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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94화 (94/173)

#94화 우리, 잤어?

2018.01.22.

“부르셨습니까?”

에스텔이 뒤를 돌아보다 미소를 지었다.

“왔어, 칼리드?”

칼리드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는 환한 빛이 나고 있었다.

한없는 호의와 신뢰가 깃든 눈.

그러나 마지막 전쟁을 앞둔 그녀의 얼굴선은 지나치게 날카로웠으며, 눈 밑에는 거뭇한 피곤의 기색이 자리해 있었다.

“잠은 제대로 주무신 겁니까?”

“잠이 무슨 필요가 있다고.”

“그래도 자야지.”

칼리드가 편하게 말하자 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이 되었고, 어둠이 내려앉아 별이 뜬 하늘과 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언제쯤 얀스가르의 군대가 이곳에 도착할까? 일주일? 닷새? 내일? 아니면 지금?”

그녀의 중얼거림에 칼리드가 답했다.

“못 해도 닷새는 걸리겠지.”

“그래.”

에스텔은 일어서서 칼리드에게로 다가가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칼리드가 익숙한 듯, 그녀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칼리드.”

“응.”

“피곤해.”

“아까는 잠이 필요 없다면서. 지금이라도 자둬.”

“피곤해.”

“에스텔.”

“피곤해, 칼리드.”

그녀의 입에서 나온 약한 말이었다.

칼리드의 눈동자가 그녀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왜소한 어깨가 눈에 보인다. 누가 그녀를 이슈타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나라를 잃지 않기를 원하는 자들은 저 등에 모든 것을 기대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추악한 기만인지도 모른 채.

그리고…….

“나 말이야, 어떻게 될까?”

“…….”

“죽게 되겠지? 그렇다면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에스텔이 고개를 들어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듯했다.

에스텔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는 아마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르고 있겠지. 에스텔은 피곤함을 느끼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하다못해.”

“하다못해?”

“그 녀석이 날 죽여주면 좋을 텐데.”

“…….”

그에 부드러웠던 칼리드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 녀석이라니?”

“제더카이어 하인트 말이야. 그 건방진 놈.”

그 말을 들은 칼리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죽음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게다가 죽여달라는 사람이 적국의 기사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러나 에스텔은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다면 말이야, 그 녀석 손에 끝나고 싶어.”

“에스텔.”

칼리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가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에스텔이 씁쓰레 웃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냥 만약을 이야기한 거야.”

그녀는 뒤로 돌아 창밖을 보았다.

별들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하늘에 별은 평온하게 떠 있었다.

에스텔은 칼리드가 자신과 똑같이 창밖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은 줄도 모른 채.

칼리드는 핏줄이 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에스텔을 응시했다. 마치 그녀를 증오하기라도 하듯이.

***

루시펠라는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심지어 머리도 깨질 것처럼 아팠다.

왜 하필이면 그때의 꿈을 꾼 것일까. 죽기 얼마 전 그 녀석과 나눈 대화라니. 잠깐, 그런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었나?

그녀는 얼굴을 찌푸린 채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죽기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기억은 나는데, 거기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이다. 꿈속의 일처럼 사소한 일 같은 건 더더욱.

뭐, 어차피 죽었는데 그날의 행적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기분만 더럽지.

루시펠라는 다시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구역질이 나는 거지? 진짜 칼리드의 꿈을 꿔서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세우다 옆을 돌아본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제드가 누워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상체를 탈의한 상태였다.

생각해 보자. 대체 왜 저 녀석이 여기서 자고 있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자신의 천막이 맞았다.

왠지 식은땀이 났다. 이건 직감이었다. 자신이 무언가 엄청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

그녀의 시선이 제드의 입술에 다다랐을 때였다.

“키스해 줘.”

어젯밤,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맞춰오는 입술. 허리를 꽉 안은 팔. 뜨거웠던 그의 품. 밀려오는 행복.

“……서,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무분별하지 않았겠지. 설마 그럴 리가!

그녀는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지?”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손을 깨닫고 멈칫했다. 제드가 눈을 뜬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 맞다. 기사인 저놈이 이런 기척 하나 못 느낄 리가 없지.

그녀는 입술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밖에 나가려고.”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드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꼴로?”

“……어?”

제드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바라본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맨몸에 헐렁한 셔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헐렁한 셔츠 사이로 드러난 쇄골에 붉은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모를 리가 없다. 그녀도 스무 해가 넘게 어린애처럼 살진 않았으니까. 소위 말하는 ‘잠을 잔’ 사람의 흔적이 어떤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며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이런 미친…….”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던 제드는 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제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잤어?”

‘아니지, 아니겠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

“글쎄.”

제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뭐야, 자면 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는 혼란스러워하며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으,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무언가 조금이나마 생각이 났다.

그때, 그녀는 분명 덥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땀을 씻고 싶다고 생각해서 호수로 갔고, 그곳으로 제드가 찾아왔다.

루시, 라고 불리자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나 그를 유혹했다. 그래서 그와 키스를 했고.

젠장! 루시펠라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 모습을 본 제드의 눈썹이 더욱더 치켜 올라갔다.

“싫었나 봐?”

“기억 안 나!”

“본인이 유혹해 놓고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난 분명 피하려고 했어.”

“알아, 안다고!”

기억이 안 난다던 그녀는 제드의 말에 빽 소리치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걸 본 제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하녀들이 오기 전에 내 옷부터 돌려주지그래?”

“어?”

아무 일도 없었다고? 루시펠라가 고개를 들어 제드를 보았다.

“영애가 지금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게 증거가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린데?”

“나와 무슨 일이 있었다면 제대로 일어설 수나 있었을 것 같아?”

세상에…….

방금 대단히 자부심이 서린 위험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루시펠라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점검했다. 그렇게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몸은 멀쩡해 보였다.

“그렇군.”

루시펠라가 중얼거리자 제드가 그것 보라는 듯 말했다.

“술에 취해서 정신이 나간 사람이랑 어떻게 해볼 만큼 난 쓰레기가 아니야.”

그 말은 꼭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것 같았지만 루시펠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제드는 루시펠라에게 옷 꾸러미를 내밀었다.

“자, 거기서 찾아온 옷이야.”

루시펠라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어디서 옷을 벗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들고 오니 민망했다.

“옷을 찾았으면 날 깨워서 입으라고 하던지, 대체 왜 내가 자고 일어날 때까지 그러고 여기 있었어?”

그에 제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루시펠라는 제드가 상당히 기분 나빠한다는 걸 눈치채고 차마 더 묻지 못한 채 얌전히 옷을 받아 들었다. 그녀가 제드에게서 등 뒤를 돌리며 말했다.

“옷 갈아입을게.”

언제 단추를 풀었는지 루시펠라가 셔츠를 훌렁 벗었다.

마르고 가느다란 어깨가 폭포수 같은 검은 머리칼에 가려졌다.

제드는 예기치 않은 기습에 애써 고개를 돌리곤 주먹을 꼭 쥐었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옷을 벗는 버릇을 하니 술버릇도 그랬던 거지.’

그는 지난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분명 이성을 집어 던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펠라의 촉촉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관계를 가진다고?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저번 그녀와 키스했을 때와 다른 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그녀는 아픈 기억이 있지 않나.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되돌릴 수 없는 건 아닌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결국, 그는 끝까지 쓰레기가 되진 못했다.

사람들 눈을 피해 천막까지 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루시펠라는 얌전했고, 제드는 같이 누운 채로 그녀를 재우는 데 매진해야 했다.

깨어난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은 어제 루시펠라의 유혹은, 그녀가 완전히 맛이 간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무작정 감정과 욕구에 휩쓸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옷 입었어.”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녀가 없음에도 옷을 입는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루시펠라는 제드에게 셔츠를 건네주었다. 그는 그제야 셔츠를 다시 입을 수 있었다. 그가 옷차림을 정돈하자 루시펠라가 말했다.

“미안해.”

“…….”

“밤새 내 주정을 받아주느라 좀 힘들었을 것 같은데. 내가 일어날 때까지 같이 있어주다니, 정말 고마워. 날 배려해 준 거지?”

그에 제드의 얼굴이 다시 찌푸려졌다. 왜, 왜? 루시펠라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나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 입장이었다.

“미안해.”

그녀의 말에 제드가 하아, 하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내 천막으로 돌아가지.”

그는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축 처진 눈으로 보고 있던 루시펠라는 제드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누워 뒹굴었다.

정말이지, 진짜 호수에 다시 뛰어들어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왜 또 미친 짓을 해서는.”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은 제드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녀가 꾸었던 꿈의 기억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한편, 천막 밖으로 나간 제드는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루시펠라가 있는 천막을 보았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할 거면 말하지나 말던가.”

우선 그녀와 벌어졌던 일은 사실 그도 잘한 게 없으니, 넘어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스스로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정도는 기억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제드는 새벽의 기억을 떠올렸다.

잠들기 전, 제드는 누운 채 그녀를 재우려고 했다. 당연히 그녀는 잠자기 싫어했고, 아무 얘기나 해달라며 칭얼거렸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루시펠라는 미소 지은 채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 이슈타르가 별의 강에 몸을 담갔다는 건 그냥 상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신이 현신해서 별이 비치는 강물에 몸을 담갔을 수도 있단 말이야. 신관들의 추측으로는 그 강이 그린힐에 흐르고 있는 강이라고 하더군.”

루시펠라가 눈을 깜빡이며 제드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졸음에 겨운 사람 특유의 나른하게 풀린 얼굴, 뻗어진 손. 제드는 괴로움을 꾹 참고 계속해서 자신을 인내했다.

“제드가 해주는 얘기는 다 재미있어. 제드, 그거 알아?”

그녀는 말하는 문장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기에 그는 피식 웃었다.

“뭘?”

“제드가 신화에 대해 잘 아는 거 말이야. 꼭 내 친구 같아…….”

“로에르 영애를 말하는 건가?”

제드가 되물을 때, 루시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제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제드는 누가 보기 전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자면 어느 정도 휴식은 취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루시펠라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설마, 아직도 잠들지 않은 건가? 제드는 지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펠라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제드, 내가 잠들 때까지 있어주라.”

“…….”

“내가 일어날 때도 옆에 있어줘.”

“뭐?”

“맨 처음으로 얼굴을 보고 싶어.”

순간 그 말을 들은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그는 애써 이성을 찾으며 말했다.

“……그건 지금 결혼하자는 말인가?”

그러나 루시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제드의 손을 잡은 채 잠이 들어버렸으니까.

그래서 제드는 그녀의 곁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지 뿌리칠 수 있는 그녀의 손이지만, 그녀의 말은 강철로 얽힌 쇠사슬보다 더 강하게 그를 옭아맸다.

***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아니.”

얼샤가 가까워질수록 루시펠라의 말수가 줄어들자 로이자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로이자와 루시펠라는 현재 같이 말을 타고 있었다. 로이자는 제드가 루시펠라를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작 각하와 혹 싸우셨나요?”

“아니야.”

얼샤에 다가갈수록 그녀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전엔 그저 ‘얼샤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했을 뿐, 얼샤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얼샤가 비참한 상태라면, 그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얀스가르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나라가 얼샤를 착취한다는 말과 똑같았다.

얼샤의 모든 이가, 얀스가르가 침입하면 나라는 더욱더 비참하게 될 거라고 말했으니까.

그녀는 그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때 제드가 손을 들더니 기사들에게 말했다.

“잠깐 휴식하지.”

그에 기사들의 행렬이 멈췄다. 얀스가르의 사람들이 얼샤로 가는데, 도착할 도시를 앞에 두고 행렬을 점검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조금 이른 감이 있었다.

말에서 내린 루시펠라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보석처럼 빛이 났다. 얼샤의 햇빛이었다.

얀스가르와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에도 얼샤의 것이라고 생각하자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편 제드는 그런 루시펠라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는데도 그녀는 자신이 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호수에서 벌어진 일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던 걸까?

어쩐지 그녀의 기분이 더욱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래도 딱히 제드를 피하거나 그를 소원하게 대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게 이상했다.

그때 마침, 로이자가 그에게 살짝 인사하며 지나치려고 했다.

“영애가 어디가 아픈 건가?”

갑작스레 들어온 물음에 놀랄 법도 하건만 로이자는 익숙하다는 듯 말했다.

“몸이 아니라 기분이 좀 안 좋으신가 봐요.”

“기분? 대체 왜?”

“글쎄요.”

“영애는 솔직한 편이 아니던가?”

제드의 물음에 로이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말에 거침이 없으신 편인데, 그렇다고 아가씨가 저희에게 모든 걸 다 말해주시진 않아요.”

그에 제드는 무언가 답답해졌다.

“원래 영애가 그랬나?”

“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고 해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루시펠라는 솔직하다. 그러나 생각 외로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비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음에도 하녀에게조차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털어놓지 않는다는 걸 알자 제드는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보통 사용인은 고용주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특히 레이디와 수발 하녀들의 경우는 더더욱.

“영애에게 가보도록.”

그는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펠라의 감정이 어떤지 알 길이 없었다. 어쩐지 갈증이 일었다. 물을 마시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갈증이.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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