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도발
2018.01.25.
도시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말을 탄 무리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더니 제드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인트 공작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루시펠라는 말에서 내려 허리를 숙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햇빛에 반사되어 주홍색 머리가 반짝거렸다.
“마중을 나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제드와 루시펠라를 둘러싼 기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루시펠라는 이 대치 상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혹 전투가 벌어질 시 어디로 피해야 방해되지 않고 안전한 장소에 갈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각하, 제가 기억이 안 나십니까? 라흐시 공작가의 가주, 재클린 라흐시입니다.”
“라흐시 공작가?”
라흐시?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루시펠라는 여자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주홍색 머리가 묘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저 여자를 본 기억이 없었다.
루시펠라 또래의 젊은 여자는 더운 여름,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제는 그 미소가 제드에게로 향한다는 거였다. 클로렌스가 제드에게 보여주었던 가식적인 미소와는 종류가 달랐다.
그에 루시펠라의 신경이 곤두섰다.
기억이 안 나냐는 말에 제드가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루시펠라 역시도 ‘라흐시’라는 이름을 어디에 들었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기억력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라흐시 공의 도시까지는 아직 한참인데 날 보러 왔다고?”
제드 역시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여자의 얼굴이 살짝 실망으로 물들었다.
“전후 이곳 국경 지대부터 카르나타 강 부근까지 황제 폐하께서 제게 영지로 하사하셨습니다. 혹 궁금해하실까 봐 폐하께서 수여식 때 내린 칙서를 가져왔습니다.”
그녀가 서류를 내밀자 버나드가 그것을 받아 들어 제드에게 전했다. 제드가 그것을 읽더니 말했다.
“틀림없는 황제 폐하의 인장이군.”
“네, 각하.”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왜 이렇게 미묘한 기분이 드는 걸까. 루시펠라는 초조해 애꿎은 말고삐만 꾹 잡았다.
제드가 기사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이 검을 집어넣었다.
“왜 여자가 작위를 받았는지 물어보지 않으십니까?”
“얼샤와 얀스가르의 상속법이 다르다는 건 진즉 알고 있지. 얼샤에 천 년을 내려온 법을 폐하께서도 바로 바꾸시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라흐시 공작의 물음에 제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얀스가르에서는 작위를 승계할 이가 여성밖에 없으면 가주가 생전에 지정한 남성 대리인이 가문의 여성이 사내아이를 낳을 때까지 작위와 가문에 대한 권한을 임시로 맡는다. 여성에게는 작위 승계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샤는 얀스가르와 다르게 여성에게도 작위 승계가 가능했다.
오래 이어져 온 법이라 바이두 황제도 바로 바꾸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제드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라흐시 공의 남동생은 당시 작위를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어리지 않았나? 이제 겨우 영식의 나이가 여섯이 되었을 것 같군.”
그에 그녀의 얼굴이 밝게 물들었다.
“드디어 제가 기억나시는 겁니까?”
“물론, 어떻게 잊겠나.”
물론이라고? 마치 당연하다는 투의 말에 루시펠라는 어이가 없었다.
뭐지,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
루시펠라는 이 낯선 감정이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라는 걸 그제야 자각했다.
“한데, 공은 내게 왜 존대를 쓰는 거지? 같은 나라의 공작 위를 가졌네. 서로 위계가 있는 건 좋지 않아.”
“그거야 공께서 제 목숨을 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얼샤, 아니, 조하르 지역의 공작이기 때문이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그녀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목숨을 살려줬다고? 그런 일이 있었나? 얼샤의 귀족과 제드 사이에?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연히 시찰을 나왔다가 각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보았습니다. 엇갈리지 않아 다행이로군요.”
제드는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다행이라는 건데? 그녀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잠깐.”
그녀가 말 머리를 돌려 앞으로 가려고 할 때 제드가 라흐시 공작을 불렀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제드가 말했다.
“내 약혼녀가 동행한다는 소식은 미처 듣지 못한 모양이로군.”
“악혼녀요?”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가 뒤를 돌아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뭐, 어쩌란 건가? 서로 인사라도 하라는 건가?
루시펠라는 제드 옆으로 말을 몰았다. 그녀와 라흐시 공작의 두 눈이 마주쳤다. 라흐시 공작은 미묘한 경계가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먼저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루시펠라 아이딘입니다. 공작 각하를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반갑긴 개뿔. 루시펠라는 그 말을 하면서도 클로렌스와 에레네 부인이 전수해 준 이 레이디의 가면이 견고함에 스스로 감탄했다.
“반갑습니다, 아이딘 영애. 레이디임에도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누구나 다 똑같이 고생하죠.”
루시펠라의 대답에 라흐시 공작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그녀는 루시펠라를 관찰하듯 훑어보았다.
“말을 잘 타시는 모양이군요.”
“부족한 실력입니다.”
“나중에 도시에 같이 오시면 꼭 같이 말을 타봅시다.”
“기대되네요.”
루시펠라의 말에 라흐시 공작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도시까지는 우리 가문에서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맨 앞으로 말을 몰았다. 루시펠라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루시펠라는 자신의 얼굴을 보는 제드의 시선을 느꼈다.
“무슨 일인데?”
루시펠라가 퉁명스럽게 묻자 제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방금 꼭 관찰당하는 것 같았는데. 이 인간은 또 왜 이러지?
“어디 기분이 안 좋나?”
“기분이 안 좋냐고? 왜 물어보는 건데?”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제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표정이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아서.”
“아, 라흐시라는 이름을 꼭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
“…….”
“왜?”
“아무것도.”
제드는 뭔가 김이 샌다는 표정을 하더니 말을 앞으로 몰았다.
싱거운 사람 같으니라고. 왜 저러는 거야?
루시펠라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툴툴거릴 때였다.
잠깐, 그렇게 앞으로 말을 몰면 라흐시 공작과 나란히 서게 되는 거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라흐시 공작이 속력을 늦춰 제드의 옆에 섰다.
“저, 저 인간이.”
나란히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루시펠라가 이를 으득 갈았다. 그녀도 속력을 높일까 했지만 반대로 말의 속력을 천천히 줄였다.
정말 얼샤의 도시가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대한 느릿하게 말을 몰았다. 울퉁불퉁한 길이 어느새 평평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도시의 성벽의 보였다.
망루에 서 있던 사람들은 라흐시 공작과 제드를 발견하고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루시펠라는 천천히 말을 몰아 성문을 지나갔다.
루시펠라는 멍하게 자신의 앞에 펼쳐진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말을 멈춘 상태였으나, 그 누구도 루시펠라를 재촉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낯선 도시의 풍경을 보고 넋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보다 이곳이 낯익었다. 그러나 이곳이 얼샤가 맞나? 그녀는 혼란을 느꼈다. 루시펠라가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볼 때였다.
“영애, 이곳이 얼샤야.”
제드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시펠라는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얼굴을 본 제드의 표정이 굳었다.
“어서 가서 몸을 쉬도록 하지.”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꾹 쥐었다.
이곳은 얼샤다. 하지만 에스텔이 아는 얼샤는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상당히 낯설었다. 보다 못한 제드가 물었다.
“왜 그러는 거지?”
“전쟁이 난 곳치고는 너무, 평화로워서.”
그때, 언제 왔는지 라흐시 공작이 옆에서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의 시장과 백성 모두가 항복했으니까요. 그만큼 피해도 덜 입었던 거죠.”
“그랬군요.”
얀스가르 놈들에게 패하면 그들은 얼샤의 국민을 모두 노예로 부릴 거라고 사람들은 주장했었다. 얀스가르 인들은 그들의 고혈을 빨아먹을 것이며, 거리에는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 가득 차게 될 거라고.
그래서 얼샤에 가기까지 루시펠라는 마음을 단단히 해야만 했다.
어쩌면 제드를 증오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시펠라는 도시에 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심지어 아주 가끔은, 괜히 따라온 건 아닌지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던 것일까.
이 도시는 그녀가 알던 일반적인 얼샤의 도시가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너무나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와 멀수록 더욱 낙후되었을 텐데도 이곳은 그녀가 살던 얼샤의 수도보다 더 발전해 있었다.
이런 도시가 있었다면 에스텔은 진즉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풍요로운 도시는 에스텔이 언제나 꿈꿔오던 곳이었으니까. 그 말은, 이 도시는 에스텔의 죽음 후 ‘발전’했다는 뜻이었다.
간간이 보이던 헐벗은 사람들도 없었고, 아이딘 백작령의 사람들처럼 모두 제대로 옷을 갖춰 입었으며, 먹을 것이 부족했던 거리에서는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라흐시 공작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라흐시 공작의 수행기사는 열 명 내외였다.
얼샤에서 귀족이 외출하려면 많은 호위기사가 필요했으나, 지금 라흐시 공작은 공작위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 여자임에도 소수의 기사만 대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만용이나 소탈함이 아니었다. 귀족과 평민의 사이에 증오와 살의가 존재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나라가 얼샤가 맞나?
그때, 라흐시 공작의 기사 중 한 명이 나팔을 불었다.
그에 길거리에 포진해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더니 자리를 비켜주기 시작했다.
루시펠라는 갈라진 인파가 내준 길로 조심스럽게 말을 몰고 주위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뭐야, 누구야?”
“라흐시 공작 각하래!”
“옆에 있는 분은 누군데?”
“하인트 공작 각하!”
“아, 그 전장의 흑사자 말인가?!”
소소한 수다가 루시펠라의 귀에 들어왔다.
루시펠라는 제드를 보았다. 얼샤인의 입장에서 얀스가르인, 그것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드는 원수였어야 했음에도 그들은 심지어 제드마저도 미워하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에스텔이었을 적, 마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가 떠올랐다. 성안으로 돌아와 행진했을 때 사람들은 저런 눈빛이었다.
제드는 그렇다면 얼샤 사람들에게 영웅이었다는 소린가.
달랐다.
너무도 달랐다.
왜? 얼샤는 전쟁에 패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이들은 전쟁 전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것일까.
루시펠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이 얀스가르보다 더 낯설었다.
***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씻어 개운했다. 향긋한 입욕제의 향기를 느끼며 루시펠라는 자신이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음을 깨달았다.
도시의 시장인 라스 남작 부부는 이미 연락을 받았기에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마쳐 두고 있었고, 그녀는 바로 목욕을 할 수 있었다.
“다리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됐어, 네 다리나 주물러.”
루시펠라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 누웠다.
“아가씨, 그렇게 하면 머리가 마를 때 눌리잖아요!”
로이자가 잔소리를 했다. 루시펠라는 그에 피식 웃었다.
가끔 하녀들의 염려를 받을 때면 루시펠라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함을 느끼곤 했다.
“상관없어. 나는 그냥 잘 거야. 푹 잘 거라고.”
“그러면 오늘 공작 각하와 그 여자 공작이 같이 만찬을 할 텐데요?”
“공작 각하와 여자 공작이라니, 같은 공작인데 누군 여자 공작이고 내 약혼자는 공작 각하고, 말 이상하네.”
루시펠라의 말에 로이자가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특이하잖아요? 여자가 공작이라니.”
“특이하긴 한데 이곳에서는 없던 일은 아니라서…….”
“네?”
루시펠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는 그대로 수마에 빠지려다 라흐시 공작과 제드가 같이 밥을 먹는 걸 생각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머리가 눌리면 안 되지.”
그것을 본 로이자가 루시펠라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미소를 지었다.
“아까 보니까 아가씨 기분 나쁘셨죠? 얼굴에 다 드러나던데.”
“내가 기분이 나빴다고?”
“네, 저는 알고 있었지요. 그 라흐시 공작 각하와 아가씨가 눈이 마주치는데 막, 꼭 기사들이 기세 싸움하는 것처럼 파바밧! 하는 기운이…….”
로이자의 말에 같이 있던 하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 안 했어.”
루시펠라가 부정했다. 라흐시 공작의 일도 기분이 나빴지만, 루시펠라를 흔들었던 건 이 도시의 풍경이었다.
“그래도 사실 신경 쓰이시잖아요?”
“그건 부정하지 않을게.”
루시펠라의 시원한 인정에 하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와서 앉으세요. 머리를 정성 들여 빗어야 만찬에서 예쁘게 보이죠. 드레스를 준비할게요.”
“이러려고 그 드레스들을 가져온 거야?”
루시펠라가 아무리 넣지 말라고 해도 하녀들은 기어코 편한 드레스가 아닌 연회용 드레스를 챙겨왔다. 그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니. 루시펠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드레스들을 입히지 말 것. 이건 명령이야.”
“네? 왜요?!”
하녀들이 항의하자 루시펠라가 말했다.
“그렇게 온몸으로 신경 쓰인다는 티를 내야겠어? 그런 건 하수나 하는 짓이야.”
“그래도……!”
“난 그런 거 안 입어도 예뻐.”
루시펠라의 단언에 하녀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차마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신경 쓰인다는 표시를 내면 그야말로 지는 거 아냐? 그는 내 약혼자인데 말이야.”
“그것도 그러네요.”
“그럼 자연스럽게 리본으로 머리를 땋는 게 어떨까요?”
하녀들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루시펠라는 묘한 표정으로 창문 쪽을 보았다. 루시펠라의 명령으로 창은 커튼이 쳐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만찬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라스 남작 부부는 사려 깊은 사람들이었고, 만찬의 음식도 훌륭한 편이었다.
루시펠라는 대화를 하며 라스 남작 부부를 보았다.
저들은 얀스가르가 쳐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한 이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저들은 얀스가르인인 제드에게 딱히 비굴하지도 않았으며, 속이 음흉해 보이지도 않았다.
루시펠라는 이상하게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항복하던 이들을 보며 비굴하다고 비난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렇게 비난받을 사람인가. 이들의 항복은 도시를 지켜냈다.
“그러고 보니 아이딘 영애, 얼샤 억양을 쓰는군요.”
“제가요?”
루시펠라는 라흐시 공작의 지적에 당황했다.
처음 루시펠라의 몸이 되어 다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나서부터 고치려고 공을 들였다. 그래서 이젠 완벽하게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슬쩍 제드의 얼굴을 보니 제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고 보니, 가끔 미묘하게 억양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얼샤의 억양이었군.”
루시펠라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제 어머니가 얼샤 태생이라서 그걸 따라 말하고 있었나 봐요.”
방금 생각해 낸 변명치고 상당히 훌륭한 변명이었다.
“얼샤 태생이었다고요? 백작부인께서?”
“네. 제 억양이 달랐다는 걸 저도 이제야 알았네요.”
루시펠라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 역시 납득하는 표정인지라 루시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수다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 분은 언제 약혼하셨나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네요.”
“벌써 1년이나 되었나?”
제드의 물음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드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사이가 정말 좋아 보이시는군요.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 올리실 예정인가요?”
남작부인의 물음에 제드와 루시펠라가 머뭇거렸다.
결혼할지 안 할지는 얼샤에 다녀오고 나서 결정하기로 했는데 결혼에 대해 말해도 되는 것일까?
“사정이 되는 한 빨리 할 생각입니다.”
결국 대답을 한 이는 제드였다. 루시펠라는 미소를 지으며 물을 마셨다. 그때 라흐시 공작이 입을 열었다.
“공작께서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내가?”
“듣자 하니 수도에서 인기가 많으시다고 하셔서요. 신붓감을 고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드가 그 말에 루시펠라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라흐시 공작을 보았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드가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었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머, 이런 말을 하면 영애가 질투할까요?”
라흐시 공작의 말에 루시펠라가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질투할 이유가 있나요? 과거의 일인데.”
이미 자신을 긁으려고 말한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게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루시펠라가 저런 도발에 넘어갈 이유는 없었다. 특히나 제드의 앞에서라면.
“불안하지 않으신가요?”
라흐시 공작의 물음에 그녀는 피곤함을 느꼈다. 그녀가 도발에 마지못해 응하려고 할 때였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꼭 영애를 불안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
제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라흐시 공작과 눈을 마주쳤다.
루시펠가 슬쩍 제드를 바라보자, 그는 적당히 하라는 경고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도 라흐시 공작이 루시펠라를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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