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폭발
2018.02.08.
“축제가 열린다고 해.”
루시펠라가 눈을 번쩍 뜨며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여주는 그녀의 미소였기 때문이다.
도우비 남작은 이 근방이 이때가 되면 축제철이라고 했다. 이유를 설명해 주었던 것 같으나, 잘 기억이 나진 않았다. 어쨌든 축제를 한다는 게 중요한 거였다.
“벌써? 아, 지금이 그 시기지?”
“뭐?”
그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 물어볼까 생각했으나 제드는 자신의 용건이 먼저였다.
“나가서 같이 구경할래?”
제드의 제안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이내 루시펠라는 입가에 살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는 그 얼굴을 보니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축제에 대해 도우비 남작이 무슨 말을 더 언급했는지 생각했다.
뭐라더라? 고목이 어쩌고 말했던 것 같은데.
제드는 루시펠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몰랐다.
“단둘이 나가는 건 어때?”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생각을 멈추며 되물었다.
“단둘이?”
“사람들이 많이 가는 건 싫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단둘이 나가자. 귀족인 거 티 내지 말고.”
제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둘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꽤나 괜찮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런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건 거추장스러웠다.
역시 축제를 가자고 하길 잘했다고 제드는 생각했다. 그 얼굴을 본 루시펠라가 말했다.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지?”
“그냥, 여러 가지로 다.”
제드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을 무시했다. 나중에 제드는 그것이 루시펠라의 미소에 홀렸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축제를 나가는 날까지는 놀랍도록 평온하고 잔잔했다. 그녀의 하녀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루시펠라 역시 간만에 활기차게 무슨 옷을 입고 갈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주머니를 따로 준비해 돈까지 제대로 챙겨간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드!”
축제 당일, 외출하러 나온 제드는 루시펠라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그녀는 평민 여성이 주로 입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려 하늘색 리본으로 묶고 있었다.
상기된 새하얀 얼굴, 미소를 짓고 있는 붉은 입술.
제드는 새삼 루시펠라의 외양이 상당히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낯뜨거운 말이지만 그녀에게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느꼈어도, 그건 외모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상당히 예뻤기에 그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숨기려고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여기 얼굴을 가리려고 로브도 챙겨왔어.”
“잘했어.”
제드는 그녀가 생각보다 이 축제를 기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즉 이런 것에 신경을 쓸 걸 그랬다.
그는 루시펠라가 생각보다 축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이런 특이한 데이트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제드가 루시펠라와 손을 잡으려 하자,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대신 그녀는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는 어색함을 느꼈다. 지금 이 모습은 누가 봐도 연인인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잘 다녀오세요.”
버나드를 비롯한 기사들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다 알고 있다는 표정에 제드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축제라고 해서 사실 특별할 건 없었다.
온갖 도시에서 몰려온 사람들은 가판대에 물건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물건을 사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또 어느 곳에서는 음유시인이 노래를 하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기이한 곡예를 벌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흥겨운 음악,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 그야말로 전형적인 축제의 모습이었다.
“행복해 보인다.”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년에 얼마 되지 않는 축제를 즐기며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진짜 행복해 보여.”
그 말에 어째서인지 서글픔이 배어 있어 제드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잘못 느낀 건가? 제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드, 저것 좀 봐! 새가 말을 하고 있어!”
루시펠라가 소리치며 손을 끌자 제드는 그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루시펠라는 모여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억지로 들어갔다.
“말하는 새네. 말하는 새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진짜? 저건 마법이 아니야?”
“전서구처럼 훈련하는 거야.”
루시펠라가 김이 샜다는 표정을 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는 음유시인처럼 이야기하거나 공을 잡아 바구니에 넣는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신기해라.”
루시펠라가 중얼거렸다. 사실 전쟁 통에 여러 나라를 다니며 몇 번 본 것이라 그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루시펠라가 제드에게 말했다.
“그렇게 지루하면, 음료수라도 사오는 게 어때? 나 목마른데.”
“뭐?”
설마 지금 자신에게 음료를 사오라는 것인가.
제드가 눈썹을 찌푸렸으나, 모처럼 보이는 활기찬 그녀의 얼굴에 한숨을 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그대, 아니, 널 혼자 두라는 거지?”
“바로 앞이잖아. 그리고 내가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사람인 줄 알아?”
그녀가 팔찌를 흔들어 보여주자 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음료를 사러 갔다.
그가 위생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도 모른 주스를 사 들고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을 때였다.
없었다.
루시펠라가 없었다.
제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는 루시펠라와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팔찌를 들어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팔찌를 잃어버린 상황에 처했거나 그녀가 팔찌를 일부러 제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제드의 직감은 어쩐지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축제에 나가자는 말에 평민처럼 하고 나가자고 했던 루시. 이상할 정도로 친근했던 모습.
“저…….”
그때, 누군가가 제드를 불렀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평민 남자가 어색한 표정으로 제드 앞에 서 있었다.
“아까 여자 일행분이 이걸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는 종이쪽지를 바라보았다.
―금방 돌아올게.
제드의 두 눈이 서서히 분노로 물들기 시작했다.
***
“그래서, 찾았나?”
“아직입니다. 경비대 측에서 따로 연락 온 것도 없고요.”
도시 한복판에서 말을 탄 제드는 기사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으나, 그의 옆에 있는 기사들은 알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다는 걸.
제드의 분노를 눈치챈 기사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옆에 있는 남작 역시 그의 눈치를 힐끔 보며 경비대들을 더 채근하고 있었다.
제드는 그 쪽지를 몇 번이고 눈으로 훑었다. 급하게 쓴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리 준비되었던 쪽지다. 그 말인 즉, 이것은 그녀가 미리 계획했던 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장난이라면 참으로 고약한 장난이었다.
제드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민폐를 끼치기 싫다면서 이것만큼 커다란 민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만약 잡으면…… 잡으면 어떻게 할까. 그는 자신 안에 떠오르는 온갖 흉포한 상상을 하며 자조했다.
자신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쓰레기였다. 너무나 커다란 분노 아래 이성을 되찾지 못하고 이렇게 분노하는 것을 보면.
팔찌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녀의 행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참으로 미칠 노릇이었다.
어떻게 그 도시에 처음 와본 사람이, 그것도 언제나 틀어박혀 있던 레이디가 지금 이 시각까지 경비대에 발각되지 않는 것인가.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스쳤다.
말!
그녀는 기마의 귀재였다.
제드의 머릿속에 섬뜩한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녀가 아예 이곳을 벗어나려고 한다면?
제드를 비롯한 모두는 루시펠라가 이 도시를 벗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타국이었고, 낯선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대는 루시펠라였다. 그녀는 평범한 레이디가 아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루시펠라가 만약 말을 타고 도시를 벗어났을 경우를 생각했다.
“남작, 어느 성문으로 가야 가장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지?”
“네? 지금 이 시기라면 북문이군요. 한데 그건 왜…… 설마?”
“확실하지는 않네. 우선 마시장에서 그녀의 행적을 찾아봐 주게. 분명 좋은 말을 가져갔을 테니,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는 말 머리를 돌리며 같이 있던 기사 둘을 데리고 북문으로 향했다.
남작이 뒤에서 무어라 말했으나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축제 때문에 길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따라서 말이 달리는 속도는 자연히 느려졌다.
어느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도시의 밤거리가 알록달록한 등으로 더욱 화려하게 물들었다.
제드와 기사들이 성문을 통과했다. 그러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곳은 제드가 예상하던 그냥 ‘길’이 아니었다.
이 길은 바로 숲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안전한 길이 숲이라고?
숲은 여자 혼자 여행하기 위험한 구역이었다.
마물이 나타날 수도 있고, 마물이 없으면 들짐승들이 인간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노릴 수도 있었다.
남작이 잘못 알려줬음이 틀림없다.
기사들 역시 난감한 표정이었다. 제드는 혀를 차며 이를 갈았다.
“경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 남작에게 다시 어느 방향인지 물어보도록 해.”
제드는 자신을 따라온 기사 중 한 명에게 명령했다.
축제로 혼잡한 성문을 셋이서 들어가기엔 시간이 너무나 걸렸다. 차라리 여기서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제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숲을 보았다.
그의 옆에 있는 기사가 흉흉한 기세를 뿜는 제드의 눈치를 보았다.
그때였다.
제드는 팔찌에서 강한 진동을 느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볼 때 팔찌가 사라졌다.
그에 제드의 머리가 곤두섰다. 이곳에 그녀가 있는 것이다. 진동이 강하게 울리다 사라진 거라면, 아마도, 분명 팔찌를 꼈다가 뺀 것이리라.
제드는 재빨리 숲으로 말을 급하게 몰았다. 그에 기사가 황급히 제드의 뒤를 따랐다. 밤의 숲에는 불이 필수였지만, 그는 루시펠라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때, 제드는 딱히 횃불을 챙겨오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특이하게도 새파란 빛덩이들이 숲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덕분에 어두웠음에도 숲은 낮처럼 환했다.
“이게 뭐죠?”
“반딧불이야. 여긴 특이하게도 푸른빛을 띠는군.”
제드는 그것에 감탄할 시간이 없었다. 루시펠라를 찾아야만 했다.
“신기하군요. 반딧불이들이 꼭 길 안내를 해주는 것 같습니다.”
제드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란 반딧불이들은 마치 제드를 안내해 주는 것 같았다.
제드는 자신의 팔목 주변에 날아오는 반딧불이들을 보았다. 반딧불이들이 팔찌에 내려앉았다.
“마력 탓인가?”
제드가 중얼거렸다.
이 반딧불들은 신기하게 마력에 감응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반딧불들이 있는 끝에 루시펠라가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드는 망설이지 않고 반딧불들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숲속 깊숙이 들어가자, 코를 찌르는 꽃향기가 났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자 꽃에 달라붙어 반짝이고 있는 반딧불의 불빛이 보였다.
제드는 그중 반딧불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장소를 발견했다.
그것은 거대한 고목이 서 있는 곳이었다.
반딧불이들이 달라붙어 푸르게 빛나는 그 고목 앞에서 제드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단장님, 저기!”
“알고 있어.”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검은 머리 여자도.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이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아직 그녀는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게. 기사들에게 다시 쉬라고 전하고.”
그의 명령에 뭔가를 말하려던 기사는 제드의 눈빛을 보고 조용히 말 머리를 돌렸다.
말에서 내린 제드가 기척을 죽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거리를 좁히자, 그녀는 그제야 인기척을 눈치채며 뒤를 돌아보았다.
“……!”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게 서 있었다. 도망칠 생각 따윈 하지 않는 듯했다.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도망치려 했다가는, 정말 자신이 미쳐서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제드가 루시펠라 앞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그의 적갈색 눈에는 명백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가 간신히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이렇게 빨리 날 찾을 줄은 몰랐어.”
그에 제드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를 과소평가한 모양이로군.”
“그런 말이 아니었어.”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이유는?”
제드의 물음에 루시펠라가 제드의 눈을 피했다. 그러더니 그녀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어.”
“혼자 있을 시간? 그대는 사람을 물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위치였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혼자가 될 수 있었지.”
“그게 진짜 혼자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겨우 혼자 있을 시간을 위해서 이렇게 도망쳤다는 건가? 그것도 나와 함께하고 있을 때?”
그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루시펠라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긍정하는 듯한 그 표정에 제드는 자신의 억눌러 왔던 이성이 뚝 끊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눌러 왔던 감정이 격랑처럼 휘몰아치며 결국 폭발했다.
“그대는 대체 나를 무엇으로 보고 있었던 거지?!”
“…….”
소리를 치면 무서워할 걸 안다. 이런 곳에서 자신이 화를 내는 건 충분히 위협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말의 이성조차도 제드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녀를 배려할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억누르고 또 억눌러서 그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그대가 말해줄 순간을 기다렸고, 말해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
“…….”
“영애가 날 믿게 하려고 난 그간 노력해 왔어! 영애의 마음을 얻고자. 그거 하나 구걸하기 위해서!”
“…….”
“영애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지. 아무것도 납득시키려 하지 않지. 영애의 곁에 있고 싶은 것은 나였으니, 그 또한 내가 짊어져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나를 떠나지는 말았어야지…….”
루시펠라의 두 눈이 커졌다.
제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은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이게, 영애에게 바친 내 마음에 대한 대가인가?”
철저히 무너져 내리는 사람을 보며 루시펠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던 남자가 상처받았다.
바로 자신 때문에.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철저하게 깨달았다.
이것은 제드가 억누르고 배려해 왔던 마음에 대한 가혹한 배반이었다.
연인처럼 미소로 위장하며, 그를 속이고 기만했다.
루시펠라의 눈물을 본 그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왜 운단 말인가? 무엇이 억울해서? 무엇이 그리도 서글퍼서?
저 사람은 지금껏 단 한 순간도 자신을 배려한 적이 없었는데.
자신이 품은 마음 따윈 저 사람에겐 깃털보다 더 가벼웠을 텐데.
제드는 그녀가 가증스러웠다. 그는 사람을 이렇게나 증오한 적이 없었다.
“나는…….”
루시펠라는 입을 열었다.
제드는 그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입에서 적어도 진실이 나오길 기다리며, 그렇게.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흘린 채 그를 외면할 뿐이었다.
제드는 그것이 답임을 알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마음을 품어야 하는가? 제드는 처음으로 자신이 품은 감정에 후회했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지.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녀가 관계를 끊어내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자신 역시도 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런 이기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이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면 될 일이었다.
사랑을 주는 이는 사랑을 받길 원한다. 그는 되받길 원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하며 인내해 왔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되돌아올 수 있는 마음을 갈망했다.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귀하게 여겨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 끝은 명확했다.
그가 루시펠라를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며 등을 돌릴 때였다.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어.”
“…….”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단 말이야. 아무것도,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어!”
루시펠라가 소리쳤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다가 서늘한 비웃음을 지으며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등 뒤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끝까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는 그녀로부터 멀어져 갔다.
“……흑.”
그 순간 그는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녀가 주저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를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이 꼭 자신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제드는 그 고통을 외면하기라도 하려는 듯 소리쳤다.
“영애, 나도 언제까지고 참을 순 없어!”
“…….”
“참으려고 했지만, 이제 난 영애를 원해! 영애의 모든 걸 알기를 원한다고!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까! 영애를 사랑한다고, 마냥 인내할 수 있다는 소린 아니란 말이야!”
그는 숨을 헐떡이며 다시 등을 돌려 걸었다.
제길, 가려면 그냥 가지 왜 마지막에 구차하게 소리를 쳐서는.
그가 얼굴을 찌푸릴 때였다.
그는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바로 등 뒤에 훌쩍 다가온 그녀의 기척을 느꼈다.
울음을 꾹 참은 채 흐느끼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제드는 그에 다시 꿋꿋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제기랄!”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참지 못하고 루시펠라를 와락 껴안았다.
그것을 신호로 루시펠라가 억지로 틀어막던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
그것은 마치 아이가 목놓아 우는 것처럼 솔직했으며 처연했다.
루시펠라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신기하게도, 그동안 느껴졌던 답답함이, 그녀의 배신에 느꼈던 분노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루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더욱 꽉 끌어안았다.
흐느끼는 그녀의 눈물이 그의 가슴팍을 적셨다.
“루시, 루시.”
그에 그녀가 더욱더 서글프게 흐느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더 강하게 팔에 힘을 주었다.
절박하게 매달리는 손길, 터뜨리는 눈물은 분명 그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참고 있던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도 무언가를 참고 있었던 것이다.
제드는 그녀가 혼자 외롭게 우는 것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관계에서 절대적인 약자였으므로.
관계를 끊어내는 건 결국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사랑이라는 그 애매한 것의 본질을 깨달았다.
절대로 이성적으로 헤아리며 계산할 수 없는 것. 보답받지 못해도 이타적이게 될 수밖에 없는 참으로 불공평하며 불합리한 감정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허리를 껴안은 그 작은 손길 하나에, 품어왔던 서운함과 분노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키기는 이미 늦어버렸다.
만약, 마음을 끊어냈어야 한다면 지금이 아니라 훨씬 전이었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고 자신 안에서 몰아치는 감정을 애써 진정시켰다.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렇게 자신의 곁에서 마음을 터놓고 운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는 그 빌어먹을 불합리한 감정을 그녀에게 품고 있었으니까.
제드는 그녀를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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