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두 이방인
2018.02.12.
따스한 품에서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배려하듯 배려하지 않는 듯 허리를 꽉 껴안은 손길.
루시펠라는 그 안에서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꾹 참아오던 마음이 그 온기에 터지고야 말았다.
얼샤를 다니며 그녀가 느꼈던 감정은 그야말로 절망뿐이었다.
풍요로워진 물자, 발전된 도시, 희망이 깃든 사람들의 눈동자.
도시를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는 이전 얼샤가 어떤 상태였는지 똑똑히 깨달았다.
라흐시 공작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도시의 영주들, 심지어 잠깐 들렀던 마을까지도 사람들은 얼샤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에스텔에 대한 말은 빠지지 않고 나왔다.
어리석은 국왕, 부패한 귀족, 절망과 포기로 삶을 연명했던 국민.
그리고 국왕을 보호했던 어리석은 여자 기사 에스텔.
얼샤가 멸망했어야 할 수많은 이유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눈에 보였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에스텔 슈페르트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어야 할 이유 따윈 애써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살았던 삶은 잘못된 것이다.
그녀는 괴로워했다.
더욱 고역이었던 것은 제드의 얼굴을 매일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에스텔의 실체를 몰랐을 리는 없다.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었던 것일까. 그녀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왜 그는 라흐시 공작의 말에 동의했던 거지? 에스텔은 그에게 어떤 사람이었던 것일까.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사는 목적이 뭐냐고 물어봤고, 에스텔은 그런 목적이 없는 것 같은 그를 비웃었다. 제드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어리석음과 모순을.
그런 최악의 기사인 에스텔이 사실 자신의 약혼녀, 루시펠라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그녀를 그대로 사랑할까, 아니면 경멸할까.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이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사람. 언제나 사려 깊게 배려해 주는 사람.
루시펠라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변함없는 그의 친절과 애정을 볼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도망을 계획했다. 그저 단 한 순간이라도 이 모든 것들과 떨어져 있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 좋은 장소에 도착했다.
가브라인 공작령이었던 도시 메리벨. 에스텔이 자주 돌아다녔던 장소였다.
심지어 시기도 적절했다. 별의 강이 가장 맑게 보일 때 이들은 축제를 벌이며 이슈타르를 경배한다. 그 축제 한복판에서 루시펠라는 제드로부터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익숙한 에른 숲으로 들어가 바로 고목으로 향했다. 고목에 깃든 마력이 밤 짐승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정 시간 동안 머물러 있으면 고목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일시적으로 사람에게 스며들어 고목에서 벗어나도 안전했기에, 안전하게 숲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곳은 에스텔이 자주 왔던 장소였다. 왜냐하면 이 고목 아래서 밤을 지새우면 세상과 동떨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에스텔은 가끔 이곳에서 샛별이 뜰 때까지 앉아 있고는 했다.
혼자 있는 건 편안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쓸쓸했다.
에스텔이었을 때처럼 언제나 옆에 있어주던 이도 없었고, 루시펠라였을 때처럼 그녀의 곁에 당연하다는 듯 머물던 이도 없었다.
고목 아래서 턱을 괸 채 앉아 하늘에 별의 강이 떠오르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싸우던 전사들이 죽으면 아스트라의 품에 안겨 별이 된다지.
그렇다면 자신이 이렇게 다시 살아난 이유는 아스트라조차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최악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루시펠라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녀는 가슴을 쥐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따뜻한 바람은 어느새 서늘함을 품었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하나둘 늘어날 때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제 선택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모처럼 온 얼샤였다. 이것은 유일한 기회였다.
그녀가 루시펠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옛 동료들을 찾아갈 기회. 에스텔로 조금이나마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루시펠라는 자신이 나온 도시 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제드는 화를 내며 도시를 이 잡듯 뒤지고 있겠지. 레이디인 그녀가 혼자 떨어져 이렇게 도시 바깥으로 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여기서 떠난다면, 이제 그와 다시는 못 보게 된다.
자신에게 웃어주던 그 모습.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음료를 사오라는 말에 툴툴대던 모습. 그게 마지막인 것이다.
그 사람과 이렇게 헤어진다고?
제대로 된 인사 없이, 이대로?
순간 울컥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팔찌를 꼈다가 화들짝 놀라서 바로 다시 뺐다.
그녀는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자책했다. 다행히 순식간에 저질렀던 일이라 제드도 눈치를 못 챘을 것이다.
그때, 푸른 반딧불이의 빛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뜬 채 반딧불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맘때쯤 반딧불이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수가 모여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 그래, 너희들, 마력에 감응했지.”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이상하게 많았다. 그 많은 반딧불이가 일제히 고목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루시펠라는 뒤돌아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전, 그녀는 칼리드와 이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땐 칼리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 녀석은 가라앉아 있었다.
왜 칼리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는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자 친구였는데.
어쩌면 그 녀석도 자신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녀는 자조했다.
그러다 갑자기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제드가 서 있었다.
그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다 울었나?”
제드가 루시펠라에게 물었다. 루시펠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제드는 함께 고목 앞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히끅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제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울음기를 가라앉히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감자 아직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제드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손가락이 볼을 쓸고 엄지가 젖은 눈 아래를 훑어 내렸다.
그 다정하고 따스한 애정이 어린 손길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숙였다.
“왜?”
“생각해 보니까 얼굴이 엉망일 것 같아서. 눈물 콧물에, 애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제드는 그것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건 마치 엉망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가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루시.”
“응.”
“말하지 않아도 돼.”
“…….”
“그대가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
“…….”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루시펠라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을 쫓아온 그는 화를 냈다. 심지어 상처를 받았음을 드러냈다.
루시펠라는 처음으로 그의 약한 면을 목격했다. 그것을 본 그녀는 자신이 제드에게 얼마나 최악의 사람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결국 이 사람은 자신을 외면하지 못했다.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그녀는 또 그를 답답하게 만들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이기적이었다며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이 사람이 품은 마음은 얼마나 깊은 것일까.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기온이 내려갔다. 루시펠라는 숲속의 찬바람을 맞으며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에 떠오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을 보며, 루시펠라는 그동안 망설였던 질문을 마치 생각났다는 듯 툭 꺼냈다.
“라흐시 공작 말이야. 에스텔 슈페르트에 대해 이야기했어.”
제드는 루시펠라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녀가 평범한 수다를 떤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으니 그 기사처럼 멍청한 기사는 없는 것 같더라.”
루시펠라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으나, 제드는 루시펠라가 한참을 울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제드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당신의 생각은 어때? 당신은 그때 클로렌스가 열었던 티 파티에서 그 기사를 옹호했잖아. 그런데 라흐시 공작이 최악의 기사라고 말하니까 또 동의했고. 어느 쪽이야?”
“내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가?”
“궁금해할 수도 있잖아. 그러면 안 돼?”
루시펠라가 얼마나 긴장하는지도 모른 채 제드는 고개를 젓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라흐시 공작의 말에 동의했던 건, 공작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그녀였기 때문이야.”
그에 루시펠라의 두 눈이 커졌다.
자신이 그 사람을 죽였다고? 라흐시라는 이름이 귀에 익다고 생각했는데 그 탓인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최악의 기사겠지. 그 말에 굳이 맞춰주지 않을 필요가 있나? 그러고 보니 이유가 궁금하기는 하군. 그렇게 최악의 기사라고 하면서 그녀를 따라 하는 이유가 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경한다는 건가?”
제드는 더 말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긴 듯 별을 보았다. 루시펠라는 다시 조급해졌다.
제드가 ‘최악의 기사’라는 말에 동의한 이유는 라흐시 공작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럼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분명히 그 기사의 삶은 얼샤를 더욱 황폐하게 한 것과 다름없는데?”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그녀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순간 루시펠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너무 파고들었던 것일까? 수상하게 보일까?
“영애는 상당히 그 기사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군. 영애도 그 기사가 마음에 들었나?”
“어, 어머니가 얼샤 출신이어서 그래. 그쪽도 관심이 있어 보여서 그렇고.”
루시펠라가 볼을 빨갛게 물들더니 더듬거렸다.
제드는 ‘그쪽도 관심이 있어 보여서’라는 말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피식 웃었다.
“생각을 하고 간언을 했어야 했다. 라흐시 영애가 그렇게 말했다지?”
루시펠라의 시선이 흔들렸다.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에 제드가 말했다.
“신경이 쓰여서 말이야. 그대가 라흐시 공작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자세히 알려달라고 했거든.”
“어…….”
“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는 그대에게 관심이 많아.”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그 기사가 싸워왔던 방식은 어리석지. 그녀가 했던 행동이 얼샤의 멸망에 기여했을 수도 있고 말이야. 그렇지만 나라의 멸망에 그 기사가 그렇게 큰 기여를 했다고?”
“…….”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는 픽 웃으며 신랄하게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오면서 얼샤의 귀족을 얼마나 많이 봤지? 그때 그 인간들은 뭘 하고 있었지? 국왕의 철퇴가 무서워 입을 닥쳤다고? 평민 출신의 에스텔 슈페르트가 간언을 하면 국왕은 그 말을 들었을까, 아니면 반기를 든 그녀의 목을 잘랐을까.”
“…….”
“평민이고 여자인 기사는 죽어서도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군. 역사서에도 여자의 실책, 멍청한 평민의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적힌 채 조롱당하고, 똑같이 침묵한 이들은 이렇게 살아남아 자기 잘못도 되돌아보지 않고 그녀를 비난하지.”
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잘못에 대해 나열하자면 끝이 없어. 아내가 얀스가르라는 뒷배를 짊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아내를 때린 미친 국왕은? 예전부터 멍청한 짓을 해오던 이곳 귀족놈들은? 영주에게 복수를 한답시고 무고한 레이디를 짓밟았던 영지민은?”
루시펠라는 그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얼샤의 멸망은 에스텔 한 사람의 죄가 아니다.
귀족이 멋대로 권력을 휘둘렀고, 국왕 역시 그것을 방관했다. 나라 전체가 그렇게 병들어갔다. 에스텔만의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소타 황녀 전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녀가 분명히 도움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몰라.”
이것은 루시펠라가 자기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이며, 제드가 변호해 주길 바라서 하는 말이었다.
참 간사하기도 하지. 루시펠라는 자기 스스로를 비웃었다.
“영애는 황제 폐하가 그 폐왕이 미친놈이었다는 걸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나?”
“어?”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이 무슨 말이지? 그렇다면 황제는 알면서 황녀 전하를 얼샤에 시집보냈다는 말인가?
“황녀 전하가 있어서 폐하가 얼샤를 침략하지 않았다고 했지. 하지만 글쎄, 어떤 생각으로 그분을 그곳으로 보냈는지는 폐하만이 아시겠지.”
그는 비꼬듯 중얼거렸다. 그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루시펠라는 제드가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지 알았다. 제드는 얼샤의 귀족뿐만이 아니라 자국의 귀족들, 심지어 황제에게도 상당히 신랄했다.
그때 제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여자가 어쩌면 파비아누스의 고양이가 맞을지도 모르지.”
제드가 피식 웃었다.
“내가 나라에선 전장의 흑사자니 뭐니 불려도, 복속된 국가에서 얀스가르의 개, 또는 학살자 또는 까만 고양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그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까만 고양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루시펠라가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내가 봐온 에스텔 슈페르트는 부와 권력을 위해 싸워오던 사람은 아니야. 나라를 지킨다는 단순한 신념에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쳤지.”
루시펠라는 그에 입을 다물고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때, 제드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떻지?”
“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목숨을 내던진 기사의 삶이 진정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갑작스럽게 날아온 질문에 루시펠라의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삶,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삶. 그것이 진짜로 잘못된 것일까?
그녀는 부를 추구하지 않았다. 권력 따윈 탐하지 않았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어렸을 적 밑바닥을 구르던 자신을 거둬 검을 가르쳐 주고, 삶의 의미를 만들어준 이 나라를 위해 검을 들었다.
나라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저 평민이었던 그녀에게 가난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상상 따윈 한 번도 해보지 못했으므로.
결국 국왕의 앞잡이로 남은 어리석은 기사가 되었지만, 그녀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워 목숨을 바쳤다.
에스텔 슈페르트의 삶은 잘못되었던 걸까?
루시펠라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아니. 아니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잘못 살아오지 않았다. 비록 잘못된 나라에서 살아왔지만, 그녀의 삶 전체가 잘못된 건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영애.”
제드는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는 루시펠라가 동의하자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에 루시펠라의 마음이 환하게 물들었다. 억눌려 있던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얄팍한 자기 위로일지는 몰라도, 그녀는 괜찮다고, 충분히 노력해 왔던 삶을 살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생각해도 상관없다. 그녀가 살아왔던 삶이 진정 그릇된 것이라도 상관없다.
오직 이 사람에게 자신의 삶이 헛된 게 아니라면, 그것으로 된 거다.
“하늘에서 그 말을 들으면 참 좋아하겠네, 그 사람.”
“글쎄, 얼굴도 딱 한 번 봤던 놈이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기분 나빠할 것 같은데. 저 하늘에서 날뛰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
무엇을 생각하는지 제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루시펠라는 억울했다. 대체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했기에.
“그 기사도 바보는 아니거든? 분명 기뻐할 거야.”
그녀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러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파란 반딧불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움직이자 반딧불이가 날아가 풀숲에 내려앉았다. 루시펠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예쁘다. 그렇지?”
제드가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풀숲에 자그마한 반딧불이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별이 꼭 지상에 내려온 것 같군.”
루시펠라를 찾느라 몰랐지만, 새삼 자각하니 이곳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움에 제드가 넋을 잃을 때였다.
루시펠라가 아릿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에스텔이 좋아했던 장소야.’
에스텔이었을 적, 검술을 수련하다가 이곳에 와 쉬고는 했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눈물겹도록 그리운 그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 자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가. 힘든 수련에도,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기사가 되었다는 것에 기뻐하며 방방 뛰었다.
분명 자신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떤 생각도, 고민도 없이.
그렇게 소녀는 검을 잡으며 자신에게 기회를 준 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다. 그 끝이 어찌 될지도 모르고.
루시펠라는 그 머릿속에 에스텔의 과거를 지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밤의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빛나고 있는 그 모습이 눈에 보였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장소에 제드라는 이방인이 들어와 있었다. 어째서인지 생전 그녀가 있던 곳에 그가 서 있는 게 신기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얼샤의 기사였던 에스텔의 마음이 적국의 기사였던 제드를 사랑하는 것은 말이 안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스텔의 삶을 긍정하며, 그녀의 삶이 훌륭하다 말해주었던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당신에게 내 삶이 그토록 가치 있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얻은 내 삶은 당신과 함께해야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제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그의 입꼬리도 부드럽게 올라갔다.
“제드, 그거 알아?”
무언가를 묻는 듯한 시선에 루시펠라가 귓속말을 하려는 듯, 그의 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마치 엄청난 비밀을 말할 것처럼 진지한 표정이었기에 제드는 몸을 기울여 루시펠라의 키에 맞춰주었다.
“내가 정말 많이 당신을 좋아해.”
풀벌레가 찌르르거리는 소리도, 밤 짐승들의 울음소리도, 바람이 이따금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서늘한 소리도 그녀의 은밀한 고백을 방해할 수 없었다.
제드는 멍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좋아한다고? 아니면 그냥 자신이라는 인간의 성격이 좋다는 건가?
막상 그녀가 진짜로 고백하고 있음에도 제드는 그것을 쉽사리 눈치채지 못했다.
이해를 하지 못한 듯, 혼란스러워하는 제드의 표정에 루시펠라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귓속말로 했는데, 설마 못 들은 건 아니지?”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많이 좋아한다지 않았나? 그러다 제드는 문득 든 생각에 표정을 굳히고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미소가 서려 있었고, 그 눈빛에는 분명 자신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설마……. 루시펠라가 어떤 말을 했는지 그제야 깨달은 그의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다.
“그럴 리가. 제대로 들었어.”
제드의 표정을 보며 루시펠라는 가슴이 벅차왔다.
어쩌면 자신은 제드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에스텔의 마음으로 그를 거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행복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술과 입술이 벌어지고, 서로 열기를 교환한 그들은 더욱더 몸을 밀착했다.
서늘한 바람에 고목의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풀벌레 울음소리가 더욱더 밤을 짙게 물들였다.
그렇게 에스텔의 장소에 들어온 이방인은 입을 맞추었다.
이 순간, 그녀 역시 또 다른 이방인, 루시펠라가 되어 그와 숨결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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