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대화
2018.01.29.
“농이 지나쳤던 것 같군요. 미안해요, 영애.”
“네, 조금 지나치셨어요.”
루시펠라가 웃으며 말했다.
라흐시 영애가 루시펠라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루시펠라의 직접적인 말에 그녀 역시도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더 이상 시비 걸 생각이 없는 듯 미소를 지은 뒤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루시펠라도 똑같이 포크를 들었다. 하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아 포크만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나요?”
남작부인이 물어보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음식은 훌륭해요. 다만 오랜만에 이런 식사를 접하니 몸이 받지 않는군요.”
정말이었다. 이곳의 요리는 훌륭했다. 그럼에도 음식을 먹는다면 얹힐 것 같았다. 그녀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먼저 일어나 봐도 될까요?”
그녀의 얼굴은 누가 봐도 창백했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일어나지.”
제드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각하께선 조금 더 식사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직 다 드시지 않았잖아요?”
“몸이 안 좋은 약혼녀를 두고 식사를 할 한심한 놈으로 보이나?”
제드가 그 말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루시펠라가 그에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라흐시 공작을 보니 그녀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인을 시켜 방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길은 알고 있으니 괜찮소.”
제드는 남작의 호의를 거절하고 루시펠라의 손을 잡아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나가기 전, 식탁에 앉아 있는 남작 부부는 왠지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특히 남작부인의 얼굴은 꼭 신혼부부를 바라보는 아주머니 같은 표정이었다.
루시펠라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많이 아팠던 건가?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군.”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저었다.
“몸이 아프다기보다는 피곤한 거야.”
루시펠라가 대답했다. 제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한참 동안 단둘이 복도를 걸었다. 제드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영애,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뭔데?”
“영애는 질투 같은 건 안 하나?”
“질투?”
루시펠라가 걸음을 멈추고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돼.”
“응?”
“참으로 유치한 짓을 했어.”
“잘 안 들렸어. 다시 말해봐.”
그러나 그는 다시 말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해 그녀를 앞섰다.
그녀는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질문의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질투라니? 게다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뒷말은 또 뭐란 말인가. 그래도 물어봤으니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아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당연히 질투하지.”
그에 제드가 눈을 크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을 질투해.”
“나?”
제드는 의외의 대답에 당황해했다.
이번에는 루시펠라가 걸음을 빨리해 그를 지나쳤다. 제드가 재빨리 그녀를 따라잡으며 말했다.
“영애, 지금 아무 말이나 한 거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 말에 제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시선을 피했다.
거짓이 아닌데, 루시펠라는 괜히 찝찝했다.
루시펠라가 제드에게 강렬하게 가졌던 감정은 애정이 아니라 질투였다.
사실 아직도 그녀는 그의 단단한 육체를 볼 때면 부러웠다.
그가 다시 루시펠라의 손을 잡고 말했다.
“라흐시 공작이 영애에게 자꾸 시비를 걸더군.”
“내가 못마땅한가 보지. 상관없어. 계속하라고 해.”
루시펠라는 라흐시 공작 이야기가 나오자 괜히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그녀는 목숨을 구해줬다는 일이 뭐냐, 그래서 어떤 사이였냐며 묻고 싶은 걸 참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어딘지 거슬렸기 때문이다.
“영애, 나는 영애 편이야.”
“누가 뭐래?”
루시펠라의 퉁명스러운 말에 제드가 미소를 지었다. 제드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영애, 기분이 안 좋으면 왜 기분이 안 좋은지 정도는 말해줘.”
“뭐?”
“영애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어.”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을 보았다.
“라흐시 공작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닌 거지? 영애는 그전부터 기분이 안 좋았으니까.”
루시펠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제드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루시펠라가 아니라 에스텔이 가진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제드는 루시펠라를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것이 이런 감정인 건가.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루시펠라 안에 있는 에스텔의 감정이었다.
복잡해 보이는 루시펠라의 표정을 본 제드가 말했다.
“방까지 바래다주지. 가서 좀 쉬도록 해.”
다정한 음성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제드도 분명 서운하겠지.
제드는 루시펠라의 손을 꾹 잡았다가 놓았다. 마치 미련이 남은 것처럼.
***
그녀는 풀밭 위에 앉아 있었다. 푸른빛을 띤 반딧불이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예쁘다, 에스텔.”
“그렇지?”
칼리드의 말에 그녀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풀밭에 내려앉은 반딧불이들을 보던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에스텔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정말 예뻐.”
가브라인 공작의 사후 얼마 되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칼리드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서렸다.
“하늘에도 별이 있고, 땅에도 별이 있네.”
칼리드의 말 대로였다. 어둑한 숲에 떠다니는 반딧불이들은 꼭 마치 별처럼 어두운 숲을 수놓았다.
“오늘은 별의 강도 잘 보여서 좋아. 그치?”
“맞아.”
칼리드가 미소를 짓더니, 거대한 고목에 다가가 앉았다. 그가 손짓하자 에스텔도 그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에스텔과 칼리드는 가만히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어색함이 없는 시간. 그들은 이 시간에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
그들은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와 날짐승들의 울음소리를 음악을 듣는 것처럼 즐겼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풀들이 부딪히는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도 저 별 중 하나가 되셨겠지?”
“분명 그러셨겠지. 아저씨도 아스트라께서 품어주실 만한 전사였으니까.”
에스텔의 말에 칼리드가 피식 웃으며 되뇌었다.
“아스트라께서 품어주실 만한 전사라…….”
에스텔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칼리드의 손가락이 붉은 흉성, 아레스에 향했다.
“저기 아레스다.”
“어디?”
에스텔이 그의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별을 보려면 그의 시야에서 봐야 했으므로 에스텔은 최대한 칼리드의 곁에 붙었다. 칼리드가 피식 웃었다.
그의 손끝을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에스텔, 그거 알아?”
“뭘?”
“아레스는 이슈타르의 힘을 질투해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하잖아.”
“응.”
“그런데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따로 있대.”
“진짜?”
그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저 남신 아레스는 첫째인 이슈타르의 힘을 질투해 세상을 불사르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들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였다.
“신전 측에서는 아무래도 깨끗하고 고결한 신화를 원하니 각색해서 전파했나 봐. 나도 어렸을 적 신관에게 들었어. 사실 내려오는 기록은 따로 있대.”
칼리드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에스텔을 바라보더니 다시 하늘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이번에는 에스텔도 알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긴 별의 강인데?”
“맞아. 너도 잘 보이지?”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드가 대답했다.
“별의 강에 몸을 담근 이슈타르를 우연히 보게 된 아레스가 그녀를 마음에 품은 거야.”
“엥? 둘이 서로 남매잖아.”
“신들에게는 혈연이 그렇게 중요하진 않지.”
“피조물들 입장에서 보면 좀 중요한데…….”
에스텔의 말에 칼리드가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슈타르는 자신의 동생의 마음을 거절했어. 아레스는 이룰 수 없는 마음에 괴로워하기 시작했지. 그러나 이슈타르를 강제로 가질 수는 없었어. 왜냐하면 그녀는 아레스보다 훨씬 강했으니까.”
“…….”
“그렇게 아레스는 꺼지지 않는 정욕의 불꽃 속에서 번민하고 고뇌한 끝에…….”
“끝에?”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불살랐다고 해.”
“…….”
“역설적이게도, 그런 아레스를 봉인했던 게 그렇게도 사랑했다던 이슈타르였지.”
그 말을 들은 에스텔이 말했다.
“그거 완전 미친놈이네.”
그 말에 칼리드가 큭, 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그는 상체를 숙이며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에스텔은 꼭 자신이 바보 취급당한 것 같아 칼리드의 등을 퍽 치며 나무 기둥에 기댔다.
“내 말이 틀렸냐. 신이라고 해서 별거 없다니까. 사랑하는 이가 자길 사랑해 주지 않아요∼ 라고 괴로워하다가 기껏 생각해 낸 게 세계 멸망? 열다섯 먹은 놈도 거기까진 생각 안 할 거다. 더 노력할 생각을 해야지.”
“그런가?”
칼리드가 에스텔의 눈을 보았다. 그는 어느새 웃음을 멈춘 뒤였다.
“그렇지.”
“나는 아레스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뭐?”
“때로 속에 담아두기 너무나 커다란 마음이 터져 버리면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기도 하지.”
그의 입에는 웃음기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두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에스텔이 눈을 깜빡이며 의아한 표정으로 칼리드를 보며 말했다.
“난 안 그러는데?”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칼리드는 미소 지으며 에스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스텔은 칼리드의 얼굴에서 기묘한 선뜩함을 느꼈다.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 커지면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거야.”
그녀가 눈을 깜박이고 칼리드의 얼굴을 다시 볼 때, 그는 여느 때처럼 따스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루시펠라는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얼샤에 오고 난 뒤에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저번에도 그 녀석의 꿈을 꿨는데.”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시 잠들까 생각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누워 있어봤자 그 녀석 생각밖에 더 하겠는가.
어슴푸레한 새벽빛만이 방 안에 깔려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해가 뜰 모양이다.
루시펠라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공기를 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루시펠라는 하녀를 부를까 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숄을 걸친 채 바깥을 나섰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성은 조용했고, 따라서 루시펠라의 걸음 소리는 복도를 울렸다.
그녀가 건물 바깥을 빠져나올 때였다.
“빨리 일어나셨군요, 아이딘 영애.”
루시펠라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보았다. 라흐시 공작이 서 있었다.
“이 아침에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신가요?”
“저는 아침엔 체력 단련을 하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체력 단련이라니, 놀랍지 않으세요?”
“아니요, 저도 하는걸요.”
루시펠라의 말에 라흐시 공작이 웃었다.
“설마 산책을 체력 단련이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루시펠라는 그에 얼굴을 굳히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뚝뚝 묻어나는 자신감은 어딘지 모르게 거슬렸다. 마치 너와 나는 다르다고 하는 것 같은 느낌.
그녀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꼭 예전 에스텔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예전 부끄럽게도, 체력 약한 레이디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걷는 것도 체력이 약한 사람에게는 일종의 단련이죠. 체력 단련이라는 게 꼭 거창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루시펠라의 말에 라흐시 공작이 눈을 크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우리 여자끼리 같이 산책이나 할까요? 영애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아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피하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 바깥을 돌며 새벽의 찬바람을 쐬었다. 생각보다 일찍 나왔는지 아직도 해가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그녀가 남자처럼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인트 공작과는 정략적으로 약혼하신 건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물음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건 제드에게 물어보지 왜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인지. 그녀는 괜히 아침에 밖에 나왔다고 후회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 말에 루시펠라가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글쎄요.”
그녀가 말을 빙글빙글 돌려 말하자 루시펠라의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하인트 공의 약혼녀라면 좀 더 특이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영애는 정말 평범한 레이디처럼 보이네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제가 저만이 가진 특별함을 제 약혼자가 아닌 각하께 보여 드려야 하나요?”
루시펠라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에 라흐시 공작의 입꼬리가 덩달아 올라갔다. 무언의 기세 싸움에 그녀가 잔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거 정말 이길 수가 없군요. 영애를 화나게 한 것 같아 미안해요.”
계속 루시펠라를 은근히 건드렸던 것에 비해 시원한 수긍이었다.
“영애도 눈치챘다시피 전 하인트 공작 각하께 호감을 품고 있었어요. 그분께 신세를 졌거든요.”
“어떤 신세요?”
“자세한 건 비밀.”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루시펠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에 라흐시 공작이 웃었다.
“죄송해요, 이제 그만할게요. 제가 자꾸 이렇게 행동하면 하인트 공께서 화를 내시겠죠. 현명한 행동은 아닐 거예요.”
그녀의 웃음에 루시펠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라흐시 공작이 말했다.
“별로 관심이 없는 표정이신데요, 영애?”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여서요. 그만하신다면서 이것도 제게 도발이라고 느껴지네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요?”
“그냥, 이런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요?”
“저는 확실한 말을 좋아해요. 왜 이 이야기를 하신 건가요? 각하께서 제드를 좋아하니 제가 죄책감을 가지라는 건가요? 아니면 이렇게나 멋진 남자를 좋아하니, 제가 황송해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 말에 라흐시 공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과연,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니 제가 할 말이 없군요. 영애는 확실히 특별한 사람이네요. 아까는 실언했어요. 영애는 제가 보기에도 남다른 사람이에요.”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품평하는 것 같은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뭐가 그렇게 다른 것 같은데요?”
“제가 여자임에도 단 한 번도 각하라는 말을 빼먹지 않잖아요? 심지어 얼샤 사람도 보통 사람들은 제게 라흐시 영애라고 잘못 부르고는 하죠.”
“…….”
“게다가 영애의 눈, 절 보는 눈이 다른 사람과는 달라요.”
“…….”
“레이디들은 보통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더군요. 레이디의 미덕에 어긋난다고. 그런데 영애는 달랐어요. 과하게 추앙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죠.”
라흐시 공작의 말에 루시펠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특별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요?”
“에스텔 슈페르트라는 여자 기사도 배출해 낸 나라잖아요.”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건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이게 아니고서는 그녀가 편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해 줄 그럴듯한 이유가 없었다.
그에 라흐시 공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영애의 나라에서는 에스텔 슈페르트라는 기사가 무척 유명한 모양이군요.”
“유명한 편이에요.”
사교계의 영애들이 이름을 알 정도면 유명한 거겠지.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흐시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명할 만도 하겠죠. 여자임에도 기사단장 직에 올라 기사들을 이끌었고, 보통 기사들보다 강한 힘을 지녔다고 하니까요.”
“…….”
“저도 그 기사를 처음 봤을 때 무척 동경했어요. 은색의 갑주를 입고, 은색의 머리칼을 한 채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나라를 지키는 기사. 얼마나 아름다워요. 부끄럽지만 저는 에스텔 슈페르트가 되고 싶었답니다. 지금 이 모습도 그녀를 따라 한 모습이고요.”
루시펠라의 두 뺨이 붉어졌다. 라흐시 공작의 모습은 역시나 에스텔을 따라 한 것이었다. 괜히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그게 다 정말 자신을 보고 따라 한 거라니.
막상 자신을 동경하며 따라 했다는 말을 듣자 루시펠라는 머쓱해졌다. 심지어 그런 소리를 들으니, 마냥 들던 적개심과 짜증마저 사라졌다.
그녀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딘 영애는 그 여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네?”
갑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물음에 루시펠라의 말문이 막혔다.
루시펠라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나라에 충절을 지킨 기사? 여자임에도 강한 무력을 지녀 기사단장에 오른 사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막상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니 부끄러웠던 탓이다.
“그렇군요.”
라흐시 공작의 입꼬리가 꼭 비웃는 것처럼 올라갔다.
뭐지, 저 여자? 동경한다면서 왜 저런 표정을 지어?
루시펠라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얼샤를 끝까지 지킨 공로는 인정하죠. 기사로서 제 명예를 다했으니까요. 하지만 영애, 무언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에스텔 슈페르트는 충절의 상징이 아니에요.”
“무슨…….”
“에스텔 슈페르트는 얼샤의 이슈타르라고 불렸죠? 그런데 에스텔 슈페르트가 사실 뭐라고 불린 줄 아세요?”
그 두 눈에 서린 적의와 차가운 비웃음.
루시펠라는 깨달았다. 라흐시 공작은 에스텔을 싫어하고 있었다. 아니,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파비아누스의 잡종 고양이.”
“……네?”
“국왕이 예뻐하는 고양이였던 거예요, 그 여자.”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