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최악의 기사 (1)
2018.02.01.
“그 말에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영애는 그 여자를 좋게 본 것 같은데, 놀랍지 않으세요?”
“여자가 거기까지 올라가는데 그런 소리가 안 나올 리가 없죠.”
정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루시펠라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아니, 그것을 대단한 비밀씩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우스웠다.
그러나 그런 말을 막상 듣자 루시펠라에게서는 그다지 좋은 소리가 나가지는 않았다.
“어머, 영애도 에스텔 슈페르트를 동경했나요?”
라흐시 공작의 물음에 루시펠라는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자신을 동경한다고 말하니 이것 역시 참 낯 뜨거웠지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라흐시 공작이 납득했다는 표정을 했다.
“영애, 같은 여자인 제가 그런 대단한 사람을 그리 박하게 평가할까요? 다시 말하지만 저도 에스텔 슈페르트를 꽤나 동경했어요. 심지어 멀리서 보기까지 했죠.”
라흐시 공작은 자신이 입고 있는 바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여자는 언제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검을 들고 싸웠어요. 모든 나라의 기사들에게 귀감이 되는 정말 훌륭한 기사였죠.”
대체 왜 칭찬은 하면서도 에스텔에 대해서 그런 막말을 하는 거지?
루시펠라가 드러나지 않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실상은 에스텔 슈페르트가 지킨 건 나라가 아니라, 국왕이었어요.”
“…….”
“권력의 앞잡이였던 거죠.”
루시펠라의 눈에 분노가 담겼다.
권력의 앞잡이?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면서 저렇게 함부로 말하다니. 그녀는 초인적인 인내로 분노를 참았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하네요.”
그래서 루시펠라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이런 말뿐이었다.
“지금의 얼샤가 바로 그 근거죠.”
“그게 무슨 말이죠?”
“영애는 모르겠지만, 얀스가르에 복속되기 전 얼샤는 지옥이었거든요.”
루시펠라가 예상했던 ‘이유’란 기껏 국왕이 여자인 그녀를 다른 의미로 가까이했다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라흐시 공작이 멸망 전 열샤의 상태를 말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황했다. 얼샤가 지옥이었다는 것은, 루시펠라 역시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모든 이가 헐벗고, 굶주리고,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마차로 영지를 나갈 때면 몇 개씩 보였어요. 특히나 폐왕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영지를 지나칠 때는 시체 썩는 악취가 코를 찔렀죠.”
라흐시 공작이 지금까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얼샤는 그런 황폐한 나라였다. 소수의 귀족만 부를 누리고, 에스텔을 비롯한 빈민이 다수였던 나라. 그게 얼샤였다.
“귀족들은 착취하고 왕은 그런 착취를 방관했어요.”
“왕이 방관했다고요?”
“파비아누스 국왕은 참으로 최악의 국왕이었어요. 대놓고 패악을 부리던 아들, 아렌트 국왕보다 그 음습함이 더욱 끔찍한 사람이었죠.”
“…….”
“국왕에게 반기를 드는 귀족들은 모두 국왕으로부터 숙청당했습니다. 파비아누스 국왕이 만든 시토라 기사단으로부터.”
시토라 기사단.
자신의 기사단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가 움찔했다.
“보우셋, 아이오타, 클레셋,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보려고 노력했던 자들이 허망하게 반역죄로 몰려 사형당했어요.”
그 가문의 이름은 기억났다. 반역을 일으켜 멸문한 자들이었다.
“그들 덕분에 그나마 얼샤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수도 귀족들은 모르고 있었죠.”
“반역을 저질렀다는 게 사실이 아니었던 건가요?”
“영애도 아시잖아요. 정적을 제거할 가장 편리한 수단은 반역죄예요. 다 죽어가는 영지민들을 데리고 어떻게 반역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요.”
라흐시 공작의 단호한 말에 루시펠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속에서 스멀스멀 불쾌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흐시 공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루이르크 공께서 그렇게 끝낸 것도 나쁜 결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입에서 칼리드가 나왔다.
루시펠라는 ‘그렇게 끝냈다’는 게 에스텔의 목을 베고 얀스가르에 항복했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게 잘했다고? 자신이 살해당했다는 게 나쁜 결말이 아니라고?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참 이상하군요. 배신이 좋은 건가요? 기사가 나라를 배신했다고 하는데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분노에 떨리고 있었다. 라흐시 공작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혀를 차며 말했다.
“칼리드 루이르크 공작이라면 그래도 돼요.”
“배신해도 되는 사람이 있고, 배신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따로 있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편하게 ‘배신자’라고만 부른다는 거예요. 얀스가르에서도 루이르크 공작은 배신자라고 불린다면서요?”
라흐시 공작의 말에 루시펠라가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아누스가 루이르크 공께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했는지 안다면 그렇게 쉽게 배신자라는 말은 못 할 거예요.”
“그 끔찍한 행동이라는 게 대체 뭔데요?”
“궁금하세요?”
루시펠라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흐시 공작은 얼샤의 귀족이었으며, 얼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작의 말이 사실인지,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루시펠라는 칼리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었다.
“시토라 기사단의 구성원들은 다양했어요. 귀족의 사생아, 무술 대회에 높은 성적을 거둔 평민들, 사고를 친 기사들. 소위 말하면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파비아누스는 루이르크 공을 그 기사단에 부단장으로 넣었죠.”
칼리드는 그걸 상관하지 않았다. 국왕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시토라 기사단에서 칼리드는 잘 지내고 있었다. 역시나 라흐시 공작이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민 여자가 단장인 곳에 부단장으로 루이르크 공작 각하를 배치하는 것. 영애도 아시잖아요, 파비아누스는 그분을 가지고 논 거예요.”
라흐시 공작은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루시펠라는 그들의 사정이 어떤지 모르지 않냐고 반문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파비아누스 국왕이 몰랐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검만 들고 나라를 지켰던 에스텔은 알 수 없었지만, 얀스가르 중심부에서 귀족이 무엇인지 그들 사회에 대해 학습한 루시펠라는 보였다.
이것은 명백한 은유적인 조롱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괜찮으면 괜찮지’라고 에스텔처럼 가볍게 생각할 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단장이 된 이유는 국왕이 진짜 자신을 봐주기 때문이 아니었단 말일까?
“처음부터 얼샤라는 나라는 내겐 쓰레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
칼리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에스텔, 왜 한낱 평민 여자였던 네가 기사가 된 것일까? 왜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비아누스 선왕은 널 그 자리에 앉혔을까.”
그게, 설마 이런 이유였다고?
루시펠라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주먹을 꾹 쥐고 동요를 숨겼다.
“그래서 동료와 나라를 배신했다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죠. 진짜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어요.”
라흐시 공작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루시펠라의 심장이 불길함으로 세차게 뛰었다. 무슨 이유가 남아 있단 말인가.
“파비아누스가 가브라인 공작을 살해했기 때문이에요.”
“뭐라고요?”
“가브라인 공작이 파비아누스에게 암살당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죠.”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떴다.
파비아누스 국왕에게 가브라인 공작이 암살당했다고?
그 사람 좋던 할아범이? 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점입가경이었다. 배신한 귀족들이 서로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변명일 것이다. 그녀는 애써 자신을 안심시켰다.
“……근거가 있나요?”
“국왕은 일부러 숨기려 들지도 않았어요. 가브라인 공작은 마물을 토벌하러 나갔다가 죽었거든요. 그 죽음에 의혹이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았던지요. 죽였다고 대놓고 드러냈던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군사를 원조해 주기로 했던 그 지방 영주는 어째서인지 군사 지원을 거부했고, 그래서 선대 가브라인 공작이 이끌던 기사단은 모두 마물에 몰살당했다고요. 그리고 몰살당한 이들은 가문의 사생아로 이루어진 기사가 대부분이었죠.”
“…….”
“참 대단하게도, 그 아들인 루이르크 공작이 있었던 시토라 기사단도 그런 ‘똑같은’ 경우가 많았다는 거예요. 그래도 꿋꿋이 살아남은 걸 보면 그 여기사의 실력도 무시할 수 없었던 거지요.”
그에 루시펠라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지원을 약속해 준 귀족들의 변심. 도주.
시토라 기사단에 있을 때 숱하게 겪어왔던 일이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던가. 없던 일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심지어 에스텔 역시 작정하고 자신들을 죽이기로 했나 생각할 정도였다.
한데 그것이 사실 의도된 것이었다고?
가브라인 공작의 아들인 칼리드를 죽이기 위해서?
유독 시토라 기사단에게 강도 높은 임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에스텔은 그것이 국왕의 신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임무란 그만큼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했다.
“대체 왜요?”
루시펠라가 물었다. 라흐시 공작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야 가브라인 공작가가 최후에 남은 왕족이었으니까요.”
“고작 그 이유 때문이라고요?”
“그 이유 때문이라도 사람은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또 다른 왕족은 왕권에 위협이 되니까요.”
루시펠라는 검에 매진했던 그 남자, 가브라인 공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검을 제대로 알려준 사람, 칼리드 아버지인 일카이 가브라인.
그는 절대 바깥에 나가지 않았으며, 정치와 관련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에스텔은 그가 자신처럼 검만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모든 것은 이유가 있다.
단어 하나, 행동 하나하나도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루시펠라가 배워온 사교계의 법칙이었다.
테미르와 이오지프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같은 형제라도 권력을 위해 서로 싸운다. 하물며 먼 친척이라면 더 가혹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 부정할 수도 없게 정황이 이렇게 맞아떨어져 가는가.
루시펠라는 미약하게 입술을 떨었다.
“시토라 기사단이 계속 살아남자 파비아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시토라 기사단을 가까이 두기 시작했어요.”
아니야, 그건 왕이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국왕의 명령에 복종했다는 것은 곧 그를 위한 검이 되어, 결국 그의 권력을 지켰다는 소리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모르느냐는 힐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시펠라는 라흐시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런, 충격이었나요? 아니면 산뜻한 아침에 나눌 대화로 나라의 멸망은 별로 유쾌한 주제가 아니었을까요?”
루시펠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흐시 공작이 웃으며 말했다.
“레이디의 환상을 깨는 거라 정말 미안하군요. 하지만 전 에스텔 슈페르트에 대해 동경하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요. 구역질이 나거든요, 그 여자.”
“……대체 그 여자는 왜요?”
왜? 만약 그렇다고 해도, 파비아누스 국왕의 탓이 아닌가? 그런데 왜 유독 자신을 미워하는가?
“아이딘 영애가 생각하던 대로 그녀는 기사 중의 기사였어요. 여자임에도 갑옷을 입고 검을 휘두르며, 나라를 지킨다고 외치고 다니던 사람이 어찌 멋있지 않겠나요? 사람들 사이에서 이슈타르라고 불리던 게 당연해요. 몇몇 여자의 꿈이기도 했어요.”
“…….”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어리석고 아둔했어요. 파비아누스 국왕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했죠.”
“…….”
“정작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면, 국왕을 그렇게 두어서는 안 되었죠. 적어도 왕에게 간언해야 했어요. 국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대체 왜 나라를 지키는 거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지 않는 이상, 그녀는 국왕이 아끼는 애완동물에 불과해요.”
“……그녀에게도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그녀의 변명이었다. 당연히 그녀에게도 생각이란 게 있었다.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단 하나의 진심이 있으면 통할 거라는 생각.
나라를 바꿀 수는 없지만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생각.
최소한 그런 생각으로 그녀는 자신을 불살라 살아왔다. 그녀는, 애완동물이 아니었다.
“생각이 있었으면 전쟁이 벌어지게 두지 않았겠죠.”
라흐시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생각이 있었다면, 같은 여자를 그렇게 죽게 두지 않았을 거예요. 불쌍한 이소타 황녀님.”
이소타라는 말을 듣자 루시펠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되었다.
“같은 왕궁에 있었고, 레이디를 지키는 기사라면서, 왜 이소타 님은 지키지 못했던 거죠?”
왕비 이소타. 언제나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던 조용한 여자.
왕비로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이따금 에스텔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물처럼 잔잔하고 고요한 사람이었다.
“여자 기사라고요? 여자 기사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요. 그렇다면 그 여기사는 왕비님이 돌아가실 때 대체 무엇을 했던 거죠?”
“…….”
“왕비님, 아니, 이소타 황녀께서 폐왕 아렌트에게 폭력을 당해 돌아가셨을 때 무엇을 했느냔 말이에요!”
루시펠라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말했다.
“얼샤에서는, 그게…… 사고라고 주장했는데요.”
“그게 거짓이라는 모두가 알고 있었어요! 심지어 그 여자도. 이소타 왕비는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 대단하신 여기사는 무엇을 한거죠?”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여기사가 무엇을 했냐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소타 왕비 전하의 팔에 멍이 들어 있었어.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국왕 전하가 왕비 전하를 학대한다고 해. 국왕 전하가 그 짓거리를 멈추도록 해야 해!”
“에스텔, 안 돼.”
“왜 안 되는 건데? 어떻게 연약한 여자를 때릴 수가 있지? 할아범도 왜 그렇게 전하를 막 키우신 거야! 우리가 막아야 한다고.”
그녀가 알현실 쪽으로 몸을 돌리자 칼리드가 에스텔의 손을 잡아 돌려세웠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소타 왕비님의 의사가 먼저야. 그녀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어?”
“아니.”
“도움을 청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섣불리 나서겠다고? 그건 왕비 전하께 커다란 결례야.”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 전하의 성정은 잘 알잖아. 네가 그렇게 말해봤자 전하는 바뀌지 않아. 이소타 전하께 먼저 찾아가 봐. 도움을 먼저 청해야 네가 도와줄 수 있는 거야.”
칼리드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왕비 전하의 침전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녀는 혹시나 국왕 전하께서 폭력을 쓰지 않는지 물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그러나 이소타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경께서 저를 걱정해 주시다니 매우 영광이네요. 하지만 전 괜찮답니다. 팔에 멍이 든 것은 제가 넘어졌기 때문이랍니다. 체통 때문에 애써 숨기려고 했던 건데, 다 들켜 버렸네요.”
“그랬던 겁니까?”
“걱정은 너무 고마워요. 호사가들은 전하의 권위를 훼손하기 위해 이런 상처 하나도 자극적으로 과장해서 말하고는 하지요.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이소타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지요?”
“네, 물론이에요.”
아무 일도 없었구나, 에스텔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아렌트가 가끔 고함을 지르며 물건을 부순다는 소리를 들어도, 왕비의 침전에 가 싸웠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믿었다.
아무 일도 아니겠지. 하긴, 강대국 얀스가르의 공주가 어떻게 그런 일을 당하고 살겠어.
심지어 그녀는 왕비만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녀는 너무도 많은 것을 해야 했다. 시토라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죽은 파비아누스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그러나 에스텔은 이따금 이소타가 죽은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에스텔은 자신의 앞에 죽어 있는 이소타를 보았다. 참혹한 시체의 살결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추락사라고 했다. 국왕이 이소타와 같은 방에 있었다고 했지만, 아렌트 국왕은 사고라고 주장했다.
사고다.
이것은 사고다.
아니, 반드시 사고여야만 했다.
아렌트 국왕이 아비인 파비아누스와는 달리 포악하긴 하지만 아내를 밀어서 떨어뜨릴 위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뛰어내렸다고 하더라도 국왕 아렌트에게 책임이 없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분노한 얀스가르의 국왕이 얼샤에게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전쟁, 우리도 바라던 바였다! 얀스가르 놈들, 잘난 척만 해대고. 우리도 우리의 기사가 있어! 우리에겐 이슈타르가 있단 말이다!”
적어도 국왕이 얀스가르에 용서를 빌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수 있었다.
차라리 나라를 바쳤다면, 그랬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자존심을 꺾고 싶지 않아 했다.
그는 입에 침을 튀기며 주장했다.
“그것은 사고였어! 지금 전쟁의 명분을 잡았다고 그러는 거다! 바이두에게 전하라! 네놈의 야욕을 내 여기서 꺾어주겠다고!”
그렇게 전쟁이 벌어졌다.
수도 안의 모든 사람이 얀스가르의 군대가 얼샤를 짓밟을 거라고 했다. 침략자들은 얼샤의 국민을 살해해 피로 강을 만들고,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모든 것을 앗아갈 거라고 했다.
에스텔은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당연히 검을 빼 들었다.
얀스가르인들은 이소타 왕비를 아렌트가 죽였다고 했다.
그러나 얼샤의 기사들은 모두 그것을 ‘사고’라고 말했다.
설령 그것이 진짜로 사고였더라도, 이소타 왕비를 아렌트가 죽였음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얀스가르와 전투를 벌이며, 생과 사를 가르는 전투에서 전쟁의 원인 따윈 쉽게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전쟁은 상실을 만들었고, 상실은 적군을 증오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우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다. 얀스가르라는 나라로부터 얼샤를 지키겠다.
나라의 국민이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싸우리라.
그렇게 에스텔은 검을 들고 싸웠다. 나라를 지키는 기사로서, 죽을 때까지 찬란하게.
“그렇게 나라를 지키고 싶었으면, 국왕에게 저항했어야 했어요. 간언을 올려야만 했던 거죠.”
“…….”
“권력의 앞잡이로 행동한 기사가 어떻게 현명한 기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얀스가르와 전쟁에서 그 여기사가 승전보를 거두면 거둘수록 나라는 더욱더 황폐해져 갔어요.”
루시펠라는 그때를 떠올렸다.
전쟁에서 승전보를 울리고 당당히 성문 안으로 행진할 때, 사람들은 그녀를 이슈타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분명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일까?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최악이라죠. 에스텔 슈페르트가 그랬어요. 신념은 올곧았는데, 그녀가 휘둘렀던 검은 나라를 더욱더 끔찍하게 만들었어요.”
에스텔이 보았던 나라. 거리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배가 고파 죽어 나뒹굴던 시체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왔던 것인가?
“나라의 국민이 들고일어나 귀족의 목을 얀스가르에 바쳐 성문을 열 정도였는데 그 여자는 끝까지 저항했죠. 겨우 나라 하나를 지키겠다는 신념 앞에, 그게 얼마나 끔찍한 행동인지 그 여자는 몰랐을 거예요.”
나라의 국민이 반란을 일으켜 영주의 목을 바치고 성문을 개방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텔은 그들이 비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들을 원망했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는 얀스가르에 가담한 귀족들까지 처단하기 시작했죠.”
라흐시 공작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라흐시 공작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루시펠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국왕의 명령에 따라서 쓸어버린 몇 개의 도시가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여자 기사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나요? 동경할 이유도 높게 평가할 가치도 없는 여자예요.”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흐시 공작의 말대로라면 에스텔 슈페르트는 친구로서도, 기사로서도 최악의 인간이었다.
그녀 없이 행복을 되찾은 얼샤가 그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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