다시 보겠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광경은 제드가 보기에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광경이니까. 아직도 푸른 반딧불이들이 숲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을 받은 곳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낭만적인 장소였다. 그렇다면 조금 더 봐두는 것도 좋겠지.
그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여운을 즐겼다.
애정이 보답받았다. 생각해 보면, 시간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유를 가지자 조급한 마음이 사라지며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때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이 시점은 바로 그걸 질문할 시점이다.
분명 그녀는 자신을 언제부터 좋아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딱히 대답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낭만적이고 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답은 무엇일까. 설마 여기서 대답을 못 하면 좋아한다는 말을 취소하진 않겠지?
제드가 심각하게 고민할 때였다.
“그 에스텔 슈페르트 말이야.”
“또, 왜?”
지금 두 사람의 일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그 사람의 이야기는 왜 여기서 또 나온단 말인가.
제드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만났어? 이야기를 듣고 싶어.”
“대체 왜?”
제드는 퉁명스럽게 묻다가 아차 싶었다. 그녀는 그저 제드에 대해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도 루시펠라의 소소한 생각이 궁금했다. 그가 미안함을 느낄 때였다.
“질투해서라고 해둘게.”
“뭐?”
그러나 루시펠라의 의외의 대답에 그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그대가 질투한다고? 그 여자를?”
“뭐, 질투는 질투니까.”
그녀가 꿍얼거렸다. 제드는 그것에 사랑스러움을 느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여기인가?”
에스텔이 절벽 아래에 위치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여기가 익서스 공작의 도시 샐튼이야.”
칼리드가 대답했다. 에스텔은 그곳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 나라의 공작이나 되는 놈이 얀스가르에게 가담하다니.”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차근차근 조사해 봐야지.”
아니카의 만류에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시작해 볼까.”
호박색 눈이 서늘한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그에 기사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제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아까부터 기분 나쁜 표시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기사들이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단장님, 표정 좀 푸십시오.”
버나드의 말에 제드가 이를 갈았다.
“전하께선 그냥 내가 죽길 바라는군.”
“어찌할 수 없잖습니까.”
다 이긴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은 이상하게도 끝나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전쟁 끝에 제드와 하인트 공작가의 군대가 전쟁에 참여했다.
승기를 잡았나 싶더니, 그녀의 전략 때문에 얀스가르로 이어진 중대 보급로 중 하나가 끊겼다.
군공을 세우려고 점령에 지나치게 열을 올렸던 바반드 백작의 실책이었다.
보급로가 차단되었기에 국왕의 군대는 잠시 주춤했다. 다시 그쪽을 탈환하려면 시간이 걸릴 터였다.
제드와 국왕의 군대가 점령지에서 철수하느냐, 아니면 바반드 백작이 이끄는 군대가 남하하여 보급로가 있는 쪽 땅을 탈환하느냐 결정되지 않았다.
여러 말이 오가는 흉흉한 분위기 속, 얼샤의 익서스 공작이 은밀히 ‘보급’을 해주겠노라고 제안해 왔다.
국왕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얀스가르는 그 지원을 받아 대승을 거두었다.
익서스 공작은 얀스가르에 자신의 충의를 보여주었으며, 다음 보급품은 얀스가르의 지휘관 중 한 명이 가지러 왔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국왕은 주저하지 않고 제드를 보냈다.
낯선 나라, 특히나 적군의 심장부를 몰래 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함정일지도 몰랐으며, 잘못했다가는 인질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인질이 되면 모두 다 함께 자결하라는 말이겠지. 우리 아버지가 머리 아파하겠군. 그 양반은 후계자가 나 외엔 없거든.”
“단장님!”
제드의 극단적인 말에 버나드가 말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얼샤에는 멍청한 녀석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이슈타르라는 녀석은 골치를 아프게 했다.
듣자 하니 여자라던데,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 생각보다 빨리 익서스 공작의 도시, 샐튼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은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리며 제드와 얀스가르의 기사들을 맞이했다.
제드는 그를 관찰했다. 제드가 혐오하는 전형적인 귀족 중 하나였다.
“전장의 흑사자를 제 눈으로 직접 보다니!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습니다.”
제드는 적당히 그에 맞춰주었다. 제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실제로 이 비밀 동맹을 제안했던 이가 저 공작이 아닌 과묵한 얼굴로 술만 마시는 라흐시 백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드는 눈을 가늘게 뜨곤 그 남자를 눈여겨봤다.
공작의 목적은 제드의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얼샤가 얀스가르에 귀속되면 국왕의 비호를 얻어 더 큰 권력을 잡는 것.
정말 얀스가르에 잘 보이고 싶다면 수도와 가까운 이점을 이용해 군사를 모아 바로 수도로 진격하면 될 게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물자는 얀스가르에, 군사는 얼샤 측 후방에 지원했다. 그런 박쥐 같은 이를 국왕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저렇게 권력에 목매는 이들을 보는 게 싫어 수도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제드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그의 침 튀기는 수다를 들어주었다.
보급품이 준비될 동안 그는 이곳에 묵어야만 했고, 그때마다 공작은 제드와 만나지 못해 안달했다.
라흐시 백작은 예상대로 진중한 사람이었고, 제드를 대하는 데 무척이나 깍듯했다.
그는 심지어 엄밀히 적진의 중심에 머물게 된 제드를 배려해 성 뒤에 위치한 비밀 보급소를 보여주며 준비 상황을 알려주었다.
따라서 제드는 최소한 이들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게 아니라고 안심할 수 있었다.
제드는 틈만 나면 일부러 도시를 돌아다녔고, 때로는 라흐시 백작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비밀 보급소에서 보급품이 얼마나 모였는지 체크했다.
그가 습관적으로 보급소에 들어오던 어느 날이었다. 익서스 공작가의 기사들이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퍽!
“윽!”
그것은 분명 신음 소리였다. 여자인지 어린 소년이 내는 것인지 모를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제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곳으로 말을 몰았다. 모여 있는 사람들 틈 사이로 쓰러진 소년이 보였다. 소년의 발목에는 밧줄이 묶여 있었다.
“어디서 도둑고양이처럼 이곳을 염탐해?”
“너 말이야, 여길 어떻게 알았어!”
병사 한 명이 쓰러진 사람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이놈 봐라, 설마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이 소년의 몸을 더듬었다. 어느 한 지점에 손이 머물자 그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야, 너 여자였냐?”
그에 이를 갈던 기사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소년, 아니,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때까지 제드는 별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지나치려고 했다. 이곳의 병사들과 충돌해 봤자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자신의 기사들이었으면 반 죽여놓았을 거라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이 계집, 그 여자 기사 아니야?”
“여자 기사?”
“그 이슈타르인지 뭔지 하던 계집 말이야.”
“그년이라면 지금 한참 칼 휘두르고 싸우고 있겠지 왜 여기에 있겠어?”
“아니야. 공작 각하를 염탐하러 왔을지도 모른다고. 봐, 몸이 여자치고 부드럽지 않잖아. 이거 다 근육일걸.”
그들은 낄낄거리며 여자의 몸을 주물렀다. 여자의 팔은 뒤로 묶인 상태였으며 그 희롱에 그녀의 몸이 수치심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희롱 방법도 참신하군. 더러워서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어.’
보다 못한 제드가 나서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그때까지도 제드는 그녀가 겁에 질려 떨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잡혀 있던 여자가 몸을 희롱하던 남자의 손을 꽉 물었다.
제드는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이 빛난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러했다.
“아악!”
“이 변태 새끼들이! 어딜 함부로 더듬어? 어?”
“이년이!”
그가 손을 얹자 기사의 배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마치 야생마같이 날뛰는 여자를 보며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아악!”
“따흐흐흐윽! 거긴!”
여자는 묶여 있는 상태에서도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 크게 악을 내지르며 온몸을 이용해 남자들을 공격했다.
생각 외로 여자는 쉽게 제압되지 않았다. 곳곳에 그녀에게 당한 남자들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심지어 어떤 남자는 급소를 맞아 땅을 뒹굴기도 했다.
그걸 보며 제드는 혀를 찼다. 적국에서 보는 참으로 진귀한 구경이었다.
한참 후에 그녀는 결국 제압되고야 말았다.
“이년, 진짜 에스텔 슈페르트 아니야?”
그녀가 머리를 들이받아 나가떨어진 남자가 말했다.
“맞아. 그러고 보니 머리색도 이상해. 머리색이 별빛 색이라던데.”
진짜 그 이슈타르인지 뭔지 하는 여자는 바반드 백작과 한참 전선에서 싸우고 있겠지.
제드가 들은 그 여자의 소식은 그러했다. 한데 그런 이슈타르가 왜 여기 있겠는가.
남자의 찌질함을 보다 못한 제드가 나가서 말했다.
“저 머리가 쥐 색깔이지 어딜 봐서 별빛 색 머리카락이라는 거지? 그 이슈타르인지 샛별인지는 저 여자가 아니야. 아니, 여자가 맞긴 하나? 내가 보기엔 천둥벌거숭이로 보이는데.”
그가 나동그라진 여자를 보고 말했다. 그에 여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기껏 구해주려고 하니까 저 눈빛은 또 뭔가.
“고, 공자님!”
기사 중 한 명이 자신을 불렀다. 그에 다른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라니, 무슨 소리야. 여기에 도련님이 어디 있다고?”
“여, 여기 방문한 사람 있잖아.”
“아, 그 얀스가르의 하인트 공자 말인가?”
당연하겠지만, 그가 방문한 것은 비밀로 해야 마땅했으며, 다분히 말조심을 해야 할 일이었다. 저런 무해해 보이는 여자 앞이라도.
얀스가르의 하인트 공자라는 말을 들으니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 결국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버렸군.
제드는 혀를 찼다. 이걸로 저 여자의 목숨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선 저 여자는 가둬두고, 공작께 그대들의 말실수를 말한 뒤 처분을 맡기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공작의 영지민에 대한 권리는 내 손에 없으니 말이야.”
“고, 공자님.”
“그러리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여자에게 손대지 않을 기사도는 있다고 믿겠어.”
그가 눈빛으로 나지막이 경고를 보냈다. 그는 전장에서 일어나는 더러운 짓거리들을 극렬히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제드는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니 라흐시 백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드는 아까 보급소에서 목격한 일을 말할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가 말해봤자 즉결처분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면 보고가 올라올 터였고, 여자는 처형당할 것이다. 자신의 말로 인해 여자가 죽는 것은 참 기분 더러운 일이었다.
제드는 소파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그저 공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라흐시 백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연무장에서 얀스가르의 기사들을 보고 왔습니다. 과연 다르더군요.”
“대련이라도 벌였던 모양이군요.”
잠시라도 가만있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하는 놈들이니.
“얀스가르와 얼샤의 차이가 어디서부터 생기는 건지 잘 알았습니다. 기사들의 기강부터가 다르더군요. 검술 또한 이곳 기사들 중에선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이곳에 온 기사들은 대부분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로 얀스가르 내에서도 뛰어난 이들입니다. 이곳 기사들의 수준이 낮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아마도.”
굳이 아마도라는 말을 붙인 것은 아까 그 저급한 작태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에 라흐시 백작이 피식 웃었다.
“말을 가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얼샤의 기사들은 이것보다 더 최악이니까요.”
“그 이슈타르라는 기사도 있지 않습니까?”
“그 기사 말입니까?”
라흐시 백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시토라 기사단은 얼샤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단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최악의 기사단이기도 하지요.”
그는 씁쓸히 웃었다. 제드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전쟁을 하면 알게 모르게 이들의 입장도 귀에 들리게 된다. 시토라 기사단이 국왕의 앞잡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백작께서는 이슈타르를 직접 본 적이 있습니까?”
“수도에 오던 날 아주 우연히 딸아이와 멀리서 본 적은 있습니다만,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습니다. 저 같은 시골 귀족이 국왕 직속 기사단을 볼 기회는 많이 없지요.”
“그렇군요.”
여자인데 기사라, 한 번은 보고 싶긴 했다. 어차피 전장에서 어떤 형태로든 부딪히게 되겠지만. 제드는 심드렁히 생각했다.
“그 기사가 그렇게 뛰어나나?”
“검으로는 얼샤의 일인자였던 가브라인 공작이 직접 가르쳤던 인재입니다. 시토라 기사단을 창설했을 때 파비아누스가 보검까지 하사했다고 하죠. 현 가브라인 공작과 검술이 비등하다고 하더군요.”
어찌 되었든 나라를 배신한 이에게 그 나라의 기사에 대한 칭찬을 듣다니, 굉장히 기분이 미묘했다.
라흐시 백작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공자,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십시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제드는 라흐시 백작을 아주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그가 보아온 결과, 이 영지가 이토록 유지되는 것은 라흐시 백작이 익서스 공작을 보필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보좌관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 집 여식을 얀스가르의 귀족 중 마땅한 분과 맺어지게끔 힘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겨우 그것입니까?”
제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라흐시 백작이 말했다.
“전쟁이 휩쓸고 간 얼샤는 분명 참담할 겁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얼샤가 아닌 얀스가르의 귀족이 되어서 사는 게 이 아비가 해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면서 걱정 어린 표정으로 제드를 보았다. 제드가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 같습니다만.”
“역시, 그렇습니까.”
“아니, 그쪽 영애가 만족해할 만한 신랑감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백작께서는 꼼꼼한 사람인데 영애 역시 그러지 않겠습니까?”
라흐시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클린이 그러긴 합니다.”
“그럼 국왕 전하께…….”
그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문을 보았다.
“배,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지금 공자께 이런 무례를 저지르고.”
“에, 에스텔 슈페르트가 감옥을 탈출했습니다!”
“뭐?”
“오늘 감옥에 들어온 계집이, 에스텔 슈페르트였던 겁니다!”
에스텔 슈페르트? 무슨 개소리지?
그가 라흐시 백작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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